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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6 — 마지막 직업

6장: 두 사람의 서랍 — 이정훈과 김수진


1. 이정훈의 전화

인천공항 제2터미널, 115번 게이트. 탑승 안내가 시작되기 20분 전이었다.

이정훈은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가 다시 넣었다. 딸에게 전화한 것은 아침이었다. 아빠 잘 다녀와. 열여섯 살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 담담함이 이해인지 체념인지를 이정훈은 구별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1학년. 담임이 대학 진학 상담을 시작했다. 친구들은 코딩 학원에 다닌다. 월 120만 원. 이정훈의 치킨집이 월 150만 원을 벌던 곳이었다는 것을 딸은 안다.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아빠가 멀리 가는 건 도망이 아니라는 것. 소리를 듣고 금형의 떨림을 읽던 사람이, 그 소리가 아직 필요한 곳으로 가는 것이라는 것.

그러나 그 말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자기 변호처럼 들릴 것 같았다. 확신이 있었다면 22개월을 치킨집에서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확신이 있었다면 투자금 1억 2,000만 원 중 3,800만 원만 회수하는 결과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프롤로그에서 우리는 이정훈이 115번 게이트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는 장면을 보았다. 편도 티켓. 캐리어 하나. 사원증은 없다 — 2년 전에 반납했다.

그 장면에서 빠진 것이 하나 있다. 이정훈이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은 뒤, 게이트 유리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다는 것이다. 53세. 현대차 아산 공장 생산기술부 부장이었던 사람. 치킨집 사장이었던 사람. 지금은 하이퐁행 편도 승객.

유리창에 비친 얼굴에는 직함이 없었다. 명함이 없는 얼굴. 3장에서 우리가 분석한 바로 그 상태다. 명함이 정체성의 닻이었던 사회에서, 닻이 빠진 사람의 표정. 3장의 정민호는 명함에 "과장"이라고 적혀 있으면서도 비어 있었다. 이정훈에게는 명함 자체가 없다.

비어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비어 있으면 채울 수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없으면 그 착각마저 불가능하다.

게이트 주변의 승객들은 대부분 젊었다. 여행객이거나 출장자이거나 유학생이었다.

50대 초반 남성이 캐리어 하나 들고 편도로 하이퐁에 가는 일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 종류의 이동이다. 출국 심사대의 직원은 목적을 묻지 않았다. 여권과 탑승권만 확인했다. 53세 남성이 왜 편도인지는 시스템이 묻는 질문이 아니다.

한국에서 매년 50만 명 이상이 비자발적으로 직장을 떠난다.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를 추적하는 통계는 없다.

재취업률, 자영업 전환율, 폐업률은 있다. 아산에서 하이퐁으로, 울산에서 자카르타로 — 그 뒤의 이동은 집계되지 않는다. 제도의 언어 바깥에 있는 사람이 제도의 언어 바깥에 있는 곳으로 간다.

딸에게 말하지 못한 것은 확실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이퐁에서 28년의 감각이 다시 쓰일 것이라는 박상호의 말을 믿었지만, 믿음과 확신은 다르다.

믿음에는 틀릴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다. 이정훈은 그 가능성을 딸에게 말할 수 없었다.

전화기는 주머니 안에서 묵직했다. 공장에서 설비 이상을 보고하던 전화기와 같은 기계다.

달라진 것은 전화 너머의 대상이다. 예전에는 생산관리팀장에게 불량 징후를 보고했다. 지금은 열여섯 살 딸에게 부재를 통보해야 한다.

탑승 안내 방송이 울렸다. 베트남어가 먼저 나오고, 한국어가 뒤따랐다. 이정훈은 캐리어를 끌고 줄에 섰다.


2. 이정훈의 선택

이정훈이 하이퐁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하이퐁이 이정훈에게 남은 선택지 중 하나였을 뿐이다.

5장에서 우리는 밀림의 사슬을 추적했다. 제조업에서 퇴직, 자영업, 폐업, 자산 고갈로 이어지는 사슬. 이정훈은 네 번째 고리까지 도달한 사람이다. 투자금 1억 2,000만 원 중 회수액 3,800만 원. 회수율 31.7퍼센트. 대출 5,000만 원은 남아 있다.

