1. 이정훈의 새벽
2025년 6월, 하이퐁. 새벽 5시 47분.
바깥은 아직 어둡다. 6월의 하이퐁은 새벽부터 습하다. 공장 지붕의 슬레이트 위로 전날 밤 내린 비가 마르지 않았다. 안쪽에서 형광등이 켜지고, 콘크리트 바닥 위로 작업화 소리가 퍼진다. 아산 공장과 다른 것은 냄새다. 기름 냄새에 아열대의 습기가 섞인다.
프레스 라인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LG 클러스터 반경 8킬로미터, 한국계 자동차 부품 협력업체의 2번 공장. 이정훈은 프레스기 옆에 서서 눈을 감는다.
쿵. 쿵. 쿵.
300톤 프레스가 강판을 찍어내는 소리다. 1분에 12회. 3초 간격에서 0.2초의 편차가 있으면 금형 정렬이 틀어진 것이다. 이정훈의 귀는 그 편차를 잡아낸다. 28년 동안 현대차 아산 공장에서 매일 들었던 소리다.
쿵. 쿵. 쿵 — 크.
네 번째 타격의 끝에 미세한 마찰음이 섞였다. 이정훈이 눈을 뜬다. 베트남인 라인 관리자 응우옌 반 투안에게 고개를 돌린다.
"3번 금형, 하단 가이드 포스트."
투안이 눈을 크게 뜬다. 통역사가 번역하기도 전에 이정훈은 이미 프레스기 뒤편으로 걸어가고 있다. 금형을 빼내고 가이드 포스트를 확인한다. 0.03밀리미터의 편마모. 이대로 이틀을 더 돌리면 불량률이 3퍼센트를 넘기고, 한국 본사의 품질 기준을 벗어난다.
투안이 묻는다. 통역사가 옮긴다.
"어떻게 알았어요."
"소리."
투안은 올해 스물일곱이다. 하노이 공업대학을 졸업했다. 교과서에서 프레스 공정을 배웠고, 불량 코드 체계를 외웠다. 그러나 교과서에는 소리가 없다.
0.03밀리미터의 편마모가 만드는 마찰음은 어떤 교재에도 수록되지 않았다. 투안이 이정훈을 바라보는 눈에는 의심과 경외가 섞여 있다. 경험이 만든 감각을 3개월 만에 인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금형을 빼내고 확인한 수치가 이정훈의 판단을 증명한다. 매번 그렇다.
그 답은 매뉴얼에 없다. 한국 본사 QC 기준서 842페이지 어디에도 "프레스 타격음의 미세 마찰음으로 가이드 포스트 편마모를 판단하라"는 항목은 없다. 센서 데이터로도 이 단계에서는 잡히지 않는다.
이정훈에게는 28년이 센서다.
한국에서 이 능력은 "구식 데이터"였다. 현대차 아산 공장의 AI 품질 예측 시스템이 도입된 2023년 이후, 이정훈의 귀는 시스템이 아직 학습하지 못한 영역에서만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 영역은 해마다 줄었다.
하이퐁에서는 다르다.
이 공장에는 AI 예측 유지보수 시스템이 없다. AOI 자동 광학 검사 장비가 한 대 있지만 프레스 공정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품질 검사는 사람이 한다. 베트남인 검사원 열두 명이 완성품을 육안으로 확인하고, 불량을 수기로 기록한다.
동일한 판단을 AI 품질 예측 시스템으로 구현하려면 진동 센서, 음향 센서, 소프트웨어 라이선스, 유지보수를 합산해 연간 5,000만에서 1억 원이 든다. 이정훈의 연간 계약 비용은 그 절반에서 6할 수준으로 추정된다. 비용만으로도 이정훈이 선택되는 구조다. 거기에 현지 맥락 적응성까지 더하면 — AI 시스템은 한국 공장의 데이터로 학습했기에 베트남 공장의 습도, 원자재 편차, 작업 패턴을 반영하지 못한다 — 경쟁 우위는 비용을 넘어선다.
이정훈의 경험은 여기서 "구식 데이터"가 아니다. "아직 사람 없이는 안 되는 지식"이다.
