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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5 — 사이의 전략

16장: 불가결의 다섯 조건 — 한국 점수표


1. 백지 위의 다섯 줄

2025년 2월,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산업통상자원부 7층 대회의실. 창밖으로 행정도시 특유의 넓고 낮은 스카이라인이 펼쳐졌고, 실내는 형광등과 프로젝터 불빛이 겹치는 특유의 밝음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보안 딱지가 붙은 바인더 열두 권이 놓였고, 그 중 한 권이 "첨단산업 전략 자산 구조 분석"이라고 적혀 있었다.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비공개 전략 세션이었다. 참석자는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외교 분야 실무 책임자 열두 명. 주제는 "한국의 불가결 자산 목록 작성"이었다.

차관보가 보드에 다섯 개의 항목을 적었다. 기술. 공급망. 제도. 인재. 안보. 각 항목 옆에 빈칸을 남겨뒀다 — 5점 만점으로 점수를 매길 자리였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여섯 번째를 추가했다. 사이버. 이 항목 옆에는 빈칸 대신 물음표를 적었다.

두 시간의 토론 끝에 보드는 빼곡해졌다. HBM 62퍼센트, DRAM 70퍼센트 — 이 숫자들 옆에는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그러나 HBM 옆의 동그라미 아래에는 작은 글씨가 추가됐다. "마이크론 21퍼센트 추격 중." 이 격차가 좁혀지는 속도가 동그라미의 유효기간을 결정한다. 파운드리 8퍼센트 — 이 숫자 옆에는 엑스 표시. 배터리 3사 — 동그라미와 엑스 사이의 세모. 출산율 0.72 — 빨간 밑줄. 회의가 끝난 뒤, 한 참석자가 복도에서 동료에게 말했다.

"반은 세계 최강이고 반은 세계 최약이야. 이런 나라가 또 있나."

그 말이 이 장의 출발점이다.

1부에서 역사가 귀납적으로 보여준 것이 있다. 1장의 한자동맹 — 200개 도시의 네트워크가 북해-발트해 교역을 독점하다가 네덜란드의 기술 혁신에 무너졌다. 2장의 스위스 — 210년간 중립을 유지하며 시계에서 금융으로, 금융에서 제약으로, 불가결성의 내용물을 시대마다 교체했다. 같은 장의 핀란드 — 소련과의 우호조약 아래에서 노키아를 키우며 전략적 인내를 실행했다.

2부에서 현대 7개국이 연역적으로 증명한 것이 있다. 4장의 TSMC — 첨단 파운드리 90퍼센트 장악으로 대만의 실리콘 방패가 됐다. 7장의 ASML — EUV 노광장비 100퍼센트 독점으로 세계 반도체 공급망의 최상류를 잠갔다. 3장과 6장의 싱가포르 — 제도 자체를 상품으로 만들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불가결 노드를 설계했다.

이 두 방향의 분석을 합치면 다섯 개의 조건이 남는다. 3장에서 우리는 그 조건을 처음 제시했다. 대체할 수 없는 기술. 우회할 수 없는 공급망 위치.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제도적 신뢰. 다음 세대를 배출하는 인재 시스템. 강대국 사이에서의 균형 능력.

이 다섯 조건으로 한국을 재어보면, 기술(4점) + 공급망(3.5점) + 제도(2.5점) + 인재(3.5점) + 안보(3점). 합산 총점은 16.5 — 만점 25점의 66퍼센트다. 그리고 여섯 번째 조건인 사이버 안보의 잠정 점수는 1.5점이다. 다섯 조건 중 어느 것보다 낮다 — 그러나 개선의 레버도 어느 것보다 많다.

합격인가 불합격인가. 그 판단은 이 장의 끝에서 내리겠다. 먼저 각 조건을 하나씩 열어보자.

점수를 읽기 전에, 그 점수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밝혀두어야 한다. 5점은 독점적 위치 — 해당 조건에서 대체 수단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상태다. 4점은 구조적 우위 — 대체는 가능하지만 비용과 시간이 크다. 3점은 경쟁적 균형 — 여러 행위자가 비슷한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2점은 구조적 열위 — 다른 행위자에 비해 명백히 불리하다. 1점은 의존적 취약 — 외부 행위자의 결정에 국익이 좌우되는 상태다.

각 조건의 판정에는 세 개에서 다섯 개의 지표를 사용했다. 기술적 대체 불가성은 세계 시장 점유율, 대체 기술 존재 여부, 경쟁자와의 기술 격차 세대 수, 그리고 공정 재현의 난이도로 판정했다. 공급망 위치는 수출입 비대칭 계수, 글로벌 공급망에서 우회 가능성, 핵심 투입재의 국산화율로 측정했다. 제도적 유연성은 세계은행 정부효과성 지수, 규제 전환 속도, MSCI 등급과 FDI 유입 규모로 판단했다. 인재 재생산성은 PISA 순위와 R&D 집약도, 유니콘 배출 비율, 합계출산율의 중장기 인구 경로로 평가했다. 안보-경제 균형은 안보 동맹과 최대 교역국의 지정학적 거리, 경제 보복 사례의 실제 피해 규모, 방산 수출 다변화 진행도를 근거로 삼았다.

이 점수는 정밀한 계량이 아니라 구조적 위치의 스냅샷이다. 같은 지표를 두고 분석가마다 0.5점의 차이가 날 수 있다 — 그것은 불확실성의 증거가 아니라 현실 복잡성의 표현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절대적 수치가 아니라 조건 간 상대적 위치와 그 의미다.


2. 하나만 끊으면 AI가 멈춘다

기술적 대체 불가성에서 한국의 점수는 5점 만점에 4점이다. 7개국 중 대만과 네덜란드에 이어 세 번째로 높다.

