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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5 — 사이의 전략

17장: 읽은 자의 전략 — 국가와 개인의 실행 계획


1. 두 개의 숫자

2026년 3월의 어느 오후, 여의도 금융투자협회 건물 6층 세미나실. 한 자산운용사 CIO가 슬라이드 하나를 띄웠다. 화면에는 두 개의 숫자만 있었다. 38배, 그리고 10배.

ASML의 P/E 38배. 삼성전자의 P/E 10배.

객석은 70명 남짓한 기관 투자자와 리서치 애널리스트로 채워져 있었다. CIO가 말했다. "같은 반도체 공급망 안에 있습니다. ASML 없이 삼성이 칩을 못 만들고, 삼성 없이 ASML이 장비를 팔 데가 줄어듭니다. 그런데 시장이 매기는 가격은 4배 가까이 차이 납니다."

객석에서 질문이 나왔다. "삼성이 저평가된 겁니까, ASML이 고평가된 겁니까?"

CIO가 대답했다. "둘 다 아닙니다. 이건 기술의 가격이 아니라 대체 가능성의 가격입니다."

그는 두 번째 슬라이드를 넘겼다. KOSPI 전체의 P/B 0.9배. 미국 S&P 500의 4.5배. 일본 TOPIX의 1.5배. 한국 주식시장 전체가 장부가치 이하에서 거래되고 있다는 뜻이다. 같은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어느 나라에 상장되어 있느냐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이 세미나의 제목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구조와 해법"이었지만, 진짜 주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대체 가능성을 대체 불가능성으로 바꾸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이 대화 안에 이 장의 전부가 들어 있다. 16장에서 한국의 점수를 매겼다 — 16.5점, 25점 만점에. 반쪽짜리 불가결 노드. 진단은 끝났다.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그 점수를 어떻게 올릴 것인가.

진단을 실행으로 전환하는 것. 국가의 전략, 자본의 전략, 개인의 전략 — 이 세 층위를 동시에 움직이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만 움직이면 나머지 둘이 발목을 잡는다.

7장에서 우리는 ASML의 P/E 38배가 기술 독점의 가격이라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삼성전자의 P/E 10배는 무엇의 가격인가. 대체 가능성의 가격이다. 그리고 그 가격을 바꾸는 것이 전략이다.


2. 다섯 개의 파이프라인

16장의 점수표는 진단이다. 진단에서 처방으로 넘어가려면, 점수를 올리는 메커니즘을 식별해야 한다. 그리고 그 메커니즘은 이 시리즈를 통해 이미 보여진 바 있다.

이스라엘은 군에서 기술로, 기술에서 창업으로, 창업에서 산업으로 이어지는 파이프라인을 깔았다. 5장에서 보았다 — 유닛 8200에서 복무한 청년이 전역 후 사이버보안 스타트업을 세우고, 그 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320억 달러에 인수된다. 위즈가 그 파이프라인의 출구였다.

싱가포르는 이민에서 교육으로, 교육에서 산업으로, 산업에서 시민권으로 이어지는 파이프라인을 깔았다. 3장과 6장에서 보았다 — 외국인 비율 30퍼센트가 출산율 0.97의 인구 감소를 보전하고, HDB 혼합 할당제가 인종 갈등을 관리한다.

대만은 국가 R&D에서 민간 이전으로, 민간 이전에서 글로벌 제조로 이어지는 파이프라인을 깔았다. ITRI에서 시작된 연구가 TSMC라는 기업이 되었고, 그 기업이 대만 전체의 실리콘 방패가 되었다.

네덜란드는 지식 클러스터에서 공급망 교차로로, 교차로에서 기술 독점으로 이어지는 파이프라인을 깔았다. 7장에서 보았다 — 아인트호벤의 대학과 기업과 연구소가 ASML이라는 유일무이한 장비 기업을 탄생시켰다.

네 나라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자원이 아니라 파이프라인으로 이겼다. 니켈을 캐는 것이 아니라 니켈이 흐르는 관을 설계한 것이다. 8장에서 인도네시아가 니켈 세계 생산의 55퍼센트를 장악하고도 가치사슬의 핵심을 중국에 빼앗긴 것은, 자원은 있었으나 파이프라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다섯 개의 파이프라인이 필요하다.

첫째, 제도에서 기술로 이어지는 사이버 파이프라인. 5장에서 보았듯 망분리 해제와 글로벌 표준 통합이 수출형 보안 산업의 전제 조건이다. 방패를 문으로 바꾸는 것.

둘째, 군에서 산업으로 이어지는 인재 파이프라인. 5장에서 제안한 한국판 8200 — 징병제를 인큐베이터로 바꾸는 것.

셋째, 숙련에서 전환으로 이어지는 노동 파이프라인. 14장의 이정훈이 치킨집 대신 AI 품질 검증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경로를 까는 것.

넷째, 국경에서 인재로 이어지는 이민 파이프라인. 12장에서 보았듯 마르는 파이프를 외부에서 보전하는 것.

다섯째, 자립에서 교차로로 이어지는 소부장 파이프라인. 16장에서 직시한 것처럼, 완전한 자립이 아니라 핵심 취약점을 관리하는 것.

이 다섯 파이프라인을 동시에 깔 수 있느냐는 잘못된 질문이다. 이스라엘도 8200 하나를 완성하는 데 30년이 걸렸다. 싱가포르도 이민 파이프라인을 안정시키는 데 두 세대가 걸렸다. 그리고 한국의 제도적 유연성은 2.5점이다 — 다섯 조건 중 가장 낮다. 가장 약한 근육으로 가장 무거운 짐을 들어야 하는 역설. 이 역설을 무시하면 처방은 공허해진다.

동시가 아니라 순서다. 어느 것을 먼저 깔 것이냐가 진짜 질문이다.

