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산에서 온 남자
2024년 3월 15일 금요일, 충남 아산시 배방읍. 현대자동차 아산 공장 정문 앞에서 이정훈(53세)이 28년간 쓰던 사원증을 반납했다. 1996년 인하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입사한 해, 그는 생산라인에서 가장 어린 사원이었다. 퇴직하는 날, 그는 생산기술부에서 가장 나이 많은 부장이었다.
이정훈의 경력은 손끝에 있었다. 라인에서 나는 소리만으로 프레스 금형의 정렬 상태를 판단했고, 부품 표면의 미세한 광택 차이로 도장 불량을 잡아냈다. 그가 부장이 된 것은 불량률을 0.3퍼센트에서 0.09퍼센트로 낮춘 공정 개선 프로젝트 때문이었다. 20여 명의 팀원들이 그를 "부장님"이 아니라 "형님"이라 불렀다. 점심은 늘 구내식당에서, 저녁은 때때로 아산 신도시 삼겹살집에서 팀원들과 함께했다. 주말에는 초등학생 딸과 배드민턴을 쳤다.
그 일상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2023년 1월이었다. 새 공장장이 부임하면서 AI 기반 품질 예측 시스템 도입을 발표했다. 머신 비전 카메라가 생산라인 위에 설치됐고, IoT 센서가 설비 가동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했다. 이정훈은 처음에 그것이 보조 도구라고 생각했다. 28년간 쌓은 소리, 냄새, 촉각의 감각을 AI가 대체할 수 없다고 믿었다.
9개월 후, 불량률은 더 낮아졌다. AI가 해냈다. 이정훈 팀의 인원은 필요 없어졌다. 회사는 그것을 "밀림"이라 부르지 않았다. "역할 재조정"이라고 했다. 그에게 주어진 새 직함은 "AI 시스템 모니터링 감독"이었다 — 하루 종일 모니터를 보며 AI가 이미 처리한 결과를 확인하는 일. 실질 업무는 그가 28년간 해온 일의 5퍼센트에 불과했다.
희망퇴직 패키지가 나왔다. 퇴직금 2억 4,000만 원 — 약 17만 4,000달러. 이정훈은 3일간 고민한 뒤 수락했다. 그 돈의 절반과 대출 5,000만 원으로 치킨 프랜차이즈를 열었다. 2025년 현재, 월 순이익은 150만 원이다. 최저시급으로 하루 6시간을 일하는 알바보다 적다.
이정훈은 분노하지 않는다. 그것이 가장 슬픈 부분이다. 그는 자신이 "시대에 뒤처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딸에게는 "아빠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세상이 바뀐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그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를 설득하지 못한다. 그가 가장 힘든 것은 무능함의 감각이 아니다. 무용함의 감각이다. AI가 틀릴 때 자신이 잡아낼 수 없다는 것 — 자신의 28년이 데이터로 변환되지 않은 채 공장 밖으로 나왔다는 것.
1장에서 한자동맹의 독점이 기술 혁신에 의해 우회되는 패턴을 보았다. 네덜란드 상인이 선상 염장 기술로 한자의 청어 독점을 깨뜨렸을 때, 한자의 숙련 노동자들은 쓸모를 잃었다. 이정훈은 자신이 그 숙련 노동자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라쿠스가 실패한 이유를 아무도 그에게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
2. 기계가 배운 것
이정훈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이 네 사람이 통계적 대표 표본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에서 반복되는 패턴 — 기술 전환, 자본 이동, 개인의 표류 — 은 거시 데이터가 보여주는 구조와 정확히 일치한다. 한국 제조업 전체가 같은 공식 위에 서 있다.
한국 제조업 고용은 2016년 467만 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장기 하강 국면에 접어들었다. 2025년 2월 기준 438만 6,000명. 전체 취업자 중 비중은 2000년 20.4퍼센트에서 15퍼센트로 떨어졌다. 제조업 고용보험 가입자는 6개월 연속 감소세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수치는 빙산의 수면 위에 불과하다.
더 조용한 붕괴가 진행 중이다. 공정관리자, 품질팀장, 생산계획 담당 과장 — 현장과 경영진 사이를 잇는 중간관리자층의 소멸이다. AI가 가장 먼저, 가장 효율적으로 대체하는 영역은 이 사람들의 업무와 정확히 겹친다.
