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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6 — 마지막 직업

4장: 인지 노동의 해체 — AI가 대체하는 것의 정체


1. 승인 버튼 앞의 파라리걸

2025년 3월, 서울 강남.

테헤란로의 법률 사무소. 14층. 오전 9시 7분. 이진희(30세)가 모니터 앞에 앉는다.

로스쿨 3년, 학자금 대출 4,000만 원. 이 사무소에 입사한 지 14개월째다. 로스쿨에서 그녀는 계약법 판례를 외웠고, 민법 총칙의 조문을 분석했고, 모의법정에서 변론 연습을 했다. 졸업 후 그녀가 앉은 자리는 AI 계약 분석 시스템 앞이다.

화면에 어젯밤 사이에 처리된 계약서 57건이 대기 목록에 나열되어 있다. 각 항목 옆에 색깔 표시가 붙어 있다. 초록색 "이상 없음"이 49건. 노란색 "검토 요망"이 6건. 빨간색 "주의 필요"가 2건이다.

이진희는 초록색 항목을 클릭한다. AI가 생성한 분석 요약이 뜬다. 계약 유형, 핵심 조항, 위험 평가 점수. 그녀는 요약을 읽고 승인 버튼을 누른다. 다음 항목. 클릭, 읽기, 승인. 클릭, 읽기, 승인.

49건을 처리하는 데 12분이 걸린다.

노란색과 빨간색 항목 8건은 파트너 변호사에게 넘긴다. 넘기는 데 3분이 걸린다.

15분. 이진희의 오전 핵심 업무가 끝났다.

6개월 전까지 이 작업은 달랐다. 계약서를 직접 읽었다. 조항 하나하나를 눈으로 추적하며 위험 요소를 식별했다. "이 면책 조항은 우리 쪽에 불리하다" — 그런 판단을 내리는 것이 그녀의 일이었다. 한 건에 40분이 걸렸다. 57건이면 사흘 작업이었다.

지금은 12분이다. 효율이 올라간 것이다. 사무소는 만족한다.

이진희는 만족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만족과 불안이 공존한다. 12분 만에 끝난 작업의 나머지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그 시간에 그녀가 하는 일은 다른 AI 도구의 출력을 검토하는 것이다. 판례 검색 AI가 추출한 요약을 확인하고, 법률 문서 초안 AI가 생성한 내용증명을 교정한다. 하루 종일 AI가 만든 것을 확인한다.

3장에서 이정훈이 사원증을 반납했다. 28년간 소리를 듣고, 금형의 떨림을 감지하던 사람. 그의 전문성이 불필요해진 순간, 사원증은 플라스틱 조각이 되었다.

이진희는 사원증을 반납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출근한다. 여전히 급여를 받는다. 그러나 그녀가 하는 일의 실질이 바뀌었다. 계약서를 "읽는" 사람에서 AI가 읽은 것을 "확인하는" 사람으로. 판단에서 승인으로.

동사가 바뀌었다.

이정훈의 확인 버튼과 같은 자리다. 다른 업종, 같은 구조.


2. 태스크 분해의 논리 — 직업이 아니라 태스크가 대체된다

"AI가 직업을 대체한다"는 문장은 정밀하지 않다.

정확한 단위는 직업이 아니라 태스크다. 이 전환의 기원은 데이비드 오터, 프랭크 레비, 리처드 머내인이 2003년 논문에서 제시한 태스크 모델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의 핵심 구분은 두 축이었다. 루틴 대 비루틴. 인지 대 수동. 두 축을 교차하면 네 유형이 나온다.

루틴 수동은 조립 라인 반복 작업이다. 1980년대 이후 산업용 로봇이 대체했다. 1권에서 보았던 공장의 풍경이다.

루틴 인지는 회계 데이터 처리, 표준화된 법률 문서 검토, 단순 번역이다. 컴퓨터가 대체해왔고, LLM이 가속했다.

비루틴 수동은 배관이나 청소처럼 물리적 세계의 적응적 조작이 필요한 영역이다. 환경에 따라 몸을 적응시켜야 하므로, 로봇이 아직 완전히 대체하지 못했다.

비루틴 인지는 창의적 문제 해결, 복잡한 협상, 전략적 판단이다. 2022년 이전까지 "자동화 불가 영역"으로 간주되었다.