22개월 동안 새벽 5시에 닭을 해동하고 밤 11시에 기름때를 닦았다. 배달 플랫폼 수수료 24퍼센트가 매출을 깎았고, 골목 치킨집의 매출 천장은 낮았다. 그 구조의 결과가 이 숫자다.

남은 선택지를 나열하면 이렇다.

경비직 — 월 180만 원, 경력과 무관. 택배 분류 — 월 200만 원, 체력이 자본인 자리. 시설 관리 — 월 190만 원, 공장에서 소리를 듣던 귀가 쓰이지 않는 곳.

재취업 교육이라는 선택지도 있다. 내일배움카드로 "디지털 마케팅 입문"이나 "바리스타 자격증"을 배울 수 있다. 프레스 금형 공정이나 도장 품질 관리를 가르치는 과정은 없다. 제도의 언어가 이정훈의 경험을 번역하지 못한다.

53세 제조업 기술자에게 한국의 노동시장이 제안하는 단어들 — "경비," "택배," "시설 관리" — 은 경험과 연결되는 단어가 하나도 없었다. 프롤로그에서 이미 보았던 풍경이다. 박상호도 같은 목록 앞에 섰었다. 이력서를 열두 군데 넣었고, 면접에서 받은 질문은 요즘 젊은 친구들이랑 잘 지낼 수 있겠어요?였다.

하이퐁은 다른 종류의 선택지였다. 박상호가 보낸 것은 직업 제안이 아니라 위치 제안이었다. 형님, 여기서는 아직 형님이 필요해요. 같은 기술, 다른 좌표. 한국에서 AI가 9개월 만에 흡수한 28년의 감각이, 자동화 이전 단계의 베트남 공장에서는 아직 사람에게서만 나온다.

월급은 한국의 60퍼센트이지만, 생활비가 3분의 1이므로 실질 소득은 한국에서의 마지막 연봉과 비슷하다. 숫자만 보면 합리적이다.

그러나 숫자에 포함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딸은 서울에 남는다. 아내는 마트 파트타임을 계속한다. 국민연금 수령까지 15년이 남았다. 건강보험은 지역가입자로 전환된다. 하이퐁에서 다치면 어느 나라의 보험이 적용되는지 알 수 없다. 사회 안전망의 그물코에서 빠져나가는 것이다.

5권에서 우리는 불가결성은 위치의 함수라고 분석했다. 같은 기술이 한국에서는 잉여이고 베트남에서는 희소하다. 이정훈은 그 분석을 논문이 아니라 몸으로 확인하러 가는 것이다.

18세기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이 떠오른다. 의회 인클로저법으로 공유지를 잃은 농민들이 도시 공장으로 밀려들었다. 토지가 정체성이었던 사람들이 토지를 빼앗기고 낯선 곳에서 노동을 팔았다. 그들에게 공장은 선택이 아니라 남은 문이었다.

이정훈에게 하이퐁도 같은 구조다. AI가 그의 기술이 서 있던 땅을 울타리 쳤다. 울타리 안에는 센서 3,200개와 알고리즘이 들어섰다. 울타리 밖으로 나온 이정훈에게 남은 것은 그 울타리가 아직 쳐지지 않은 곳을 찾는 것이었다.

인클로저의 농민과 이정훈 사이에는 250년의 시차가 있다. 그러나 구조는 같다.

생산 수단이 서 있던 자리에서 밀려난 사람이, 그 수단이 아직 유효한 곳으로 이동한다. 농민은 10마일을 걸어 맨체스터의 방직 공장에 도착했다. 이정훈은 3시간 40분을 날아 하이퐁의 프레스 공장에 도착한다.

거리가 바뀌었을 뿐, 밀림의 방향은 같다.


3. 김수진의 서랍

같은 시각, 서울 강남.

국민은행 강남지점 3층, 기업금융팀. 김수진(44세)은 퇴근 준비를 하고 있다. 모니터에는 오늘 처리한 예외 건 목록이 떠 있다. 12건. 3년 전에는 하루 40건이었다. 2년 전에는 28건이었다. 줄어드는 속도가 일정하다.