이 점수의 거의 전부를 HBM이 설명한다. 11장에서 우리는 SK하이닉스 이천 캠퍼스의 M16 팹을 보았다. 12층짜리 DRAM 다이를 수직으로 쌓아 올리는 공정, 사람 머리카락 열 가닥보다 얇은 775마이크로미터 구조 안에 초당 1.18테라바이트의 대역폭을 담는 기술. SK하이닉스의 HBM 시장 점유율 62퍼센트, 삼성을 합치면 79퍼센트. 엔비디아의 H200 GPU 하나에 HBM3E가 여섯 개 들어간다. 이천의 클린룸이 멈추면 세계 AI 인프라가 멈춘다.

4장에서 TSMC가 첨단 파운드리 90퍼센트를 장악하며 대만의 실리콘 방패가 된 것을 보았다. 한국의 HBM 지배력은 그에 비견된다 — 그러나 결정적 차이가 있다. TSMC는 파운드리라는 거대한 시장 전체를 장악한다. 한국은 메모리라는 한 영역 — 그중에서도 HBM이라는 한 제품군에 집중된 독점이다. DRAM 전체에서 한국의 점유율은 70.5퍼센트로 여전히 압도적이고, NAND 플래시에서도 52.6퍼센트다. OLED 패널에서도 삼성과 LG가 세계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영역은 HBM이다.

파운드리에서의 열세가 1점을 깎는다. 삼성 8퍼센트 대 TSMC 67퍼센트. 이 격차는 59퍼센트포인트 — 단순한 수치 차이가 아니라 고객 신뢰의 간극이다. 삼성이 2022년 세계 최초로 3나노 GAA 공정을 도입했지만, 수율 문제가 반복되면서 퀄컴과 엔비디아가 TSMC로 옮겨갔다. 7장에서 ASML이 EUV 노광장비 100퍼센트 독점을 달성한 것을 보았다. 그 독점의 핵심은 30년 R&D와 10만 개 부품의 복잡성이 만든 진입 장벽이었다. 삼성 파운드리에는 그런 구조적 장벽이 없다. 기술 자체는 보유하고 있으나, "없으면 안 된다"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4점은 낮은 점수가 아니다. AI 시대에 HBM이 물리적 병목이라는 사실이 한국의 기술적 지위를 구조적으로 강화한다. AI 모델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메모리 없이는 실행할 수 없다. SK하이닉스의 MR-MUF 기술 — 몰드 수지 대신 비전도성 필름을 사용하는 적층 방식 — 은 경쟁사가 즉각 복제할 수 없는 공정 노하우다.

반도체만이 아니다. OLED 디스플레이에서 삼성과 LG는 세계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의 프리미엄 디스플레이는 거의 전부 한국산이다. 자동차에서 현대-기아 그룹은 2023년 수출 709억 달러(약 94조 원)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고, HD현대의 조선 부문은 LNG 운반선에서 세계 시장의 절반 이상을 수주한다. 이 기술들은 HBM처럼 "하나만 끊으면 세계가 멈춘다"는 수준은 아니지만, 한국이 보유한 기술 포트폴리오의 넓이를 보여준다. 4점은 HBM의 깊이에서 나왔지만, 그 깊이를 넓이가 보완한다.

역사가 가르치는 교훈을 떠올려보자. 1장에서 한자동맹의 독점이 네덜란드의 기술 혁신에 무너진 것은 그 독점이 구조적 포지션에 기반했기 때문이었다. 뤼베크와 함부르크를 거치지 않으면 교역이 불가능하다는 지리적 독점 — 누군가 그 구조를 우회하는 방법을 찾자 붕괴했다. 한국의 HBM 독점은 포지션이 아니라 축적된 공정 역량에 기반한다. TSV 관통전극, 마이크로범프 접합, 열 관리 — 이것은 우회할 수 있는 항로가 아니라 수십 년간 반복된 시행착오의 산물이다.

중국 CXMT가 DDR5를 출시하고 기술 격차를 1~2세대로 좁히고 있다는 경고가 있다. 2024년 한국 검찰은 전 삼성 직원 10명을 CXMT에 10나노 DRAM 기술을 유출한 혐의로 기소했다. 추격은 현실이다. CXMT의 매출은 2022년 대비 3배인 약 30억 달러(약 4조 원)를 넘어섰고, DDR4 칩은 한국산보다 50퍼센트 저렴하게 공급된다.

그러나 HBM의 적층 공정은 평면 DRAM과는 차원이 다른 복잡성을 요구한다. 12층을 쌓아 올리는 것은 12개의 방을 짓는 것이 아니라, 12층짜리 건물을 머리카락 두께 안에 짓는 것이다. 1장의 붕괴 패턴이 즉각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 단, "즉각"이라는 단어에 방점이 찍힌다. 영원히 반복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역사 어디에도 없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600조 원 이상을 투입하고, HBM4에서 기술 격차를 다시 벌리는 것이 이 4점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3. 그물의 구멍

공급망 비대칭 의존에서 한국의 점수는 3.5점이다. 강하지만 완전하지 않다.

