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텍사스의 텅 빈 클린룸
2025년 7월, 텍사스주 테일러시. 오스틴에서 북동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이 소도시의 외곽에, 건설 완료율 92퍼센트인 거대한 구조물이 서 있었다. 삼성전자 테일러 파운드리 팹. 총 투자액 440억 달러 — 약 60조 원. 한국 기업이 미국 땅에 쏟아부은 가장 큰 단일 투자였다.
닛케이아시아가 보도한 한 줄이 이 공장의 현실을 요약했다. "고객이 없다(there are no customers)."
2021년 11월, 삼성이 테일러 팹 건설을 발표했을 때 도시의 분위기는 축제에 가까웠다. 테일러 시장 브라이언 스미스는 "우리 도시의 역사가 바뀌는 날"이라 선언했고, 바이든 행정부는 CHIPS Act의 가시적 성과로 이 투자를 치켜세웠다. 미 상무부는 삼성에 최대 64억 달러(약 8조 3,000억 원)의 직접 보조금을 약속했다. 2,000개의 영구 일자리가 이 공장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건물이 올라가는 동안 고객은 오지 않았다. TSMC가 애플, 엔비디아, AMD — 세계에서 가장 많은 칩을 사는 기업들 — 을 독점하고 있었다. 삼성 파운드리의 수율 문제는 업계에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11장에서 삼성 파운드리의 세계 점유율이 8.1퍼센트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았다. TSMC의 67.1퍼센트와 비교하면, 이 공장은 시작부터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 세워진 것이다. 삼성 내부에서조차 자조적인 말이 나왔다. "우리는 CHIPS Act 보조금을 받기 위해서라도 테일러 팹을 열어야 한다. 열지 않으면 경쟁자보다 더 뒤처진다."
2024년 2분기, 공장 건설이 92퍼센트에 도달한 상태에서 설비 반입이 지연되기 시작했다. 삼성이 4나노에서 2나노로 공정 업그레이드를 결정했으나, 그 사이 핵심 고객 유치에 실패한 것이다. 4월, 미 상무부와 삼성은 CHIPS Act 보조금을 공식 합의했다.
그러나 2025년 12월, 상황은 더 나빠졌다.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불확실성 속에서 삼성의 미국 총 투자 계획은 440억 달러에서 370억 달러(약 48조 1,000억 원)로 축소됐다. 연방 보조금도 64억 달러에서 47억 5,000만 달러(약 6조 2,000억 원)로 26퍼센트 삭감됐다. 생산 개시는 2026년으로 재연기됐다. 4장에서 TSMC가 애리조나에 1,650억 달러(약 214조 5,000억 원)를 투자하면서도 미국 정치의 변덕에 노출된 것을 보았다. 삼성 테일러 팹은 같은 구조적 취약성의 한국판이다.
92퍼센트 완성된 건물, 텅 빈 클린룸. 이 이미지가 공급망 재편이라는 거대한 서사의 이면을 보여준다. 국가는 공장을 짓는 돈을 댈 수 있다. 그러나 그 공장을 채울 고객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CHIPS Act는 벽돌을 쌓았지만, 주문서를 만들지는 못했다. 1장에서 한자동맹이 붕괴할 때 기술 혁신이 기존 공급망을 우회했던 것처럼, 공급망 재편의 승자는 보조금의 크기가 아니라 시장의 신뢰로 결정된다.
2. 분리의 지도
삼성 테일러 팹이 보여주는 것은 단지 한 기업의 실패가 아니다. 미중 디커플링이라는 지각 변동이 만든 새로운 지형의 단면이다.
숫자가 분리의 속도를 말한다. 미국 전체 수입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8년 21퍼센트에서 2024년 13.4퍼센트로, 그리고 2025년 상반기에는 10퍼센트 미만으로 추락했다. 7년 만에 절반 이하로 줄어든 것이다.
세계 무역에서 미중 양자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도 2015년 3.6퍼센트에서 2025년 약 2퍼센트로 반 토막이 났다. 투자는 더 극적이다 — 미중 간 기업 투자는 이미 세계 투자 흐름의 1퍼센트 미만으로, 사실상 분리 상태다.