규제 해체가 먼저다. 2025년에서 2028년. 사이버 규제 개혁과 소부장 이원화가 이 단계의 과제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것을 치우는 것이다. "북한 해킹에 연간 수천 건 노출되는데 망분리를 유지할 것인가"는 좌우를 가리지 않는 질문이다. 국제 표준을 도입하면 되돌리기가 어려워진다 — FedRAMP를 채택한 뒤 원래의 망분리로 돌아가는 것은 수출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인프라 창설이 그 다음이다. 2028년에서 2032년. 밀린 자 전환 센터와 한국판 8200 시범 운영이 이 단계의 과제다. 한국이 역사적으로 강한 영역 — 새로운 것을 빠르게 만드는 것. 반도체 클러스터를 세계 최대 규모로 건설한 나라가 전환 센터를 못 짓겠는가. 고용 위기가 정치적 동력을 제공한다.

문화 전환이 마지막이다. 2032년에서 2035년. 이민 확대가 이 단계의 과제다. 가장 어렵고 가장 오래 걸리는 것을 마지막에 놓는다. Phase 1과 2의 성공이 "외국인 인재가 필요하다"는 증거를 축적한 뒤에야, 이민 확대의 정치적 기반이 마련된다. 12장에서 보았듯 이민에 반대하는 국민이 55퍼센트인 나라에서, 증거 없이 문을 여는 것은 전략이 아니라 도박이다.

치우는 것, 만드는 것, 바꾸는 것. 난이도가 순서대로 올라간다. 그리고 각 단계의 성공이 다음 단계의 전제 조건이 된다.

그렇다면 각 파이프라인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계되어야 하는가. 먼저 기술 선단의 유지 — 파이프라인이 흐르는 기반 — 부터 보자.


3. 10년 로드맵 — 반쪽에서 완전체로

국가 전략은 세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기술 선단의 유지, 제도 속도의 개혁, 인재 파이프라인의 재설계.

이 세 축은 순차적이 아니라 동시적이다 — 3장에서 리콴유가 싱가포르의 군사적 생존, 경제적 불가결, 제도적 플랫폼을 동시에 구축했던 것처럼. 하나가 완성되기를 기다리면 나머지 둘이 함께 무너진다.

기술 선단의 유지가 가장 긴급하다. HBM에서 SK하이닉스의 압도적 시장 지배력은 한국이 가진 가장 날카로운 칼이다. 이 칼을 무디게 만드는 것은 시간이다. HBM4가 2025~2026년에 양산되고, HBM5가 그 뒤를 잇는 사이클에서 1세대라도 뒤처지면 마이크론이 추격해온다.

SK하이닉스의 MR-MUF 기술 특허 장벽, 엔비디아와의 장기 공급 계약, 용인 메가팹 클러스터의 적기 완공 — 이 세 가지가 2027년까지의 방어선이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를 합치면 HBM과 DRAM 모두에서 세계 시장의 압도적 다수를 한국이 쥐고 있다. 이것은 ASML의 EUV 독점에 가장 근접한 구조다. 그러나 투자자의 시선으로 보면 다른 질문이 따라온다 — 마이크론이 21퍼센트에서 30퍼센트로 점유율을 끌어올리는 데 몇 분기가 걸리는가. 그 속도가 SK하이닉스의 62퍼센트 프리미엄을 정당화하는 기간의 길이를 결정한다.

이 방어선이 구축되는 동안, 아산에서는 다른 시간이 흐른다. 용인 클러스터에 반도체 소부장 기업의 사무실이 하나씩 들어설 때, 이정훈의 치킨집이 있는 아산 배방읍에도 그 생태계의 끝자락이 닿을 수 있는가 — 방어선의 성패는 여의도 지표만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파운드리에서는 공격이 필요하다. 삼성전자의 점유율 8퍼센트는 "없어서는 안 될" 수준이 아니다. TSMC의 3분의 2 점유율과의 격차는 59퍼센트포인트. 그러나 여기에 역설적 기회가 있다. 대만 유사시를 우려하는 미국과 유럽의 고객들에게 삼성은 유일한 현실적 대안이다. 2나노 GAA 공정의 수율을 65퍼센트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분기점이다. 수율이 올라가는 순간, "대만 리스크 헤지"라는 구조적 수요가 삼성 파운드리로 흘러들어온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622조 원 — 약 4,500억 달러 — 의 장기 투자가 이 시나리오를 뒷받침한다. 삼성이 파운드리에서 "2티어" 이미지를 벗는 순간, 한국은 메모리와 파운드리 양쪽에서 불가결한 나라가 된다.

배터리에서는 시간을 사야 한다. 11장에서 보았듯 한국 3사의 합산 점유율이 36퍼센트에서 15퍼센트로 반토막 났다. CATL 39.2퍼센트, BYD 16.4퍼센트 — 중국 두 기업만으로 한국 전체를 압도한다. LFP 가격 경쟁에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8장에서 인도네시아의 니켈 사다리를 보았다 — 자원 불가결성은 기술 전환에 의해 수명이 유한해진다. 배터리에서도 같은 논리가 작동한다. 현행 리튬이온 화학에 머무르는 한 중국의 규모 우위를 이길 수 없다.

전고체 배터리가 판을 바꿀 유일한 무기다. 삼성SDI는 2027년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 현재 추세가 유지된다면, 에너지 밀도 900와트시/리터는 현행 리튬이온의 3배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발화 위험 제거, 10분 급속 충전, 항속거리 2배 — 개선이 아니라 세대 교체다. 전고체에서 2~3년의 선행 우위를 확보한다면, LFP 가격 경쟁과는 다른 차원에서 불가결성을 만들 수 있다. 전고체가 리튬이온을 대체하면, 니켈 수요 구조도 바뀐다. 술라웨시의 바그스 수토모가 월급 30퍼센트를 잃은 것은 자율주행 덤프트럭 때문이었지만, 다음 충격은 화학의 전환에서 온다 — 한국의 배터리 전략은 인도네시아 광산 노동자의 운명과 같은 공급망 위에 놓여 있다.