강한 쪽부터 보자. 배터리 3사 —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 는 세계 EV 배터리 시장의 약 15퍼센트를 차지한다. CATL 단독 39퍼센트에 밀리지만, 미국과 유럽에 대한 비중국산 배터리 공급자로서의 위치는 견고하다. 11장에서 LG에너지솔루션의 폴란드 브로츠와프 공장이 유럽 최대 배터리 공장이고, 조지아에서는 현대차 메타플랜트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한국산 EV 클러스터가 형성된 것을 보았다. 서방 자동차 제조사들에게 한국 배터리 기업은 "중국이 아닌 대안"이라는 구조적 수요를 가진다. IRA가 중국산 핵심 광물을 배제하는 FEOC 조항을 도입한 이후, 이 수요는 정책적으로 고정됐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또 다른 종류의 공급망 노드다. 세계 최대 CDMO — 계약 위탁 개발 생산 — 로 2024년 매출 4조 5,500억 원(약 33억 달러), 전년 대비 23퍼센트 성장. 5공장 착공으로 총 생산 능력 78만 리터에 달한다. 2025년 초에는 유럽 제약사와 14억 달러(약 1조 8,500억 원) 규모의 역대 최대 계약을 체결했다. 글로벌 빅파마가 생산을 외주화하는 추세에서, 삼성바이오로직스 없이는 대형 바이오의약품 공급이 불안정해지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셀트리온의 바이오시밀러 — 레미케이드, 허셉틴, 아바스틴의 복제약 — 또한 세계 시장에서 오리지널 의약품 가격을 40~60퍼센트 낮추는 구조적 역할을 한다. 한국 바이오시밀러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약 30퍼센트로, 이 분야에서도 "한국 없이는 비용 구조가 달라진다"는 수준에 근접하고 있다. 지정학적 리스크로 서방 제약사의 탈중국 CDMO 수요가 증가하면서, 인천 송도의 공장들은 점점 더 우회하기 어려운 노드가 되어간다.

그러나 그물에는 구멍이 있다. 한국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소재, 부품, 장비 — 이른바 소부장 — 에서 일본과 네덜란드와 미국에 깊이 의존한다. 포토레지스트와 블랭크 마스크와 불화수소의 핵심 소재는 일본에서 온다. 2019년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는 이 의존의 위험을 정면으로 드러냈다. 노광장비는 ASML이, 식각장비는 램리서치와 도쿄일렉트론이 장악한다. 한국 반도체 장비 국산화율은 20퍼센트에 불과하다. 목표는 2035년까지 40퍼센트지만, 7장에서 본 ASML의 복잡성 — 칼 자이스의 거울, 트럼프의 레이저, 수만 개 부품의 정밀 조립 — 을 생각하면, 핵심 장비의 완전 국산화는 10년 안에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다.

8장에서 인도네시아가 니켈 세계 생산량의 55~60퍼센트를 장악하면서도, 정련의 75퍼센트를 중국 기업이 통제하는 역설을 보았다. 자원은 인도네시아의 것이지만 가치사슬의 핵심은 중국이 쥐고 있었다. 한국 반도체도 비슷한 구조적 역설에 놓여 있다. HBM에서는 세계를 장악하지만, 그 HBM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장비와 소재에서는 장악당하고 있다. 비대칭의 방향이 제품에서는 한국 우위이고, 투입재에서는 한국 열위다. 이 양방향 비대칭이 3.5점의 의미다 — 완전한 공급망 지배가 아니라, 상호의존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이다.

배터리 원료에서도 의존 구조가 드러난다. 리튬 정제의 80퍼센트 이상, 코발트 정제의 70퍼센트, 음극재 생산의 91퍼센트가 중국이다. 11장에서 IRA의 FEOC 조항이 한국 배터리 기업의 공급망 전체를 흔든 것을 보았다. 중국산 중간재를 빼려면 공급망을 통째로 재설계해야 한다. 포스코퓨처엠이 전남 광양에 전구체 공장을 짓고, 8장에서 본 인도네시아 니켈 사다리와 연결하여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셀 공장을 카라왕에 가동한 것은, 이 재설계의 시작이다.

반도체 수출 자체는 사상 최고를 경신하고 있다. 2024년 1,419억 달러, 2025년 1,734억 달러 — 전체 수출의 28.3퍼센트를 차지한다. AI 수요가 만든 HBM 슈퍼사이클이 한국 무역수지의 기둥이다. 그러나 이 기둥이 하나의 제품군에 집중돼 있다는 것이 구조적 리스크다.

2024년 대중 무역이 사상 처음 적자로 전환된 것은 이 구조의 변화를 알리는 더 큰 신호다. 수입 1,399억 달러, 수출 1,329억 달러, 약 70억 달러(약 9조 2,000억 원) 적자. 한국이 중국에 팔 것보다 중국에서 살 것이 더 많아졌다. 한국의 대중 무역이 수십 년간 흑자를 유지해온 역사에서 이것은 구조적 전환점이다. 비대칭의 방향이 조금씩 불리하게 기울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를 직시해야 한다. 장비 국산화율 "20퍼센트에서 40퍼센트"라는 목표가 현실적인가. 7장에서 ASML의 EUV를 해부한 우리는 안다 — 칼 자이스의 거울과 트럼프의 레이저와 10만 개 부품의 정밀 조립은 10년 안에 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소부장을 국산화하겠다는 목표는 달성 불가능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 효율성을 희생하면서 주권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적 접근은 이원화다. 소재와 부품과 소프트웨어와 후공정 장비 — 국산화가 가능한 영역에 집중하고, EUV 핵심 광학처럼 국산화가 불가능한 영역에서는 복수 조달과 공급 보장 협정으로 취약점을 축소한다. 목표는 "완전한 자립"이 아니라 "핵심 취약점의 관리"다. 8장에서 인도네시아가 니켈의 자원 주권을 주장하면서도 정련의 기술 주권은 중국에 의존한 것을 보았다 — 자원을 쥐었다고 가치사슬을 통제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국산화율이라는 단일 숫자로 공급망 안전을 측정하는 것은 환상이다.


4. 느린 시계, 마르는 파이프

제도적 유연성에서 한국의 점수는 2.5점이다. 다섯 조건 중 가장 낮다.

이 점수가 의미하는 것을 6장과 비교하면 선명해진다. 싱가포르는 1968년 아시아 달러 시장을 창설하며 홍콩이 비거주자 이자 소득에 15퍼센트 원천징수세를 부과한 틈을 정확히 찔렀다. 리콴유 정부의 의사결정 구조 — 소수 엘리트의 신속한 판단과 실행 — 가 이를 가능하게 했다. 세계은행 정부효과성 세계 1위. 규제 샌드박스에서 본규제로의 전환이 매끄럽다. 한국의 정부효과성 백분위는 82 — 나쁘지 않지만 싱가포르의 100, UAE의 90, 네덜란드의 93에 비하면 열위다.