그러나 절대 규모를 보면 풍경이 달라진다. 2025년에도 미중 상품 무역 총액은 연간 6,500억 달러 이상이다.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관리된 디커플링(managed decoupling)"이 진행 중이다. 2018년 관세전쟁 개시 이후 바이든 행정부는 전기차에 100퍼센트, 반도체에 50퍼센트 관세를 부과했고, 트럼프 2기에서 중국산 전체에 추가 관세가 적용되자 2025년 상반기 대중 수입은 전년 대비 25퍼센트 감소했다.
표면 아래에서는 더 역설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숫자 앞에 한 사람이 필요하다.
2022년 초, 텍사스에 본사를 둔 전자부품 기업 CEO 데이비드 후앙은 광저우 공장에서 세 번째 봉쇄 소식을 들었다. 납기가 또 밀렸다. 주요 고객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 "China+1 조항을 계약서에 넣겠다. 중국 외 생산 거점이 없으면 계약 갱신이 어렵다." 후앙은 베트남 북부 하노이 인근 공업단지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이전은 예상보다 훨씬 고통스러웠다. 광저우의 핵심 관리자들이 이직을 거부했다. 하노이 공단의 납기는 처음 3개월간 30퍼센트 지연됐다 — 중국에서 부품을 조달하는 데, 중국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베트남의 부품 현지 조달률은 중국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3년 뒤, 후앙의 회사는 베트남과 광저우 두 공장을 모두 유지하는 "듀얼 트랙"으로 안착했다. 고객의 China+1 요건은 충족했다. 그러나 중국 공급망과의 연결은 끊지 못했다.
미국의 베트남 수입이 급증하는 동시에, 베트남의 중국 수입 의존도가 28퍼센트에서 33퍼센트로 올라간 것은 이 구조 때문이다. 멕시코의 중국 수입 비중도 18퍼센트에서 20퍼센트로 상승했다. 중국은 완제품 수출국에서 중간재 공급국으로 변신했다 — 공급망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한 층 깊이 숨어든 것이다. 서방 기업들이 중국을 떠나는 동시에, 중국 기업들이 멕시코에 투자해 USMCA를 우회하려는 움직임까지 나타나고 있다. 디커플링의 역설이다 — 분리할수록 새로운 연결이 생긴다.
미국의 대응은 점점 더 체계적이 됐다. 2022년 10월, 반도체 제조 장비에 대한 포괄적 수출 규정 개정. 2023년 10월, 엔비디아의 중국용 성능 제한 칩(A800, H800)까지 차단. 바이든 행정부는 2025년 1월, 세계를 세 등급으로 나누는 "AI 확산 프레임워크"를 도입했다. Tier 1 — 미국, 한국, 일본, 대만, 영국 등 18개 동맹국에는 제한 없는 AI 칩 접근을 허용했다. Tier 3 — 중국, 러시아, 이란, 북한에는 사실상 금지를 적용했다. 나머지 약 150개국은 Tier 2로 제한적 허용이다. 7장에서 미국이 네덜란드를 통해 ASML의 수출 스위치를 끈 것을 보았다. AI 확산 프레임워크는 그 논리를 반도체 장비에서 AI 칩 전체로 확장한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시행 2일 전에 이 Tier 구조를 폐지하고 더 유연한 접근법으로 전환했다. 정책의 방향이 아니라 속도와 방식이 변한 것이다. 디커플링은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 됐다. 남은 질문은 "분리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속도로, 어떤 형태로 분리할 것인가"다.
프렌드쇼어링이라는 단어가 이 흐름을 집약한다. 정치적 가치와 무역 협정을 공유하는 동맹국으로 공급망을 이동시키는 전략. 멕시코는 2024년 미국 최대 수입국으로 등극했다 — 대미 수출 5,059억 달러, 미국 전체 수입의 15.6퍼센트. 베트남의 전자 수출은 2024년 1,265억 달러에 달했다. 인도의 전자 생산은 같은 해 1,250억 달러를 기록했다.