바이오 CDMO라는 세 번째 날개도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2024년 매출 4조 5,500억 원 — 약 33억 달러. 생산능력 78만 리터. 서방 제약사들이 지정학 리스크로 중국 CDMO에서 이탈하면서 수주가 급증하고 있다. HBM, 전고체, CDMO — 불가결성의 세 다리다.

네 번째 다리가 있다. 사이버 안보의 산업화다. 16장에서 잠정 1.5점 — 여섯 조건 중 가장 낮은 점수를 매겼다. 이스라엘이 매년 수십억 달러의 사이버보안을 수출하는 동안, 한국의 보안 기업은 5장에서 본 갈라파고스 규제 안에 갇혀 있다.

전환의 경로는 세 단계다. 2026년에서 2028년 사이에 망분리의 전면 규정형을 위험 기반 분리로 전환한다. 미국의 FedRAMP, 영국 NCSC의 "Secure by Default" 원칙과 호환되는 클라우드 보안 기준을 공공 조달에 통합한다. 이것은 기술 혁신이 아니라 제도 정리다 — 5장에서 제시한 역순 공식이 여기서 작동한다.

2028년에서 2031년 사이에 국정원·KISA·사이버사령부·민간 SOC를 잇는 위협정보 공유체계를 표준화한다. 에스토니아의 CCDCOE가 NATO 전체의 사이버 방어 표준을 세운 것처럼, 한국은 북한발 위협의 실전 경험으로 아시아-태평양 사이버 방어의 기준점이 될 수 있다.

2031년에서 2035년 사이에 수출형 보안 기업을 육성한다. 국내 전용 솔루션에서 글로벌 시장 점유율 3~5퍼센트로 전환하는 것이 목표다. 이스라엘이 인구 940만으로 사이버 수출 세계 2위를 차지한 것은 위협이 곧 산업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공격적인 위협에 매일 노출되면서도 그 방어 경험을 수출하지 못하고 있다. 방패를 문으로 바꾸는 것 — 그것이 사이버 파이프라인의 설계도다. 과기정통부와 국정원이 규제 전환을 주도하고, KISA와 민간 SOC가 실행한다. 이 전환이 2028년까지 시작되지 않으면, 글로벌 클라우드 보안 표준과의 격차는 비가역적으로 고착되고, 5장에서 본 갈라파고스의 벽은 더 높아진다.

제도 속도의 개혁은 한국이 16.5점에서 가장 크게 감점당한 영역이다. 제도적 유연성 2.5점. 싱가포르 4.5점과의 격차 2.0점. 12장에서 타다의 죽음을 보았다 — 1심 무죄 판결 16일 후 금지법이 통과됐다. AI 기본법은 3.5년간 국회에서 표류했다. 이것이 제도 속도 2.5점의 실체다.

6장에서 싱가포르가 홍콩이 세금을 부과할 때 세금을 면제하며 아시아 금융 허브를 선점한 것을 보았다. 제도적 속도는 천연자원보다 강력할 수 있다. 규제 샌드박스의 승인 절차를 싱가포르 수준 — 신청 후 30일 이내 결정 — 으로 단축하는 것, 외국인 고급 인재 비자를 UAE 골든 비자 모델로 전환하는 것, 기업 설립에서 폐업까지의 행정 비용을 OECD 상위 10퍼센트 수준으로 줄이는 것 — 이것들은 예산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다. 김수진이 AI 재훈련 프로그램에 등록할 수 있으려면, 그 프로그램이 먼저 존재해야 한다. AI 기본법이 3.5년간 표류하는 속도로는, 김수진의 20년 심사 역량이 새로운 산업으로 이동할 경로가 열리기 전에 무용화가 완료된다.

인재 파이프라인의 재설계는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가장 근본적인 축이다. 세계 최저 출산율의 나라에서 반도체와 배터리 엔지니어를 어디서 확보할 것인가. 두 개의 경로가 있다. 안에서 만드는 것과, 밖에서 데려오는 것이다.

안에서 만드는 것부터. 5장에서 이스라엘의 유닛 8200이 군 복무를 기술 인큐베이터로 전환한 것을 보았다. 한국판 8200의 설계는 복제가 아니라 변형이다 — 5장에서 직시한 것처럼 18개월 복무로는 8200의 3년차 경험을 축적할 수 없고, 한국군의 위계 문화는 이스라엘의 후츠파와 다르다. 그러나 법적 파이프라인은 바꿀 수 있다.

2025년에서 2027년 사이에 과학고와 CTF 대회와 오픈 채널에서 연 50명을 선발하는 시범 트랙을 운영한다. 기초군사훈련 8주 후 사이버사령부와 KISA에 18개월 실전 배치 — 북한발 악성코드 탐지, 공급망 침투 대응, 산업제어시스템 방어의 실무를 경험시킨다. 핵심은 전역 후의 경로다. 군사기밀보호법의 기술이전 조항을 재설계하여 "국방 사이버 기술 스핀오프 인증서"를 발급하고, 창업 지원금과 보안인가 정리 패스트트랙을 제공한다. 싱가포르의 DIS가 디지털 인재를 군에서 산업으로 이전시키는 것, 미국의 CyberCorps가 공공복무와 사이버 교육을 연계하는 것이 참고 모델이다.

2027년에서 2030년 사이에 본격 200명으로 확대한다. 전역 후 창업 트랙을 제도화하고, 5장에서 본 판교 벤처캐피털 회의실에서 24세 청년이 스핀오프 인증서를 내미는 장면이 현실이 되게 한다. 2030년에서 2035년 사이에 동문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최초의 사이버보안 유니콘이 배출되는 것이 목표다. 이스라엘이 8200을 완성하는 데 30년이 걸렸다. 한국은 10년 안에 그 축소판을 시작할 수 있다 —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다. 국방부가 시범 트랙을 운영하되, 전제 조건인 군사기밀보호법 개정은 국회의 몫이다. 중간 성과 지표는 전역 후 보안업계 취업률과 민간 이전 기술 건수다.

