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추방된 나라
1965년 8월 9일 정오, 싱가포르 시티홀. 42세의 리콴유가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 섰다. 전날 밤 그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새벽에 서명한 문서 한 장이 그의 나라를 만들어냈다 — 그가 평생 반대해온 방식으로.
목이 메었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는 말을 멈추고 기자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깐 멈춰도 될까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카메라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아시아 현대 정치사에서 한 지도자가 공개적으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그때까지 거의 없었다. 감정을 추스른 뒤 그는 말을 이었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를 분리하는 이 협정에 서명한 이 순간은 고통의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평생 합병과 두 영토의 통일을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독립 선언이 아니었다. 추방 통보였다. 1963년 말레이시아 연방에 합류했던 싱가포르는 말레이인 중심 정책에 반발하며 "말레이시아인의 말레이시아"를 주창했고, 이것이 인종 폭동으로 번졌다. 말레이시아 연방 정부는 이 골칫거리를 잘라냈다. 싱가포르는 원하지 않는 독립을 떠안았다.
리콴유에게 이것은 꿈의 파괴였다. 그는 도시국가 단독으로의 생존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다. 훗날 회고록 『제3세계에서 제1세계로』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생존 가능성이 희박한 엄청난 역경에 직면했습니다. 싱가포르는 자연적인 국가가 아니라 인공적인 국가였습니다 — 영국이 자신들의 전 세계 해양 제국의 결절점으로 발전시킨 무역 전초기지였습니다. 우리는 배후지 없는 섬을 물려받았습니다. 몸통 없는 심장을."
숫자가 그 절망을 증언한다. 인구 190만 명. 1인당 GDP 516달러. 실업률 14퍼센트. 인구의 절반이 문맹이었고, 70퍼센트가 빈민가에 살았다. 천연자원은 사실상 전무했다. 마실 물조차 말레이시아 조호르주에서 수입해야 했다. 영토는 서울보다 작은 719제곱킬로미터. 군대는 없었다 — 안보 전체를 영국군에 의존하고 있었다.
헨리 키신저는 같은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동남아시아에서 단연 가장 작은 나라인 싱가포르는, 만약 독립을 유지할 수 있다 해도, 더 강력한 이웃 국가들의 위성국가가 될 운명처럼 보였다고.
그런데 60년 뒤, 이 나라의 1인당 GDP는 91,000달러다 — 약 1억 2,000만 원. 독립 당시의 176배. 국부펀드 두 개의 합산 자산이 1조 달러를 넘는다. 세계에서 미국 항공모함을 수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항만을 보유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답은 하나다. 불가결성을 설계했다.
2. 생존의 3단계
리콴유의 전략은 세 단계로 구축되었다. 군사적 생존, 경제적 불가결, 제도적 플랫폼. 이 세 단계는 순차적이면서 동시적이었다 — 하나가 완성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다음을 시작했다.
첫 번째 충격은 독립 3년 만에 왔다. 1968년 1월, 영국이 '수에즈 동쪽' 병력을 1971년까지 전면 철수하겠다고 발표했다. 영국 군사기지는 싱가포르 GNP의 2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3만 명의 영국군과 연간 7,000만 파운드의 군사비 지출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경제적 타격만이 아니었다. 안보의 우산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리콴유 정부는 패닉 대신 선제적 전환을 택했다. 영국 군사기지를 상업 인프라로 바꾸는 '기지경제전환부'를 설치했다. 군사 조선소가 상업 조선소로 변했다 — 이것이 싱가포르 조선업의 기원이다. 방위비를 3배로 늘리는 동시에 외자 유치를 가속했다. 1971년 5대국 방위협정을 체결해 다자 안보 틀을 확보했다. 영국군 철수 시한이 도래했을 때, 싱가포르는 이미 완전 고용에 근접해 있었다.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이 패턴은 싱가포르의 DNA가 되었다.
경제적 불가결성의 구축은 의도적으로 설계된 사다리였다. 1960년대, 주롱 산업단지의 갯벌 위에 도로를 깔고 전기를 연결했다. 악어가 서식하던 불모지에 경제개발청(EDB)이 공장 부지를 조성했다. 국제 기업들은 물었다. 왜 여기서 사업을 해야 하는가. EDB는 숫자로 대답했다 — 세금 면제, 저렴한 노동력, 세계 최고의 항만 접근성, 그리고 약속을 지키는 정부.