공정관리부터 보자. 경험 많은 공정팀장이 설비 가동률, 불량 발생 패턴, 작업자 숙련도를 종합 판단하던 일을 실시간 IoT 센서 데이터와 머신러닝 기반 이상탐지 시스템이 대신한다. 예지보전 — 기계가 고장나기 전에 예측하고 정비하는 기술 — 이 공정팀장의 "감"을 데이터로 대체했다. 품질검사도 마찬가지다. 통계적 공정관리 데이터를 해석하고 협력사 품질을 지도하던 담당자의 자리에 머신 비전 카메라가 들어섰다. 삼성SDS 스마트팩토리 사례에서 자동차 부품 제조사는 LOT 추적부터 협력사 출하 품질, 검사 정보까지 AI가 통합 관리한다. 생산계획은 더 빠르게 바뀌었다. 영업팀 수주 데이터, 재고, 설비 여력을 수작업으로 조율하던 과장의 업무를 클라우드 기반 APS — 고급 생산계획 시스템 — 가 수분 내에 처리해 현장 단말에 자동 배포한다.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반도체 생산의 100퍼센트를 AI 팩토리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했다. 정부는 AI 접목 스마트 제조 현장을 2024년 26개에서 2030년 100개 이상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OECD는 한국 현행 일자리의 38.8퍼센트가 70퍼센트 이상 자동화 위험에 처해 있다고 분석했다. 저숙련 제조업 고용인원은 향후 10년간 약 10.2퍼센트 감축될 전망이다.
그런데 "저숙련"이라는 분류는 오해를 낳는다. 이정훈이 28년간 축적한 암묵지 — 소리로 판단하는 금형 상태, 냄새로 감지하는 윤활유 이상, 촉각으로 읽는 부품 표면의 결 — 는 학력 기준으로 "저숙련"에 분류되지만, 그 판단의 복잡도는 결코 낮지 않다. AI는 바로 그 암묵지를 데이터로 변환하여 흡수한다. 3장에서 리콴유가 설계한 불가결성의 네 번째 조건 — 인적 자본의 재생산 — 을 보았다. 이정훈의 28년이 데이터로 변환되지 않은 채 공장 밖으로 나왔다는 것은, 인적 자본이 재생산되지 않고 폐기되었다는 뜻이다.
1권에서 랭커셔 수직공들이 손기술을 방직기계에 빼앗긴 과정을 따라갔다. 수직공은 기계가 자신의 손기술을 복제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늘날 공장장은 AI가 자신의 판단력을 복제한다는 사실을 목격한다. 차이는 규모와 속도뿐이다. 수직공의 밀림에는 30년이 걸렸다. 이정훈의 밀림에는 3년이 걸리지 않았다. AI는 증기 기관보다 빠르다.
3. 도장 찍는 존재
김수진(44세)은 국민은행 강남지점 기업금융팀 차장이다. 2004년 입행, 20년 경력의 대출 심사역.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CFA 1차를 통과한 수재였다. 그녀가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능력은 서류 뒤에 있는 "사람"을 읽는 것이다. 재무제표 숫자가 좋아도 사장의 눈빛이 불안하면 보류했고, 숫자가 나빠도 사업 히스토리가 탄탄하면 통과시켰다. 2018년, 그녀가 통과시킨 한 작은 식자재 납품업체는 3년 후 코스닥에 상장했다. 그 순간이 그녀가 자신의 직업에 가장 큰 의미를 느낀 때다.
환어음 중개인이 은행 심사역에게 자리를 내줬고, 심사역은 신용평가 알고리즘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자본 배분의 게이트키퍼는 항상 기술 혁신에 의해 대체됐다. 김수진은 그 파수꾼의 마지막 세대다.
2022년, 은행이 AI 신용평가 시스템 2.0을 도입했다. 처음에는 참고 자료였다. 시스템이 "승인 권고"를 내면 김수진이 최종 결재했다. 그러나 점차 시스템의 권고를 뒤집는 것이 어려워졌다. AI가 "거절 권고"를 내린 건에 대해 그녀가 승인하면, 이후 그 기업이 연체될 경우 "심사 기준 일탈"로 기록됐다.
2023년, 성과 평가 기준이 바뀌었다. AI 권고와 심사역의 결정 일치율이 평가 항목에 들어갔다. 일치율 85퍼센트 이상이면 "우수", 80퍼센트 미만이면 "개선 필요". 김수진은 자신이 AI와 얼마나 다르게 판단하는지를 스스로 측정하게 됐다. 그리고 그 "다름"이 점수로 깎이기 시작했다.