분리의 지도가 다시 그려지고 있다. 새로운 선이 그어지는 곳마다, 기회와 위험이 교차한다.
3. 보조금보다 먼저 온 결단
이 교차점에서 한국 기업들의 궤적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하나는 삼성 테일러 팹의 지연이고, 다른 하나는 SK온 조지아의 선제적 투자다.
조지아주 커머스시, 2022년 봄. 미국 최초의 독립 배터리 대형 공장 SK배터리아메리카의 1공장이 가동을 시작했다. 라인을 지나는 셀은 포드 F-150 라이트닝에 들어갈 것이었다. 현장에는 한국인 엔지니어들이 미국인 라인 관리자들에게 전극 코팅 공정의 허용 오차를 설명하고 있었다. 단위가 달랐다 — 한국인들은 마이크로미터를 썼고 미국인들은 밀리인치로 환산을 요청했다. 그 사소한 간극을 메우는 데 한 달이 걸렸다. 공장 외벽에 내걸린 현수막에는 "2,600 JOBS, JACKSON COUNTY"라고 적혀 있었다.
2019년 3월, SK이노베이션 — 현재의 SK온 — 은 이 카운티에 16억 7,000만 달러(약 2조 2,000억 원) 규모의 배터리 공장 착공을 발표했다. 당시 미국 전기차 시장은 아직 초기 단계였다. 보조금은 없었다. IRA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SK가 베팅한 것은 단 하나 — 미국 시장이 반드시 온다는 판단이었다.
2021년, 그 판단이 시험대에 올랐다. LG에너지솔루션과의 배터리 특허 분쟁으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SK의 배터리 수입 금지 명령을 발동할 위기에 처했다. SK온의 미국 사업 자체가 사라질 수 있는 순간이었다. 바이든 행정부가 거부권을 행사해 금지령을 막았다. 이유는 "국가 안보 이익"이었다. 조지아에 이미 뿌리를 내린 2,600개 일자리가 구명줄이 됐다. 조지아 거버너 브라이언 켐프는 이후 SK의 고용 목표 초과 달성을 직접 발표했다 — 목표 기한보다 2년 앞서.
2022년 8월 16일, IRA가 서명됐다. SK온은 가장 큰 수혜자가 됐다. IRA를 기다린 기업이 아니라, IRA가 오기 전에 이미 미국 땅에 있었던 기업이 최대 배당을 받았다. 포드와의 블루오벌SK 합작 법인, 켄터키와 테네시에 총 115억 달러(약 14조 9,000억 원) 규모의 배터리 공장 3개, 에너지부로부터 96억 3,000만 달러(약 12조 5,000억 원)의 연방 대출 — 조지아의 씨앗이 거대한 나무로 자랐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도 역설이 있다. 2025년, EV 수요 둔화가 모든 계획을 흔들었다. 블루오벌SK의 공장 가동 일정이 지연됐고, 포드와의 합작 해소 논의가 시작됐다. 트럼프 행정부는 소비자 EV 세액공제를 종료시켰다. 현대차가 210억 달러(약 27조 3,000억 원) 미국 투자를 발표한 직후, 혜택이 삭감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약속 후 철회.
11장에서 IRA가 한국 배터리 기업에 기회이면서 동시에 족쇄라는 것을 보았다. 정책이 만든 기회도 시장이 검증한다.
삼성이 베트남에 누적 224억 달러(약 29조 1,000억 원)를 투자해 전 세계 스마트폰 생산의 45퍼센트를 담당시키는 동안, 베트남의 중국 수입 의존도는 오히려 올라갔다 — 2절에서 본 데이비드 후앙의 구조가 대기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Made in Vietnam"의 핵심 부품은 여전히 "Made in China"다.
한국의 좌표는 이 두 궤적 사이에 있다. 삼성 테일러 팹의 지연은 공급망 재편이 의지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SK온 조지아는 선제적 결단이 정책 배당을 만든다는 것을 증명한다. 두 사례 모두 같은 교훈을 가리킨다 — 공급망 재편에서 승자는 보조금이 아니라 타이밍이 결정한다.
