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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피니(Hal Finney)는 이메일을 두 번 읽었다.
2008년 10월 31일 금요일 오후,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 그의 홈 오피스는 늘 그렇듯 어수선했다. 모니터 두 대, 키보드 옆에 쌓인 기술 서적, 반쯤 식은 커피. 창밖으로는 남캘리포니아의 건조한 햇살이 유칼립투스 잎을 비추고 있었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6주 전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했다는 사실이 이 동네의 풍경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피니는 프로그래머였다. 정확히 말하면, 프라이버시를 위한 프로그래머. 1990년대 초부터 PGP(Pretty Good Privacy) — 이메일 암호화 소프트웨어 — 의 핵심 개발자로 일했고, 암호학 커뮤니티에서는 잘 알려진 이름이었다. 그는 2004년에 RPoW(Reusable Proofs of Work)라는 시스템을 직접 만든 적도 있었다. 컴퓨터의 연산 능력을 "비용"으로 전환하여 디지털 토큰에 가치를 부여하려는 시도였다. 작동은 했지만, 중앙 서버가 필요했다. 서버가 죽으면 시스템도 죽었다. 사이퍼펑크들이 10년 넘게 부딪혀 온 벽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날 오후, 같은 시각 월가는 혼란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워싱턴에서는 재무장관 폴슨이 법제화된 지 한 달도 안 된 7,000억 달러 규모의 부실자산구제프로그램(TARP)의 효과를 불안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CNN은 실직자 인터뷰를 내보냈고, 월스트리트의 트레이딩 플로어에는 골판지 박스를 든 사람들이 여전히 줄을 잇고 있었다. 금융 시스템이 붕괴하고 있었다.
피니의 모니터에는 그 뉴스가 아니라 이메일 클라이언트가 떠 있었다. 암호학 메일링 리스트(The Cryptography Mailing List)에 새 글이 올라왔다. 발신자는 Satoshi Nakamoto.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제목은 "Bitcoin P2P e-cash paper."
"I've been working on a new electronic cash system that's fully peer-to-peer, with no trusted third party."
신뢰할 수 있는 제3자가 전혀 없는, 완전한 P2P 방식의 전자 화폐. 피니는 첫 문장에서 멈췄다. "trusted third party" — 이 표현이 사이퍼펑크의 언어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은행. 정부. 중앙 서버. 지난 20년간 디지털 화폐를 시도한 모든 프로젝트가 결국 이 "신뢰할 수 있는 제3자"를 제거하지 못해 실패했다.
첨부된 문서는 9페이지였다. 학술 논문치고는 짧았다. 제목: "Bitcoin: A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 참고문헌은 8개. 문체는 절제되어 있었다 — 마케팅도 없고, 과장도 없고, 혁명을 선언하는 어조도 없었다. 마치 엔지니어링 명세서처럼 건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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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링 리스트의 반응은 냉담했다.
첫 번째 답장은 이틀 뒤 제임스 A. 도널드(James A. Donald)가 보냈다. "우리에게 이런 시스템이 매우 필요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제안이 필요한 규모로 확장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정중한 회의론이었다. 다른 응답들도 비슷한 온도였다. 혹자는 에너지 소비 문제를 지적했고, 혹자는 비잔틴 장군 문제(Byzantine Generals Problem)의 해결이 불완전하다고 주장했다.
피로감이 있었다. 사이퍼펑크 커뮤니티는 이미 여러 번의 실패를 겪은 뒤였다.
데이비드 차움(David Chaum)의 DigiCash가 있었다. 1989년에 설립된, 최초의 본격적인 디지털 화폐 회사. 차움은 '은닉 서명(Blind Signature)' 기술로 익명 전자 현금의 이론적 토대를 놓은 천재였지만, DigiCash는 중앙 서버에 의존했다. 서버를 운영하는 회사가 파산하면 — 그리고 1998년에 실제로 파산했다 — 화폐도 함께 사라졌다.
웨이 다이(Wei Dai)의 b-money는 어떠했나. 1998년에 제안된, 분산된 장부와 연산 능력을 통한 화폐 발행 개념. 아이디어는 선구적이었지만 합의 알고리즘을 코드로 구현하지 못해 이론에 머물렀다.