2. 교차점의 경제학
에드워드 라자(Edward P. Lazear)는 2005년 저널 오브 레이버 이코노믹스(Journal of Labor Economics)에 발표한 논문에서 하나의 명제를 제시했다. 단일 역량의 깊이가 아니라, 여러 역량의 균형이 독립과 전환에서 우위를 만든다.
"만능 재주꾼(Jack of All Trades)"이라는 표현은 본래 경멸에 가깝다. 한 가지를 깊이 하지 못하는 사람.
라자는 이것을 뒤집었다. 스탠퍼드 MBA 졸업생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복수의 직종을 경험한 사람이 창업하거나 독립 컨설턴트로 전환할 확률이 유의미하게 높았다. 단일 직종의 깊은 전문가는 고용 상태에 머무는 경향이 강했다.
최고 역량이 아니라 최저 역량이 병목이 된다는 것이 라자의 핵심 발견이다.
T자형 인재(T-shaped professional) — 한 도메인의 깊이와 인접 도메인과 소통하는 넓이. 이 개념의 한계는 수직 막대가 하나라는 데 있다. 그 도메인이 AI나 구조 변화에 의해 무너지면 전체가 흔들린다.
파이(π)자형 인재는 수직 막대가 두 개다. 두 개의 깊은 전문성, 그 사이를 연결하는 수평 역량. 이 구조가 작동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두 도메인이 "번역"이 필요할 만큼 멀 것. 두 도메인 사이에 가교가 희소할 것. 그 가교를 실제로 수행한 경험이 있을 것. 추상적 이해가 아니라 실전 번역이다.
사회학자 로널드 버트(Ronald Burt)는 1992년 구조적 공백(Structural Holes)에서 이 논리를 네트워크 이론으로 체계화했다. 서로 연결되지 않은 두 집단 사이에 위치한 행위자는 정보 이점, 협상 이점, 중개 이점을 동시에 누린다. 양쪽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 연결 자체가 가치가 된다.
버트의 후속 연구(2004)에 따르면, 동일 조직 내에서 구조적 공백을 점유한 관리자는 승진이 빠르고, 임금 프리미엄이 유의미하게 높았다. 두 집단 모두에게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AI가 단일 도메인의 깊이를 빠르게 학습하는 시대에, 두 도메인의 교차 번역은 AI가 즉각 복제하기 어렵다.
맥락이 다른 두 세계를 동시에 이해해야 하고, 양쪽의 신뢰를 동시에 확보해야 하고, 문서화되지 않은 지식을 한 세계의 언어에서 다른 세계의 언어로 옮겨야 한다. 이 세 가지는 데이터만으로 학습되지 않는다.
이정훈의 수직 막대 하나는 품질관리 — OT(운영기술, Operational Technology)의 깊이다.
프레스 소리를 듣고 금형 상태를 판단하는 암묵지. 협력업체의 납기 행동 패턴을 읽는 경험. 한국 본사 보고 체계의 암묵적 규칙.
다른 하나는 베트남 현장 환경이다. 아직 완전히 세워지지 않은 기둥이지만, 3개월의 현장 경험이 그것을 만들어가고 있다. 베트남 작업자의 학습 속도, 현지 관행의 논리, 습도와 온도가 공정에 미치는 영향.
수평 연결은 번역이다. 한국에서 "불량률 0.05퍼센트 이하"라는 기준은 자동화된 검사 라인을 전제로 설계되었다. 베트남의 육안 검사 환경에서 동일한 결과를 내려면 검사 빈도, 샘플링 방식, 작업자 교육이 모두 달라져야 한다. 그 차이를 아는 사람이 번역자다.
OT만 아는 시니어 엔지니어는 한국에서 밀리고 있다. IT만 아는 청년 엔지니어는 현장 맥락을 모르기 때문에 자동화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설계를 반복한다.