노동 시장의 경직성도 제도 점수를 깎는 요인이다. 대기업 정규직의 고용 보호는 OECD 최고 수준인 반면, 중소기업과 비정규직과의 이중구조가 고착돼 있다. 스타트업이 우수 인력을 채용하려면 재벌과 임금 경쟁을 해야 하고, 해고의 유연성은 없다. 이 구조가 이스라엘식 민첩한 창업 생태계의 형성을 가로막는다.

한국의 문제는 입법의 속도가 아니다. AI 기본법은 EU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통과됐다. 규제 샌드박스 누적 승인은 ICT와 산업 분야를 합쳐 1,000건 이상이다. 5G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것도 한국이다. 문제는 입법과 실행 사이의 간극이다. 법은 빨리 만들어지는데, 법이 현실로 바뀌는 속도는 느리다. 샌드박스 승인 후 본규제로 전환되는 비율은 낮고, 기업들은 "시범은 되는데 사업은 안 된다"는 딜레마에 빠진다. 빨리 달리는 시계와 느리게 달리는 시계가 같은 벽에 걸려 있는 셈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이 제도적 경직의 재무적 표현이다. 삼성전자의 역사적 P/E는 8~12배 — TSMC 23배, ASML 38배와 비교하면 극도로 낮다. 동일한 기술 자산에도 불구하고 TSMC 대비 약 50~70퍼센트 할인 거래된다. 재벌 총수 지배구조, 소수주주 보호 미흡, 낮은 배당 — 이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문제다. MSCI 선진국 지수 편입이 2024년에도 실패한 것이 상징적이다. 3장에서 싱가포르가 제도 자체를 상품으로 만든 것을 보았다 — "약속을 지키는 정부"라는 신뢰가 4,200개 다국적 기업의 지역 본부를 유치했다. 한국의 제도는 기술 자산의 가치를 깎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

9장에서 UAE가 2020년 이후 외국인 지분 100퍼센트 허용, 골든 비자, AI 부 장관 임명 등 과감한 제도 혁신으로 FDI를 35퍼센트 증가시킨 것을 보았다. 권위주의적 속도라는 유보가 붙지만, 결과는 명확했다. 한국의 FDI 유입은 약 130억 달러(약 17조 원) — 싱가포르 1,600억 달러의 12분의 1이다. 제도적 유연성의 부족은 외국 자본과 인재를 밀어내고 있다. 2024~2025년 탄핵 정국은 정책 연속성 리스크를 가중시켰다. 투자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손실이 아니라 불확실성이다.

그러나 탄핵은 예외적 사건이고, 한국 제도의 더 깊은 구조적 제약은 5년 단임 대통령제 자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의 시계가 리셋된다. 전임 정부의 핵심 정책은 후임 정부에서 축소되거나 폐기되고, 새 정부는 새로운 이름으로 같은 문제에 재접근한다.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이 정권 교체를 넘어 생존한 것은 수혜자의 규모가 너무 커서 되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규제 샌드박스 전환, 비자 간소화, MSCI 편입 조건 정비 — 지금 필요한 제도 혁신은 수백만 유권자의 체감과 직결되지 않는다. 5년마다 돌아오는 리셋이 제도 개선의 복리 효과를 차단한다. 입법이 빠른데 실행이 느린 역설의 뿌리가 여기 있다.

인재 생태계 재생산성은 3.5점이다. 양면이 극명하게 갈린다.

강한 면부터. PISA 2022에서 한국은 수학 527점(세계 3~4위), 읽기 515점, 과학 528점을 기록했다. 대학 진학률 76퍼센트 이상. R&D 투자가 GDP의 4.96퍼센트로 이스라엘에 이어 OECD 2위다. 절대 금액으로는 약 1,050억 달러(약 139조 원)로 7개국 중 압도적 1위다. 삼성전자 단독으로 AI 특허를 2024년 한 해에 6,000건 이상 출원했다. GDP 100억 달러당 특허 출원 7,309건으로 세계 1위.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표준화된 시험 성적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인재를 배출한다.

그러나 5장에서 이스라엘의 유닛 8200을 보았다. 정보기관 출신이 스타트업을 창업하고, 군 복무가 기술 훈련 인큐베이터로 기능하는 구조. 국방부 프로그램 출신 스타트업이 2023~2024년에 72퍼센트 증가했다. 2025년 기준 활성 유니콘은 이스라엘 23개, 한국 13개 — 인구가 한국의 5분의 1인 나라에서 유니콘이 두 배 가까이 나온다. 한국에는 군에서 기술로, 기술에서 창업으로 이어지는 파이프라인이 없다. 병역 의무가 경력의 공백으로 인식되지, 기술적 발사대로 기능하지 않는다.

