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밤의 시안 공장
2026년 1월, 중국 산시성 시안(西安).
삼성전자 시안 NAND 공장의 야간 교대조가 클린룸에 들어서고 있었다. 바깥 기온은 영하 4도. 공장 내부는 항온 22도, 습도 45퍼센트. 클린룸의 공기는 외부보다 1만 배 깨끗하다. 이 공간 안에서는 계절도, 국경도, 지정학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웨이퍼 위에 회로를 새기는 노광기의 진동은 인간의 감각으로 포착할 수 없을 만큼 정밀하다. 그 정밀함 바깥에서, 훨씬 거친 힘이 이 공장의 미래를 결정하고 있었다.
이 공장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클린룸 안의 공정이 아니라 클린룸 밖의 정치다.
프롤로그에서 우리는 이 공장을 서초구 본사의 책상 위에서 만났다 — 2022년 10월 7일 금요일, 본부장급 임원이 왼쪽의 BIS 수출통제 사전 통보문과 오른쪽의 시안 공장 생산 현황 보고서를 번갈아 보던 아침. 왼쪽 문서가 오른쪽 문서를 불법으로 만들려 하고 있었다.
3년 4개월이 지났다. 시안 공장은 여전히 가동 중이다. 그러나 같은 공장이 아니다. 미국의 "검증된 최종사용자" 유예는 2025년 8월에 만료됐고, 연간 라이센스 체제로 전환됐다. 매년 갱신 여부를 워싱턴이 결정한다. 삼성전자 전체 NAND 생산의 40퍼센트를 차지하던 이 공장은, 이제 30퍼센트 이하로 비중이 줄었다. 최첨단 공정의 장비 반입이 사실상 차단되면서, 시안은 레거시 제품 전용 라인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공장은 돌아가지만, 심장부의 기술은 멈춰 있다.
시안 공장만이 아니다. SK하이닉스의 우시 DRAM 공장과 대련 NAND 공장도 같은 제약 아래 놓여 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중국 내 자산은 수십조 원 규모다. 이 자산들이 레거시로 전락하는 속도와, 한국 내 대체 생산 역량을 구축하는 속도 사이의 경주가 벌어지고 있다. 이천과 청주에 새 라인이 올라가고 있지만, 인력이 부족하다. 합계출산율 0.72의 나라에서 클린룸 엔지니어를 어디서 구할 것인가. 프롤로그에서 이 수치를 처음 언급했을 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 그때는 위기의 예고였고, 지금은 위기의 실체가 됐다는 것이다. 3년 사이에 0.72는 예측치에서 현실로 내려앉았다. 두 개의 시계 — 반도체 공급망 재편의 시계와 인구 감소의 시계 — 가 동시에 돌고 있다.
프롤로그에서 우리는 물었다. 한국이 살아남은 이유는 구조적 상호의존 — 한국 없이는 세계 반도체 공급망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 — 이 한국의 방패였다고. 그리고 물었다. 그 방패는 영원한가.
5권 전체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방패는 영원하지 않다. 그러나 방패를 다시 벼릴 수 있는 재료는 아직 한국에 있다. 답은 "아니다"와 "그러나" 사이에 있다.
2. 여행의 궤적
여행은 13세기 뤼베크의 항구에서 시작됐다. 한자동맹의 상인들이 200개 도시의 네트워크로 독점을 만들었고, 그 독점은 지리를 우회한 자들에 의해 무너졌다. 스위스는 중립을 자산으로 전환했고, 리콴유는 쫓겨난 섬에서 세계가 없앨 수 없는 나라를 설계했다. 역사에서 하나의 법칙을 읽었다 — 불가결성의 다섯 가지 조건.
그 조건을 들고 현재로 돌아와 일곱 개의 거울을 비췄다. 대만의 실리콘 방패, 이스라엘의 안보-혁신 역설, 싱가포르의 규제 상품, 네덜란드 ASML의 병목 권력, 인도네시아의 니켈 사다리, UAE의 주권자본 피벗, 일본의 부활과 쇠퇴. 거울마다 한국의 다른 얼굴이 비쳤다 — 가능성과 경고가 동시에.