오터-레비-머내인의 2003년 예측은 명쾌했다. 루틴 태스크는 자동화가 계속될 것이고, 비루틴 태스크는 인간의 영역으로 남을 것이다. 이 예측은 GPT 이전까지 대체로 타당했다. 스프레드시트가 회계 데이터 처리를 대체하고, OCR이 문서 분류를 대체할 때, 패턴은 "루틴 인지 태스크의 자동화"였다. 오터의 분석이 옳았다.

그러나 이 모델의 암묵적 전제 — "비루틴 인지 태스크는 자동화되지 않는다" — 는 2022년 이후 무너지기 시작했다. 글쓰기, 법률 분석, 코드 작성, 의료 진단 보조 — 비루틴 인지 태스크가 LLM의 영역에 들어왔다. 오터 자신이 2022년 MIT 강연에서 인정했다. "내 2003년 모델은 LLM을 예측하지 못했다."

변화의 규모는 2023년에 계량화되었다. 엘라운두 등이 미국 노동통계국 O*NET 직업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LLM의 노출도를 분석한 연구다. 핵심 발견은 세 가지였다.

미국 직종의 80퍼센트가 최소 하나의 핵심 태스크에서 LLM에 10퍼센트 이상 노출된다. "영향 없음" 직종은 전체의 20퍼센트에 불과하다.

19퍼센트는 핵심 태스크의 50퍼센트 이상이 노출된다. 이 직종들에서는 절반 이상의 업무가 LLM으로 대체되거나 보완될 가능성이 있다.

가장 반직관적 발견은 세 번째였다. 고소득, 고학력 직종일수록 노출도가 높다. 과거의 자동화는 저숙련 루틴 노동을 대체했다. LLM은 반대 방향에서 작동한다. 텔레마케터나 창고 작업자가 아니라 변호사, 회계사, 분석가가 높은 노출도를 보인다.

이 발견은 2013년 프레이와 오스본의 "47퍼센트" 예측과 대비된다. 프레이-오스본은 미국 702개 직종 중 47퍼센트가 "자동화 고위험"이라 추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직업 전체를 분석 단위로 삼았다. OECD가 같은 방법론을 태스크 수준에 적용하자, 수치는 9퍼센트로 낮아졌다. 47퍼센트와 9퍼센트의 차이는 "무엇을 측정하는가"의 차이다. 직업을 단위로 잡으면 과장되고, 태스크를 단위로 잡으면 정밀해진다.

맥킨지는 800개 직업, 2,100개 세부 작업 활동을 분석하여, 생성 AI가 현재 작업 활동의 60~70퍼센트를 자동화할 기술적 잠재력을 갖는다고 추정했다. 생성 AI가 자연어 이해, 문서 생성, 코드 작성 등 비루틴 인지 영역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골드만삭스는 전 세계 3억 명의 풀타임 고용 등가가 AI 자동화에 노출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3억 명이 직업을 잃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동화될 태스크 시간을 합산하면 3억 명분의 풀타임 작업에 해당한다는 의미다. 골드만삭스는 2024년에 자기 수정 보고서를 발표하여, AI 투자 대비 생산성 향상이 아직 비례하지 않는다고 인정했다. 태스크 재배분은 일어나고 있지만 생산성 통계로 잡히기까지 제도적, 인적 적응 비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IMF는 선진국 직종의 약 60퍼센트가 AI에 노출된다고 추정했다. 저소득 개도국은 26퍼센트. 선진국에 인지 노동 집약적 직종이 더 많기 때문이다. 더 발전한 나라의 노동자가 더 많이 노출되는 역설이다.

이 수치들 사이의 편차가 크다. 그러나 방향은 일관된다. AI는 직업이 아니라 태스크를 흡수하고 있으며, 그 흡수는 고학력 인지 노동에서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노출도는 대체가 아니다. 그러나 노출은 시작이다.


3. 한국 직종별 AI 노출도 — KSCO 8그룹의 풍경

이 구조적 힘이 한국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

한국표준직업분류(KSCO) 대분류 8개 그룹에 엘라운두, IMF, 맥킨지, 한국고용정보원의 분석을 교차 적용하면, 한국 직종별 AI 태스크 대체율의 윤곽이 드러난다. 한국고용정보원은 2022년 분석에서 자동화 고위험 직종이 전체의 약 52퍼센트라고 추정했다. 미국보다 높은 수치다. 한국 노동시장의 사무직 비중과 직종의 루틴화 정도가 반영된 것이다.