닉 재보(Nick Szabo)의 Bit Gold는 비트코인과 가장 유사한 설계였다. 작업 증명(Proof of Work)을 통해 디지털 금과 같은 희소성을 만들겠다는 구상이었지만, 이중 지불(double spending)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이중 지불. 디지털 화폐의 근본적인 난제였다. 디지털 데이터는 복제할 수 있다. 내가 가진 디지털 화폐 1단위를 A에게 보내고, 동시에 B에게도 보낼 수 있다면 — 같은 돈을 두 번 쓸 수 있다면 — 그것은 화폐가 아니라 파일이다. 기존 해결책은 하나뿐이었다. 모든 거래를 감시하는 중앙 기관을 두는 것. 은행이 바로 그 역할을 한다. 내 계좌에서 돈이 나가면, 은행이 잔고를 차감해서 같은 돈을 다시 쓰지 못하게 막는다.
그런데 사토시의 9페이지는, 은행 없이 이 문제를 풀겠다고 주장했다. 어떻게?
모든 참여자가 같은 장부를 공유한다. 새로운 거래가 발생하면, 네트워크의 참여자들이 그 거래가 유효한지를 검증한다. 검증의 방법은 연산 — 컴퓨터에게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게 하고, 가장 먼저 문제를 푼 참여자가 거래들을 하나의 "블록"으로 묶어 기존 장부에 연결한다. 이 과정에서 보상으로 새로운 비트코인이 발행된다. 장부를 조작하려면 네트워크 전체의 연산 능력 중 과반을 장악해야 하는데, 그 비용이 조작으로 얻는 이익보다 크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비합리적이다.
아담 백(Adam Back)이 1997년에 개발한 Hashcash의 작업 증명 메커니즘. 웨이 다이의 분산 장부 개념. 스콧 스토르네타(Scott Stornetta)와 스튜어트 하버(Stuart Haber)의 타임스탬프 체인. 랠프 머클(Ralph Merkle)의 머클 트리. 사토시의 9페이지는 이 모든 것을 하나로 결합했다. 개별 부품은 이미 존재했다. 아무도 하지 못한 것은 그것들을 하나의 작동하는 시스템으로 조립하는 일이었다.
메일링 리스트의 대부분은 이 차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전에도 다 실패했던 아이디어"라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부품이 이미 존재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새로운 것이 없어 보였으니까. 그러나 레고 블록이 모두 알려진 것이라 해서, 그 블록으로 만든 건축물까지 예측 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토시의 혁신은 부품의 발명이 아니라 조합의 설계에 있었다.
할 피니는 그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첨부된 9페이지를 끝까지 읽었고, 직접 코드를 테스트하겠다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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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페이지의 백서가 올라온 것은 우연히 할로윈이었다. 그러나 그 타이밍에는 우연 이상의 것이 있었다.
6주 전,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했다. 재무장관 폴슨은 의회를 압박해 7,000억 달러 규모의 TARP를 법제화시켰지만, 그 효과는 아직 미지수였다. 연준은 AIG에 850억 달러의 긴급 대출을 실행했다. 납세자의 돈으로 은행을 구제하는 동안, 400만 가구가 집을 잃어가고 있었다. 월스트리트의 은행가들은 보너스를 받았다. 분노가 들끓었다.
6장에서 드러난 것처럼, 2008년의 위기는 겹겹의 실패였다. 게이트키퍼의 실패 — 무디스와 S&P는 쓰레기에 AAA를 붙였다. 모델의 실패 — 가우시안 코퓰라의 상관관계 가정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시스템 자체의 실패 — CDO의 기초자산이 무엇인지 아무도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사토시의 백서는 이 세 가지 실패 모두에 대한 정면 응답이었다.
게이트키퍼가 문을 지키지 않았다면 — 문지기 자체를 없앨 수 있다면? CDO의 기초자산을 아무도 추적할 수 없었다면 — 모든 거래가 공개 원장에 투명하게 기록된다면? 무디스라는 단일 실패 지점(single point of failure)에 시스템 전체가 의존했다면 — 단일 실패 지점이 존재하지 않는 분산 아키텍처라면?