대만에서는 하나의 기업에 국가의 운명을 건 집중 전략의 위력과 위험을 보았다. 이스라엘에서는 안보 위기를 혁신의 동력으로 전환하는 제도 설계를 보았다. 싱가포르에서는 제도의 속도가 곧 국가 경쟁력이라는 것을 보았고, 네덜란드에서는 기술 병목의 권력이 그것을 쥔 나라가 아니라 스위치를 쥔 나라에 있다는 것을 보았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자원이라는 카드의 유효기간을 보았고, UAE에서는 자본으로 불가결성을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부딪혔다. 일본에서는 한국의 30년 뒤를 보았다 — 고독사와 반도체 부활이 공존하는 풍경.
거울을 내려놓고 한국을 정면으로 보았다. HBM이라는 날카로운 날개, 하강하는 배터리, 느린 제도, 줄어드는 인구, 5년마다 리셋되는 전략. 그리고 밀린 자들 — 이정훈의 28년이 데이터로 변환되지 않은 채 공장 밖으로 나왔고, 김수진은 AI의 결정을 추인하는 도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읽은 자들도 있었다 — 박지훈은 미중 AI 경쟁의 틈새를 찾아냈고, 최영석은 IRA의 신호를 18개월 먼저 읽었다.
마지막 부에서 진단을 처방으로 전환했다. 공급망 대전환의 좌표를 설정하고, 불가결 노드의 다섯 조건으로 한국을 점수 매기고, 실행 전략을 제시했다.
이 모든 여정의 끝에, 하나의 역설이 남았다.
3. 불가결의 역설
한국의 기업들은 제도적 느림에도 불구하고 불가결하다. SK하이닉스의 HBM 없이는 엔비디아의 AI 가속기가 나오지 않고, 삼성의 메모리 없이는 세계의 데이터센터가 작동하지 않는다. LG에너지솔루션의 폴란드 공장 없이는 폭스바겐의 전기차가 굴러가지 않는다. 한국은 느린 제도, 줄어드는 인구, 5년마다 리셋되는 전략에도 불구하고 — 세계 공급망의 핵심 노드에 서 있다.
이것은 기업의 힘인가, 제도의 실패인가. 아니면, 제도가 느리기 때문에 기업이 불가결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이 질문은 5권 전체를 관통한다.
일곱 개의 거울이 보여준 답은 단순하지 않다. 대만의 TSMC는 국가 전략과 기업 역량이 정렬된 결과였다. 모리스 창이 TSMC를 세운 것은 개인의 천재성이지만, 대만 정부가 신주과학공원을 설계하고, 세제 혜택을 제공하고, 미국과의 안보 관계를 TSMC의 방패로 전환한 것은 국가의 설계였다. 이스라엘의 8200부대가 사이버보안 유니콘을 양산하는 것도, 군사 조직이 기술 인큐베이터로 기능하도록 제도가 설계됐기 때문이다. 싱가포르가 홍콩의 붕괴를 4년 만에 수조 달러의 자본 유입으로 전환한 것은, 규제 프레임워크를 48시간 안에 수정할 수 있는 제도 속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 나라 모두에서 불가결성은 기업과 국가의 합작이었다. 어느 한쪽이 홀로 만든 것이 아니다.
한국의 기업들은 이 제도적 지원 없이 — 때로는 제도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 불가결성을 만들어냈다. AI 기본법이 국회에서 3년 반을 표류하는 동안 SK하이닉스는 HBM3E를 양산했다. 타다가 국회에서 죽는 동안 현대차는 미국에 전기차 공장을 지었다. 반도체 특별법의 핵심 조항이 빠진 채 통과되는 동안 삼성은 평택에 300조 원 규모의 반도체 클러스터를 쌓아 올렸다. 기업이 제도를 우회하며 만들어낸 불가결성이다. 한국 재벌의 의사결정 속도가 국회의 입법 속도를 대신하고 있다 — 이것이 한국형 불가결성의 실체다.
이 구조에는 대가가 따른다. 기업이 국가를 대신할 때, 기업의 이해와 국민의 이해가 일치하지 않는 영역은 방치된다. 삼성이 평택에 반도체 클러스터를 쌓아 올릴 때, 이정훈의 재취업 경로는 설계되지 않았다. SK하이닉스가 HBM3E를 양산할 때, 김수진의 판단력을 새로운 산업으로 연결하는 제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기업의 전략은 기업의 생존을 위해 존재한다. 국민의 전환을 위한 전략은 국가만이 설계할 수 있다.