4. 14억의 중력 — 인도라는 변수
공급망 재편의 지도에 새로운 중력 중심이 떠오르고 있다. 인도다.
2022년 10월, 애플은 조용히 아이폰 14를 인도 타밀나두의 폭스콘 공장에서 생산하기 시작했다. 팀 쿡은 공급망 다변화를 선언한 적이 없다. 그냥 했다. 4년 뒤 숫자가 모든 것을 말했다. 2025년 인도에서 만들어진 아이폰은 5,500만 대 — 전년 대비 53퍼센트 증가. 애플 전체 생산의 25퍼센트가 인도로 이동했다. 인도발 아이폰 수출액은 2조 루피(약 230억 달러)를 넘어, 인도의 단일 최대 수출 품목이 됐다. 2025년 3월에서 5월 사이, 인도 생산 아이폰의 97퍼센트가 미국으로 향했다 — 트럼프 관세 시행 직전의 선적 집중이었다.
더 주목할 것은 타타 일렉트로닉스의 등장이다. 인도 토종 기업인 타타의 아이폰 생산 점유율이 2024년 13퍼센트에서 2025년 37~40퍼센트로 급상승했다. 글로벌 공급망에 인도 토종 기업이 편입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조립 공장 이전이 아니다. 인도가 공급망의 수동적 수용자에서 능동적 참여자로 전환하고 있다는 신호다.
인도는 2부의 7개 거울에서 다루지 않았다. 이 책이 분석한 기존 세 아키타입 — 기술 소국형(싱가포르, 이스라엘), 자원 대국형(인도네시아), 주권자본 피벗형(UAE) — 어디에도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인구 14억 4천만의 "소국"은 정의 모순이고, 니켈이나 리튬 같은 단일 자원 독점도 없으며, 국부펀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인도는 제4의 유형이다 — 시장 규모, 저비용 고학력 노동력, IT 서비스 생태계를 결합한 복합형 대국. 그리고 70년간 축적된 비동맹의 DNA로, 미국(Quad)과 러시아(원유 수입 40퍼센트 이상), 중국(양자 무역 1,277억 달러)을 동시에 상대한다. 어느 한쪽에 편입되지 않는 전략적 자율성 — 이것이야말로 "사이의 전략"의 가장 대형 실천자가 인도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에게 인도는 세 가지 벡터로 동시에 작용한다.
시장으로서의 인도. 2030년까지 약 5억 명에 달할 중산층은 중국 이후 가장 현실적인 대형 시장 대안이다. 삼성은 노이다에 세계 최대 스마트폰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2018년 확장 이후 연간 최대 1억 2,000만 대를 생산하며, 7만 명 이상을 고용한다. 현대차는 2024년 인도 증시에 33억 달러(약 4조 3,000억 원) 규모의 IPO를 단행하며 인도를 장기 핵심 거점으로 선언했다. 타밀나두와 마하라슈트라에 38억 달러(약 4조 9,000억 원)를 추가 투자해 2028년까지 연간 생산 능력을 110만 대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한-인도 양자 무역은 251억 달러에서 2030년까지 500억 달러로 두 배 확대를 목표로 하고 있다.
경쟁자로서의 인도. PLI(생산연계인센티브) 스킴을 통해 806개 기업이 승인을 받았고, 전자 생산은 5년 만에 146퍼센트 증가했다. 스마트폰 수입은 2억 1,000만 대에서 300만 대로 급감했다 — 내수 대체에 성공한 것이다. 스마트폰, 가전, 전자부품에서 한국과의 경쟁이 형성되고 있다. 타타가 아이폰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인도 제조업이 단순 조립을 넘어서고 있다는 증거다.