사무 종사자의 AI 태스크 대체율은 60~75퍼센트로 추정된다. 경리, 비서, 행정 사무원, 은행 창구 직원. 데이터 입력, 문서 분류, 표준 민원 응대, 장부 기장이 이들의 핵심 태스크다. LLM의 직접 타격 대상이다. 8개 그룹 중 가장 높은 노출도를 보인다.

전문가 그룹 — 의사, 변호사, 회계사, 교사, 기자 — 은 45~65퍼센트다. 문서 작성, 판례 검색, 표준 진단, 반복 계산이 침식되고 있다. 남는 것은 복잡 판단, 환자·의뢰인 관계, 윤리적 책임이다. 루틴 인지 태스크가 집중된 그룹이다.

관리자 그룹은 30~45퍼센트. 보고서 작성, 데이터 분석, 일정 조율은 AI로 이전되지만, 조직 판단, 이해관계 협상, 책임 귀속은 관계와 권위의 영역이므로 유지된다.

판매 종사자는 40~55퍼센트. 보험 설계사, 부동산 중개인 — 상품 정보 제공, 표준 상담, 견적 산출이 자동화 영역에 들어와 있다. 그러나 고액 관계 영업, 맞춤 설득, 신뢰 구축은 거래 규모에 따라 인간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서비스 종사자 — 요양보호사, 조리사, 미용사 — 는 15~30퍼센트에 머문다. 신체적 돌봄과 관계적 신뢰, 물리적 조작이 핵심인 직종이다. 손이 하는 일, 몸이 하는 일이 남아 있다.

기능원 — 전기 기사, 용접공, 자동차 정비사 — 은 20~35퍼센트. 비루틴 수동 태스크가 중심이므로 현재 기술로는 완충이 작동한다.

단순 노무 종사자는 15~25퍼센트. 물리적 현장 대응, 비정형 환경 작업이 물리 로봇의 한계로 완충된다.

이 수치들에서 가장 주목할 지점은 전문가 그룹의 역설적 고노출이다. KSCO 2번 전문가 그룹(45~65퍼센트)이 서비스(15~30퍼센트), 기능원(20~35퍼센트), 단순 노무(15~25퍼센트)보다 현저히 높다. 엘라운두의 핵심 발견 — "고학력·고임금 직종이 LLM에 더 높이 노출된다" — 이 한국 직업 구조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76퍼센트, OECD 1위다. 연간 사교육비 29.2조 원의 상당 부분은 법학, 의대, 회계사 시험 준비에 투자된다. 9~11년의 교육 기간, 1억~3억 원의 투자. 이 직종들은 모두 중-고 AI 노출도 직종이다.

이 숫자가 보여주는 구조는 역설이다. 한국 사회가 가장 많은 교육 투자를 집중한 곳이, AI에 가장 많이 노출된 곳이다. "고학력 = 안전한 직업"이라는 등식의 핵심 — 고학력 직종의 루틴 인지 태스크 — 을 AI가 부수고 있다.

태스크 대체율은 직업 소멸 확률이 아니다. 사무 종사자의 60~75퍼센트가 해고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이 수행하는 태스크의 그 비율이 AI로 이전 가능하다는 뜻이다. 실제 고용 변화는 제도적 선택, 임금 구조, 기업의 채택 속도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태스크가 이전된 자리에 무엇이 들어오는가.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을 때, 직업은 껍데기가 된다.


4. 세 개의 지도 — 미국·중국·한국에서 대체가 다르게 전개되는 방식

동일한 직종이라도 국가마다 AI 대체의 속도가 다르다.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제도, 임금 구조, 기술 채택률의 복합 작용이다.

미국에서 대체는 시장이 이끈다. 대형 로펌의 주니어 어소시에이트 연봉은 22만 5,000달러, 약 3억 원이다. 이 임금 수준에서 AI 도입의 투자 수익률은 즉각적이다.

미국의 고용 유연성(at-will employment)은 기업이 AI 도입 후 인력을 빠르게 조정할 수 있게 한다. "기술적 가능성 → 경제적 채택 → 고용 조정"의 사이클이 2~3년 내에 돌아간다.

파라리걸과 주니어 어소시에이트에서 직접적 영향이 이미 가시화되었다. 일부 대형 로펌이 신규 파라리걸 채용을 동결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공동화된 직종군은 법률 보조, 금융 분석, 콘텐츠 제작이다. 공통점이 있다. 모두 고학력 진입 장벽을 갖고 있었다. AI가 그 진입 장벽을 낮추면서 "고학력 자격증의 프리미엄"이 압박받고 있다.