백서의 첫 문장이 "신뢰할 수 있는 제3자에 의존하지 않는 전자 거래 시스템"이었다는 것은, 이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은행, 신용평가사, 규제 당국 — 이 중개자들은 600년간 자본 배분의 중심에 있었다. 메디치의 환어음은 메디치라는 이름에 대한 신뢰 위에서 작동했다. 잉글랜드 은행의 파운드는 왕실의 보증 위에서 작동했다. 2008년의 AAA 등급은 무디스에 대한 신뢰 위에서 작동했다. 그리고 그 신뢰가 배신당했을 때, 시스템 전체가 무너졌다.
사토시는 신뢰를 제거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신뢰의 기반을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판단과 평판 대신, 수학과 암호학 위에 신뢰를 세우겠다는 선언.
비잔틴 장군 문제가 있다. 1982년 컴퓨터 과학자 레슬리 램포트(Leslie Lamport)가 제시한 사고실험이다. 적의 도시를 포위한 비잔틴 제국의 장군들이 있다. 장군들은 산 위에 각각 떨어져 진을 치고 있고, 전령을 통해서만 소통할 수 있다. 공격하려면 전원이 동시에 공격해야 한다 — 일부만 공격하면 패배한다. 문제는 장군들 중 일부가 배신자일 수 있다는 것이다. 거짓 메시지를 보내거나, 합의된 행동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 전령이 적에게 매수되었을 수도 있고, 메시지가 위조되었을 수도 있다.
이 문제는 컴퓨터 네트워크의 근본적인 난제를 비유한 것이었다. 서로를 모르는 참여자들이 중앙 사령부 없이 어떻게 합의에 도달하는가? 금융의 역사에서 이 문제의 답은 항상 같았다 — 중앙 기관을 두는 것. 메디치 은행 본점이 각 지점을 통제했고, 잉글랜드 은행이 금융 시스템의 최종 보증인 역할을 했으며, 3장의 여신심사위원회가 대출의 승인 여부를 결정했다. 중앙 사령부가 있으면 비잔틴 장군 문제는 사라진다. 그러나 중앙 사령부가 부패하면 — 포르티나리처럼, 무디스처럼 — 시스템 전체가 위험에 빠진다.
사토시의 해법은 중앙 사령부를 두지 않으면서도 합의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작업 증명. 메시지를 보내려면 연산이라는 비용을 지불해야 하고, 다수의 정직한 참여자가 가장 많은 연산을 투입한 체인을 "진짜"로 인정한다. 배신자가 거짓 장부를 만들려면 나머지 전체보다 더 많은 연산을 해야 하는데, 그 비용이 이익을 초과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비합리적이 된다.
600년간 인간이 독점해 온 "이 거래가 유효한가"라는 판단이, 처음으로 코드로 이전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메일링 리스트의 암호학자 대부분은 이 순간을 그렇게 읽지 않았다. 그들에게 그것은 또 하나의 기술 제안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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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3일 토요일, 시각 불명.
사토시 나카모토가 비트코인의 첫 번째 블록을 생성했다. 제네시스 블록(Genesis Block). 블록 번호 0.
모든 블록체인에는 출발점이 있다. 체인의 첫 번째 고리. 이 고리는 이전 블록을 참조할 수 없기 때문에 — 이전 블록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 코드에 직접 기록(하드코딩)해야 한다. 사토시는 이 첫 번째 블록의 데이터 영역에 16진수 문자열 하나를 새겨 넣었다.
The Times 03/Jan/2009 Chancellor on brink of second bailout for banks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The Times)의 그날자 1면 헤드라인이었다. 영국 재무장관 알리스터 달링이 은행들을 위한 2차 구제금융을 검토 중이라는 기사. 이 한 줄의 텍스트에는 두 가지 기능이 담겨 있었다.
하나는 기술적인 것이었다. 타임스탬프. 이 블록이 2009년 1월 3일 이전에는 생성될 수 없었음을 증명하는 장치. 과거 날짜로 조작했다면, 그날의 신문 헤드라인을 미리 알 수 없었을 테니까.
다른 하나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Chancellor on brink of second bailout for banks" — 재무장관이 은행들을 위한 2차 구제금융 직전에 있다. 납세자의 돈이 다시 은행으로 흘러가는 그 순간에, 은행이 필요 없는 화폐 시스템의 첫 블록이 생성되었다는 선언. 우연이라고 보기 어려운 배치였다.
제네시스 블록에는 50 BTC의 채굴 보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50 BTC는 코드의 특성상 — 글로벌 UTXO(미사용 거래 출력) 집합에 등록되지 않는 구조적 이유로 — 영원히 사용할 수 없다. 디지털 기념비. 비트코인의 첫 50개는 그렇게 묻혔다.