밖에서 데려오는 것도 동시에 움직여야 한다. 12장에서 이민 3트랙 모델을 보았다 — 고숙련 인재의 신속비자, 제조·돌봄 분야의 장기체류 경로, 인구감소 지역의 정주형 비자. 외국인 비율 4.9퍼센트를 2035년까지 8~10퍼센트로 올리는 것이 목표다. 일본이 "이민"이라는 단어 없이 특정기능 비자로 실질적 이민을 확대한 것처럼, 한국도 정치적 비가시성 전략이 필요하다. 반도체와 AI 엔지니어 연 3,000~5,000명의 신속비자는 파이프라인의 상류를 보전하고, 제조와 돌봄 분야의 중숙련 인력 경로는 출산율이 채우지 못하는 하류를 보전한다. 법무부와 고용노동부가 비자 체계를 재설계하고, 산업통상자원부가 고숙련 수요를 매칭한다. 사회 통합 인프라 없이 문을 열면 유럽의 실패를 반복하고, 문을 열지 않으면 마르는 파이프를 되돌릴 수 없다.

14장의 박지훈이 실리콘밸리 대신 판교를 선택할 이유가 스톡옵션 세제 하나에만 달려 있다면, 그것은 취약한 불가결성이다. KAIST 전산학부를 나와 네이버를 거친 인재가 한국에 남는 이유가 제도적으로 설계되어야, 떠난 인재를 데려오는 것도, 외국 인재를 불러오는 것도 가능해진다.

소부장에서는 목표 자체를 재정의해야 한다. 16장에서 직시한 것처럼, "국산화율 20퍼센트에서 40퍼센트"라는 단일 목표는 현실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ASML의 EUV는 10년 안에 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 접근은 이원화다 — 소재와 부품과 소프트웨어와 후공정 장비에서 전략적 국산화를 추진하되, EUV 핵심 광학처럼 국산화가 불가능한 영역에서는 복수 조달과 공급 보장 협정으로 취약점을 관리한다. 15장에서 "공급망의 교차로에 서는 나라가 가장 많은 선택지를 가진다"고 했다. 완전 국산화는 교차로가 아니라 단독 도로다. 경기도 화성의 식각액 제조 중소기업이 일본 에포크사 독점의 순도를 달성했지만, 삼성전자 평택 팹의 구매 담당자는 "웨이퍼 1만 장 날아가면 누가 책임집니까"라고 묻는다. 필요한 것은 보조금이 아니라 면책의 공간 — 벨기에 IMEC나 대만 ITRI 같은 국가 공용 테스트베드다. 이 테스트베드에서 검증된 국산 소재만이 팹 라인에 올라갈 수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와 삼성·SK가 공동으로 이원 전략을 실행한다. 2030년까지 테스트베드 검증 완료, 2035년까지 핵심 취약 품목의 복수 조달률 80퍼센트가 목표다. 경쟁력 확보를 위장한 보호주의로 흐르면 공급망 비용이 상승하고 동맹과의 신뢰가 깎인다.

이 축들을 10년 단위로 보면 윤곽이 잡힌다. 2025~2027년은 HBM4 독점 공고화, 전고체 배터리 파일럿, 그리고 망분리 규제 전환이 목표다. 2027~2030년은 파운드리 수율 돌파, 사이버 위협정보 공유체계 표준화, 한국판 8200 시범 운영이 과제다. 2030~2035년은 전고체 배터리 세계 1위, 수출형 보안기업 육성, 바이오 CDMO 독점 심화가 도달점이다.

HBM에서 전고체로, 전고체에서 CDMO로 — 불가결성의 다리를 하나씩 놓는 것이다. 한 다리가 무너져도 다른 다리가 버티는 구조. TSMC가 대만의 방패인 동시에 대만의 인질이 된 것처럼, 단일 품목에 국가의 불가결성을 걸면 그 품목의 운명이 곧 국가의 운명이 된다. 한국이 반복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반쪽"에서 "완전체"로 가는 경로다.


4. 불가결성의 가격표 —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조건부 기회

ASML의 P/E 38배. 이 숫자의 정체를 풀어야 한다.

반도체 장비 섹터 평균 P/E는 약 24배다. ASML은 그보다 55퍼센트 높은 프리미엄을 받는다. 이 프리미엄은 기술이 만든 것이 아니다 — 대체 불가능성이 만든 것이다. EUV 노광기를 만들 수 있는 기업은 지구상에 하나뿐이고, 대안이 등장하려면 최소 10년이 필요하다. 7장에서 벨트호번의 ASML 캠퍼스를 보았다. 그 조용한 소도시에서 만들어지는 기계 한 대의 가격이 3억 8,000만 달러 — 약 5,200억 원. 매출총이익률 52퍼센트, 잉여현금흐름 마진 27.7퍼센트. 이 숫자들이 독점의 재무적 번역이다.

TSMC의 P/E는 23.5배. ASML보다 낮다. 기술 독점도에서는 TSMC가 더 높다 — 첨단 파운드리 점유율 90퍼센트 이상. 그런데 밸류에이션은 낮다. 대만 해협이라는 지정학 리스크가 약 25~30퍼센트의 할인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기술 독점 곱하기 정치적 안정성 — 이 곱셈이 최종 가격을 결정한다.

이 공식으로 삼성전자를 보면 구조가 드러난다. P/E 8~12배. DRAM 세계 1위, HBM 세계 2위, 파운드리 세계 2위. 기술 자산만 놓고 보면 TSMC에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 밸류에이션은 TSMC의 절반도 안 된다. 이 격차가 코리아 디스카운트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구성 요소는 세 겹이다. 지배구조 리스크 — 총수 일가의 경영권 승계, 소수주주 보호 미흡, 자사주 소각 부재. 지정학 리스크 — 북한, 미중 사이의 전략적 불확실성, 2024~2025년 탄핵 정국이 보여준 정치적 변동성. 시장 구조 리스크 — MSCI 선진국 지수 미편입, 외국인 투자 규제, 공매도 제한.