양쪽을 아는 사람 — 교차점에 서 있는 사람 — 의 수는 적다. 적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3. 위치 차익의 논리
위치 차익(Geographic Arbitrage)은 본래 금융 개념이다. 같은 자산이 시장에 따라 다른 가격에 거래될 때, 그 차이를 이용하는 전략이다. 인적 자본에 적용하면, 동일한 역량이 시장에 따라 다른 가치로 평가되는 구조가 된다.
세 가지 유형이 있다.
비용 차익 — 생활비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의 임금을 받는 구조. 원격근무 확산 이후 가장 보편화된 형태다.
가치 재평가 차익 — 역량의 절대적 수준은 동일하지만, 수요-공급 비율이 다른 시장에서 유리하게 작동하는 구조. 이정훈의 핵심 메커니즘이다.
정보 차익 — 한쪽 시장의 지식을 다른 시장에서 판매하는 구조. 한국의 QC 프로토콜을 모르는 베트남 공장에 그것을 전달하는 것이 이 형태다.
이정훈은 세 가지를 동시에 실현하고 있다. 그러나 핵심은 가치 재평가 차익이다. 한국에서 "구식 데이터"로 분류된 경험이, AI가 아직 도입되지 않은 베트남에서 "대체 불가능한 자산"으로 재가치화된다.
이것은 통상적 위치 차익과 방향이 반대다.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이동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정훈은 선진국에서 후발국으로 역량의 가치를 복원하러 간다. 역방향 위치 차익이다. "구식"과 "최신"은 절대적 속성이 아니다. 특정 맥락 안에서의 상대적 평가다. 맥락을 바꾸면 평가가 바뀐다.
이 구조가 작동하려면 네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기술 격차의 존재. 국제로봇연맹(IFR) 보고서에 따르면, 베트남의 산업용 로봇 밀도는 노동자 1만 명당 17대다. 한국은 1,000대를 넘는다. 60배의 격차다.
둘째, 역량의 이동 가능성. 이정훈의 QC 노하우는 특정 공장에 묶인 것이 아니다.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는 어떤 공장에서든 작동한다. 비자 허들도 낮다 — 한국 대기업 현지법인 내에서는 한국어로 작동하는 구조다.
셋째, 현지 네트워크의 구축 가능성. 하이퐁에는 이미 한국인 생태계가 형성되어 있다. 베트남 내 한국 투자 기업은 9,000개를 넘고, 누적 FDI는 810억 달러에 달한다. LG 클러스터 반경에만 한국 협력업체가 200곳 이상이다.
한국인 거주자 2만에서 3만 명. 한국 식당, 마트, 병원, 학교. 이정훈이 도착한 곳은 낯선 나라가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한국인 생태계"다.
넷째, 시장 포화 이전의 진입. KOTRA 현지 기업 인터뷰에서 응답 기업의 28퍼센트가 한국인 기술 고문을 활용 중이라고 답했고, 수요가 있다고 응답한 기업은 40퍼센트를 넘었다.
소득 구조는 이렇다. 기술 고문의 월수입은 500만에서 700만 원. 한국 재직 시의 절반에서 7할이다.
그러나 하이퐁 생활비는 100만에서 150만 원 — 서울의 3분의 1이다. 가처분소득은 한국과 동등하거나 소폭 높다. 주거와 교통을 현물로 지원받는 경우, 실질 처우는 한국 재직 시와 동등하거나 상회한다.
숫자만 보면 합리적 선택이다. 그러나 숫자가 전부가 아니다.
4. 성공과 실패의 패턴
이정훈의 경로가 유일한 것은 아니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이동이지만, 구조는 반복된다.
한국에서 매년 대기업 희망퇴직 규모는 2만에서 3만 명으로 추산된다. 그중 제조 기술 전문직은 8,000명에서 1만 명이다. 50대 이상 해외 취업자의 동남아 집중도는 40에서 50퍼센트에 달한다. 그러나 이 통계는 공식 프로그램 등록자 기준이다. 개인 계약으로 이동하는 사람은 잡히지 않는다.
일본 경제학자 아카마츠 가나메가 1930년대에 제안한 안행형 발전 패턴(Flying Geese Model)이 이 이동의 밑그림이다. 선발국의 기술이 후발국으로 이전되는 패턴이 기러기 떼의 비행 대형처럼 반복된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이 이전의 매개자는 두 산업화 단계를 동시에 이해하는 사람이다. 이정훈은 이 모델의 실제 행위자다.