이후 며칠간, 사토시는 혼자 블록을 생성했다. 블록 1, 블록 2, 블록 3... 일반 데스크톱 컴퓨터의 CPU로 채굴이 가능한 시절이었다. 난이도(Difficulty)는 최솟값인 1. 네트워크에는 사토시 혼자뿐이었다. 어딘가의 방에서, 한 대의 컴퓨터가 10분마다 블록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것이 비트코인의 전부이던 시절이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제네시스 블록과 블록 1 사이의 시간 간격이다. 정상적이라면 약 10분이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6일이 걸렸다. 왜 6일이 비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사토시가 코드를 최종 점검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기다린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제네시스 블록을 여러 번 만들어보고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을 수도 있다. 이 6일의 공백은, 사토시에 관한 수많은 미스터리 중 가장 사소하면서도 상징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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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10일, 할 피니가 트위터에 두 단어를 남겼다.
"Running bitcoin"
역사상 사토시를 제외하고 비트코인 소프트웨어를 실행한 첫 번째 인간의 기록이었다. 산타바바라의 홈 오피스에서, 피니는 비트코인 클라이언트 v0.1을 자신의 컴퓨터에 설치하고 구동시켰다. 윈도우용 GUI — 조잡한 회색 대화상자. CPU 팬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2009년에는 일반 노트북의 CPU로도 비트코인을 채굴할 수 있었다.
이틀 뒤인 1월 12일, 사토시가 피니에게 10 BTC를 보냈다. 블록 170에 기록된 이 거래는 비트코인 네트워크에서 두 사람 사이에 이뤄진 최초의 전송이었다. 화면에는 "Status: 0/unconfirmed"이라는 문구가 떴을 것이다. 몇 분 뒤, 블록에 포함되면서 상태가 바뀌었을 것이다. 확인됨. 10 BTC가 사토시의 주소에서 피니의 주소로 이동했다.
이 거래에는 은행이 없었다. 심사위원회도 없었고, 신용등급도 없었고, 서류도 없었다. 두 대의 컴퓨터, 하나의 프로토콜, 그리고 암호학적 서명. 그것이 전부였다.
속도의 차이가 극적이었다. 3장의 여신심사위원회에서 다섯 명이 2시간 넘게 논쟁한 끝에 680억 원의 흐름을 결정했다. 메디치의 환어음은 피렌체에서 브뤼헤까지 25일이 걸렸다. 잉글랜드 은행의 국채 청약은 12일이 소요되었다. 사토시가 피니에게 10 BTC를 보내는 데 걸린 시간은 약 10분 — 다음 블록이 생성되어 거래가 확인될 때까지의 시간이었다. 600년에 걸쳐 25일에서 2시간으로 단축된 자본 이동의 속도가, 단번에 10분으로 줄어든 것이다.
물론 10 BTC의 가치는 0에 가까웠다. 680억 원과 비교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금액이 아니라 구조였다. 거래가 성립하기 위해 어떤 인간의 승인도 필요하지 않았다는 사실. 이것은 600년 금융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피니는 흥분했다. 그는 사토시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버그를 보고하고 개선점을 제안했다. 메일링 리스트에서 냉소적 반응이 지배적이었을 때, 피니는 거의 유일하게 비트코인의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응답한 사람이었다. 그가 사토시에게 보낸 초기 이메일 중 하나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비트코인이 성공한다면, 각 코인의 가치가 수백만 달러에 이를 수도 있다고.
2009년 초, 비트코인 1개의 가치는 0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격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겠다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같은 해 10월 5일, 'New Liberty Standard'라는 사용자가 최초의 환율을 제시했다. 전기료를 기준으로 산정한 값이었다. 1달러에 1,309.03 BTC. 1 비트코인의 가치는 약 0.08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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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18일, 플로리다의 프로그래머 래즐로 한예츠(Laszlo Hanyecz)가 비트코인 포럼(Bitcointalk)에 글을 올렸다.
"라지 사이즈 피자 2판에 10,000 비트코인을 지불하겠습니다."