그러나 우회는 전략이 아니다. 13장에서 보았듯, 재벌이 국가를 대신하는 구조는 한국 경제의 효율이자 동시에 취약성이다. TSMC가 대만 정부의 외교적 방패 위에서 기술 독점을 구축하는 동안, 삼성전자는 스스로 방패를 만들어야 했다. 시안 공장의 유예를 받아낸 것은 한국 외교부만이 아니라, 삼성이 글로벌 NAND 공급의 40퍼센트를 쥐고 있다는 구조적 사실이었다. 기업이 곧 방패인 구조. 이것은 기업이 강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방패를 만들지 못한 결과다.
역설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한국의 불가결성이 기업에만 의존하는 한, 그 불가결성은 기업의 경쟁력이 흔들리는 순간 함께 흔들린다. 삼성 파운드리의 수율이 TSMC를 따라잡지 못하면, 한국의 반도체 불가결성은 HBM 단일 품목에 의존하게 된다. 배터리 3사의 합산 점유율이 36퍼센트에서 15퍼센트로 하락한 궤적이 계속되면, 한국의 두 번째 날개는 접힌다. 기업은 시장에서 이기거나 지지만, 국가의 불가결성은 한 기업의 분기 실적에 달려서는 안 된다. 7장에서 네덜란드가 ASML 하나에 국가적 불가결성을 의존하면서도 그 "스위치"가 워싱턴에 있다는 사실에 씨름하는 것을 보았다. 한국은 네덜란드보다 기업 수는 많지만, 그 기업들을 받치는 제도적 기반은 더 얇다.
그렇다면, 제도가 빨라진다면 어떻게 되는가. 기업의 기술력에 싱가포르의 제도 속도가 결합되고, 이스라엘의 인재 파이프라인이 더해지고, 대만 수준의 국가-기업 정렬이 이뤄진다면 — 한국은 단순히 사이에서 버티는 나라가 아니라, 사이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나라가 된다. 5권이 증명하려 한 것은 이 가능성이다. 리콴유는 아무것도 없는 섬에서 불가결성을 설계했다. 한국은 아무것도 없지 않다. HBM이 있고, 배터리 기술이 있고, K-컬처가 있고, 세계에서 가장 교육받은 인구가 — 줄어들고 있지만 — 있다. 재료는 있다. 설계가 부족한 것이다.
설계란 무엇인가. 추상적인 비전이 아니다. 대만이 TSMC의 세제 혜택을 법제화한 것, 이스라엘이 8200부대 출신의 창업을 국가 안보 전략과 연결한 것, 싱가포르가 홍콩의 국가보안법 시행 6주 만에 패밀리오피스 인가 절차를 간소화한 것 — 이것이 설계다. 기업이 만든 기술적 우위를 제도가 증폭시키고, 그 과실이 밀린 자에게도 닿도록 경로를 여는 것이다. 한국에는 그 경로가 아직 없다. SK하이닉스의 HBM이 만드는 이익은 이천의 클린룸에서 시작해 주주 배당금으로 끝난다. 이정훈의 아산 치킨집까지 도달하는 경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4. 이정훈의 두 번째 겨울
2026년 1월의 시안 공장이 방패의 유효기간을 보여주는 동안, 아산에서는 다른 종류의 시계가 돌고 있었다.
이정훈의 치킨집은 22개월째 영업 중이다. 프랜차이즈 본사가 제시한 3년 손익분기점까지 14개월이 남았지만, 월 순이익 150만 원으로는 그 분기점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정훈도 안다. 퇴직금 2억 4,000만 원 중 절반이 투자됐고, 대출 5,000만 원의 이자가 매달 나간다. 딸의 사교육비 80만 원은 줄이지 않았다. "최소한 대학은 보내야 하니까." 그가 28년간 다닌 현대차 아산 공장은 도보 15분 거리에 있다. 치킨 튀기는 냄새 사이로, 가끔 공장의 프레스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예전에는 일상이었다. 이제는 상실의 리듬이다.
이정훈에게 일어난 일은 개인의 불운이 아니다. 14장에서 보았듯, 이것은 한국판 displacement의 구조적 연쇄다. 제조업 중간관리자가 AI에 의해 조기 퇴직한다. 퇴직금으로 자영업을 시작한다. 플랫폼에 종속된 수익 구조 안에서 2~3년 내에 폐업한다. 자산이 소진되는 동안에도 자녀의 사교육비는 계속 나간다. 한 세대의 밀림이 다음 세대의 밀림을 낳는다. 2024년 자영업 폐업 100만 건, 치킨집 3년 생존율 45.4퍼센트 — 이정훈은 통계의 한 점이다.