삼성 협력업체 출신 QC 전문가(54세)가 화성에서 하노이로, 다시 하이퐁으로 이동한 사례가 있다. 한국에서 "50대 품질관리 팀장"은 희망퇴직 압박의 대상이었다. 베트남에서 "삼성 본사 기준을 아는 사람"은 대체 불가능한 자산이 되었다. 불량률을 한 달 만에 4.2퍼센트에서 1.8퍼센트로 낮추자, 인접 공장 세 곳에서 자문 요청이 왔다.
현대차 생산기술부 출신(51세)이 아산에서 하이퐁으로 이동한 사례도 있다. 연봉은 국내 대비 60퍼센트 수준이었으나 주거와 교통과 항공료가 현물로 지원되어 실질 처우는 동등했다. 그는 지금 세 개 공장의 기술 고문을 겸하고 있다.
성공 사례의 공통 조건은 다섯이다.
대기업 경험으로 즉각 신뢰할 수 있는 레퍼런스. 선행 진입자의 네트워크를 통한 연결. "현장 감독자"가 아니라 "시스템 구축자"로 역할을 정의한 것. 불량률 개선치 같은 구체적 지표로 성과를 수치화한 것. 한국 기준과 현지 관행 사이를 번역하는 유연성.
다섯 중 하나라도 빠지면 구조가 불안정해진다. 특히 세 번째 — 역할 정의 — 가 갈림길이다.
실패 사례에도 패턴이 있다.
"빨리빨리"의 충돌이 가장 빈번하다. 한국 기술 고문이 검사 절차 단축을 요구하고, 베트남 관리자가 절차 위반으로 인식한다.
반대 방향도 있다 — 한국 대기업 기준 전체를 적용하려 하면, 현지 협력업체가 과도한 요구로 받아들여 사실상 무시한다. 쌍방 불만으로 계약 6개월 내에 관계가 파탄 나는 구조다.
계약 분쟁도 반복된다. 한국 기업 문화에서 구두 합의는 상당한 구속력을 갖는다. 베트남 현지법인에서는 법인장이 바뀌면 구두 합의가 무효화된다. 한국 본사의 정기 순환 발령으로 법인장이 교체되면, 후임자가 계약 조건을 재검토한다.
그리고 시간이 말해줄 더 근본적인 것이 있다. 이 틈새가 얼마나 지속되는가.
국제로봇연맹에 따르면 베트남의 로봇 밀도는 2018년 7대에서 2022년 17대로 증가했다. 절대 수치는 한국의 60분의 1이지만 증가율은 동남아 최고다. 이정훈이 일하는 공장 벽에는 "스마트팩토리 2027"이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베트남 정부의 디지털 전환 목표다.
목표와 현실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전환 목표는 30에서 40퍼센트이지만, 실제 전환율은 2024년 기준 10퍼센트 미만이다. 그 간격이 이정훈의 유효 기간을 연장한다.
중국의 전례가 시간표를 보여준다. 중국 제조업에서 한국 기술자 수요는 2010년에서 2015년 사이에 최고조였다. 이후 중국 엔지니어 역량이 성숙하면서 급감했다. 2020년 이후에는 신기술 도입 분야에서만 선택적 수요가 유지된다. 베트남이 동일 경로를 따른다면, 유효 기간은 약 5년에서 8년이다.
"스마트팩토리 2027" 포스터가 의미하는 것은 이것이다. 이정훈이 단순 QC 감독자로만 머문다면, 그 포스터의 날짜가 그의 만료일이 된다.
5. 불가결 노드의 개인판
5권에서 국가가 불가결한 노드가 되는 다섯 가지 조건을 분석했다. 대체할 수 없는 기술, 우회 불가능한 위치, 제도적 신뢰, 인적 자본의 재생산, 강대국 사이의 독립적 가치 제공. 이 다섯 조건은 개인에게도 동일한 논리로 적용된다.