AI 신용평가 3.0이 들어온 뒤, 소액 대출의 80퍼센트가 자동 승인된다. 중액 대출도 AI가 1차 판정을 내리고, 김수진은 AI의 판정에 서명한다.

서명이 업무의 대부분이 된 것은 2년 전부터다.

팀 심사역이 4명에서 2명으로 줄었다. 줄어든 2명의 빈 책상 위에는 모니터만 남아 있다. 화면 보호기가 돌고 있다.

아무도 앉지 않는 의자가 두 개. 그 의자들이 김수진에게 말하는 것이 있다. 다음은 당신의 차례라고.

4장에서 우리는 이진희 파라리걸의 승인 버튼을 보았다. AI가 분석한 계약서 57건을 확인하는 데 12분이 걸리는 구조. 김수진의 서명도 같은 구조 위에 있다. 판단에서 추인으로. 동사가 바뀌었다.

12건. 그것이 김수진에게 남은 판단의 영역이다.

AI가 표준 범주로 처리하지 못한 비정형 케이스. 신용점수와 재무제표만으로는 판정할 수 없는 것들. 영세 자영업자의 현금 매출 비중이 높아 소득 증빙이 불완전한 경우. 프리랜서의 불규칙한 소득 패턴. 신생 법인의 시장 잠재력.

이 12건 안에서 김수진은 여전히 자기 일을 하고 있다. 서류를 넘기고, 사장과 통화하고, 목소리의 떨림과 확신을 구별한다. 숫자 너머를 읽는다.

AI는 패턴을 읽는다. 패턴에서 벗어난 것을 읽는 것이 김수진의 일이었다. 3년 전에 40건이었던 것이 12건이 되었다는 것은, AI의 표준 범주가 매년 넓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비정형이 표준으로 편입되는 속도. 그 속도가 김수진의 자리를 줄이는 속도와 같다.

AI 일치율이 성과 평가 항목에 포함된 이후, AI의 판정을 뒤집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위험이 되었다.

AI와 다른 판단을 내리면 그것이 기록된다. 기록은 평가에 반영된다. 판단하는 사람에게 판단을 벌칙으로 만드는 구조다.

김수진이 마지막으로 AI의 판정을 뒤집은 것은 8개월 전이다. 성동구의 소규모 식자재 유통업체였다. AI는 거절했다. 김수진은 대표의 거래처 네트워크와 시장 내 신뢰를 읽고 승인했다. 6개월 뒤 그 업체는 정상 상환 중이다. 그러나 평가 시스템에는 "AI 불일치 1건"으로 기록되었다.

서랍을 연다. 핀테크 스타트업의 제안서가 들어 있다. 3개월 전에 넣어두었다.

표지에 한 줄이 적혀 있다. AI가 아니오라고 할 때, 당신의 그러나가 필요합니다.

그 한 줄이 김수진의 20년을 요약한다. 서류 뒤의 사람을 읽는 능력. 재무제표의 숫자 너머에 있는 관계와 신뢰와 시장 감각을 읽는 능력. 연세대 경영학과를 나오고, CFA 1차를 통과하고, 20년간 강남지점에서 기업금융을 담당하면서 쌓은 것이 그것이다.

인터넷전문은행 3사의 대출 거절률은 40에서 50퍼센트다. AI가 거절한 사람들이다. 신용점수가 낮거나, 소득 증빙이 불완전하거나, 업종이 고위험으로 분류되거나. 그 거절 속에 AI가 읽지 못한 것이 있다 — 이것이 핀테크의 전제다.

김수진은 이 제안서를 세 번 꺼내보았다. 세 번 모두 다시 서랍에 넣었다. 20년 경력을 두고 나가는 것의 무게. 국민은행이라는 이름의 무게. 차장이라는 직함의 무게. 그 무게들이 서랍을 닫게 했다.

이정훈은 사원증을 반납당했다. 김수진은 사원증을 반납해야 나갈 수 있다. 반납당한 것과 반납해야 하는 것. 수동과 능동의 차이가 결정의 무게를 다르게 만든다.