두뇌 유출이 또 다른 감점 요인이다. KAIST와 포스텍과 서울대의 최우수 졸업생 상당수가 스탠퍼드와 MIT와 카네기멜론의 대학원으로 향한다. 구글과 메타와 엔비디아의 AI 연구소에서 한국인 연구자를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인재는 실리콘밸리에서 경험을 쌓은 뒤 텔아비브로 돌아와 창업한다 — 유닛 8200이 형성한 네트워크가 귀환의 동력이 된다. 한국에는 그런 귀환 메커니즘이 약하다. 삼성과 SK의 내부 연구소가 세계 수준의 대우를 제공하지만, 그것은 재벌 안의 이야기다. 재벌 밖에서 귀환할 이유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재벌 시스템의 이중성도 점수에 반영된다. 삼성, SK, 현대, LG — 4대 재벌의 매출이 GDP의 40.8퍼센트를 차지한다. 이 집중이 내부 기술 훈련 시스템을 가능하게 하고, 글로벌 규모의 R&D 투자를 지속시킨다. 13장에서 우리가 본 한국 특유의 구조다. 그러나 재벌 외부의 생태계는 빈곤하다. 유망 스타트업이 독립적으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경로가 미약하고, 대기업 인수 또는 대기업 협력 의존도가 높다. 이스라엘의 위즈가 구글에 320억 달러에 인수된 것 같은 글로벌 메가 엑시트 사례가 한국에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마르는 파이프가 이 점수에서 가장 무거운 감점 요인이다. 합계출산율 0.72 — 세계 최저. 2023년 4분기에는 0.65까지 떨어졌고, 서울은 0.64다. 인류 역사상 평시에 기록된 가장 낮은 수치다. 7개국 비교에서 이스라엘의 2.9, 인도네시아의 2.1과는 세 배에서 네 배의 격차다. 싱가포르도 0.97로 낮지만, 외국인 비율 30퍼센트로 인구 감소를 이민으로 보전한다. 한국의 외국인 비율은 4.9퍼센트(2023년)에 불과하다.

숫자를 더 들여다보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2025년 한국은 65세 이상 인구가 20퍼센트를 넘는 초고령 사회에 진입한다. 고령사회에서 초고령 사회로의 전환에 일본은 12년, 독일은 36년이 걸렸다. 한국은 7년이다. 2060년 노년부양비는 생산가능인구 100명당 노인 80명 이상 — OECD 최고 수준이 될 전망이다. 반도체 클린룸에서 일할 20대 엔지니어의 절대 수가 줄어드는 것은 추상적 위협이 아니라 물리적 현실이다.

12장에서 우리는 이 숫자의 인간적 의미를 보았다. PISA 세계 3위의 교육 시스템이 출산율 세계 최저를 만들어내는 역설. 사교육비가 가계소득의 3.2퍼센트를 차지하고, 사교육 시장 규모가 26조 원(약 190억 달러)에 달하며, 참여율이 78퍼센트다. 교육 과열이 출산 기피를 낳고, 출산 기피가 인재 파이프라인의 물리적 축소를 낳는다. 역사적 사례에서 인구 감소로 불가결성이 붕괴한 직접 사례는 없다 — 이 수준의 인구 붕괴 자체가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은 미지의 영역에 들어서고 있다.

그러나 인구가 법으로 고쳐지지 않는다고 해서 인재 파이프라인이 고쳐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싱가포르가 외국인 비율 30퍼센트로 출산율 0.97의 인구 감소를 보전하는 것처럼, 파이프라인의 국경을 여는 것은 출산율을 되돌리는 것보다 현실적이다. 12장에서 우리는 그 경로를 보았다 — 고숙련 인재의 신속비자, 제조·돌봄 분야의 장기체류 경로, 인구감소 지역의 정주형 비자. 현재 4.9퍼센트인 외국인 비율을 2035년까지 8~10퍼센트로 올리는 것이 마르는 파이프를 외부에서 보전하는 가장 빠른 메커니즘이다. 이 보정이 작동한다면 인재 점수의 하방 리스크는 줄어든다 — 3.5점이 3점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5. 두 강대국 사이의 복도

안보-경제 균형 관리에서 한국의 점수는 3점이다.

7개국 중 한국만이 이 조건에서 만점을 받을 구조적 불가능성을 안고 있다. 안보 동맹국과 최대 교역국이 서로 적대하는 구조에서 5점은 이론적으로도 불가능하다. 3점은 그 제약 안에서의 현실적 상한에 가깝다.

이 점수를 이해하려면 프롤로그에서 시작해야 한다. 2022년 10월, 미국이 첨단 반도체 수출 통제를 발동했을 때, 삼성 시안 NAND 공장과 SK하이닉스 우시 DRAM 공장의 운명이 불투명해졌다. 삼성 전체 NAND 생산의 약 40퍼센트, SK하이닉스 DRAM의 약 40퍼센트가 중국에 있었다. 미국이 "건드리지 마라"고 말한 곳에 한국의 핵심 생산 자산이 놓여 있었다. 120일 유예, 1년 연장, 그리고 연간 허가제 전환 — "영구 면제"는 없다. 11장에서 본 것처럼, 그 긴장은 해소된 것이 아니라 연례 행사가 됐다.

한미 동맹은 한국 안보의 기둥이다. 주한미군 28,500명, 1953년 상호방위조약, 핵우산. 국방비는 GDP의 2.6퍼센트로 약 476억 달러(약 63조 원). 그러나 최대 교역 파트너는 중국이다 — 수출의 19.5퍼센트인 1,248억 달러, 수입의 22.1퍼센트. 2017년 사드 배치 당시 중국의 경제 보복은 이 구조의 취약성을 실물로 보여줬다. 롯데 중국 사업 철수, 관광과 한류 타격 약 50억 달러(약 6조 6,000억 원) 추산. K-콘텐츠의 중국 내 유통이 차단됐다. 14장에서 본 그 사건의 상처는 아직 남아 있다.

3장에서 싱가포르가 미국 해군에 항구를 제공하면서 중국에 산업단지를 건설한 것을 보았다. 2장에서 핀란드가 소련과의 우호조약 아래에서 내부적으로 민주주의를 유지한 것을 보았다. 두 나라 모두 한쪽에 완전히 편입되지 않으면서 양쪽 모두에 가치를 제공하는 균형을 달성했다. 한국은 이 균형에서 더 어려운 위치에 있다. 싱가포르는 중국과 해양으로 떨어져 있다. 핀란드의 소련 무역 비중은 25퍼센트였지만 그것은 쌍무 물물교환 구조라는 완충장치 안에 있었다. 한국은 안보 의존도와 경제 의존도가 동시에 극히 높은 — 그리고 북한이라는 군사적 변수까지 얹힌 — 유일한 국가다.