2025년, 그녀의 팀에서 심사역이 4명에서 2명으로 줄었다. 퇴직자를 충원하지 않은 것이다. "자연 감소"라고 했다. 김수진은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가 불분명해졌다. 이정훈은 밀려났다. 김수진은 밀려나지 않았다 — 대신 무용해졌다. 대체가 아닌 무용화. 아직 자리에 있지만 역할이 사라진 상태. 그녀는 AI의 결정을 추인하는 도장이 됐다.
그녀가 가장 두려운 것은 자신이 틀렸을 때가 아니다. 자신이 옳았는데 그것을 증명할 수 없을 때다. AI가 거절한 기업에 그녀가 대출을 내줬는데 그 기업이 성장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심사 기준 일탈 후 운 좋게 성공한 사례"로 기록될 뿐, 그녀의 판단력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숫자로 보자. 은행 점포는 5년간 1,189개가 폐쇄됐다. 5대 시중은행 합산 점포는 2025년 말 기준 3,748개 — 6년 연속 감소다. 2024년 한 해에만 110개가 사라졌다. 4대 시중은행 임직원은 3년 새 1,478명, 2.7퍼센트가 줄었다. 절대 수치는 크지 않아 보이지만, 희망퇴직과 신규 채용 동결을 감안하면 실질적 감소폭은 훨씬 크다.
인터넷전문은행이 이 압력을 가속한다. 케이뱅크의 비용수익비율은 29퍼센트 — 업계 최저이자 유일한 20퍼센트대다. 카카오뱅크는 고객 2,670만 명을 직원 수천 명으로 관리한다. 시중은행 지점 한 곳의 평균 인력이 15~20명이고, 그런 지점이 수천 개인 점을 생각하면, 효율성 격차는 구조적이다. 2024년 3개 인터넷전문은행이 모두 사상 최대 이익을 달성했다. 전통 은행이 이 격차에 대응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더 많은 점포를 닫고, 더 많은 인력을 AI로 대체하는 것.
신한은행은 AI 뱅커가 탑재된 150여 대의 디지털 데스크를 영업점에 배치했고, AI만으로 운영하는 무인점포 "AI 브랜치"를 열어 64개 창구 업무를 제공한다. 금융당국은 2024년 금융권 생성형 AI 활용 지원 방안을 발표하며 인터넷망 상용 AI 서비스 허용, 금융 특화 AI 학습 데이터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콜센터와 창구 상담 직군의 추가 감소가 예고되어 있다.
40년 전의 게이트키퍼가 지금 사라지고 있다.
4. 치킨집이라는 종착역
이정훈의 치킨집으로 돌아가자.
한국의 자영업자 비율은 23.5퍼센트다. OECD 평균 약 15퍼센트, 미국과 일본의 두 배 이상. 2025년 4월 기준 자영업자 561만 5,000명. 이 숫자 자체가 구조적 과잉이다. 그리고 그 과잉이 해소되는 방식은 창업이 아니라 폐업이다.
2024년, 한국 자영업 폐업이 사상 최초로 연간 100만 건을 돌파했다. 1,008,282건 — 1995년 통계 작성 이래 최고치다. 폐업률 9.04퍼센트, 2020년 이후 최고. 자영업자의 44퍼센트가 "3년 내 폐업을 고려 중"이라고 답했다. 소매업과 음식업이 전체 폐업의 45퍼센트를 차지한다.
생존율 통계는 더 냉혹하다. 창업 3년 생존율 53.8퍼센트, 5년 생존율 39.6퍼센트. 음식점 평균 존속기간은 5년 1개월 — 전 산업 평균 8년 4개월보다 3년 이상 짧다. 치킨집은 더 나쁘다. 3년 생존율 45.4퍼센트, 평균 창업비용 9,394만 원 — 약 6만 8,000달러. 1억 원 가까이 투자해서, 절반 가까이가 3년 안에 문을 닫는다.
패턴은 이렇다. 제조업이나 금융에서 명예퇴직한 중산층 남성이 퇴직금과 대출로 프랜차이즈를 연다. 치킨집, 카페, 편의점. 평균 1억 원 전후. 2~3년 안에 폐업한다.