나흘 뒤인 5월 22일, 제레미 스터디반트(Jeremy Sturdivant)라는 사용자가 파파존스 피자 두 판을 주문해 한예츠에게 배달시키고, 10,000 BTC를 받았다. 당시 가치로 약 41달러. 피자 한 판에 20달러. 비트코인이 실물 재화와 교환된 최초의 사례였다.
이 거래가 중요한 이유는 피자의 맛 때문이 아니다. 비트코인이 "화폐"가 되기 위해 넘어야 하는 마지막 장벽 — 누군가 이것을 받고 물건을 주겠다는 합의 — 이 처음으로 성립했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교환 수단으로서의 기능"이라 부른다. 메디치의 환어음이 종이 한 장으로 국경을 넘어 자본을 이동시킬 수 있었던 것은, 상대방이 그 종이를 금 플로린으로 바꿔주겠다고 신뢰했기 때문이었다. 한예츠의 피자 거래는 비트코인에 대해 같은 종류의 신뢰가 — 비록 피자 두 판 규모일지언정 — 성립한 첫 순간이었다.
10,000 BTC. 이 숫자는 이후 비트코인의 가격이 상승할 때마다 회자되었다. 암호화폐 커뮤니티는 5월 22일을 "비트코인 피자 데이"로 기념한다. 한예츠가 실수를 한 것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2010년의 비트코인은 실험이었다. 소수의 매니아들이 포럼에서 교환하는 디지털 토큰이었고, 그것으로 피자를 사먹는 행위 자체가 실험의 일부였다. 한예츠 본인도 훗날 인터뷰에서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누군가 처음으로 비트코인을 쓰지 않았다면, 비트코인은 영원히 "쓸 수 있지만 아무도 쓰지 않는 것"으로 남았을 테니까.
2010년의 비트코인 생태계는 작고 조용했다. 사용자는 기껏해야 수천 명. 거래소랄 것도 없었다. 2010년 7월에 문을 연 마운트곡스(Mt. Gox)는 초기 가장 빠르게 성장한 비트코인 거래소였는데, 원래는 "매직: 더 개더링 온라인 거래소(Magic: The Gathering Online eXchange)"라는 트레이딩 카드 거래 사이트였다. 카드 게임 거래소가 디지털 화폐 거래소로 변신한 것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2010년 비트코인의 위상이 어느 수준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채굴은 여전히 일반 컴퓨터의 CPU와 GPU로 가능했다. 전기료보다 채굴 수익이 많은지를 셈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비트코인 포럼에서는 기술적 토론이 대부분이었고, 가격에 대한 이야기는 부차적이었다. 가격이라는 개념 자체가 아직 확립되지 않은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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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코인이 천천히 자라는 동안, 사토시 나카모토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2009년부터 2010년 중반까지, 사토시는 활발하게 활동했다. 포럼에 기술적 질문에 답변하고, 코드를 수정하고, 다른 개발자들과 메일을 주고받았다. 문체는 일관적이었다 — 정확하고, 예의 바르며,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영국식 영어("colour", "analyse")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것이 실제 국적을 반영하는지, 의도적 위장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2010년 12월 12일, 사토시는 비트코인 포럼에 마지막 글을 올렸다. 기술적인 내용이었고, 특별한 작별 인사는 없었다.
2011년 4월, 사토시는 비트코인 핵심 개발자 개빈 안드레센(Gavin Andresen)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나는 다른 일로 바빠졌다(I've moved on to other things)." 그 뒤로 이메일 주소는 응답하지 않았고, 포럼 계정도 활동을 멈췄다.
사라지기 직전, 사토시가 우려를 표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위키리크스(WikiLeaks)가 비트코인 기부를 받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2010년 말, 미국 정부의 압박으로 비자와 마스터카드가 위키리크스에 대한 결제를 차단했고, 위키리크스는 대안으로 비트코인을 선택하려 했다. 사토시는 이에 대해 "벌집을 건드리는 격"이라고 경고했다. 비트코인이 아직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부의 관심을 끌면 위험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그는 떠났다. 아무런 설명 없이.
사토시의 사라짐은 비트코인을 완성시켰다.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정확하다. 창시자가 남아 있으면, 그 사람이 곧 또 다른 중앙 권위자가 된다. 사토시의 발언이 시장을 움직이고, 사토시의 결정이 프로토콜의 방향을 좌우하고, 사토시를 압박하면 시스템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그가 사라짐으로써, 비트코인은 리더가 없는 시스템이 되었다. 아무도 사토시를 고소할 수 없고, 체포할 수 없고, 로비할 수 없었다.