2권에서 우리는 미국과 중국의 AI 경쟁을 분석했다. 그 경쟁의 여파가 노동시장에서 서로 다른 파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중국에서 대체는 국가가 설계한다. AI 판사, 알고리즘 관리, 공공 서비스 자동화가 정부 주도로 진행된다. 상하이에서 AI 검사가 시범 운영되고 있다. 대체의 범위는 사법과 행정까지 포괄하여 미국보다 넓다. 동시에 사회 안정을 위해 고용을 유지하는 완충 장치도 더 강하다.

중국의 특징은 AI 도입이 노동 감시와 결합하는 양상이다. 알고리즘이 노동자의 생산성을 실시간으로 측정하고, 그 데이터가 임금과 고용에 직접 연결된다. 태스크 대체를 넘어 인간 노동 자체의 알고리즘화가 진행되고 있다. OECD는 이를 "알고리즘 관리"의 확산으로 분석한다.

한국에서 대체는 시장이 이끌지만, 제도 반응이 느리다. 카카오뱅크와 토스뱅크의 비대면 대출 심사, 루닛과 뷰노의 영상 판독 AI, 삼쩜삼의 세무 신고 자동화 — 시장 논리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교육 시스템, 직업 훈련 체계, 사회 안전망의 재설계는 뒤처져 있다. OECD 기준 GDP 대비 사회보호 지출은 한국이 14.8퍼센트, OECD 평균 21.1퍼센트를 크게 하회한다.

시장의 속도와 제도의 반응 사이에 간극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에서 대체 속도를 결정하는 독특한 요인은 자격증 제도의 강도다. 변호사, 의사, 공인회계사, 세무사는 법령으로 업무 범위가 규정되어 있어, 기술적으로 AI 대체가 가능해도 제도적으로 인간 자격자가 수행해야 하는 업무가 남는다. 이것이 한국에서 "AI 대체가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태스크는 이미 AI로 이전되고 있지만, 자격 요건 때문에 직업 자체는 유지된다.

유지되는 것이 직업인가, 직함인가. 그 차이가 공동화의 정의다.

한국의 구조적 특수성은 "늦은 출발, 빠른 확산"이다. 카카오뱅크가 2017년 출범 후 3년 만에 시중은행 대출 점유율을 빠르게 잠식한 것이 이 패턴의 전형이다. 미국에서 5~7년에 걸쳐 진행된 은행 창구 자동화가 한국에서는 3~4년 만에 이루어졌다. 제도가 완충하다가 갑자기 무너지는 "절벽형 대체"가 한국의 특수한 위험이다.

같은 패턴이 법률과 회계 영역에서도 반복될 가능성이 있다.

그 가능성이 현실이 되기 전에, 개인은 경로를 재설계해야 한다. 그러나 경로를 재설계하라는 요구는 구조를 재설계하지 않는 사회의 책임 전가이기도 하다.


5. 태스크를 빼면 무엇이 남는가 — 회계사, 방사선과, 법률사무원

세 직종을 분해한다. 한국에서 고비용 교육 투자의 대표적 목적지이면서, AI 태스크 대체의 최전선에 있는 직종들이다.

회계사의 업무는 7개 핵심 태스크로 구성된다. 장부 기장과 전표 처리, 세무 신고서 작성, 재무제표 이상 탐지, 표준 감사 절차 수행 — 이 상위 4개 태스크의 AI 대체 가능성은 중간에서 매우 높다. 삼쩜삼과 홈택스 자동완성이 개인·소기업 세무 신고를 흡수하고 있다. 딜로이트의 Argus, PwC의 GL.ai 등 AI 감사 도구가 빅4 회계법인 모두에 도입되었다.

남는 것은 세법의 회색지대 해석, 기업 M&A 재무 자문, 감사 의견 형성 — 법적 책임이 공인회계사 개인에게 귀속되는 영역, 신뢰와 판단이 교차하는 영역이다.