1968년 12월, 텍사스 인스트루먼트가 싱가포르에 법인을 설립했다. 칼랑 베이신에 세워진 공장은 1,400명을 고용했고,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HP가 뒤따랐다. 1960년대 말 주롱에는 181개 공장이 가동 중이었다. 노동집약적 조립에서 시작해 1970년대에는 전자와 정밀기계로, 1980년대에는 고부가가치 제조로 올라갔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연평균 실질 GDP 성장률 12.7퍼센트. 제조라는 첫 번째 발판이 확보됐다.
그 위에 금융이 올라섰다. 1968년, 싱가포르는 아시아 달러 시장을 창설했다. 당시 아시아의 금융 중심지는 홍콩이었다. 그러나 홍콩 당국은 비거주자의 이자 소득에 15퍼센트 원천징수세를 부과하며 역외 달러 시장 유치를 거부했다. 일본도 외환 규제로 문이 닫혀 있었다. 싱가포르는 이 공백을 포착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 싱가포르 지점에 비거주자 달러 거래를 허용하는 특별 부서 설치를 허가하면서, 아시아 역외 금융 중심지의 자리를 선점했다. 경쟁자의 제도적 경직이 만들어낸 빈틈을 정확히 찔렀다.
1장에서 우리는 한자동맹이 200개 도시의 네트워크로 북해-발트해 교역을 독점한 것을 보았다. 그 독점은 지리적 포지션에서 나왔다 — 뤼베크와 함부르크를 거치지 않으면 소금도, 청어도, 모피도 거래할 수 없었다. 싱가포르의 금융 허브 전략은 한자동맹과 본질이 같되 방법이 달랐다. 한자동맹은 자연 발생한 지리적 독점을 방어했다. 싱가포르는 제도적 설계로 독점을 창조했다. 홍콩이 세금을 부과할 때, 싱가포르는 세금을 면제했다. 도시국가가 제국의 항구를 이긴 것은 지리가 아니라 규칙이었다.
지식과 혁신이 그 다음을 이었다. 2003년 바이오폴리스가 개소했다 — 5억 싱가포르달러를 투자해 조성한 바이오의학 연구 클러스터. 2008년에는 정보통신과 공학 연구 허브인 퓨전폴리스가 뒤따랐다. 바이오의학 분야의 GDP 기여는 2003년 60억 달러에서 2012년 294억 달러로 5배 뛰었다. 그리고 2023년, 국가 AI 전략 2.0이 발표됐다. 270억 달러 규모의 AI 투자.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AWS가 아시아 데이터센터 허브로 싱가포르를 택했다.
제조에서 금융으로, 금융에서 지식으로, 지식에서 AI로. 매 10~20년마다 허브의 내용물을 교체했다. 형태는 바뀌었으나 본질은 일관되었다 — 어느 진영에도 팔 수 있되 대체할 수 없는 것을 만드는 것.
3. 독이 있는 새우
1966년, 리콴유는 연설에서 자신의 전략을 자연의 먹이사슬로 설명했다.
"태초부터 큰 물고기는 작은 물고기를 먹고, 작은 물고기는 새우를 먹는다는 것이 자연의 질서였습니다. 아시아의 물에서 싱가포르는 새우입니다. 하지만 새우들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어떤 새우들은 독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먹으면 소화불량에 걸립니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둡니다."