첫째, 대체할 수 없는 기술의 개인 버전은 암묵지(Tacit Knowledge)다.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는 1966년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We can know more than we can tell)"고 썼다. 이정훈의 경험 중 문서화된 부분은 AI가 흡수할 수 있다. 문서화되지 않은 부분 — 프레스 소리로 금형 상태를 판단하는 감각, "이 납품업체는 납기가 빡빡해지면 이 검사 항목부터 몰래 줄인다"는 행동 패턴의 인식 — 은 문서 밖에 있다. 암묵지의 범위가 넓을수록, 그것이 특정 맥락에서 희소할수록, 대체 불가능성은 높아진다.
둘째, 공급망 위치의 개인 버전은 구조적 공백의 점유다. 이정훈이 한국 본사 기준과 베트남 현장 사이의 유일한 연결자가 되면, 그를 제거했을 때 두 세계의 소통이 멈춘다.
5권에서 한자동맹이 동유럽과 서유럽 "사이"에 위치해 양쪽의 필수 중개자가 된 것과 동일한 구조다.
셋째, 제도적 신뢰의 개인 버전은 평판이다. 3권에서 조반니 메디치의 핵심 자산이 "금이 아니라 관계"였다는 분석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환어음은 가치를 물건에서 분리하고 관계 속에 저장한 혁신이었다. 하이퐁의 한국 기업 생태계는 규모가 작다. 평판이 빠르게 전파된다. 초기에 강하게 쌓으면 기하급수적 레버리지가 생긴다.
넷째, 인적 자본 재생산의 개인 버전은 지식 전달 능력이다. 이정훈이 투안에게 한국 QC 기준을 가르치는 행위는 단기적으로 자신의 희소성을 줄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기술 이전 전문가"로서의 평판을 강화한다.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더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고, 더 고급 역할로 이동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다섯째, 강대국 사이 균형의 개인 버전은 복수 이해관계자에 대한 독립적 가치 제공이다. 한국 본사 편에만 서면 현지 팀이 신뢰하지 않는다. 현지 팀 편에만 서면 본사가 신뢰하지 않는다. 양쪽 모두의 이익을 이해하고 번역하는 중립적 조율자 위치를 유지해야 한다. 5권에서 싱가포르가 미국에도 중국에도 편입되지 않으면서 양쪽에 가치를 제공한 전략의 개인판이다.
이정훈이 지금 충족하는 것은 첫 번째와 두 번째다. 나머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평판은 축적되어야 하고, 지식 전달은 반복되어야 하고, 독립적 가치 제공은 설계되어야 한다.
5권에서 국가의 불가결성을 분석했을 때, 하나만 충족해서는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대만은 반도체 제조라는 대체 불가능한 기술을 가졌지만, 지정학적 위치의 취약성이 불가결성의 지속을 위협한다.
싱가포르는 다섯 조건 모두를 의식적으로 설계했기에 독립 60년이 지나도 불가결성을 유지한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암묵지와 구조적 공백만으로는 5년에서 8년을 버틸 수 있다. 그 너머를 가려면 나머지 세 조건을 쌓아야 한다.
6. 두 개의 의자
17세기 초, 발트해.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은 200년 넘게 유럽 북부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다. 뤼베크와 함부르크를 거치지 않으면 동유럽의 곡물과 서유럽의 직물이 만나지 못했다. 5권에서 분석한 세 겹의 독점 — 물류 경로의 통제, 신용망의 배타적 운영, 정보의 비대칭이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이 독점을 정면으로 깨지 않았다. 우회했다. 뤼베크를 거치지 않고 발트해에 직접 접근하는 항로를 개척했다. 한자동맹의 규칙에서 보면 "규칙을 깬 자"였다. 거래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더 싸고 빠른 경로를 제공한 자"였다. 같은 행위가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파괴와 혁신으로 갈린다.
막힌 곳에서 밀려난 자가, 막히지 않은 곳에서 불가결해진다.