사토시의 지갑으로 추정되는 주소들에는 약 100만 BTC가 들어 있다. 블록체인 분석가 세르지오 데미안 레르너(Sergio Demian Lerner)가 2013년에 발표한 "패토시 패턴(Patoshi Pattern)" 분석에 따른 추정치다. 이 코인들은 한 번도 이동한 적이 없다. 2026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수십조 원에 달하는 금액이 디지털 금고에 잠긴 채, 블록체인 위에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지만 아무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존재한다. 사토시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한 사람인지, 여러 사람인지조차 확인할 방법이 없다.
메디치의 조반니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코시모가 은행을 물려받았다. 잉글랜드 은행의 윌리엄 패터슨이 떠난 뒤에도 총재직은 다음 사람에게 넘어갔다. 인간이 만든 제도에는 항상 후계자가 있었고, 후계자와 함께 권력의 연속성이 유지되었다. 사토시는 후계자를 남기지 않았다. 그가 남긴 것은 코드뿐이었다. 그리고 코드는 후계자가 필요 없다 — 규칙이 이미 코드 안에 적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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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피니에게도 시간이 남지 않았다.
2009년 8월, 피니는 근위축성 측삭경화증(ALS) 진단을 받았다. 운동 뉴런이 서서히 죽어가는 질병. 스티븐 호킹이 앓은 그 병이다. 치료법은 없었다. 진단 후에도 피니는 비트코인 개발에 참여했다. 타이핑이 어려워지자 안구 추적 장치를 사용했다. 눈동자의 움직임으로 커서를 조작하며 코드를 작성했다.
2014년 8월 28일, 할 피니가 세상을 떠났다. 58세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글 중 하나는 비트코인 포럼의 게시물이었다. 2013년 3월 19일에 올린 글에서, 피니는 자신의 상태를 담담하게 기술했다. 전신이 마비되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지만, 안구 추적 장치로 글을 쓸 수 있고, 여전히 프로그래밍을 하고 있다고. 그는 비트코인의 미래에 대해 여전히 낙관적이라고 썼다. 눈동자의 움직임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입력하며 쓴 글이었다.
피니의 유해는 알코르 생명연장재단(Alcor Life Extension Foundation)에 의해 냉동 보존되었다. 미래의 기술이 ALS를 치료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그가 비트코인의 가능성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그의 신체가 미래 기술에 대한 신뢰 속에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 사이에는 묘한 일관성이 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의 가치를 알아보는 능력 — 피니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다.
사토시가 누구인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피니 자신이 사토시가 아니었냐고 물었다. 피니는 부인했고, 그의 가족도 같은 입장이다. 그가 사토시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사토시의 9페이지를 읽고 "이것은 작동할 수 있다"고 판단한 사람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메일링 리스트의 다른 암호학자들이 회의론을 표했을 때, 피니는 직접 소프트웨어를 설치하고 구동시켰다. 이론이 아니라 실행으로 응답한 것이다.
600년간 자본 배분의 역사에서, 판단은 항상 인간의 영역이었다. 메디치의 지점장이 상인의 얼굴을 보고 신용을 가늠했고, 잉글랜드 은행의 이사들이 국채의 안전성을 토론했고, 저축은행의 심사역이 분양률 가정을 놓고 논쟁했다. 판단의 도구는 바뀌어도 — 환어음, 국채, BIS 비율, 블랙-숄즈 공식 — 판단의 주체는 항상 인간이었다.
비트코인은 이 구조를 뒤집었다. "이 거래가 유효한가"를 판단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네트워크다. 규칙은 코드에 적혀 있고, 코드는 예외를 모른다. 사정도 없고, 로비도 통하지 않으며, 컨소시엄의 압력이 결과를 바꾸지 못한다. 3장에서 여신심사위원회의 위원장이 "조건부로 올려봅시다"라고 말했을 때, 그 판단에는 숫자 외의 것들 — 컨소시엄과의 관계, 영업 실적의 압박, 윗선의 눈치 — 이 개입했다. 비트코인의 프로토콜에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해방인지 결핍인지는 아직 답이 없는 질문이다.