"독이 있는 새우" 독트린. 이 은유 안에 싱가포르 외교 전략의 전부가 들어 있다. 작아서 위협이 되지 않으므로 적을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삼키면 위험하므로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 그리고 모든 강대국에 유용하므로 어느 쪽도 적으로 만들 이유가 없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이 독트린은 정교하게 작동했다. 싱가포르는 미국의 공식 동맹국이 아니다. 그러나 창이 해군기지는 세계에서 미국 항공모함을 수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설이다. 1990년 군사 협력 양해각서, 2005년 전략적 협력 협정, 2015년 강화된 방위 협력 협정, 2019년 2035년까지의 연장. 조약 없는 동맹 — 그것이 싱가포르가 만들어낸 독특한 위치다.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다른 카드를 꺼냈다. 1992년 리콴유는 중국을 방문해 부총리 주룽지에게 수저우 산업단지 공동개발을 제안했다. 싱가포르 컨소시엄 65퍼센트, 중국 컨소시엄 35퍼센트. 이것은 단순한 경제 협력이 아니었다. 싱가포르식 행정 시스템 — 법치, 도시계획, 투자 유치 노하우 — 을 패키지로 이전하는 프로젝트였다. 중국 내에 싱가포르의 레버리지를 심어놓은 것이다.
화교 문화권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면서 미국 해군에 항구를 제공한다. 이 아슬아슬한 균형이 싱가포르를 불가결한 중개자로 만들었다. 2장에서 우리는 스위스가 프랑스어권, 독일어권, 이탈리아어권을 동시에 서비스하며 "어느 강대국의 수도도 아닌 곳"이라는 중립의 자산을 만들어낸 것을 보았다. 싱가포르의 전략은 스위스와 닮았으되 더 능동적이었다. 스위스의 중립이 "개입하지 않겠다"는 소극적 선언이었다면, 싱가포르의 중립은 "양쪽 모두에 필요한 존재가 되겠다"는 적극적 설계였다.
2장에서 우리는 핀란드가 소련과의 우호조약 아래에서 서방 경쟁력을 축적하며 "전략적 인내"를 실행한 것도 보았다. 노키아가 소련 시장에서 벌어들인 수익으로 R&D에 재투자하여 세계 최대 휴대전화 제조사로 부상한 것. 그러나 핀란드의 전략은 소련이라는 특정 환경에 의존했고, 소련이 사라지자 전략 환경 자체가 소멸했다. 싱가포르는 달랐다. 냉전이 끝나도, 아시아 금융위기가 와도, 미중 경쟁이 격화되어도, 매번 허브의 내용물을 바꿔 끼우며 불가결성을 갱신했다.
리콴유의 전략은 헤징이 아니었다. 헤징은 위험을 분산하는 것이다. 그가 한 것은 위험을 자산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사이"에 놓인 것이 약점이 아니라, "사이"에서만 제공할 수 있는 가치를 만들어냈다. 어느 강대국이든 싱가포르 없이는 아시아에서의 경제적, 군사적, 외교적 이익을 온전히 추구할 수 없게 만드는 것 — 그것이 불가결 노드 전략의 원형이다.
4. 국부펀드라는 방패
군사력도, 자원도, 인구도 없는 나라가 만들어낸 방패가 하나 더 있다. 돈이다.
1981년 설립된 GIC는 싱가포르의 외환보유고를 운용하는 국부펀드다. 공식적으로 자산 규모를 밝히지 않지만, 추정치는 7,000억에서 8,500억 달러 사이를 오간다. 1974년 설립된 테마섹 홀딩스는 정부 보유 전략 자산을 운용한다 — 싱가포르항공, DBS은행, 싱텔이 그 포트폴리오에 들어 있다. 순 포트폴리오 가치 약 3,000억 달러. 두 펀드를 합치면 1조 달러를 넘는다. 싱가포르 연간 GDP의 2~3배에 달하는 규모다.
이 자본의 전략적 의미는 세 가지다. 위기 시 경제 충격을 흡수하는 완충제 — 아시아 금융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19 때마다 국내 경제를 방어했다. 천연자원 없는 나라가 만들어낸 금융 자원 — 석유 대신 인적 자본과 허브 전략으로 창출한 잉여를 축적한 것이다. 그리고 전 세계 주요 기업과 인프라에 대한 지분을 통해 경제 외교력을 투사하는 수단.
UAE의 아부다비 투자청이나 쿠웨이트 투자청도 세계 최대 국부펀드에 속한다. 그러나 그들의 재원은 석유다. 싱가포르의 재원은 사람이다. 이 차이가 본질적이다. 석유는 고갈된다. 인적 자본은 — 재생산 시스템이 작동하는 한 — 고갈되지 않는다.