그런데 이정훈에게는 하나의 선택지가 남아 있다.
현대차 시절 동료였던 박상호(51세)가 연락을 해왔다. 박상호는 같은 생산기술부 출신으로, 2년 먼저 퇴직한 뒤 베트남 하이퐁의 한국계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공정 기술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월급은 한국 시절의 60퍼센트지만, 생활비가 3분의 1이라 실질 소득은 나쁘지 않다. 한국에서 "시대에 뒤처진" 암묵지가, 자동화 이전 단계의 베트남 공장에서는 여전히 가치가 있다. 소리로 금형 상태를 판단하고, 냄새로 윤활유 이상을 감지하는 28년의 감각 — 한국의 AI가 데이터로 흡수한 바로 그 능력이, 아직 AI가 도달하지 않은 공장에서는 사람에게서만 나온다.
박상호의 제안은 단순하다. "형님, 여기서는 아직 형님이 필요해요."
그 말에는 5권 전체의 논리가 응축되어 있다. 불가결성은 절대적이지 않다.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ASML의 EUV 노광기가 세계 유일의 기술인 것처럼, 이정훈의 암묵지도 특정 맥락에서는 대체 불가능하다. 한국에서는 AI가 그 자리를 차지했지만, 베트남에서는 아직 사람이 필요하다. 불가결성은 장소를 바꾸면 되살아날 수 있다. 다만, 그 이동에는 비용이 따른다.
이정훈은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딸을 두고 갈 수 없다. 치킨집을 정리하면 투자금의 절반 이상을 잃는다. 가면 한국의 사회안전망 — 그나마 남아 있는 — 에서 벗어난다. 가지 않으면 3년 손익분기 미달로 폐업 후 자산이 0에 수렴한다.
이것은 이정훈 개인의 딜레마가 아니다. 한국의 밀린 자 수백만 명이 서 있는 갈림길의 축소판이다. 8장에서 인도네시아의 바그스 수토모가 니켈 광산에서 자율주행 덤프트럭에 자리를 내준 것을 보았다. 10장에서 일본의 고독사 76,000명이 경제 기적의 그림자라는 것을 보았다. 밀린 자는 한국에만 있지 않다. 그러나 한국의 밀린 자가 직면하는 속도 — AI가 증기 기관보다 빠르다는 사실 — 는 역사상 전례가 없다.
그리고 이정훈의 딜레마에는 5권의 핵심 구조가 압축되어 있다. 베트남으로 가는 것은 한국의 "사이" 전략을 개인의 수준에서 실행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자동화된 기술이 아직 자동화되지 않은 곳에서 가치를 찾는 것 — 이것은 3장에서 리콴유가 말레이시아에서 쫓겨난 뒤 싱가포르를 세계가 필요로 하는 장소로 만든 논리와 같다. 다만 리콴유에게는 국가가 있었고, 이정훈에게는 치킨집 한 채와 딸의 사교육비가 있을 뿐이다.
5. 김수진의 모니터
김수진의 국민은행 강남지점에서는 다른 종류의 변화가 진행 중이었다.
2025년 하반기, 은행은 AI 심사 시스템 3.0을 도입했다. 2.0과의 차이는 결정적이다. 2.0은 "권고"를 내렸다 — 심사역이 최종 결재했다. 3.0은 소액 기업대출의 80퍼센트를 자동 승인한다. 심사역의 서명이 필요 없다. 김수진의 팀에 남은 심사역은 이제 그녀 혼자다. 다른 한 명은 디지털뱅킹부로 이동했다. 업무의 대부분은 AI가 자동 승인하지 않는 20퍼센트의 "예외 건"을 처리하는 것이다. 예외 건이란, AI가 판단하지 못한 건이 아니라 AI의 신뢰도 점수가 임계값에 미달한 건이다. 김수진은 AI가 확신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 확신해주는 역할을 맡게 됐다.