퇴직금이 소진된다. 30년간 직장에서 축적한 자산이 증발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3년이 채 되지 않는다. 부동산을 제외한 금융 자산은 0에 수렴한다. 한국경제 신문은 2025년 8월 "퇴직하면 치킨집이나 해야지 — 이제는 안 통한다"고 보도했다. 최후의 안전망마저 작동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
이정훈이 바로 그 패턴 위에 서 있다.
플랫폼이 자영업자의 마지막 숨통을 조인다. 치킨집의 배달 플랫폼 매출 비중은 75.7퍼센트다. 매출의 4분의 3이 배달 앱을 거친다. 배달의민족 중개 수수료는 2024년 7월 최대 9.8퍼센트로 인상됐고, 무료였던 포장 주문 수수료도 6.8퍼센트가 부과되기 시작했다. 중개수수료, 배달수수료, 광고수수료를 합치면 매출의 24퍼센트가 플랫폼으로 간다. 이정훈의 치킨집 월 매출이 600만 원이라면, 144만 원이 플랫폼 비용이다. 식자재비와 임대료를 빼면 남는 것이 150만 원인 이유다.
배달의민족 42.6퍼센트, 쿠팡이츠 42.1퍼센트 — 사실상 양강 체제가 유통을 지배한다. 13장에서 재벌의 집중 구조가 한국 경제의 효율과 취약성을 동시에 만든다고 보았다. 플랫폼도 같은 구조다. 알고리즘이 노출을 팔고, 수수료를 거두며, 데이터를 독점한다. 자영업자는 생산을 담당하고 플랫폼은 유통을 통제한다. 생산 수단을 소유하는 것과 유통망을 통제하는 것은 다르다.
로마의 소농이 자신의 토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대규모 노예 농업과의 경쟁에서 패배한 것처럼, 이정훈은 자신의 가게를 가지고 있지만 플랫폼 알고리즘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로마에서 그라쿠스 형제가 토지개혁을 시도하고 실패한 것처럼, 한국 정부는 수수료 상한제를 논의하지만 입법은 미완이다. 생산 수단의 소유 여부와 관계없이, 유통망을 통제하는 자가 경제적 주권을 갖는다.
이정훈에게 다른 길이 있었는가. 28년간 축적한 프레스 공정의 감각 — 소리로 판단하는 금형 상태, 냄새로 감지하는 윤활유 이상 — 을 AI 시스템의 학습 데이터로 번역하는 직무가 존재했다면. 아산이 아니라 판교의 제조 AI 스타트업에서 "도메인 전문가"로 합류하는 경로가 있었다면. 그러나 그 길은 이정훈이 퇴직한 2024년 3월에 존재하지 않았다. 고용복지플러스센터 3층의 "파이썬 빅데이터 과정"만이 유일하게 열려 있는 문이었다. 그 문이 이정훈을 어디로 데려갈 수 있었는지는, 아무도 진지하게 설계하지 않았다.
5. 스펙이라는 역설
이정훈의 딸은 중학교 2학년이다. 월 사교육비 80만 원. 이정훈의 치킨집 월 순이익 150만 원의 절반이 넘는다. 그래도 줄일 수 없다고 한다. "최소한 대학은 보내야 하니까."
숫자가 그 믿음의 이면을 보여준다.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76퍼센트 이상 — OECD 최고 수준이다. 4년제 대학 및 전문대학 400개 이상을 보유한 나라다. 사교육비 총액은 2024년 29조 2,000억 원 — 약 212억 달러. 4년 연속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학생 수는 줄고 있는데 사교육비는 늘고 있다. 학생 1인당 월평균 47만 4,000원. 소득 800만 원 이상 가구는 월 67만 6,000원을 쓰고, 300만 원 미만 가구는 20만 5,000원을 쓴다. OECD 전체 교육 재원 중 민간 부담 비율에서 한국은 37.2퍼센트로 1위다. 평균 16.1퍼센트의 두 배 이상을 가계가 부담한다.
그런데 고졸 실업률이 5.5퍼센트이고, 대졸 실업률이 6.7퍼센트다. 학력이 높을수록 실업률이 높다. 청년 비경제활동인구 중 대졸자 비중은 2015년 19.4퍼센트에서 2024년 23.7퍼센트로 올랐다. 400개가 넘는 대학이 매년 고학력자를 배출하지만, 경제는 그만큼의 고학력 일자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대졸 최저임금 알바"는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시스템의 필연적 산물이다.