GIC는 2024년 유럽 스타트업 투자에서 전 세계 국부펀드 중 최대 투자자가 됐다. 스트라이프, 줌, 스노우플레이크 같은 실리콘밸리 기업에도 투자한다. 인구 590만의 도시국가가 세계 자본 시장의 주요 행위자로 존재한다. 그것 자체가 불가결성의 증거다.
5. 한자동맹이 실패하고 싱가포르가 성공한 이유
1장에서 우리는 한자동맹의 독점이 어떻게 붕괴했는지를 보았다. 네덜란드 상인들이 선상 즉시 염장 기술로 소금-어업 독점을 우회하고, 외레순트 해협 직항로로 지리적 독점을 무력화했다. 200개 도시의 네트워크는 기술 혁신 앞에서 무너졌다. 불가결성을 구축하는 데 150년이 걸렸으나, 붕괴에는 100년도 걸리지 않았다.
한자동맹의 실패와 싱가포르의 성공 사이에는 하나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한자동맹의 독점은 구조적 포지션에 기반했다 — 뤼베크와 함부르크를 거치지 않으면 교역이 불가능하다는 지리적 독점. 누군가 그 구조를 우회하는 방법을 찾자 독점이 붕괴했다. 싱가포르의 불가결성은 포지션이 아니라 능력에 기반했다. 허브의 내용물을 시대마다 교체하는 적응력 — 그것이 60년간 불가결성을 유지한 핵심이다.
한자동맹의 만장일치 거버넌스(한제타크)는 빠른 전략 전환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200개 도시가 합의해야 하나의 결정이 내려졌다. 싱가포르는 정반대였다. 리콴유의 인민행동당은 독립 이후 단 한 번도 정권을 내주지 않았고, 그 정치적 연속성이 전략의 일관성을 보장했다. 유고슬라비아의 비동맹 전략이 티토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난 것과 달리, 싱가포르는 리콴유 이후에도 고촉통, 리셴룽, 로렌스 웡으로 이어지는 4세대 지도부 승계를 완수했다. 개인이 아니라 제도가 전략을 계승했다.
1권에서 우리는 핵심 공식을 보았다 — 기술 혁신이 자본을 집중시키고, 집중된 자본이 사회 불안을 만들고, 사회 불안이 제도 재설계를 강제한다. 싱가포르에 이 공식을 적용하면 흥미로운 변주가 나타난다. 리콴유는 이 공식의 순서를 뒤집었다. 제도를 먼저 설계하고, 그 제도로 자본을 유치하고, 유치된 자본으로 기술을 획득했다. 보통의 국가에서 제도 재설계는 위기의 산물이다. 싱가포르에서 제도 설계는 위기의 예방이었다.
그러나 이 성공에는 대가가 있었다. 세계은행 정부효과성 1위, 부패통제 최상위권 — 이 효율성의 이면에는 정치적 자유의 제한이 있다. 언론 자유 지수에서 싱가포르는 늘 하위권이다. 리콴유 자신이 "서구식 민주주의는 사치"라고 공언했다. 효율과 자유 사이의 긴장 — 이것은 싱가포르 모델을 참조하려는 모든 나라가 마주하는 질문이다.
6. 불가결성의 다섯 가지 조건
역사는 법칙을 숨기고 있다. 1장의 한자동맹과 네덜란드 황금시대, 2장의 스위스 중립과 핀란드의 인내, 그리고 이 장의 싱가포르. 이 사례들을 나란히 놓으면 하나의 패턴이 드러난다.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을 뿐 아니라 번영한 나라들이 공유하는 조건이 있다.
불가결성의 첫 번째 조건은 대체할 수 없는 기술이다. 한자동맹은 소금-청어 무역의 전 과정을 장악했다. 네덜란드는 플리트 선박이라는 혁신으로 단위 운송비를 획기적으로 낮췄다. 싱가포르는 시대마다 제조, 금융, 바이오, AI로 기술의 내용물을 교체했다. 경쟁자가 따라올 수 없는 격차를 유지하되, 그 격차의 원천을 갱신하는 것 — 그것이 기술적 대체 불가성이다.