이정훈에게 한자동맹은 한국의 AI 자동화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이 "구식 데이터"로 분류한 28년의 경험이, 시스템의 도달 범위 바깥에서 여전히 작동한다. AI가 "이 역량은 대체 가능하다"고 선언한 영역에서 밀려난 사람이, AI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곳에서 불가결해진다.
한자동맹의 붕괴에서 세 가지 교훈이 번역된다.
첫째, 구조적 포지션은 기술 혁신에 취약하다. "이 경로를 거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독점은 우회로가 열리는 순간 무너진다. 이정훈이 "이 공장의 QC 감독자"라는 포지션에만 의존한다면, 원격 AI 시스템이 그 포지션을 우회하는 순간 가치가 사라진다.
둘째, 암묵지 기반의 가치가 더 오래 지속된다. 네덜란드가 우회한 것은 "뤼베크를 거쳐야 한다"는 지리적 구조였지, 한자동맹 상인들이 30년간 쌓은 거래 노하우가 아니었다. 베테랑 상인들은 새로운 시스템 아래서도 상당 기간 거래 능력으로 살아남았다.
이정훈도 포지션이 아니라 암묵지에 기반해 가치를 설계해야 한다.
셋째, 거버넌스 유연성이 생존을 결정한다. 한자동맹은 200개 도시의 만장일치가 필요했기에 빠른 전략 전환이 불가능했다. 개인은 의사결정 속도가 가장 빠른 단위다. 그것이 개인의 최대 강점이다.
위치 차익이 소진되면 빠르게 다음 포지션을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7. 지속 가능성의 질문
이 틈새는 영구적인가. 답은 아니다.
모든 차익에는 수명이 있다. 가격 차이가 알려지면 사람들이 몰리고, 공급이 늘면 차이가 줄어든다.
자동화의 역설이 존재한다. 자동화가 진행될수록, 자동화 시스템을 현지 환경에 맞게 조정하고 한국 본사 기준과 연결할 수 있는 사람의 수요가 새로 생긴다. 순수 OT 전문가의 역할은 줄지만, OT와 IT 교차 역량을 가진 사람의 역할은 늘어난다.
5권에서 싱가포르의 핵심 교훈은 이것이었다. "불가결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설계하는 것이다." 싱가포르는 제조에서 금융으로, 금융에서 바이오로, 바이오에서 AI로 허브의 내용물을 교체했다. 허브의 위치가 아니라 내용물을 바꾸는 능력이 생존을 결정했다. 이정훈에게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QC 감독자에서 기술 이전 설계자로, 다시 한-베 제조 에코시스템 컨설턴트로 — 역할을 진화시키는 설계가 필요하다.
착취 구조의 위험도 있다. 기업 입장에서 위치 차익은 "한국에서 값비싼 기술자를 베트남에서 싸게 쓰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해석이 우세하면 이정훈은 비용 절감의 도구가 된다.
역할 정의가 방어선이다. "현장 감독자"가 아니라 "기술 이전 설계자"로 자신을 정의하고, 성과를 수치로 보여주고, 한 고용주에 종속되지 않는 복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정체성 비용이 있다. "한국에서 쫓겨난 자"와 "전략적 선택자" 사이의 거리는 경제적 거리가 아니라 서사의 거리다.
이정훈이 자신의 이동을 어떤 이야기로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동일한 하이퐁의 새벽이 다른 의미를 갖는다.
프롤로그에서 이정훈은 인천공항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었다. 편도 티켓. 캐리어 하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온도"라고 썼다. 3개월이 지난 지금, 이정훈은 하이퐁의 프레스 라인 옆에 서 있다. 소리를 듣고, 금형을 판단하고, 투안에게 설명한다. 매일 새벽 5시 47분에 공장에 도착한다. 이 루틴이 "도피"인가 "재배치"인가는 이정훈 자신도 아직 확정하지 못한 문장이다.
보이지 않는 비용도 존재한다.
딸과의 물리적 분리. 국민연금 납부 중단으로 수령액이 줄어들 것이라는 계산. 건강보험 공백.