한국 세무사의 주요 고객층인 소규모 자영업자가 AI 플랫폼으로 이동하면, 세무사 업계의 하단 수요가 줄어든다. 남는 것은 법인 세무 전략, 세무 조사 대응, 복잡한 국제 거래 세무다. 전문성과 신뢰가 동시에 요구되는 영역만 남는다. 한국 회계법인(빅4 포함) 채용은 2023년부터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방사선과 의사의 7개 태스크 중 상위 4개 — 흉부 X선 판독, CT·MRI 정량 분석, 유방 촬영 판독, 이상 케이스 우선순위 분류 — 는 AI 대체 가능성이 높다. 루닛의 흉부 X선 AI는 국내 50개 이상 병원에서 사용 중이다. 일부 연구에서 전문의 동등 성능이 보고되었다. FDA가 승인한 AI 방사선 진단 보조 시스템은 2023년 기준 100개를 넘는다.

한국의 건강보험 수가 구조상 영상 판독 건당 수가가 낮고, 의사 1인당 판독 건수가 하루 200~300건에 달하는 병원도 있다. 이 고부담 환경에서 AI 보조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 수단"이다.

그러나 AI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전문의의 독자 판단력이 저하되는 역설이 가속화된다. AI가 먼저 필터링하면, 전공의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수천 장의 필름으로 눈에 익히는" 수련 기회가 줄어든다. 영상의학과 전공의 지원율이 2020년 이후 미국에서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법률 사무원의 7개 태스크 중 상위 4개 — 표준 계약 검토, 판례·법령 검색, 법률 문서 초안 작성, 소송 기록 정리 — 가 업무 시간의 60~70퍼센트를 차지한다는 업계 추정이 있다. 로폼, 케이스노트 등 국내 리걸테크가 이 영역에서 이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GPT-4 기반 법률 문서 초안 도구가 빠르게 보급되고 있다. 기술적으로 3분의 2가 AI로 전환 가능한 상태다.

한국 법률 시장의 특수한 압력이 있다. 로스쿨 도입(2009년) 이후 매년 1,700명의 변호사가 배출된다. 수요를 흡수할 시장이 충분히 성장하지 않는 상태에서, AI가 주니어 작업을 대체하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공급 증가와 수요 감소가 동시에 작동한다.

세 직종의 공통 패턴이 있다. AI가 대체하는 태스크는 정확히 주니어 전문가가 초기 3~5년간 반복 수행하면서 전문성의 기반을 쌓는 태스크들이다.

장부 기장은 회계사가 숫자 감각을 익히는 과정이다.

흉부 X선 판독 반복은 방사선과 의사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눈에 새기는 과정이다.

계약서 수백 건 검토는 법률 사무원이 위험 조항을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을 키우는 과정이다.

이 "반복의 경험"이 AI로 이전될 때, 5~10년 후의 시니어 전문가들은 그 기반 없이 고난도 판단을 내려야 한다. 지식은 전달되지만 감각은 체화되어야 한다. 루틴 반복이 감각을 만든다. AI가 루틴을 흡수하면 감각의 발달 경로도 함께 흡수된다.

경험 사다리의 하단이 철거되고 있다. 단기 효율 향상의 장기 비용이 여기에 있다.


6. 두 개의 의자 — 수직공과 은행 심사역

1815년, 영국 노팅엄.

토마스 히기든이 공장 문 앞에 선다. 10년 전까지 그는 자신의 손으로 실을 날고, 베틀 위에서 패턴을 결정하고, 완성된 직물의 결을 손끝으로 확인했다.

1권에서 우리는 수직공의 임금이 주급 25실링에서 4.5실링으로 82퍼센트 하락하는 과정을 따라갔다. 그러나 임금보다 먼저 하락한 것이 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권이었다.

지금 히기든이 하는 일은 증기 직기가 짠 천의 끝단을 검사하는 것이다. 직물의 결은 기계가 결정한다. 그는 끊어진 실이 없는지, 패턴이 어긋나지 않았는지를 확인한다. 눈이 이 일을 한다. 손은 더 이상 필요 없다.

직업의 이름은 여전히 "직공(weaver)"이다. 그러나 직공의 본질 — 손으로 실을 다루는 장인의 기술, 실의 장력을 손끝으로 느끼는 능력, 날실과 씨실의 균형을 눈으로 읽는 능력 — 은 없어졌다.

1812년 러다이트 운동은 흔히 "기계 파괴 광신자들의 반란"으로 묘사된다. 그 본질은 달랐다. 직업이 남아 있지만 직업의 의미가 사라진 것에 대한 저항이었다. 해고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공동화에 대한 저항이었다.

두 세기가 지났다. 도구가 달라졌다. 구조는 같다.