디스카운트가 프리미엄으로 전환될 수 있는 조건은 세 가지다. 그러나 그 조건이 충족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MSCI 선진국 지수 편입이 실현되면 글로벌 인덱스 펀드의 자동 매수가 발생한다 — 한국 시장에 수십조 원의 패시브 자금이 유입되는 구조적 이벤트다.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의 실질적 이행 — 자사주 소각, 배당 확대, 독립 이사회 구성 — 이 지배구조 할인을 줄인다. NPS의 주주권 행사 강화 — 1,100조 원 규모의 세계 3~4위 연기금이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면, 시장은 움직인다.

삼성전자의 P/E가 10배에서 TSMC 수준인 20배로 수렴한다면, 시가총액이 두 배 가까이 상승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것은 기술 혁신 없이, 제도 혁신만으로 가능한 가치 창출이다 — 단, 그 수렴이 실현되는 전제는 제도 개혁의 속도에 달려 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한국의 약점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 제도 조건이 충족되면 전환될 수 있는 잠재 에너지다.

9장에서 UAE가 국부펀드라는 자본의 힘으로 불가결성을 "사는" 전략을 보았다. 무바달라가 글로벌파운드리스의 지배주주가 되어 반도체 공급망 안에 진입한 것, ADIA가 AI 인프라로 명시적 피벗을 선언한 것. 한국에는 이미 NPS라는 거대한 자본이 있다. 문제는 이 자본이 불가결성을 만드는 데 쓰이고 있느냐다. NPS의 해외 주식 비중은 약 30~35퍼센트. 노르웨이 GPFG의 70퍼센트, 싱가포르 GIC의 60~65퍼센트에 크게 못 미친다. NPS가 글로벌 불가결 노드 자산의 비중을 높이는 동시에, 국내에서는 지배구조 개선의 촉매가 되는 것 — 이 이중 역할이 코리아 프리미엄의 열쇠다.

그러나 코리아 프리미엄은 자동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12장에서 보았듯 한국의 제도 속도는 OECD 최하위권이다. 타다 금지법이 1심 무죄 16일 후에 통과되고, AI 기본법이 3.5년간 표류하는 나라에서 MSCI 편입 조건 — 외환시장 자유화, 공매도 제도 정상화 — 이 신속하게 충족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낙관이 아니라 무책임이다. 코리아 프리미엄은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이 현실이 되려면 3절에서 제시한 제도 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 선후가 바뀌면 프리미엄은 구호에 머문다.


5. 읽은 자의 투자 프레임워크

이 시리즈를 처음부터 읽어온 독자라면 이제 하나의 구조가 보인다. 반도체가 부를 만들고, 부가 격차를 벌리며, 격차가 제도를 시험한다 — 그리고 제도가 응답하지 못하면 격차는 다음 세대의 출산율에 새겨진다. 이 순환이 한국의 맥락으로 번역한 공식이다.

1장에서 한자동맹의 붕괴를 만든 "혁신 실패, 거버넌스 경직, 국가 경쟁의 부상"이라는 세 요인은, 8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작동하고 있다.

투자에서 이 공식을 읽는 구조는 단순하다. 공식의 어느 단계에 있는가를 파악하고, 다음 단계의 수혜자에 미리 서는 것이다.

지금 세계는 "자본 집중"과 "제도 재설계"가 동시에 전개되는 복합 국면에 있다. 엔비디아, TSMC, ASML로의 시가총액 집중이 자본 집중 단계의 증거이고, CHIPS Act, IRA, EU 반도체법이 제도 재설계 단계의 증거다. 이 전환기에서 구조적으로 유리한 위치는 어느 한 블록에 편향되지 않으면서, 복수의 강대국이 필요로 하는 기술과 자원을 보유한 "사이의 노드"다.

이 프레임워크의 출발점은 불가결성을 밸류에이션보다 먼저 보는 것이다. P/E 38배의 ASML이 P/E 10배의 삼성전자보다 비싼 것이 아니다. 불가결성의 시간적 해자가 이미 가격에 반영된 것이다.

그 위에 두 번째 원칙이 놓인다. 단일 블록에 집중하지 않는 것. 미중 관계가 관리된 경쟁으로 가든, 급격한 디커플링으로 가든 — 어느 시나리오에서도 살아남는 자산을 구성한다. 이것은 분산 투자가 아니라 지정학 헤지다. 3장에서 싱가포르가 "어느 진영에도 팔 수 있되 대체할 수 없는 것"을 만든 전략과 같은 논리다.

타이밍도 전략의 일부다. 제도 재설계의 수혜자에 미리 서는 것이 세 번째 원칙이다. IRA가 통과되기 전에 한국 배터리주를 산 투자자, CHIPS Act 이전에 반도체 장비주를 산 투자자가 가장 큰 수익을 거뒀다. 공식의 네 번째 단계 — 제도 재설계 — 는 예측 가능한 사건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조건부 기회다. 동일한 기술 자산이 국가 리스크로 30~50퍼센트 할인될 때, 그 할인이 해소될 촉매의 존재 여부를 따진다. 4절에서 보았듯 촉매는 식별 가능하다 — 그러나 촉매의 실현 시점과 속도는 제도 개혁에 달려 있다.

마지막으로, 장기 구조를 읽되 단기 뉴스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미중 갈등 뉴스가 주가를 단기적으로 흔든다. 그러나 반도체 공급망 재편, AI 인프라 투자, 배터리 화학의 전환은 10년 단위의 구조적 사이클이다. 뉴스에 반응하면 밀린다. 구조를 읽으면 앞선다.