그녀가 20년간 쌓은 능력 — 서류 뒤에 있는 "사람"을 읽는 것 — 은 이제 필요하지 않다. AI 3.0은 재무제표뿐 아니라 사업자의 카드 매출 추이, 온라인 리뷰, 업종별 폐업률 데이터까지 통합 분석한다. 사장의 눈빛을 읽는 것은 데이터에 포함되지 않지만, 은행은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14장에서 보았던 그 식자재 납품업체 — 김수진이 AI의 거절을 뒤집고 통과시켜 3년 뒤 코스닥에 상장한 그 기업 — 는 이제 시스템 안에서 "심사 기준 일탈 후 우연히 성공한 사례"로 분류되어 있다. 그녀의 판단은 데이터가 아니었으므로, 기록되지 않았다.
김수진에게도 선택지가 있다.
핀테크 스타트업 하나가 그녀에게 제안을 했다. AI 신용평가가 거절한 기업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대안 금융 플랫폼이다. AI가 "아니오"라고 한 곳에서, 인간 심사역의 "그러나"가 가치를 만드는 모델. 기존 은행에서는 AI의 도장이 되어가는 그녀의 판단력이, 이 플랫폼에서는 핵심 자산이 된다. 보수는 불확실하고 안정성은 떨어지지만,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는 다시 명확해진다.
그녀 역시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20년간 다닌 은행을 떠나는 것은, 이정훈이 28년간 다닌 공장을 떠난 것과 같은 무게를 가진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정훈은 밀려났고 김수진은 아직 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직 자리에 있지만 역할이 사라진 상태 — 대체가 아닌 무용화. 그것이 더 잔인한 형태의 밀림인지는, 김수진 자신도 모른다.
이정훈과 김수진의 이야기는 대칭적이다. 이정훈은 몸의 기술을 가진 사람이었고, 김수진은 판단의 기술을 가진 사람이었다. AI는 둘 다를 흡수했다. 이정훈의 손끝 감각은 머신 비전 카메라로, 김수진의 신용 판단은 통합 데이터 분석으로 변환됐다. 그 변환 과정에서 두 사람이 잃은 것은 직업만이 아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에 대한 답이다.
6. 국가의 전략, 개인의 전략
이정훈과 김수진의 딜레마는 5권의 핵심 질문을 개인의 수준으로 번역한 것이다.
5권 내내 우리는 물었다.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남는가. 한자동맹의 상인도, 스위스의 은행가도, 리콴유도 이 질문에 답해야 했다. 일곱 개의 거울 속 국가들도 각자의 답을 내놓았다. 대만은 기술 집중으로, 이스라엘은 안보-혁신 순환으로, 싱가포르는 제도 속도로, 네덜란드는 기술 병목으로. 한국은 기업의 불가결성으로 버텨왔지만, 그 불가결성의 과실이 이정훈과 김수진에게는 닿지 않았다. SK하이닉스의 HBM이 엔비디아의 심장에 실리는 동안, 이정훈은 치킨을 튀기고 있었다. 삼성이 평택에 300조 원을 쌓아 올리는 동안, 김수진은 AI의 결정에 도장을 찍고 있었다. 국가의 불가결성과 개인의 불가결성 사이에 놓인 거리 — 이것이 5권이 남기는 가장 무거운 질문이다.
시리즈의 핵심 공식이 다시 돌아온다. 기술이 씨앗이라면 자본은 비료이고, 사회 불안은 폭풍이며, 제도 재설계는 방파제다. 씨앗이 빠르게 자랄수록 폭풍도 빠르게 온다 — 그리고 방파제가 준비되지 않은 나라는 수확 직전에 쓸려 나간다. 5권은 이 공식을 국가 단위로 적용했다. 방파제에 빨리 도달하는 나라가 살아남고, 늦게 도달하는 나라가 밀린다. 일곱 개의 거울이 그 증거였다.
그러나 공식을 읽는 것은 국가만의 몫이 아니다. 개인도 이 공식 안에서 살아간다. 이정훈은 공식의 세 번째 단계에서 밀렸고, 박지훈은 첫 번째 단계에서 네 번째를 내다보며 움직였다. 야엘 샤피르는 국가가 설계한 시스템 덕분에 읽을 수 있었고, 바그스 수토모는 국가의 시스템이 닿지 않는 곳에서 밀렸다. 같은 공식이 국가와 개인 모두에게 작동한다. 차이는 규모가 아니라 읽는 능력에 있다.
국가가 공식을 읽으면 제도를 재설계한다. 개인이 공식을 읽으면 자신의 좌표를 재설정한다. 읽지 못하면, 국가든 개인이든, 밀린다.