그러나 서랍 안의 제안서보다 무거운 것이 있다. 매일 줄어드는 12건이다. 내년이면 8건이 될 것이고, 그다음 해에는 5건이 될 것이다. AI가 비정형 데이터를 학습하는 속도가 김수진의 판단 영역을 잠식하는 속도와 같다.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자리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일. 이것이 비워짐이다.


4. 하이퐁 공장 첫 날

하이퐁, 한국계 자동차 부품 공장. 새벽 6시.

3월의 하이퐁은 아산보다 덥고 습하다. 공장 안의 공기는 금속 냄새와 윤활유 냄새가 섞여 있다. 아산과 비슷하다. 공장의 냄새는 어디나 비슷하다 — 기계와 금속과 사람의 땀이 만나는 곳의 냄새.

이정훈은 안전화 끈을 묶는다. 아산에서 가져온 안전화다. 밑창이 닳아 있다. 공장 바닥을 걸은 발이 기억하는 마찰이 이 신발에 남아 있다.

캐리어에 넣은 몇 안 되는 물건 중 하나. 작업복 세 벌, 안전화 한 켤레, 디지털 버니어 캘리퍼스. 모든 것을 캐리어 하나에 넣을 수는 없었지만, 넣을 수 있는 것은 넣었다.

이정훈이 프레스 라인 앞에 선다. 금속이 찍히는 소리가 난다. 아산과 다른 소리다. 아산에서 마지막으로 다루던 장비는 2018년식 서보 프레스였다. 여기는 2012년식 기계식 프레스다. 습도가 다르고, 금속의 조성이 다르고, 프레스의 톤수가 다르다.

소리의 결이 다르다.

이정훈은 첫 번째 프레스 앞에서 멈추었다. 눈을 감았다. 3년 동안 듣지 않았던 소리가 밀려온다. 금속이 찍히는 충격, 유압의 숨소리, 금형이 맞물리는 진동. 아산의 서보 프레스와는 다른 층위의 소리다.

이 소리를 읽을 수 있는가. 3년 만이다. 치킨집 튀김유의 소리, 배달 오토바이의 경적, 인천공항의 안내 방송 — 그 사이에 프레스의 언어가 남아 있는지 이정훈 자신도 몰랐다. 응우옌이 옆에서 무엇을 기다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러나 듣는 법은 같다.

프레스 라인 12대가 번갈아 찍어낸다. 이정훈은 라인을 따라 걸으며 듣는다. 첫 번째, 정상. 두 번째, 정상. 세 번째에서 소리가 달랐다. 찍히는 순간의 울림이 0.5초 길었다.

아산에서라면 금형 정렬이 0.2밀리미터 어긋났을 때 나는 소리다. 기계가 다르므로 수치는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소리의 변칙이 의미하는 것 — 금형이 제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 — 은 기계와 무관하다. 물리 법칙은 국경을 넘지 않는다.

이정훈이 라인을 멈추라고 한다. 베트남인 라인 관리자 응우옌이 눈을 크게 뜬다. 생산을 멈추는 것은 비용이다. 금형을 열어보니 정렬 핀이 0.3밀리미터 빗나가 있었다. 이대로 500개를 더 찍었으면 불량이었다. 불량 500개의 비용은 라인을 30분 멈추는 비용의 열 배다.

응우옌이 묻는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정훈이 대답한다. 소리가 달랐다.

응우옌의 표정이 달라졌다. 존경이라고 부르기에는 이르지만, 경계가 풀린 것은 분명했다. 한국에서 온 53세 남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처음으로 본 표정이었다.

센서도 없이, 계측기도 없이, 귀 하나로 0.3밀리미터를 잡아낸 사람. 한국에서는 AI가 센서 3,200개의 데이터로 하는 일을, 이 사람은 귀로 한다.

아산 공장에서 그 귀는 잉여였다. 하이퐁 공장에서 그 귀는 유일하다.

28년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이정훈은 3년 만에 자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다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프롤로그에서 사원증을 반납한 뒤 사라졌던 문장이 돌아온 것이다 — 나는 공정 기술자다.