이 다섯 원칙의 공통분모는 하나다. 국가 단위가 아니라 노드 단위로 사고하는 것이다. "한국에 투자할까, 대만에 투자할까"가 질문이 아니다. "어느 노드가 불가결한가"가 질문이다. 불가결한 자산은 지정학의 파도 위에서도 가라앉지 않는다.

이 다섯 원칙을 세 개의 리스크 프로파일별 포트폴리오로 구체화한 내용은 부록 D에 수록했다.


6. 밀린 자에서 읽은 자로 — 구조적 전환의 경로

14장에서 우리는 이정훈과 김수진을 만났다. 같은 장에서 박지훈과 최영석을 만났다. 네 사람은 같은 나라, 같은 시대, 같은 경제 안에 있다. 그런데 결과가 갈렸다. 그 갈림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 이 절의 과제다.

이정훈은 현대차 아산 공장에서 28년간 암묵지를 축적했다. 소리로 금형 상태를 판단하고, 부품 표면의 광택으로 도장 불량을 잡아냈다. 그 기술은 현재 시스템 안에서의 최적화였다. AI가 그 시스템 자체를 교체했을 때, 28년의 경험은 데이터로 변환되지 못한 채 공장 밖으로 나왔다. 이정훈이 치킨집 대신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박지훈의 선택을 구조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박지훈이 세컨드브레인을 창업할 수 있었던 조건은 세 가지다. KAIST 전산학부라는 기술 기반, 네이버 AI 연구소에서의 실무 경험, 그리고 스탠퍼드에서 GPT-3 API를 접한 시점 — 즉, 기술 전환의 초기 신호를 감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정훈에게는 이 세 조건 중 어느 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의지의 차이가 아니라 구조적 접근성의 차이다. 박지훈이 한국어-일본어-인도네시아어라는 언어적 틈새를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 틈새를 "볼 수 있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정훈의 자리 — 아산 공장 생산라인 — 에서는 그 틈새가 보이지 않는다. 구조를 읽는 능력은 개인의 통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구조를 읽을 수 있는 위치에 접근할 수 있느냐가 선행 조건이다.

최영석의 사례는 다른 차원을 보여준다. 그가 IRA 통과 18개월 전에 중국산 전구체 의존도를 68퍼센트에서 22퍼센트로 줄이기 시작한 것은, 배터리 소재 산업의 내부에서 지정학 신호를 읽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11장에서 한국 배터리 기업들이 IRA의 FEOC 규정에 발이 묶인 것을 보았다. 최영석은 그 규정이 오기 전에 움직였다.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리스크의 방향을 먼저 읽을 수 있는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김수진은 은행 창구에서 20년간 같은 시스템의 심사역이었다. 그녀가 AI에 의해 무용화된 것은 판단력의 부족 때문이 아니다. 14장에서 보았듯 그녀가 통과시킨 식자재 납품업체는 3년 후 코스닥에 상장됐다. 그러나 그 성과는 "심사 기준 일탈 후 운 좋게 성공한 사례"로 기록될 뿐이었다. 시스템 밖의 신호를 읽을 채널이 차단된 구조 안에 있었다.

14장에서 바그스 수토모는 인도네시아 정부의 니켈 수출 금지가 자신의 삶을 나아지게 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가공 공장은 중국 기업이 짓고, 숙련 기술자는 중국에서 왔다. 8장에서 보았듯 인도네시아의 니켈 수출은 40억 달러(약 5조 2,000억 원)에서 220억 달러(약 28조 6,000억 원)로 450퍼센트 이상 급등했다. 국가 수준에서 자원 불가결성은 작동했다. 그러나 바그스의 월급은 30퍼센트 줄었다. 국가의 전략이 개인에게 도달하려면, 그 사이를 연결하는 제도적 파이프라인이 필요하다. 인도네시아에는 그것이 없었다. 한국에도 충분하지 않다.

이 네 사람과 바그스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명확하다. 불가결성의 전략은 국가 수준에서만 작동하면 불완전하다. 3절의 로드맵이 여의도와 판교에만 도달하고 아산과 강남지점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전략이다 — 16.5점짜리 전략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구조적 전환이 가능한 조건은 무엇인가.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기술 전환의 신호에 접근할 수 있는 채널이다. 이정훈의 아산 공장에는 AI 도입 결정이 위에서 내려왔을 뿐, 그 기술이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 있는 정보 경로가 없었다. 이스라엘의 유닛 8200 출신이 창업하는 이유는 군에서 최전선의 기술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병역 구조에는 그에 상응하는 기술 노출 경로가 부재하다.

채널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존 역량을 인접 영역으로 옮길 수 있는 제도적 다리가 함께 있어야 한다. 이정훈의 28년 품질관리 경험은 AI 품질 예측 시스템의 학습 데이터를 설계하거나, 소부장 기업의 품질 컨설턴트로 전환될 수 있는 기반이었다. 그러나 퇴직 후 그에게 제시된 선택지는 치킨 프랜차이즈뿐이었다. 전환 경로를 설계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 아니라 산업 정책의 몫이다.

그 산업 정책은 세 가지 인프라로 구성된다.

첫째, 전환수당이다. 이전 급여의 70퍼센트를 6개월에서 12개월간 보전한다. 덴마크의 플렉시큐리티가 세계에서 가장 유연한 노동시장을 만든 것은 해고를 쉽게 한 것이 아니라, 해고 후의 안전망을 두텁게 한 것이다. 소득 대체율 90퍼센트. 이정훈의 퇴직금 2억 4,000만 원은 3년 안에 소진된다. 딸의 사교육비 월 80만 원이 그 시간을 더 줄인다. 전환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시간은 돈으로 사야 한다. 연간 5만 명 전환 시 약 2조 5,000억 원 — 저출산 대응에 매년 투입되는 20조 원의 약 9퍼센트 수준이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 20조를 쓰면서, 이미 숙련을 축적한 노동자의 전환에 2조 5,000억을 아끼는 것은 산술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둘째, 경험 번역형 직무다. 고용복지플러스센터 3층의 "파이썬 빅데이터 과정"은 가짜 해결책이다. 이정훈이 파이썬 개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28년간 프레스 공정에서 쌓은 감각 — 소리로 금형 상태를 판단하고 부품 표면의 광택으로 불량을 잡아내는 — 을 AI 시스템의 학습 데이터로 번역하는 직무가 필요하다. 숙련 번역이라 부를 수 있다. 판교의 제조 AI 스타트업에 이정훈이 "데이터 라벨러 겸 도메인 전문가"로 합류하는 것이 첫 번째 경로다. "이건 베어링 마모가 아닙니다. 겨울철 아침 첫 가동 때 나는 쇳소리입니다" — 이 구분은 AI가 스스로 학습할 수 없다. 두 번째 경로는 인접산업 이동이다. 소부장 기업의 품질 데이터 설계, 스마트팩토리 운영, 공급망 컴플라이언스 — 제조 현장의 암묵지가 가치를 갖는 직무로의 이동이다.