2권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우리는 물었다. 미중 두 거인의 사이에서 제3의 플레이어로 살아남는 나라가 있을 것이다, 그 나라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5권은 7개국의 거울에서 답을 찾았다. 한국은 사이에서 버틸 수 있다 — 기업의 불가결성이 방패가 되는 한. 그러나 그 방패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도 시안 공장이 보여주었다. 방패의 유효기간은 제도가 결정한다.
7. 사이에서 읽는다
이정훈은 아산에서 치킨을 튀기며, 베트남행 비행기 표를 검색하고 있다. 김수진은 강남의 사무실에서 AI 3.0의 예외 건을 처리하며, 핀테크 스타트업의 제안서를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두 사람 모두 공식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기술 혁신이 자본을 집중시키고, 집중된 자본이 그들을 밀어내고 있다. 제도 재설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19세기 영국의 공장법이 산업혁명 시작 후 70년이 지나서야 온 것처럼, 한국판 공장법은 표류 중이다.
그들이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은 70년이 아니다. AI는 증기 기관보다 빠르다. 랭커셔 수직공의 밀림에는 30년이 걸렸다. 이정훈의 밀림에는 3년이 걸리지 않았다. 김수진의 무용화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공식의 세 번째 단계에서 네 번째 단계로의 이행이 가속되지 않으면, 밀린 자의 수는 늘어만 간다.
이 책의 제목은 "사이의 전략"이다. 그 전략은 국가만의 것이 아니다. 이정훈에게도, 김수진에게도,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도 사이가 있다. 현재의 자리와 다음 자리 사이. 알고 있는 것과 알아야 하는 것 사이. 밀리는 것과 읽는 것 사이. 시안 공장의 클린룸과 아산의 치킨집 사이. 국가의 불가결성과 개인의 무용화 사이. 한국이라는 나라는 이 모든 사이 위에 서 있다.
밀린 자와 읽은 자의 차이는 능력의 차이만이 아니었다. 구조의 차이였고, 정보의 차이였으며, 때로는 운의 차이였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공식을 모르는 사람은 공식에 의해 밀린다. 공식을 아는 사람은 — 적어도 — 어디서 서야 할지를 선택할 수 있다.
이정훈이 베트남으로 갈지, 아산에 남을지는 아직 모른다. 김수진이 핀테크로 옮길지, 은행에 남을지도. 그러나 그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것 —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 공식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읽는 것 — 이 읽는다는 것의 시작이다.
5권은 국가의 전략을 다뤘다. 불가결 노드가 되기 위해 국가가 무엇을 설계해야 하는가. 한자동맹에서 ASML까지, 역사는 하나의 법칙을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대체 불가능한 위치를 차지한 자가 살아남는다. 그러나 그 법칙은 국가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개인에게도 같은 질문이 돌아온다. 당신은 대체 불가능한가. 당신의 28년은 데이터로 변환될 수 있는가. 변환된다면 당신에게 무엇이 남는가.
이정훈의 딸은 올해 중학교 3학년이 된다. 그녀에게 국가 전략은 추상이다. 사교육비 80만 원은 현실이다. 대학에 갈 것인가. 간다면 무엇을 배울 것인가. 배운 것이 AI에 의해 자동화되는 세계에서, 어떤 능력이 가치를 유지하는가. 이정훈이 아산에서 직면하는 질문과, 그의 딸이 교실에서 직면할 질문은 같은 공식의 다른 단계에 있다.
국가의 전략에서 개인의 전략으로. 5권에서 우리는 국가가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물었다. 6권에서는 개인이 사이에서 어떻게 읽는지를 묻는다. 공식을 아는 개인은 공식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제도가 재설계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밀리지 않기 위해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
이 전환이 6권의 출발점이다.
시안의 클린룸은 오늘 밤도 항온 22도를 유지하고 있다. 아산의 치킨집은 밤 10시에 문을 닫는다. 강남의 은행 창구에서는 AI 3.0이 자정에도 심사를 처리한다. 세 공간은 서로 다른 시간 위에 놓여 있지만, 같은 공식 안에 있다. 시안의 클린룸에서 씨앗이 자라고, 아산의 치킨집에서 폭풍이 지나가고, 강남의 은행 창구에서 방파제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난다. 공식은 멈추지 않는다.
6권 『읽은 자의 시간』은 이정훈의 선택으로 시작한다.
에필로그 끝 — 리서치 소스: C-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