파트너로서의 인도. 인도의 반도체 ATMP(조립·테스트·패키징) 역량이 성장하면, 한국의 메모리 칩과 인도의 후공정을 연결하는 분업 구조가 가능해진다. 마이크론이 구자라트에 27억 5,000만 달러(약 3조 6,000억 원)를 투자해 ATMP 시설을 건설한 것은 이 방향의 첫 걸음이다. 타타 일렉트로닉스는 대만 파워칩과 손잡고 구자라트 돌레라에 110억 달러(약 14조 3,000억 원) 규모의 반도체 팹을 짓고 있다 — 28나노에서 110나노 공정으로, 2026년 가동 목표다. 돌레라 현장에는 TSMC 난징 팹에서 5년간 공정 엔지니어로 일한 뒤 타타로 옮긴 대만인 기술자들이 인도인 신입 엔지니어에게 웨이퍼 이송 프로토콜을 가르치고 있었다. 대만에서는 하루에 소화하던 교육 내용을 돌레라에서는 사흘에 걸쳐 진행했다 — 장비 매뉴얼의 번체 중국어를 영어로, 다시 힌디어로 옮기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2025년에는 한국-인도-미국 3자 1.5트랙 대화가 열려 기술 인재 아카데미, 한국 중소기업 산업단지 등을 논의했다.
인도네시아는 니켈 원광 수출을 금지했을 때 가치사슬을 강제로 올라가는 방법을 택했다. 인도의 전략은 다르다. 자원이 아니라 규모로 승부한다. 14억 소비 시장이라는 중력 자체가 공급망을 끌어당긴다.
그러나 이 중력에는 마찰이 있다. 타밀나두 스리페룸부두르의 폭스콘 공장에서 일하는 한 한국계 품질관리 매니저는 매일 아침 공장까지 편도 두 시간을 이동한다. 도로가 우기에 잠기면 세 시간이 됐다. 그가 서울 본사에 보낸 보고서에는 불량률 수치보다 먼저 "인프라"라는 단어가 나왔다. 인프라 부족, 관료주의, 노동 인구의 90퍼센트가 비공식 고용이라는 구조적 제약. 청년 실업자의 83퍼센트가 15~29세이고,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은 41.7퍼센트에 불과하다. 세계 담수의 4퍼센트로 세계 인구의 18퍼센트를 부양해야 하는 물 위기는 반도체 팹 같은 수자원 집약 시설의 입지를 제약한다.
인도의 인구 배당금은 자동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중위 연령 29세라는 숫자는 잠재력이지, 보장이 아니다. 잠재력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인도를 "확실한 대안"이 아닌 "거대한 변수"로 만든다.
5. 보이지 않는 전선 — AI 주권의 세 차원
공급망 재편이 물리적 세계의 지각 변동이라면, AI 주권은 디지털 세계의 영토 분쟁이다. 두 전선은 하나의 구조로 수렴한다.
AI 주권이란 국가가 외국 기술 제공자에 의존하지 않고 자국의 AI 인프라, 데이터, 모델을 개발하고 통제하는 역량을 말한다. McKinsey는 2030년까지 전 세계 AI 지출의 30~40퍼센트 — 약 5,000억~6,000억 달러 — 가 주권 요건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추정한다. AI 주권은 선언이 아니라 시장이다.
이 시장은 세 차원으로 나뉜다.
기반이 되는 것은 컴퓨트다. AI를 훈련시키려면 GPU가 필요하다. 엔비디아가 이 시장을 지배하고, 한국은 Tier 1 국가로서 제한 없이 접근할 수 있다. 2025년, 한국 전체에 25만 개 이상의 엔비디아 GPU 배치가 합의됐다. 삼성전자 5만 개, SK그룹 5만 개, 현대차 5만 개.