3장의 여신심사위원회에서, 위원장의 "조건부 가결"에는 숫자로 환원할 수 없는 무언가가 포함되어 있었다. 시공사 대표의 과거 행적에 대한 인상, 부동산 시장의 분위기에 대한 체감, 금감원 검사 일정이 가져오는 심리적 압박. 인간의 판단에는 항상 이 "숫자 바깥의 것"이 섞여 있었다. 그것이 때로는 지혜가 되고, 때로는 편향이 되었다.
비트코인의 프로토콜에는 숫자 바깥의 것이 없다. 규칙이 충족되면 거래가 승인되고, 충족되지 않으면 거절될 뿐이다. 그 사이에 회색 지대는 허용되지 않으며, "조건부 가결" 같은 것은 불가능하다. 이 냉정함이 시스템을 견고하게 만들지만, 인간적인 맥락은 배제된다.
다만 분명한 것은, 9페이지의 백서가 제안한 것이 단순한 디지털 화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600년간 인간이 독점해 온 판단의 권한을 코드로 이전하는 실험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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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토시가 해결한 것은, 금융의 일부에 불과했다.
비트코인은 송금을 해결했다. A가 B에게 가치를 전달하는 행위. 은행 계좌 없이, 국경 없이, 영업시간의 제약 없이. 제네시스 블록에서 시작된 체인은 그 뒤로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2009년 1월 3일 이후 매 10분마다 새로운 블록이 생성되었고, 2026년 현재까지 그 기록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금융은 송금이 아니다.
금융은 대출이다.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고, 갚지 못하면 담보를 처분하는 행위. 금융은 보험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의 비용을 미리 분산하는 행위. 금융은 투자이고, 리스크의 거래이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가격 매기기다. 메디치 은행이 환어음을 발행한 것은 단순한 송금이 아니라 신용의 창출이었고, 잉글랜드 은행이 국채를 인수한 것은 국가에 대한 대출이었으며, 3장의 여신심사위원회가 심사한 것은 PF 대출 — 프로젝트 파이낸싱이었다.
비트코인은 이 중 어느 것도 하지 못했다. 대출? 불가능했다. 이자율을 설정하는 메커니즘이 없었고, 담보를 자동으로 청산하는 기능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비트코인은 화폐였지, 은행이 아니었다.
3장의 여신심사위원회를 떠올려보면, 저축은행이 하는 일의 본질은 "돈을 받아서, 판단하고, 빌려주는 것"이다. 예금을 받고, 대출 신청을 심사하고, 승인하고, 이자를 징수하며, 부실이 나면 담보를 처분한다. 이 전체 과정에서 비트코인이 대체할 수 있는 부분은 "돈을 보내는 것"뿐이었다. 가장 단순한 행위 하나.
그렇다면 나머지는? "판단하고 빌려주는 것"을 코드로 구현할 수 있을까?
비트코인 이후 10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의 변주를 시도했다. 은행 없는 송금이 가능하다면, 은행 없는 대출도 가능하지 않을까. 은행 없는 보험은. 은행 없는 거래소는. 은행이 하는 모든 일을 코드로 구현할 수 있다면 — 은행 없는 은행이 가능하지 않을까.
2015년, 비탈릭 부테린(Vitalik Buterin)이라는 러시아계 캐나다인 프로그래머가 이더리움(Ethereum)을 출시했다. 비트코인이 "프로그래밍 가능한 화폐"였다면, 이더리움은 "프로그래밍 가능한 모든 것"이었다. 이더리움 위에서는 스마트컨트랙트(smart contract) — 조건이 충족되면 자동으로 실행되는 코드 — 를 배포할 수 있었다. "담보가 일정 비율 이하로 떨어지면 자동으로 청산하라"는 규칙을 코드로 작성하고, 블록체인 위에 올려놓으면, 그 규칙은 24시간 쉬지 않고 작동한다. 위원장의 승인도 필요 없고, 영업시간의 제약도 없다.
2020년 여름, 이 가능성이 폭발적으로 현실화되었다. 세계가 코로나 봉쇄에 갇혀 있는 동안, 이더리움 블록체인 위에서 완전히 새로운 금융 시스템이 건설되고 있었다. 대출, 거래, 보험, 파생상품 — 은행이 수백 년에 걸쳐 구축한 금융의 기능들이, 몇 줄의 코드로 복제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이것을 "DeFi 서머"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