그리고 5년에서 8년 후 한국에 돌아왔을 때, "베트남 경력"을 한국 고용 시장이 인정할 것인가라는 질문. 50대 제조업 퇴직자의 정규직 재취업률이 18퍼센트인 시장에서, 60대 초반의 "베트남 기술 고문 경력"은 어떤 무게를 가지는가.
6장에서 이정훈은 딸과 전화했다. 아빠 잘 다녀와. 열여섯 살의 담담한 목소리. 이해인지 체념인지를 구별하지 못했다. 3개월이 지났다. 딸은 열일곱이 되었다. 전화 빈도는 줄었다. 일요일 저녁 영상통화에서 딸의 방 배경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챈다. 포스터가 바뀌었다. 누가 바꿔줬는지는 묻지 않는다.
위치 차익은 경제적으로 계산 가능하다. 정체성 비용과 관계 비용은 계산 불가능하다. 계산 불가능한 것이 종종 더 무겁다.
8. 교차점에서
이정훈의 하이퐁 3개월은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보여준다. 가치는 역량 자체에 있는가, 역량과 맥락의 교차에 있는가.
28년의 품질관리 경험은 한국에서와 베트남에서 동일하다. 달라진 것은 맥락이다. AI가 도입된 한국 공장에서 이정훈의 귀는 점점 필요 없어졌다. AI가 도입되지 않은 베트남 공장에서 이정훈의 귀는 아직 대체할 수 없다. 역량이 변한 것이 아니라 맥락이 변한 것이고, 맥락을 바꾸자 역량의 가치가 부활했다.
이것은 자기위로가 아니라 구조다. 기술 도입의 시차가 존재하는 한, 한 시장에서 가치가 떨어진 역량이 다른 시장에서 재가치화되는 현상은 반복된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베트남으로 — 안행형 패턴이 만드는 구조적 시차다.
그러나 이 구조를 낭만화해서는 안 된다. 이정훈의 선택이 가능했던 것은 구체적 조건들의 합산이다. 대기업 경험, 박상호라는 선행 진입자의 네트워크, 한국인 생태계가 이미 형성된 하이퐁.
이 조건 중 하나라도 빠지면 구조는 작동하지 않는다.
"해외에 나가면 된다"는 처방이 아니다. "가치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 가능한 구조적 조건이 있으며, 그 조건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경로가 존재한다"는 분석이다.
이정훈은 혼자 이 분석을 한 것이 아니다. 박상호가 먼저 갔다. 박상호 곁에는 열두 명의 한국 기술자가 있다. 매달 한 번 모여 정보를 나누고, 일감을 소개하고, 실패를 공유한다. 개인의 전략이 집단의 구조가 되는 순간이 거기에 있다.
이정훈은 아직 그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박상호가 다음 달 모임에 오라고 했다. 하이퐁 시내 응우옌반린 거리의 한국 식당이다. 일요일 저녁, 딸에게 영상통화를 하는 시간과 같은 시간이다.
개인의 전략만으로는 구조적 불안정성을 감당하지 못한다. 계약 분쟁이 생겼을 때 혼자 대응해야 하고, 비자 문제가 생겼을 때 혼자 해결해야 하고, 일감이 끊겼을 때 혼자 찾아야 한다.
한국의 공식 지원 프로그램은 20대에서 30대를 대상으로 설계되어 있다. 해외취업지원센터의 연령 상한은 대부분 39세다. 50대 퇴직 기술자의 기술 이전을 지원하는 공식 제도는 없다.
독일에는 은퇴 전문가 봉사단(Senior Experten Service)이 있고, 일본에는 모노즈쿠리 해외 파견이 있다. 한국에는 그것이 없다. 박상호의 네트워크는 그 부재에서 자생한 구조다.
그것이 다음 장의 이야기다. 이정훈이 박상호의 모임에 처음 참석한 날. 개인의 전략이 모여 집단의 구조가 되는 순간. 공식 제도의 빈자리를 비공식 제도가 채우는 순간.
문턱의 질문: 당신의 경험 중, 한 맥락에서 가치를 잃은 것이 다른 맥락에서 되살아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 교차점은 어디에 있는가.
8장 끝 — 리서치 소스: R-08, R-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