한국 부모의 교육 투자 논리는 명확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안정적 중산층. 수능 준비 3~4년에 재수와 삼수를 포함하면 더 길어진다. 대학 4년, 취업 준비 2~3년 — 총 9~11년의 시간과 사교육비, 대학 등록금, 취업 준비 비용을 합치면 1억~3억 원 — 약 7만~22만 달러의 투자다. 그 끝에서 입사한 직종이 5~10년 내 AI에 의해 대체될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OECD는 한국 일자리의 약 50퍼센트가 AI에 노출되어 있다고 분석했다. 그중 대체 위험이 높은 직종에 사무직, 판매직, 장치기계조립, 단순노무직이 포함된다. 한국 대졸자가 가장 많이 취업하는 직군들이다.
아이러니가 한 겹 더 있다. 정부와 사교육 시장은 "AI 시대를 대비하라"며 코딩 교육에 투자하고 있다. 한국 스마트 교육 시장은 97억 6,000만 달러 — 약 13조 원 규모다. 정부는 2025년까지 디지털 교육 인프라에 1조 원 이상을 투입한다. 그러나 AI는 바로 그 코딩 업무를 대체하는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주니어 개발자가 수행하는 보일러플레이트 코드 작성, 간단한 모듈 개발, 기초 버그 수정은 이미 자동화되고 있다. "코딩을 배우면 미래가 보장된다"는 메시지로 수백만 원을 쓴 가정들은, 그 미래가 AI에 의해 흡수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5장에서 이스라엘의 8200부대가 18세 청년에게 실전 AI 역량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 이스라엘 부모는 자녀에게 "오늘 선생님께 어떤 질문을 했니?"라고 묻는다. 한국 부모는 "시험 몇 점 맞았니?"라고 묻는다. 이스라엘이 실전 역량을, 싱가포르가 시스템 설계를 택했다면, 한국은 서열 내 위치 확보를 택했다. 목표는 SKY —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 입학이고, 출구는 대기업 공채 또는 공무원 시험이다. 그 두 경로 모두 AI가 가장 먼저 자동화할 직군을 포함하고 있다. AI 시대에 서열 내 위치 확보는 가장 빠르게 가치가 하락하는 자산이다.
6. 같은 시대, 다른 선택
밀린 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박지훈(36세)은 AI 스타트업 세컨드브레인의 대표이사다. KAIST 전산학부 출신, 네이버 AI 연구소 3년을 거쳐 창업했다. 그가 읽은 것은 단순한 시장 기회가 아니었다. 2021년 미국 스탠퍼드에서 GPT-3의 API를 가지고 놀다가 한 가지를 발견했다 — 대형 언어 모델은 인터넷에 공개된 것에는 강하지만, 특정 조직의 내부 지식에는 무능하다. 구글 검색보다 똑똑하지만 회사 내부 데이터베이스보다는 멍청하다.
미국 AI는 영어 중심이고, 중국 AI는 중국어 중심이다. 한국어와 일본어와 인도네시아어 기업의 내부 지식을 처리하는 시스템은 어느 쪽도 우선순위가 아니다. 그 언어적, 문화적 틈새가 그의 공간이다. 2024년 기준 고객사 420개, ARR 38억 원 — 약 276만 달러. 한국 고객이 전체의 71퍼센트이지만, 수익 성장의 80퍼센트는 일본과 동남아에서 나온다. 그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국내 대기업 납품 의존"이다. 삼성이나 SK에 납품하면 처음엔 매력적이지만, 대기업 하청이 되는 순간 독자적 글로벌 확장의 동력을 잃는다.
아이러니는, 박지훈이 만드는 것이 이정훈 같은 사람들의 암묵지를 구조화하는 도구라는 점이다. 일본 중견 제조업체 직원이 "우리 회사 20년치 기술 노하우가 이제 검색된다"고 말했을 때, 박지훈은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것이 실현되고 있음을 느꼈다. 이정훈의 28년 경험이 세컨드브레인 같은 시스템에 저장됐다면, AI는 그를 대체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혹은, 그의 경험을 학습해 훨씬 더 완전하게 대체했을 수도 있다. 그 경계를 누가 관리할 것인가.