2025년, 서울. 시중은행 대출 심사역 박재영(43세)이 오전 업무를 시작한다. 화면에 AI가 처리한 대출 신청서 34건이 나열되어 있다. 각 항목에 AI 신용 평가 점수, 리스크 등급, 권고 결정이 적혀 있다.

박재영은 승인 항목에 전자 서명을 찍는다. 거절 항목은 자동으로 처리된다.

20년 전, 박재영은 사업자의 사무실을 직접 방문하여 장부를 검토하고 대표의 눈빛을 읽었다. 재무제표에 담기지 않는 것 — 사업자의 의지, 시장에 대한 감각, 위기 대응의 경험 — 을 읽는 것이 그의 전문성이었다. 지금 그가 읽는 것은 화면 위의 숫자다. 그 숫자를 만든 것은 AI다.

직업명은 여전히 "심사역"이다. 역할의 실질은 달라졌다.

4대 시중은행의 총 직원 수는 2015년 약 7만 2,000명에서 2023년 약 5만 9,000명으로 18퍼센트 감소했다. 같은 기간 인터넷 전문은행의 직원 1인당 고객 수는 시중은행의 10배를 넘는다. "인간 심사역 없이 더 많은 대출을 처리한다"는 모델이 확산될수록, 심사역의 역할은 더욱 희박해진다.

히기든은 손의 감각으로 직물의 결을 읽는 전문성을 잃었다. 박재영은 사업자의 미래를 읽는 판단력을 빼앗겼다.

두 사람 모두 여전히 출근한다. 두 사람 모두 해고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전문성은 더 이상 요구되지 않는다.

히기든은 결국 직업 자체를 잃었다. 기계가 더 저렴하고 더 빠르게 모든 것을 했기 때문이다. 박재영은 "서명 권한"을 보유하는 한 직업을 잃지 않는다. 제도적 보호막이 있다.

그 보호막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


7. 직업의 공동화 — 직함은 남고 내용은 사라진다

태스크가 AI로 이전된 후 인간에게 남는 것은 세 가지 역할로 수렴한다.

첫째, 감독. AI 출력을 모니터링하고 오작동을 감지한다. 능동적 판단이 아니라 수동적 감시다. 공장의 품질 관리 검사원처럼, 자율주행차의 안전 운전자처럼, 인간은 AI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역설이 있다. 인간이 AI를 제대로 감독하려면 AI가 하는 일을 이해해야 한다. AI가 처리하는 양이 늘어날수록, 인간이 각 결과를 깊이 이해하는 데 투자하는 시간은 줄어든다. "감독자"는 실질적으로 "확인자"가 된다 — 이상 신호가 없는지 표면만 훑는다. 항공업계에서 "자동조종장치 과의존"이라 불리는 현상이 모든 감독 역할에 구조적으로 내재한다.

둘째, 승인. AI가 결정한 사항에 인간의 서명을 찍는다. 법적, 제도적 이유로 인간의 최종 결재가 요구되는 프로세스에서 이 역할이 발생한다. 대출 서류에 서명하는 심사역. AI가 작성한 의무기록을 검토하는 의사. AI가 분석한 재무제표에 의견을 제출하는 회계사.

전문성의 내용이 비워지고, "서명할 수 있는 자격" — 면허 — 만 남는다.

이것은 판단 없는 책임과 책임 없는 판단이 분리되는 구조다.

AI가 판단하고, 인간이 서명한다. AI가 틀렸을 때, 소송의 피고는 인간이다. 판단력 없이 책임만 지는 구조다.

셋째, 예외 처리. AI가 다루지 못하는 이상 케이스를 담당한다. 전문성의 핵심은 유지되지만 업무량이 크게 줄어든다. 긍정적으로 보면 전문성의 고도화이고, 부정적으로 보면 직업의 희박화다.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유지할 충분한 케이스가 없다.

예외 처리 역할의 구조적 위험이 있다. 평상시에는 AI가 모든 것을 처리하다가, 갑자기 어려운 예외 케이스가 등장했을 때 인간이 즉각 최고 수준의 판단을 내려야 한다. 자동화가 높아질수록 수동 판단 능력이 저하된다. 자동조종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파일럿의 조종 능력이 저하되고, 비상 상황에서 판단 지연이 늘어난다. 보잉 737 MAX 사고의 부분적 원인이기도 했다.

이 구조적 위험이 전문직 전반에 내재한다.