셋째, 지역 거점 전환센터다. 서울의 고용센터가 아니라, 아산과 구미와 울산 — 공장이 있는 곳에 전환 허브를 짓는다. 싱가포르의 SkillsFuture가 커리어 전환 프로그램을 산업 현장과 직결시킨 것이 모델이다. 전환센터는 교육기관이 아니다. 퇴직 엔지니어와 인력이 필요한 스타트업을 연결하는 매칭 플랫폼이다.

이 전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는 않는다. 이정훈 한 명당, 세 명은 여전히 치킨 프랜차이즈를 열 것이다. 이 정책의 목표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전환의 좁은 다리를 넓히는 것이다 — 1퍼센트에서 15퍼센트로. 고용노동부가 주도하고, 재원은 고용보험기금·기업 분담금·일반재정이 삼분한다. 전환수당이 고용보험법상 법정 급여로 제도화되지 않으면, 7절에서 제시한 수혜자 락인 원칙에 어긋나며, 정권 교체 시 프로그램 자체가 사라진다.

"사이의 위치"는 국가만의 전략이 아니다. 개인에게도 구조적 가치를 만든다. 박지훈이 미국 AI와 한국-일본-동남아 시장 사이에서 틈새를 찾은 것처럼, 두 영역을 연결하는 위치에 서는 것이 프리미엄의 조건이다. 반도체와 배터리를 동시에 이해하는 엔지니어, AI 규제와 기업 전략을 동시에 읽는 컨설턴트 — 연결 지점에 서는 사람이 불가결해진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기 때문에 모두에게 필요한 위치. 이 논리는 국가에만이 아니라 개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위치를 잡는 것과 별개로, 제도 변화의 신호를 읽을 수 있는 리터러시가 필요하다. AI 기본법이 시행되면 AI 거버넌스 전문가의 수요가 생긴다. CHIPS Act가 집행되면 반도체 공장 건설의 프로젝트 매니저가 필요해진다. 최영석이 IRA를 읽고 공급망을 재설계한 것은 제도 리터러시의 산물이다. 공식의 네 번째 단계를 읽을 수 있다면, 다음에 어떤 기술이 프리미엄을 받을지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전제 조건이 있다. 장기 구조 변화에 자신을 정렬시킬 수 있는 시간적 여유다. 이정훈에게 그 여유는 없었다. 퇴직금 2억 4,000만 원은 3년 안에 소진되는 금액이다. 딸의 사교육비 월 80만 원이 그 시간을 더 단축시킨다. 전환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시간은 자원이다. 전환을 위한 안전망 — 재교육 기간의 소득 보전, 기술 전환 바우처, 경력 전환 대출 — 이 제도적으로 설계되어야 개인의 구조적 전환이 가능해진다.

이 다섯 조건을 관통하는 하나의 원칙이 있다. 밀린 자에서 읽은 자로의 전환은 개인의 각성이 아니라 제도적 인프라의 문제다. 14장에서 "이정훈은 자신이 로마의 농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썼다. 17장에서 덧붙일 것은 이것이다 — 이정훈은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 될 필요가 없다. 수도교의 건축가가 되면 된다. 28년간 금형의 소리를 들어온 귀는, 제대로 된 파이프라인 위에서라면 AI가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전문가가 된다.

국가가 구조를 바꿀 때, 그 변화가 이정훈의 치킨집까지 도달하는 경로를 함께 설계하지 않으면, 로드맵은 여의도 세미나실에서 끝난다.


7. 대통령을 넘어서는 설계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앞에서 제시한 모든 것 — 다섯 파이프라인, 3단계 순차 로드맵, 사이버 산업화, 전환 인프라 — 이 과연 실행될 수 있는가. 한국의 대통령은 5년 단임이다. 그리고 후임자는 전임자의 정책을 해체하는 것으로 정당성을 확보하는 관습이 있다.

원전 정책은 확대에서 탈원전으로, 다시 재확대로 반복됐다. 4대강에 22조 원을 투자한 뒤 보를 해체했다. 우리가 제안하는 3단계 로드맵 — 2025년에서 2035년 — 은 대통령 3명을 거친다. 이 제약을 무시하면 모든 처방은 공약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정권 교체를 살아남은 정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민연금은 1988년 노태우 정부가 만들었다. 38년, 7명의 대통령을 거쳤다. 보수 정부도 진보 정부도 그것을 폐지하지 못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2,200만 가입자를 적으로 만들 대통령은 없다. 건강보험도 같은 논리다 — 49년, 전 국민이 수혜자. 해체 시 정치적 자살. 반도체 투자는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고 지원됐다 — "국가 경제의 심장"이라는 안보 프레이밍이 당파를 초월시켰다.

이 생존한 정책들에는 공통 조건이 있다. 수혜자가 너무 많아서 폐지 비용이 유지 비용보다 크거나, 국가 안보로 프레이밍되어 당파를 초월하거나, 대통령 위원회가 아니라 법률과 독립기관으로 제도화되었거나, 한번 만들면 되돌리기가 물리적으로 어렵거나. 네 조건 중 하나라도 충족하면 생존 확률이 올라간다.