최영석(49세)은 배터리 소재 기업 EC머티리얼스의 대표이사다. 그가 읽은 것은 지정학적 신호였다. IRA — 인플레이션감축법 — 가 미국 의회를 통과하기 18개월 전, 그는 이미 중국 의존도를 낮추는 공급망 재설계에 착수했다. 중국산 전구체 의존도를 68퍼센트에서 22퍼센트로 줄이는 데 2년이 걸렸다. 11장에서 한국 배터리 기업들이 IRA의 FEOC 규정에 발이 묶인 것을 보았다. 최영석은 그 규정이 오기 전에 움직였다.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리스크의 방향을 먼저 읽은 것이다.
이정훈과 박지훈은 같은 나라, 같은 시대를 산다. 김수진과 최영석도 같은 경제 안에 있다. 차이는 무엇인가. 밀린 자는 기존 구조 안에서 경험을 축적했다. 읽은 자는 구조 자체의 변화를 감지했다. 이정훈이 28년간 쌓은 것은 현재 시스템 안에서의 숙련이었다. 박지훈이 읽은 것은 그 시스템이 바뀌는 방향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개인의 능력 차이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바그스 수토모(38세)는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섬 소로와코의 니켈 광산에서 150톤급 덤프트럭을 몰았다. 월 약 1,200만 루피아 — 약 75만 원. 솔로에서 농사짓는 아버지 소득의 세 배였다. 두 아이의 학비를 댔고, 소로와코에 작은 집을 샀다. "광산이 있는 한,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카마쓰의 자율주행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하울링 팀 70명 중 28명이 계약 종료 통보를 받았다. 바그스는 원격 모니터링 보조로 재배치됐고, 월급은 30퍼센트 줄었다.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인도네시아가 니켈 원광 수출을 금지하고 제련까지 하겠다고 했는데, 왜 자신은 더 가난해졌냐는 것이다. 가공 공장은 중국 기업이 짓고, 숙련 기술자는 중국에서 왔다. 자원의 부가가치가 올라간다는 정부 발표가 소로와코까지는 닿지 않았다.
이정훈, 김수진, 바그스. 세 사람은 서로를 모른다. 한국의 제조업 부장, 한국의 은행 차장, 인도네시아의 광산 운전사. 그러나 셋의 밀림은 같은 공식 위에 있다.
12장에서 한국의 인구 절벽과 규제 경직이 불가결성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한다고 보았다. 밀린 자들의 이야기는 그 위협의 인간적 얼굴이다. 구조를 정리하면 이렇다. 제조업 중간관리자가 조기 퇴직한다. 퇴직금으로 자영업을 시작한다. 플랫폼에 종속된 수익 구조 안에서 2~3년 내에 폐업한다. 자산이 소진되는 동안에도 자녀의 사교육비는 계속 나간다. 고학력 자녀는 졸업 후 은행에 취업하지만, AI가 그 직군을 대체하기 시작한다. 한 세대의 밀림이 다음 세대의 밀림을 낳는다. 이것이 한국판 displacement의 연쇄다.
핵심 공식을 적용하면, 밀린 자들은 공식의 세 번째 단계 — 사회 불안 — 의 구체적 얼굴이다. AI라는 기술 혁신이, 재벌과 플랫폼이라는 자본 집중을 거쳐, 이정훈과 김수진과 바그스에게 도달했다. 네 번째 단계 — 제도 재설계 — 는 아직 오지 않았다. 19세기 영국의 공장법이 산업혁명 시작 후 70년이 지나서야 온 것처럼, 한국판 공장법은 표류 중이다. 배달 플랫폼 수수료 상한제 논의, AI 기본법의 국회 통과 지연, 은행 점포 폐쇄 규제 강화 — 모두 파편적이고, 모두 대증 요법이고, 모두 늦다.
읽은 자는 공식을 아는 사람이다. 밀린 자는 공식이 작동하는 한가운데에서 그것이 공식인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 차이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랭커셔 수직공에게 방직기계를 발명하지 못한 죄를 묻는 것과 같다. 구조가 바뀌는 시대에, 구조를 바꾸는 것은 국가의 몫이다. 그 국가가 제도 재설계에 실패하면, 밀린 자는 계속 밀린다.
이정훈의 치킨집은 오늘도 문을 열었다.
3부는 여기서 멈춘다. 기술의 자리(11장), 제도의 균열(12장), 재벌과 소프트파워의 역설(13장), 그리고 밀린 자들의 얼굴(14장) — 진단은 끝났다. 이제 설계의 시간이다. 한국이 '사이'에서 불가결한 존재로 서기 위해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 4부는 그 처방을 묻는다.
14장 끝 — 리서치 소스: R-19, R-20, R-21, R-22, C-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