데이터센터가 그 GPU를 수용한다. SK텔레콤과 AWS가 공동으로 짓는 울산 AI 데이터센터는 50억 달러(약 6조 8,000억 원) 규모로, 2027년 완공 시 아시아 최대가 된다. 전라남도에는 3기가와트급, 350억 달러(약 45조 5,000억 원) 규모의 데이터센터 단지가 계획돼 있다. 이 입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산업통상자원부의 한 과장은 세 가지 변수를 동시에 저울질해야 했다 — 냉각수 확보가 가능한 해안 접근성, 원전과의 송전 거리, 그리고 지역 주민의 수용성이었다. 전력 1기가와트는 원자로 한 기에 해당한다. 데이터센터 하나의 입지가 에너지 정책과 국토 계획을 동시에 결정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블랙록과 한국 정부는 하이퍼스케일 AI 데이터센터 허브 구축을 발표했다. 9장에서 UAE가 미국 오픈AI와의 스타게이트 파트너십으로 아부다비에 대규모 AI 데이터센터 벨트를 조성하는 장면을 보았다. 주권자본으로 AI 인프라를 사들이는 전략이었다. 한국은 국부펀드가 아닌 민간 재벌과 외국 빅테크의 합작으로 같은 인프라를 쌓고 있다 — 자본의 성격은 다르지만, AI 컴퓨트 주권을 물리적으로 확보하려는 목적은 같다.
이 인프라는 전력을 먹는다. 2024년 전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는 460테라와트시. 2030년에는 1,000테라와트시를 넘을 전망이다. 골드만삭스는 그때까지 85~90기가와트의 신규 원전 용량이 필요하다고 추산한다. 한국의 대응은 X-energy, 아마존, 한수원, 두산에너빌리티의 SMR(소형모듈원전) 파트너십이다. 두산이 창원에 SMR 제조 시설을 짓기로 한 것은 AI와 원자력이 하나의 투자 사슬로 연결되는 구조를 보여준다.
그러나 컴퓨트의 역설이 있다. AI 칩을 소비하는 나라이면서 동시에 AI 칩의 핵심 부품을 공급하는 나라 — 이것이 한국의 독특한 위치다. 11장에서 보았듯, SK하이닉스의 HBM 없이는 엔비디아의 H200이 작동하지 않는다. HBM 시장에서 한국(SK하이닉스+삼성)의 점유율은 79퍼센트다. 미국의 AI 패권도, 중국의 AI 추격도, 한국산 HBM 없이는 불가능하다. 소비자이면서 공급자. 이 이중적 위치가 한국의 협상력을 만든다.
이 인프라 위를 흐르는 데이터가 또 다른 전선이다. AI 모델의 성능은 학습 데이터의 양과 질에 달려 있다. 한 글로벌 클라우드 기업의 아시아 총괄은 서울 데이터센터 구축을 검토하면서 내부 메모에 이렇게 적었다 — "한국은 EU와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고, 미국 클라우드에도 올릴 수 있으며, 중국과의 무역 경로도 열려 있다. 아시아에서 이 세 조건을 동시에 충족하는 곳은 드물다." 여기서 규제가 지형을 만든다. 한국 개인정보보호법(PIPA)은 EU로부터 적정성 결정을 받은 아시아 최초의 법제 중 하나다. 2021년 12월 발효된 이 결정은 한-EU 간 개인정보 이전을 간소화한다.
동시에 한국은 중국의 강제적 데이터 로컬라이제이션과 차별화된다. 중국은 사이버보안법, 데이터 보안법, 개인정보보호법이라는 3법 체계로 "중요 데이터"의 국내 저장을 법적으로 강제한다. 한국과 EU는 원칙적으로 역외 이전을 허용하되 안전 조치를 요구한다. 이 차이가 한국을 데이터 허브의 후보로 만드는 구조적 기반이다.
한국은 IPEF(미국 주도)와 RCEP(중국 포함)에 동시에 참여하는 유일한 주요 경제국 중 하나다. EU와 호환되면서도 미국 Cloud Act와 충돌을 최소화하고, RCEP을 통해 중국과도 연결된다. 3장에서 싱가포르가 규제의 골디락스 — 너무 느슨하지도, 너무 엄격하지도 않은 — 로 불가결성을 구축한 것을 보았다. 한국의 데이터 거버넌스는 같은 논리 위에 있다.