감독, 승인, 예외 처리. 이 세 역할의 공통점은 "남은 것"이라는 데 있다. 능동적으로 창조하는 역할이 아니라, AI가 하고 난 뒤를 수습하는 역할이다.

아세모글루는 현재 AI 발전 경로가 지나치게 "자동화 편향"을 갖는다고 비판했다. 인간 능력을 보완하는 방향보다 대체하는 방향으로 투자가 집중되어, 생산성 이득이 자본에 집중되고 노동의 가치는 하락하는 구조가 고착화될 수 있다. 이것은 기술의 필연이 아니라 선택이다. 그 선택의 비용은 중간 계층이 치르고 있다.

공동화는 해고와 다르다. 해고는 가시적이고 통계에 잡힌다. 공동화는 비가시적이다. 고용 통계는 직업이 "존재한다"고 보고하지만, 그 직업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는 보고하지 않는다. GDP 통계도 마찬가지다. 태스크가 빠져나가도 직업이 남으면 고용 통계는 정상으로 보인다.

개인도, 조직도, 정책도 "아직 직업이 있으니 괜찮다"고 착각한다.

문제는 껍데기만 남은 직업이 얼마나 오래 껍데기로 남아있을 수 있는가다.

국내 금융권 직원 수는 2015년 약 27만 명에서 2023년 약 23만 명으로 감소했다. 법률 서비스에서는 매년 1,700명의 변호사가 배출되는데, 리걸테크가 파라리걸 수요를 줄이고 있다. 공급 증가와 수요 감소의 교차. 회계법인 채용은 2023년부터 감소 추세다.

이 숫자들은 직업의 소멸을 말하지 않는다. 이 직종들은 아직 존재한다. 그러나 태스크가 빠져나가면서 직업의 밀도가 낮아지고, 전문성의 가치가 하락하고, 진입 장벽이 낮아지면서 임금이 압박된다. 이것이 공동화의 경제적 표현이다.

직업의 사망 진단서는 "폐업"이 아니라 "공동화"라고 쓰여 있다.

계약서를 성실히 읽었던 파라리걸. 영상을 한 장씩 판독했던 방사선과 전공의. 대출 신청자의 사무실을 직접 방문했던 심사역. 시스템에 가장 충실했던 사람들이 그 시스템에 의해 밀려나고 있다.


8. 문턱에서

직업은 태스크의 단순한 목록이 아니다. 직업은 특정 태스크들이 하나의 묶음으로 제도화된 것이다. 왜 의사가 진단과 처방과 환자 상담을 하나의 직업으로 묶어 수행하는가. 왜 변호사가 법률 리서치와 계약 협상과 법정 변론을 함께 담당하는가. 이 묶음은 기술적 필연이 아니라 역사적, 제도적 선택이다.

AI는 그 묶음을 풀고 있다. 태스크 단위로 흡수하고, 인간에게 감독과 승인과 예외를 남긴다.

태스크를 잃은 직업이 걸을 수 있는 경로는 세 가지다. 새로운 태스크로 묶음을 재구성하는 것이 전환이다. 남은 태스크만으로 작아진 채 지속되는 것이 공동화다. 남는 것이 없어 사라지는 것이 대체다.

현재 가장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대체(세 번째)가 아니라 공동화(두 번째)다. 공동화는 대체보다 더 보이지 않고, 더 다루기 어렵고, 더 넓은 범위에 퍼져 있다.

"AI가 X를 대체할 것이다"는 예측이 아니다. "이런 구조적 힘이 작동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 힘의 결과가 어디로 수렴하는지는 아직 열려 있다. 확실한 것은, 확실한 답이 없다는 것이다.

이진희는 오늘도 승인 버튼을 눌렀다. 12분 만에 49건. 그녀의 로스쿨 3년이 가르치지 않은 것이 있다. 계약법, 민사소송법, 헌법재판소 판례 — 그것들은 가르쳤다. 그녀의 직업이 이런 모양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가르치지 않았다.

강남 사무소의 파라리걸에서 마포구의 치킨 프랜차이즈까지, 서울의 풍경이 바뀌고 있다. 인지 노동의 해체는 사무실 안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그 파장은 거리의 간판까지 흔든다. 간판이 내려가는 곳에서, 다른 종류의 밀림이 시작되고 있다.


문턱의 질문: 당신의 직업에서 AI가 이미 하고 있는 태스크는 무엇인가. 그것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그 남은 것이 직업인가, 직함인가.


4장 끝 — 리서치 소스: R-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