북한이라는 변수는 다른 7개국 어디에도 없는 한국만의 부담이다. 휴전선 북쪽 40킬로미터에 핵무기가 있다. 이것이 외국인 투자의 구조적 할인 요인이고, 한국이 국방에 GDP의 2.6퍼센트 — NATO 기준을 넘는 수준 — 를 지출해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위협이 방산 수출의 토대가 됐다. 70년간 전쟁 준비를 지속한 나라에서 축적된 군사 기술은 세계 시장에서 가격 대비 성능의 경쟁력을 갖는다. 폴란드에 K2 전차 1,000대, K9 자주포 672문, FA-50 경전투기 48대를 수출한 2022년의 메가 계약은 그 축적의 결과물이다.

디커플링의 속도가 빨라지면 복도는 좁아진다. 미국의 HBM 대중 수출 제한 요구, 칩4 동맹 참여 압력, IRA의 FEOC 조항. 중국 쪽에서는 사드 보복의 전례, 희토류 수출 규제 카드, CXMT를 통한 한국 메모리 대체 추진. 한국은 미중 양측에서 레버리지를 행사받는 동시에 행사해야 하는 위치에 서 있다.

방산 수출이 이 복도에서 새로운 통로를 열고 있다. 2022년 약 173억 달러(약 23조 원) 규모로 세계 9위에 올라섰다. 폴란드 메가 계약 이후 호주와 사우디아라비아와 루마니아로 수출선이 확대되고 있다. 방산 수출의 전략적 의미는 매출액을 넘어선다. 한국산 무기를 도입한 나라는 정비와 부품과 후속 업그레이드에서 한국에 장기 의존하게 된다 — 일종의 안보 공급망 잠금 효과다. 이것은 3장에서 싱가포르가 무역 허브 기능으로 달성한 것의 군사적 버전이다. 그러나 방산 수출의 확대는 서방 진영과의 안보 유대를 강화하는 동시에, 중국의 경계심을 높인다. 이 역시 양날의 검이다.

여섯 번째 조건 — 사이버 안보 — 은 5장에서 이스라엘 사례를 통해 제안된 것이다. 잠정 점수는 1.5점이다. 다섯 조건 중 가장 낮고, 유일하게 2점 미만이다.

이 점수를 세 축으로 분해할 수 있다. 첫째, 방어 인프라는 2점 수준이다. 세계 최고의 인터넷 보급률 99.9퍼센트, 5G 세계 최초 상용화 — 그 위에 국가정보원 사이버안보센터와 KISA가 방어망을 운영한다. 북한의 라자루스 그룹은 2023년 기준 암호화폐 관련 해킹으로 약 6억 달러(약 7,900억 원) 이상을 탈취한 것으로 추산되고, 한국 정부와 방산 기업에 대한 사이버 공격은 연간 수천 건에 달한다. 세계에서 가장 공격적인 위협에 매일 노출되면서 축적한 방어 경험은 실전적이다 — 그러나 그 경험이 체계화되어 수출 가능한 형태로 전환되었는가는 다른 문제다.

둘째, 산업 전환은 1점이다. 5장에서 이스라엘이 유닛 8200 출신의 스타트업 생태계로 사이버 안보를 경제적 자산으로 전환한 것을 보았다. 사이버보안 수출 세계 2위. 위즈, 체크포인트, 사이버아크 — 위협이 곧 산업이 된 사례다. 한국은 그 전환에 실패하고 있다. 5장에서 본 갈라파고스 효과가 여기서 작동한다 — 21년간 유지된 망분리 규정과 공인인증서 체계가 국내 보안 시장을 글로벌 표준에서 격리시켰다. 위즈가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과, 한국 보안 기업이 세계로 나가지 못하는 것은 같은 규제의 양면이다.

셋째, 제도 환경은 1.5점이다. 9장에서 UAE의 G42가 화웨이와의 관계를 끊고 마이크로소프트와 정렬한 것을 보았다 — 어느 진영의 인프라 위에 올라서느냐가 국가의 전략적 위치를 결정하는 시대다. 한국의 사이버 제도는 그 시대의 속도에 맞지 않는다. 위험 기반이 아닌 전면 규정형 망분리, 민관 위협정보 공유의 부재, 군사기밀보호법이 가로막는 기술 이전. 5장에서 제시한 역순 공식이 여기서 다시 적용된다 — 사이버 영역에서는 제도 재설계가 기술 혁신보다 먼저 와야 한다.

1.5점은 다섯 조건 중 어느 것보다 낮다. 그러나 출산율은 법으로 고칠 수 없고, HBM 독점은 수십 년의 축적 없이 만들 수 없다. 사이버 안보는 다르다 — 제도를 바꾸고 인재 파이프라인을 설계하면 올릴 수 있는 점수다. 방패만 들고 칼은 쥐지 못한 상태. 이것은 위험이자 미개척 기회다.


6.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나라

16.5점. 만점 25점의 66퍼센트. 이 숫자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한 가지 방법은 7개국의 아키타입과 비교하는 것이다. 대만과 이스라엘과 싱가포르와 네덜란드는 A형 — 기술과 금융의 소국형이다. 인구 500만에서 2,400만의 소국이 특정 기술 영역에서 글로벌 독점을 확보하고, 그 독점을 생존의 방패로 삼는다. 인도네시아는 B형 — 자원과 인구의 대국형이다. 니켈 세계 생산량의 55~60퍼센트와 2억 8천만 인구가 레버리지다. UAE는 C형 — 주권 자본으로 미래를 사는 피벗형이다. 1조 7,000억 달러의 국부펀드가 기술 지분을 매입한다.