가장 취약한 고리는 모델에 있다. 한국의 위치는 이 차원에서 가장 약하다. 네이버의 HyperCLOVA X는 한국어 데이터를 GPT-4 대비 6,500배 더 많이 학습했다. 6만 개 기업 고객을 확보했고, 2025년에는 추론 특화 모델 HyperCLOVA X Think을 출시했다. 삼성 가우스는 온디바이스 AI에서 갤럭시 스마트폰의 번역, 요약, 이미지 생성을 담당한다. LG의 Exaone, SKT의 A.X, 카카오의 Kanana — 한국 기업들이 자체 모델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OpenAI의 GPT, Anthropic의 Claude, Google의 Gemini와의 격차는 크다. 영어 성능, 추론 능력, 학습 데이터 규모에서 한국 모델들은 글로벌 프론티어에 미치지 못한다. 프론티어 모델을 개발하려면 수조 원의 투자와 수만 개의 GPU가 필요하다.
이 격차가 한국 AI 주권의 방향을 결정한다. "더 나은 글로벌 AI"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 맞는 AI"를 확보하는 것. 한국어 법령, 의료 데이터, 금융 규정 — 글로벌 모델이 다루지 못하는 영역에서의 주권 확보가 현실적 전략이다. 네이버는 이 방향을 보여주는 사례다. 인텔 가우디 AI 가속기 기반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구축해 엔비디아 GPU 의존 탈피를 시도하고 있다.
2025년 8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5개 소버린 AI 개발 컨소시엄 — 네이버, SK텔레콤, LG, NCSoft, Upstage — 을 선정하고 3,810억 원의 정부 지원을 확정했다. "완전 자급"이 아니라 "선택적 주권과 전략적 파트너십"의 조합이다. 국가 안보와 공공 서비스는 국산 모델과 국내 클라우드로, 상업적 응용은 글로벌 인프라를 활용한다. 하드웨어(HBM, 배터리, SMR)에서는 글로벌 필수 공급자 위치를 공고화하고, 소프트웨어 서비스에서는 한국 특화 레이어를 구축한다.
AI 주권의 세 차원 — 컴퓨트, 데이터, 모델 — 에서 한국의 위치는 균일하지 않다. 컴퓨트에서는 소비자이면서 공급자라는 독특한 양면성이 있고, 데이터에서는 규제 호환성이라는 구조적 이점이 있으며, 모델에서는 선택적 주권이라는 현실적 경로를 걷고 있다. 이 불균일함 자체가 전략의 형태다 — 모든 차원에서 지배할 수 없다면, 각 차원에서 최적의 위치를 잡는 것이 현실적인 답이다.
6. 교차로의 나라
공급망 재편과 AI 주권. 표면적으로 다른 두 흐름이 한국에서 하나의 구조로 수렴한다.
그 수렴의 논리는 이렇다. 한국이 HBM을 지배하기 때문에 미국의 AI 칩 Tier 1 접근을 확보한다. Tier 1 접근이 AI 인프라 투자 — 데이터센터, GPU 클러스터 — 를 가능하게 한다. 인프라 위에 국산 AI 모델 훈련이 올라간다. 그 모델이 한국어 AI 서비스 주권을 만든다. 하드웨어 공급망의 불가결성이 소프트웨어 주권의 기반이 되는 구조다. 4장에서 대만의 "실리콘 방패"가 미국으로 이동할 때 대만이 잃는 것을 보았다. 한국의 방패는 이동하지 않는다 — HBM 생산은 이천과 용인에 있고, 그것이 한국의 협상력의 물리적 근거다.
그러나 이 구조에는 리스크가 존재한다.
미국이 강제 선택을 요구할 때. 만약 Chip 4가 대중 수출 통제의 칼로 변하면, 한국은 반도체 수출의 51.7퍼센트를 차지하는 중화권 시장을 잃는 충격을 감수해야 한다. 7장에서 네덜란드가 미국의 요구로 ASML의 수출 스위치를 끈 것을 보았다. 한국은 스위치를 끄지 않았다 — 아직은. 그리고 그 "아직"이 전략적 공간이다.