이 원칙을 다섯 파이프라인에 적용하면 설계가 나온다.

사이버 규제 개혁은 생존 확률이 가장 높다. 글로벌 표준 — FedRAMP, SOC2 — 을 채택하면 비가역적 표준이 된다. 도입한 뒤 원래의 망분리로 되돌리는 것은 한국 보안 기업의 수출 경로 자체를 폐기하는 것과 같다. 국제 표준은 대통령보다 오래 산다.

밀린 자 전환 인프라는 수혜자 락인으로 설계한다. 고용보험법을 개정하여 전환수당을 법정 급여로 만들면, 수만 명의 수혜자가 생긴다. 국민연금과 같은 논리 — 수혜자가 많아지면 폐지 비용이 유지 비용을 초과한다.

소부장 이원화는 민간 주도로 전환한다. 삼성과 SK가 주도하는 테스트베드는 정부가 바뀌어도 민간 투자의 관성으로 지속된다. 대만의 TSMC와 ITRI가 민주화 이후에도 생존한 것은 경제적으로 불가역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판 8200은 안보 프레이밍으로 보호한다. 국방부 산하의 소규모 시범 — 50명 — 으로 시작하면 정치적 가시성이 낮다. 성과가 나오면 확대의 정치적 비용은 줄어든다. 이스라엘의 8200이 좌파 정부에서도 우파 정부에서도 존속한 것은 군 기관으로서의 독립성 때문이었다.

이민 확대는 가장 어렵다. 12장에서 보았듯 반대 여론이 55퍼센트다. 일본의 전략이 참고가 된다 — "이민"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비자 체계를 조용히 확장하는 것. 특정기능 비자라는 기술적 명칭이 정치적 비가시성을 제공한다. 에스토니아의 X-Road가 전 국민 디지털 ID로 폐지 불가능해진 것처럼, 이민도 산업 현장에 외국인 근로자가 깊이 통합된 뒤에는 되돌리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그 통합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 Phase 3이 마지막인 이유다.

핵심 원칙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대통령의 의지에 의존하는 전략은 전략이 아니다. 법률에 새기고, 수혜자를 만들고, 되돌리기 비용을 높이는 것 — 그것이 5년짜리 나라에서 10년짜리 전략을 실행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16장에서 제도적 유연성 2.5점의 원인으로 5년 리셋을 짚었다. 이 절에서 제시한 것은 그 리셋을 이기는 설계다. 국민연금이 38년을 버틴 방식으로 — 법으로 깔고, 사람을 태워라.


8. 교차로에 서는 전략

이 책을 시작할 때 하나의 공식을 제시했다.

기술 혁신 → 자본 집중 → 사회 불안 → 제도 재설계.

1장에서 한자동맹이 이 공식의 세 번째 단계에서 무너진 것을 보았다. 혁신에 실패하고, 거버넌스가 경직되고, 국가 경쟁이 부상했을 때 — 200개 도시의 네트워크는 한 세기 만에 소멸했다. 3장에서 리콴유가 이 공식을 역으로 읽어 싱가포르를 설계한 것을 보았다. 7장에서 ASML이 30년의 R&D로 공식의 첫 번째 단계에서 영구적 해자를 판 것을 보았다. 14장에서 이정훈과 김수진과 바그스가 공식의 세 번째 단계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한국은 지금 이 공식의 어디에 서 있는가.

기술 혁신은 있다 — HBM, 전고체 배터리, 바이오 CDMO, 그리고 산업화되지 못한 사이버 방어 경험. 자본 집중도 있다 — 삼성, SK하이닉스, 정부 622조 원. 사회 불안의 징후도 보인다 — 세계 최저 출산율, 이정훈의 치킨집 월 150만 원, 김수진의 AI 추인 도장. 14장에서 보았듯, 이정훈과 김수진과 바그스는 서로를 모른다. 그러나 셋의 밀림은 같은 공식 위에 있다.

공식의 네 번째 단계 — 제도 재설계 — 가 한국의 다음 과제다. 그 재설계의 방향은 이 장에서 제시한 다섯 개의 파이프라인으로 수렴한다. 방패를 문으로 바꾸는 것, 징병제를 인큐베이터로 바꾸는 것, 치킨집을 전환센터로 바꾸는 것, 국경을 열어 파이프라인을 보전하는 것, 자립이 아니라 교차로에 서는 것.

이스라엘은 하나의 파이프라인을 완성했다. 싱가포르도 하나, 대만도 하나, 네덜란드도 하나. 한국에 다섯 개가 필요한 것은 한국이 A형도 B형도 C형도 아닌 —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16장에서 보았듯,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뜻이다. 교차로에 서 있는 나라가 가장 많은 선택지를 가진다.

10장에서 일본이라는 거울을 보았다. 닛케이 34년 만의 최고치와 고독사 76,020명이 같은 해에 공존하는 나라. 일본은 공식의 네 번째 단계에 30년 늦게 도달했다. 한국에게 주어진 시간은 일본보다 짧다. 출산율 0.72는 일본의 1.20의 절반 — 한국이 같은 위기에 더 빠르게 도달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국에는 일본에 없었던 것이 있다. 거울이 있다. 일본의 30년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이미 보았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필요가 없다 — 단, 지금 움직인다면.

한국의 전략은 교차로에 서는 것이다. 네 나라가 각각 하나의 파이프라인을 완성했다면, 한국은 다섯 개의 파이프라인을 순차적으로 깔아야 하는 — 그리고 깔 수 있는 — 유일한 나라다. 그 파이프라인이 이정훈의 치킨집까지 도달할 때, 16.5점은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읽은 자는 공식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공식을 아는 사람은 다음을 준비할 수 있다.

다음 장에서 이 시리즈의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사이에 선다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17장 끝 — 리서치 소스: R-26, R-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