한국은 A형도 B형도 C형도 아니다. 그 어디에도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는다. 이것이 한국을 분석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이고, 동시에 한국의 전략적 공간을 넓히는 이유다.

HBM 79퍼센트, DRAM 70.5퍼센트 — 이것은 대만과 네덜란드급의 기술 독점이다. A형의 핵심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인구 5,200만, 제조업 GDP 비중 약 26퍼센트(부가가치 기준, OECD 최고 수준), 수출 6,838억 달러, GDP 1조 7,600억 달러로 세계 13위 — 이것은 소국이라 하기엔 크고 대국이라 하기엔 작다. B형의 산업 규모를 부분적으로 보유한다.

삼성의 5년 450조 원(약 3,100억 달러) 투자 계획, SK의 AI 인프라 투자, 한화의 방산-우주 포트폴리오 — 이것은 국가 전략 차원의 자본 배치로, C형의 요소를 부분적으로 갖추고 있다. 한국투자공사(KIC) 자산은 약 2,000억 달러로 UAE의 8분의 1 수준이지만, 재벌의 글로벌 투자 포트폴리오가 사실상 준국부펀드 역할을 한다.

K-콘텐츠 수출 131억 달러와 한류 팬 2억 2,500만 명이라는 소프트파워는 7개국 중 한국만이 보유한 독립적 자산이다. 이것은 A형에도 B형에도 C형에도 없는 네 번째 차원이다. 문화 수출이 100억 달러 증가하면 소비재 수출이 180억 달러 연쇄 증가한다는 추산이 있다. 소프트파워가 하드파워의 시장을 넓히는 구조 — 넷플릭스에서 한국 드라마를 본 인도네시아 소비자가 현대차를 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하이브리드 성격은 양날의 검이다. 어느 하나에 특화하지 못한다는 것은, 대만의 TSMC나 네덜란드의 ASML처럼 "이것 하나로 세계가 우리를 필요로 한다"고 단언할 단일 레버리지가 부재하다는 뜻이다. 한국의 가장 강한 레버리지인 HBM도 TSMC의 파운드리 독점이나 ASML의 EUV 독점에 비하면 영역이 좁다.

그러나 동시에, 복수의 레버리지를 보유한다는 것은 하나가 약해져도 다른 것으로 보전할 수 있다는 뜻이다. HBM이 중국 CXMT의 추격으로 약화되더라도, 전고체 배터리가 2027년 이후 새로운 기술 독점을 만들 수 있다 — 11장에서 삼성SDI의 에너지 밀도 900와트시/리터 목표를 보았다. 반도체 수출이 미중 규제로 제약받더라도, K-콘텐츠 131억 달러(약 17조 5,000억 원)가 소프트파워 완충재로 작동한다 — 사드 사태 때 동남아시아와 중동의 한류 팬덤이 자국 정부의 반한 정책에 비공식적 저항을 형성한 것처럼. 삼성바이오로직스의 CDMO 성장은 바이오 분야에서 새로운 공급망 노드를 형성하고 있다.

역사에서 이 원칙을 확인할 수 있다. 스위스가 210년을 버틴 것은 금융 하나 때문이 아니었다. 2장에서 본 것처럼, 은행 비밀주의가 침식될 때 제약 산업이 있었고, 노바티스와 로슈가 있었고, 제네바의 40개 국제기구가 있었다. 복수 레버리지의 포트폴리오가 단일 충격에 대한 회복력을 제공했다.

세 가지 시나리오가 한국 앞에 펼쳐져 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관리된 경쟁이다 — 확률 60~70퍼센트. 미중이 기술과 군사에서 경쟁하되 금융과 상업에서 완전 분리를 회피하는 현재의 궤적이 유지된다. 이 시나리오에서 한국은 이중 기술 트랙 — 미국향 첨단 HBM과 중국향 레거시 메모리 — 을 유지하면서 ASEAN과 중동으로 수출 다변화를 가속한다. 이미 ASEAN 수출이 전체의 17.8퍼센트에 달하며, 대중 의존도 분산의 첫 걸음을 떼었다. 베트남 수출만 543억 달러로 일본 수출 274억 달러의 두 배에 가깝다 — 수출 지도의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두 번째는 급격한 디커플링이다 — 확률 15~25퍼센트. 대만 해협 위기나 미중 직접 충돌로 경제 블록화가 가속하는 시나리오. 한국의 대중 수출 19.5퍼센트가 급격히 감소하면 단기 GDP 5~8퍼센트 하락이 추산된다. 그러나 구조적으로는 "신뢰할 수 있는 공급처"로서 서방 공급망 내 위상이 상승할 수 있다. 10장에서 일본이 라피더스를 통해 반도체 주권을 되찾으려는 것을 보았다. 급격한 디커플링 시나리오에서 한국 반도체는 일본과 다른 위치에 선다 — 되찾아야 할 것이 아니라 지켜야 할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 시안 공장과 SK하이닉스 우시-다롄 공장의 자산이 동결되거나 몰수되는 극단적 시나리오에서도, 용인 클러스터와 이천 캠퍼스의 국내 생산 기반이 남는다. 아프다, 그러나 치명적이지는 않다.

세 번째는 선택적 재관여다 — 확률 10~20퍼센트. 미중이 기후변화나 팬데믹 같은 영역에서 협력을 재개하는 시나리오. 이 경우 한국의 불가결성 프리미엄이 약화될 수 있다. 긴장이 완화되면 "양쪽 모두에 필요한 존재"의 가치가 감소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미국 시장에 직접 접근할 수 있게 되면, 한국이 중간자로서 갖는 우회 경로 가치가 줄어든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에서도 HBM과 배터리의 기술적 대체 불가능한 위치는 유지된다 — 지정학이 완화된다고 물리법칙이 바뀌지는 않는다.