두 번째 조건은 공급망에서의 위치다. 한자동맹이 뤼베크-함부르크 축으로 북해와 발트해를 연결한 것, 싱가포르가 말라카 해협의 길목에서 세계 2위 컨테이너항이 된 것, 스위스가 유럽의 심장부에서 동서남북의 자본을 중개한 것. 글로벌 공급망에서 우회할 수 없는 노드를 점유하는 것이 두 번째 조건이다. 이 위치는 자연이 부여할 수도 있고, 싱가포르처럼 제도로 창조할 수도 있다.
세 번째 조건은 제도적 신뢰다. 스위스의 210년 중립이 "스위스는 중립이다"라는 국제적 공리를 만들어낸 것처럼, 싱가포르의 60년 거버넌스가 "싱가포르는 약속을 지킨다"는 신뢰를 축적했다. 홍콩의 교훈이 이 조건의 중요성을 반증한다 — 국가보안법 한 줄이 178년의 불가결성을 무너뜨렸다. 법치, 규제의 예측 가능성, 계약의 이행. 이것은 5년이나 10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되는 자본이다.
네 번째 조건은 인적 자본의 재생산이다. 베네치아가 500년을 버틴 것, 스위스가 210년을 버틴 것, 그 기저에는 세대를 이어가는 인적 연속성이 있었다. 싱가포르의 EDB가 TI를 유치하고, A*STAR가 바이오폴리스를 운영하고, NAIS 2.0이 AI 인재를 육성하는 것 — 다음 세대의 인재를 지속적으로 배출하는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으면, 어떤 기술 독점도 한 세대에서 끝난다.
다섯 번째 조건은 강대국 사이에서 자율성을 유지하는 능력이다. 핀란드는 소련과의 우호조약 아래에서 내부적으로 민주주의를 유지했다. 오스트리아는 강요된 중립을 적극적 자산으로 전환해 빈을 국제기구 거점으로 만들었다. 싱가포르는 미국 해군에 항구를 제공하면서 중국에 산업단지를 건설했다. 어느 한쪽에 완전히 편입되지 않으면서 양쪽 모두에 가치를 제공하는 균형 — 그것이 "사이"에 서는 나라의 생존 조건이다.
이 다섯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나라를 우리는 불가결 노드라 부른다. 어느 편도 쉽게 배제하거나 대체할 수 없는 존재. 프롤로그에서 우리가 던진 질문 — "어느 편도 포기할 수 없는 존재가 될 수 있는가?" — 의 답이 여기 있다.
그러나 역사는 하나의 경고도 함께 전한다. 불가결성은 영원하지 않다. 한자동맹의 260년도,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120년도, 홍콩의 178년도 끝났다. 살아남는 것은 특정 불가결성이 아니라, 불가결성을 재발명하는 능력이다. 스위스가 시계에서 금융으로, 금융에서 제약으로, 제약에서 국제기구 허브로 갈아탄 것처럼. 싱가포르가 제조에서 금융으로, 금융에서 AI로 갈아탄 것처럼.
불가결성의 평균 수명은 시대에 따라 단축되고 있다. 중세에는 수백 년이 걸렸지만, 근대에는 수십 년이면 대체재가 나타난다. AI 시대에는 그 주기가 더 짧아질 수 있다. 기술 격차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다음 격차를 준비하는 것, 그것이 진짜 전략이다.
리콴유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불가결성을 만들어냈다. 자원도 인구도 심지어 독립의 의지도 없었던 곳에서, 세계가 없앨 수 없는 나라를 설계했다. 그가 증명한 것은 단 하나다. 불가결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설계하는 것이다.
이제 그 프레임워크를 들고 현재로 돌아올 차례다. 다섯 가지 조건을 거울 삼아 현대의 일곱 나라를 비춰볼 것이다 — 대만의 실리콘 방패에서 시작해, 이스라엘의 전장 위 유니콘, 네덜란드의 빛의 독점, 인도네시아의 니켈 사다리, UAE의 모래 위 피벗, 일본의 부활과 쇠퇴까지. 각 거울 속에서 한국의 얼굴이 비칠 것이다.
3장 끝 — 리서치 소스: R-04, C-01, R-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