박상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이정훈은 첫 날에 확인했다. 필요한 곳에 서 있다는 감각. 그 감각이 3년 만에 돌아왔다.

응우옌은 이정훈 옆에서 노트를 펼치고 적는다. 소리의 차이, 금형 점검 기준, 정렬 핀 허용 오차. 이정훈의 경험이 응우옌의 노트로 옮겨지고 있다. 암묵지가 명시지로 변환되는 과정이다.

이 변환에는 기한이 있다. 응우옌이 소리를 구별할 수 있게 되는 데 6개월이 걸릴 수도 있고 2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노트가 디지털화되면, 센서가 설치되면, AI도 같은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이정훈의 가치가 이전되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 그 시간이 끝나면 이정훈은 다시 밀려난다. 이번에는 어디로 갈 것인가.

오후, 공장 한쪽 벽에 포스터가 붙어 있는 것을 본다. 스마트 팩토리 도입 추진 계획 2027. 베트남어와 한국어가 병기되어 있다.

이정훈은 그 포스터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2027년은 2년 뒤다. 아산에서 9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 하이퐁에서는 2년 뒤에 시작된다. 시간표가 다를 뿐, 방향은 같다.

아산 공장 벽에도 비슷한 포스터가 붙어 있었을 것이다. 2021년쯤에. 그때 이정훈은 그것을 읽지 않았거나, 읽었지만 자기와 무관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은 다르다. 같은 글자가 다른 무게로 읽힌다.

이정훈은 포스터에서 눈을 떼고 프레스 라인으로 돌아간다. 아직 들어야 할 소리가 남아 있다.


5. 밀려남과 비워짐

이정훈과 김수진은 같은 힘에 의해 밀렸다. AI라는 이름의 구조적 힘. 그러나 밀림의 형태가 다르다.

이정훈은 밀려났다. 직접 대체. 감각이 AI 품질 예측 시스템으로 대체되었고, "역할 재조정"이라는 통보를 받았고, 실질 업무가 기존의 5퍼센트로 줄었고, 희망퇴직으로 공장 밖으로 나왔다.

밀림의 과정이 가시적이었다. 사원증을 반납하는 순간이 있었다. 프롤로그에서 보았던 그 순간 — 플라스틱 카드를 인사팀 직원에게 건네는 3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김수진은 비워졌다. 간접 대체. 자리는 그대로 있다. 직함도 그대로 있다. 국민은행 강남지점 기업금융팀 차장. 명함도 있다. 출근 시간도 같고, 퇴근 시간도 같다.

그러나 명함 뒤의 내용이 사라지고 있다. 하루 40건이 12건이 되었다. 판단이 서명이 되었다. 사원증을 반납하는 순간은 오지 않았다 — 아직. 문이 닫히는 소리 대신, 문이 조금씩 좁아지는 소리가 나고 있다. 그 소리는 이정훈의 프레스 소리처럼 선명하지 않다.

어느 쪽이 더 잔인한 밀림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이 책의 몫이 아니다. 두 사람에게 물어도 답이 다를 것이다.

밀려난 사람은 안다. 이정훈은 자기가 밀려났다는 것을 안다. 사원증 반납이라는 사건이 있었고, 치킨집이라는 후속이 있었고, 폐업이라는 마침표가 있었다. 각 단계에 이름이 있다. 고통스럽지만 분명하다. 분명하므로 대응할 수 있다.

비워진 사람은 모를 수 있다. 김수진은 아직 자리에 있다. 급여가 나온다. 동료가 있다. 회의에 참석한다. AI가 판정한 대출에 서명한다. 이 모든 것이 "일"의 형태를 유지한다.

그러나 일의 실질이 증발하고 있다는 것을 김수진은 안다 — 다만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도 함께 가지고 있다. 아직 자리에 있으니까. 아직 월급이 나오니까. 아직 명함이 있으니까. 부정의 근거와 인식의 근거가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 이것이 비워짐의 잔인함이다.

5권 14장에서 우리는 이정훈의 사원증 반납과 김수진의 AI 심사를 나란히 보았다. 같은 장에서, 같은 구조적 힘의 두 가지 표현. 이정훈에게 그 힘은 문을 닫았고, 김수진에게 그 힘은 문의 크기를 줄이고 있었다. 밀려남과 비워짐은 같은 공식의 두 변주다.