이 점수표는 고정된 판결문이 아니다. 조건 하나의 변화가 총점을 움직이고, 총점이 움직이면 시나리오의 문이 열리거나 닫힌다. 가장 레버리지가 큰 조건은 제도적 유연성이다 — 현재 2.5점. MSCI 선진국 지수 편입이 2025년 심사에서 통과되고, 외국인 고급 인재 비자가 싱가포르 패스플러스 수준으로 간소화되고, 규제 샌드박스에서 본규제로의 전환 비율이 30퍼센트에서 60퍼센트로 오른다면 — 이 세 변화만으로도 제도 점수는 3점에 근접한다. 총점은 16.5에서 17점이 되고, 관리된 경쟁 시나리오에서 한국이 미국 주도 공급망의 핵심 파트너로 편입될 가능성이 열린다. 0.5점의 차이가 시나리오 B의 문턱을 낮춘다. 반대로, 인재 재생산성 3.5점은 출산율이 추가로 하락하거나 두뇌 유출이 가속될 경우 향후 10년 안에 3점 이하로 미끄러질 수 있는 가장 취약한 조건이다 — 그리고 그것은 기술 점수와 달리 정책이 즉각 작동하지 않는 영역이다. 인구는 법으로 고칠 수 없다.

역설적이지만, 미중 경쟁의 격화가 한국에 더 큰 전략적 공간을 열어준다 — 양측 모두 한국을 적으로 만들 여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2장에서 스위스가 나폴레옹 전쟁과 두 차례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충돌 속에서 오히려 불가결성을 강화한 것을 보았다. 강대국의 대결이 심화될수록 중간자의 가치가 올라가는 역학이 있다. 한국은 지금 그 역학의 한가운데에 있다.

그러나 이 세 시나리오의 확률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한국의 선택이 확률을 움직인다. 제도를 혁신하고 수출 다변화를 가속하면 관리된 경쟁 시나리오에서의 위치가 강화된다. 방산 수출을 확대하고 사이버 안보를 산업화하면 디커플링 시나리오에서의 충격이 완화된다. 한국은 시나리오의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 능동적 조건 설계자가 될 수 있다.

어느 시나리오에서든 한국의 과제는 동일하다. 기술적 독점을 유지하면서 제도를 혁신하고, 인재 파이프라인을 재건하는 것. 16.5점에서 빠진 8.5점의 대부분은 제도(2.5점)와 안보 균형(3점)과 인재(3.5점)에서 나왔다 — 기술이 아니라 기술 바깥의 영역에서 감점이 집중됐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희망의 근거다. 기술 독점은 잃기 쉽고 만들기 어렵다. 제도와 인재는 그 반대다 — 정치적 의지와 정책 설계만 있다면, 기술 독점보다 빠르게 개선할 수 있다. MSCI 선진국 지수 편입을 위한 공매도 제도 정비, 외국인 고급 인재를 위한 비자 간소화, 규제 샌드박스에서 본규제로의 전환 속도 개선,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줄이기 위한 주주 환원 정책 — 이것들은 반도체 팹을 짓는 것보다 적은 비용으로 점수를 올릴 수 있는 영역이다.

리콴유가 말레이시아에서 쫓겨난 섬에서 증명한 것을 기억하자. 불가결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설계하는 것이다. 싱가포르는 자원도 인구도 심지어 독립의 의지도 없었던 곳에서 불가결 노드를 구축했다. 한국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 HBM, 배터리, CDMO, K-콘텐츠, PISA 세계 3위의 교육 시스템, GDP 대비 R&D 투자 세계 2위. 부족한 것은 자원이 아니라 설계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16.5점이 전하는 진짜 메시지다. 만점이 아니라서 위기가 아니다. 점수를 올릴 수 있는 영역이 명확하기에 기회다. 기술에서의 4점을 지키면서, 제도에서의 2.5점을 3.5점으로, 안보 균형에서의 3점을 4점으로 끌어올리는 것. 그것이 한국의 다음 10년이 해결해야 할 방정식이다.

10장에서 일본의 궤적을 보았다. 1988년 세계 반도체 시장의 51퍼센트를 차지했던 나라가 2019년에는 10퍼센트 이하로 추락했다. 회복하는 데 다시 30년이 필요했고, 라피더스라는 국가 프로젝트로 겨우 첫발을 뗐다. 잃는 것은 빠르고 되찾는 것은 느리다. 한국은 지금 잃기 전에 보강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일본이 겪은 30년의 실종을 한국이 반복할 필요는 없다 — 단, 지금 움직인다면.

그러나 출산율 0.72라는 숫자가 이 방정식에 시한을 건다. 현재 5,173만 명인 한국 인구는 2050년 4,560만 명으로 줄고, 베이즈 통계 모델의 중앙값대로라면 2100년에는 3,000만 명 이하가 된다. 현재의 58퍼센트다. 중위연령은 2024년 45.2세에서 2040년 54.6세로 올라간다 — 세계에서 가장 늙은 나라가 된다.

역사상 모든 불가결한 나라의 공통점은 하나였다 — 다음 세대를 생산하고 교육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인적 재생산 시스템이 작동했다는 것. 베네치아의 500년도, 스위스의 210년도, 싱가포르의 60년도, 그 기저에는 세대를 이어가는 인적 연속성이 있었다. 한자동맹의 260년도,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120년도, 결국 그 기저에 사람이 있었다. 그 연속성이 끊어지면 점수표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용산 청사 회의실의 화이트보드로 돌아가자. 다섯 줄의 조건과 여섯 번째 사이버. 동그라미와 엑스와 세모와 빨간 밑줄.

그 보드 위의 숫자들은 한국이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을 동시에 보여준다. 가진 것은 지키고 가지지 못한 것은 만들어야 한다. 시간은 무한하지 않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그 시한의 정확한 길이를 묻는다.


16장 끝 — 리서치 소스: R-25, C-01, C-03, C-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