중국이 자급에 성공할 때. 2023년 8월, 화웨이가 사전 예고 없이 메이트 60 프로를 출시했다. 분해 분석 결과, SMIC가 만든 7나노급 칩이 탑재돼 있었다. 미국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을 중국이 해냈다. 미국 상무장관 지나 레이몬도가 베이징을 방문 중인 바로 그날, 화웨이는 아무 예고도 없이 이 폰을 출시했다. 중국 인터넷에서는 레이몬도를 "메이트 60 프로의 비공식 홍보대사"라고 조롱하는 밈이 돌았다. 중국이 HBM 자체 개발에 성공하면, 한국의 불가결성은 훼손된다. 현재의 분석은 "왜 화웨이가 엔비디아를 따라잡을 수 없는가"다. 그러나 이 분석은 10년 안에 변할 수 있는 변수다.
AI 인프라 의존이 심화될 때. AWS, Azure, GCP가 한국 내 투자를 확대하는 것은 양날의 검이다. 세계 최고 AI 인프라에 접근할 수 있지만, 데이터와 AI 워크로드의 통제권이 외국 기업에 넘어가는 역설이 발생한다. 네이버 클라우드, KT 클라우드, NHN 클라우드 — 국내 사업자들의 점유율은 제한적이다. 겉으로는 인프라가 늘어나지만, 실제 통제권은 줄어드는 구조가 될 수 있다.
이 세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위치에는 구조적 이점이 있다. IPEF(미국 주도)와 RCEP(중국 포함)에 동시에 참여하는 이중 편입. Chip 4에 조심스럽게 참여하면서도 중국에 반도체의 절반 이상을 수출하는 복수 레인 전략. EU 적정성 결정을 받은 데이터 거버넌스. 이 이중 참여는 모순이 아니라 전략적 옵션 유지다.
숫자가 이 전략의 실행을 보여준다. 2023년, 한국의 대중 무역수지가 처음으로 적자(-180억 달러)를 기록한 같은 해, 대미 무역수지는 역대 최대 흑자(+450억 달러)를 기록했다. 중국 비중은 19.7퍼센트로 20년 만에 처음 20퍼센트 아래로 내려갔다.
반도체 수출의 구조도 변했다. 2020년 한국 반도체 수출의 62퍼센트가 중화권으로 향했지만, 2024년에는 51.7퍼센트로 하락했다. 대만 비중이 크게 상승한 것은 엔비디아용 HBM이 TSMC를 경유하는 새로운 경로 때문이다. 무역 지도가 이미 재편되고 있다. 다변화는 구호가 아니라 데이터로 나타나고 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600조 원, 삼성의 5년간 450조 원, 경기 반도체 메가클러스터에 622조 원. 동시에 SK-AWS 울산 데이터센터 50억 달러, 전라남도 데이터센터 단지 350억 달러. 반도체와 AI 인프라와 에너지가 하나의 투자 사슬로 연결되고 있다. 이 사슬의 각 고리에서 한국은 공급자이면서 소비자이고, 파트너이면서 경쟁자다.
공급망의 교차로에 서 있는 나라가 가장 많은 선택지를 가진다. 교차로는 위험하다 — 어느 방향에서든 충돌이 올 수 있다. 그러나 교차로를 떠나면 선택지가 사라진다.
한국의 전략은 교차로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떠나지 않되, 어느 한 방향에 고정되지도 않는 것. 미중 사이, 보조금과 시장 사이, 하드웨어 주권과 소프트웨어 의존 사이. 3장에서 싱가포르가 불가결성의 두 번째 조건으로 공급망 핵심 노드를 제시한 것을 보았다. 한국은 노드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교차점 위에 서 있다. HBM이라는 노드, 배터리라는 노드, 데이터 거버넌스라는 노드, 그리고 AI 인프라라는 노드.
텍사스의 텅 빈 클린룸은 경고다. 공급망 재편은 보조금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조지아의 SK온 공장은 증거다. 선제적 결단이 정책 배당을 만든다. 인도의 14억 인구는 변수다. 새로운 중력 중심이 지형 자체를 바꾸고 있다. AI 주권의 세 차원은 과제다. 어느 하나도 한국이 단독으로 지배할 수 없지만, 각 차원에서의 최적 위치가 전체의 전략을 만든다.
그 교차점들이 겹치는 곳에, 사이의 전략이 있다.
15장 끝 — 리서치 소스: R-23, R-24, GA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