4장의 랭커셔 수직공과 김수진의 대비를 기억할 것이다. 수직공은 천을 짜는 자에서 기계가 짠 천을 확인하는 자로 격하되었다. 김수진은 대출을 판단하는 자에서 AI가 판단한 대출을 추인하는 자로 격하되었다. 수직공의 격하에는 30년이 걸렸다. 김수진의 격하에는 3년이 걸렸다.

속도가 달라졌을 뿐, 동사의 변화는 같다. 짜다에서 확인하다로. 판단하다에서 서명하다로.

이정훈과 김수진의 차이를 개인의 능력으로 설명하는 것은 쉽다. 이정훈은 53세이고 자산이 소진되었고 전환 여력이 낮다. 김수진은 44세이고 아직 재직 중이며 전환 여력이 남아 있다. 이정훈에게는 서울에 남겨둔 딸이 있고, 김수진은 미혼이어서 독립적 결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설명은 구조를 가린다. 이정훈이 밀려난 것은 제조업이 AI에 먼저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김수진이 아직 자리에 있는 것은 금융업의 AI 전환이 점진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개인의 조건이 아니라 산업의 시간표가 두 사람의 위치를 결정했다.

이정훈이 금융업에 있었다면 아직 자리에 앉아 있었을 것이고, 김수진이 제조업에 있었다면 이미 사원증을 반납했을 것이다.

이것을 개인의 능력 차이로 읽는 것은 구조를 보지 않는 것이다.


6. 서랍 속 제안서

김수진이 제안서를 서랍에 3개월간 넣어둔 이유를 묻는다면, 대답은 단순하다.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이렇다. AI 거절 대출 시장이 존재한다. 인터넷전문은행 3사의 거절률 40에서 50퍼센트. 거절된 사람들 중 일부는 대출받을 자격이 있다. AI가 읽지 못하는 신호가 있기 때문이다.

은평구 갈현동 전통시장의 반찬가게 사장님. 60세 여성, 신용점수 하위 20퍼센트, 매출 불규칙. 그러나 20년간 같은 자리에서 단골 고정매출을 올리고 있다. 단골이 줄을 서는 가게다. 손님 이름을 부르며 반찬을 건네는 사장님이다. AI는 이 신뢰를 데이터로 분류하지 못한다. 그것은 신뢰이지 신용이 아니다.

신뢰를 읽는 것이 김수진의 20년이었다. 2018년, 김수진이 통과시킨 식자재 납품업체가 있다. 재무제표만 보면 위험 업체였다. 부채비율이 높았고 현금흐름이 불안정했다. 그러나 김수진은 사장의 거래처 관계와 시장 내 평판을 읽었다. 3년 후 그 업체는 코스닥에 상장했다.

그 판단이 옳았다는 증거가 있다. 문제는 그 판단력을 쓸 곳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확실하지 않은 것은 이렇다. AI가 비정형 데이터를 학습하는 속도. AI 3.0이 예외 건을 40건에서 12건으로 줄이는 데 3년이 걸렸다. AI 4.0이 비정형 데이터 — 리뷰, 커뮤니티 평판, 거래 패턴 — 를 통합 분석하기 시작하면, 김수진이 읽던 바로 그것을 AI가 배우기 시작한다.

틈새가 존재하는 기간이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3년일 수도 있고, 10년일 수도 있다. 그 불확실성이 서랍을 닫게 했다.

이정훈의 하이퐁도 같은 구조다. 벽에 붙은 포스터 — 스마트 팩토리 도입 추진 계획 2027. 이정훈의 28년이 하이퐁에서 유효한 기간은 2년일 수도 있고 5년일 수도 있다. 영구적이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두 사람의 선택은 정답이 아니다. 틀릴 수 있다. 이정훈의 하이퐁도 김수진의 핀테크도, 유효 기간이 제한된 선택이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것의 결말은 이미 보았다. 이정훈은 치킨집 22개월에서 보았고, 김수진은 40건이 12건이 되는 3년에서 보고 있다.

보았으므로 움직이는 것이다. 읽었으므로 위치를 바꾸는 것이다.

퇴근 시간이다. 강남지점 로비의 조명이 하나씩 꺼진다. 김수진이 서랍을 연다. 제안서를 꺼낸다. 3개월 만에 처음으로 서랍에 다시 넣지 않는다. 가방에 넣는다.

서랍이 비었다.

비워진 것은 서랍만이 아닐 것이다. 20년간 앉아 있던 자리의 의미가, 제안서와 함께 가방으로 옮겨간 것이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확실하지 않은 채로 움직이는 것 — 그것이 이정훈이 비행기에 탄 이유이고, 김수진이 서랍을 비운 이유다.

5권 17장에서 "공식을 아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공식을 안다는 것은 정답을 안다는 뜻이 아니었다. 구조를 읽고, 자기 위치를 파악하고,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움직이는 것이었다.

이정훈과 김수진은 공식을 아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공식이 자기에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은 안다. 아는 것에서 움직이는 것까지의 거리가, 두 사람이 6장에서 건넌 것이다.


7. 다음 장으로

이정훈은 하이퐁에서 소리를 듣고 있다. 김수진은 가방 안의 제안서를 들고 강남역 방향으로 걷고 있다.

두 사람의 선택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 둘 다 확실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둘 다 확실하지 않은 채로 움직였다는 것. 이정훈은 위치를 바꾸었고, 김수진은 틈새를 향해 몸을 돌렸다. 지리적 전환과 기능적 전환. 형태는 다르지만, 불확실성 속에서 자기 서사의 다음 줄을 쓰기 시작했다는 점은 같다.

이것은 용기의 서사가 아니다. 용기라고 부르면, 움직이지 못한 사람을 비겁하다고 부르는 것이 된다.

3장에서 정민호는 빈 책상의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AI 코파일럿이 보고서를 완성한 뒤 남는 시간에 뉴스를 읽고 있었다. 정민호가 비겁한 것이 아니다. 정민호에게는 아내와 두 자녀와 전세 대출 2억 원과 노원구 아파트가 있다. 구조가 다르면 선택이 다르다.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개인이 놓인 조건이 선택의 범위를 결정한다.

밀려남과 비워짐 사이에서, 이정훈은 위치를 옮겼고 김수진은 틈새를 찾았다. 두 경로 모두 유효 기간이 있다. 하이퐁의 스마트 팩토리 포스터가 그것을 말하고 있고, AI 4.0의 비정형 데이터 학습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

영구적 해법은 이 책 어디에도 없다. 있다고 쓰는 순간 자기계발서가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이 보여주는 것이 있다. 구조적 압력 아래서, 자기 서사를 만들어가는 과정. 미래를 예측한 사람이 아니라, 불확실성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 5장의 마지막 문장에서 우리는 그렇게 썼다. 불확실성 속에서 자기 서사를 만들어가는 사람이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고.

이정훈과 김수진은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그 장이 어떤 결말을 가지는지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이정훈의 하이퐁이 5년 뒤에도 유효할지, 김수진의 핀테크가 AI 4.0 이후에도 틈새를 유지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움직이지 않았다면 보이지 않았을 것들이 움직인 뒤에 보인다는 것이다.

이정훈은 하이퐁에서 자기 귀의 가치를 다시 확인했다. 김수진은 서랍을 비우면서 20년의 판단력이 향할 곳을 처음으로 직시했다. 그것이 정답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멈춰 있었다면 확인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밀려남과 비워짐, 두 가지 형태의 밀림 사이에서 — 다른 길을 찾은 사람들이 있다. AI와 함께 일하는 법을 설계한 사람. AI가 대체할 수 없는 것을 읽어내는 사람. AI 없는 세계를 경험한 적 없는 세대.

그들의 도구와 눈과 손이 제3부에 있다.


문턱의 질문: 당신의 서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3개월째 꺼내지 않은 그것은 — 확신이 없어서인가, 확신이 없는 채로 움직이는 법을 모르기 때문인가.


6장 끝 — 리서치 소스: C-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