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7일 금요일,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
아침 8시, 본부장급 임원 한 명이 책상 위 두 개의 문서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왼쪽은 워싱턴발 이메일이다.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이 몇 시간 뒤 발표할 반도체 수출통제 규정의 사전 통보문. 오른쪽은 시안(西安) 공장에서 올라온 생산 현황 보고서다. 삼성전자 전체 NAND 플래시 생산량의 약 40퍼센트가 그 중국 공장에서 나온다.
왼쪽 문서는 오른쪽 문서를 불법으로 만들려 하고 있었다.
그날 밤 BIS가 발표한 규정은 반도체 역사상 가장 포괄적인 수출통제였다. 16나노미터 이하 로직 칩, 128단 이상 NAND, 18나노미터 이하 DRAM을 생산할 수 있는 장비의 대중국 수출이 전면 금지됐다. 미국 시민권자가 중국 첨단 반도체 기업을 위해 일하는 것 자체가 금지됐다. 미국 기술이 한 조각이라도 들어간 장비로 만든 반도체는, 지구 어디에서 제조하든, 중국으로 보내려면 미국 정부의 허가가 필요했다.
규정의 표적은 중국이었다. 그러나 총알이 먼저 맞은 곳은 한국이었다.
삼성전자의 시안 NAND 공장. SK하이닉스의 우시 DRAM 공장과 대련 NAND 공장. 한국 반도체 산업의 심장부 중 상당 부분이 중국 땅 위에서 뛰고 있었다. 이 공장들은 미국산 장비 — ASML의 노광기,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의 증착 장비, 램 리서치의 식각 장비 — 없이는 단 하루도 운영할 수 없었다. 새로운 규정에 따르면 이 장비들의 유지보수 부품조차 허가 없이는 중국에 반입할 수 없었다.
한국 정부는 즉각 워싱턴에 유예를 요청했다. 1년의 시간을 얻었다. 그리고 2023년 10월, 유예는 무기한으로 연장됐다. "검증된 최종사용자(VEU)" 지위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국 외교의 성과라고 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더 냉정한 계산이 있었다. 만약 삼성과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이 멈추면,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공급의 상당 부분이 증발한다. 미국의 데이터 센터, 아이폰, 자동차에 들어가는 칩이 부족해진다. 미국은 중국을 치려다 자기 발을 쏠 뻔한 것이다.
한국이 살아남은 이유는 외교력만이 아니었다. 구조적 상호의존 — 한국 없이는 세계 반도체 공급망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 — 이 한국의 방패였다.
그런데 그 방패는 영원한가?
사이에 서다
이 책은 사이에 대한 이야기다.
한국은 사이에 있다. 미국과 중국 사이. 선진국과 신흥국 사이. 제조 강국과 디지털 강국 사이. 인구 위기와 기술 도약 사이. 이 "사이"는 약점처럼 보인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어중간한 위치. 그러나 이 책이 말하려는 것은 정반대다. "사이"야말로 전략적 자산이 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자동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 "사이"는 하나가 아니다.
지리적 사이가 있다. 한국은 미국의 군사 동맹국이면서 중국의 최대 교역 파트너 중 하나다. 2024년 한국 수출의 약 20퍼센트가 중국으로, 약 19퍼센트가 미국으로 향했다. 두 거인의 팔이 겹치는 좁은 공간에서, 한국은 한쪽 팔을 밀치지 않으면서 다른 쪽 팔도 붙잡고 있어야 한다. 2022년 10월의 반도체 사태가 보여준 것처럼, 이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기술적 사이도 있다. 한국은 HBM(고대역폭 메모리)에서 세계 시장의 62퍼센트를 차지하지만, EUV 노광기 하나 만들지 못한다. AI 모델을 훈련시키는 GPU를 설계하지도, 제조하지도 않는다.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수율은 50퍼센트 수준으로 TSMC의 90퍼센트에 한참 못 미친다. 한국은 반도체 공급망의 특정 고리에서 지배적이지만, 전체를 장악하지는 못한다. 기술 선도국과 추격국의 사이 어딘가에, 불안하게 서 있다.
그리고 시간적 사이 — 한국은 위기와 기회의 교차점에 서 있다. 합계출산율 0.72라는 세계 최저의 인구 절벽이 다가오면서, 군 사단이 해체되고 시골 마을이 소멸하고 있다. 동시에 SK하이닉스의 HBM은 엔비디아의 AI 가속기에 독점 공급되며 사상 최대 이익을 올리고 있다. K-팝과 K-드라마는 넷플릭스 글로벌 차트를 지배한다. 한국은 쇠퇴하고 있는가, 아니면 도약하고 있는가? 답은 "둘 다"다. 바로 그 동시성이 한국을 세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전략적 실험실로 만든다.
공식의 귀환
이 시리즈를 처음부터 읽어온 독자라면 하나의 공식을 기억할 것이다.
기술 혁신 → 자본 집중 → 사회 불안 → 제도 재설계
1권 『밀린 자와 읽은 자』에서 우리는 이 공식이 로마의 농업 혁명에서, 영국의 산업 혁명에서, 미국의 철도 혁명에서 반복되는 것을 보았다. 기술이 도약할 때마다 자본은 소수에게 집중되고, 다수는 밀려나고, 사회는 불안해지고, 결국 제도가 재설계된다. 그라쿠스의 농지법이, 1833년 공장법이, 셔먼 반독점법이 그렇게 태어났다.
2권에서는 이 공식이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AI 제국의 충돌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았다. 3권에서는 자본의 흐름이, 4권에서는 제도의 속도가 국가의 운명을 어떻게 가르는지를 보았다.
5권은 이 공식을 국가 단위로 적용한다.
AI 혁명이라는 기술 혁신이, 반도체·배터리·데이터라는 자본을 미국과 중국 두 축으로 집중시키고 있다. 그 사이에 낀 나라들 — 한국, 대만, 싱가포르, 이스라엘, 네덜란드, 인도네시아, UAE, 일본 — 은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편을 골라야 하는가? 아니면 어느 편에도 서지 않을 수 있는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 어느 편도 포기할 수 없는 존재가 될 수 있는가?
이것이 5권의 핵심 질문이다.
제3의 플레이어
2권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우리는 하나의 열린 질문을 남겼다.
"이 두 거인의 사이에서 제3의 플레이어로 살아남는 나라가 있을 것이다. 그 나라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이 책은 그 질문의 답이다.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먼저 역사로 간다. 중세 한자동맹의 상인들은 어떻게 200개 도시의 네트워크로 유럽 교역을 독점했는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는 어떻게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가 되어 해양 패권을 장악했는가. 스위스는 어떻게 두 차례 세계대전의 한가운데에서 중립을 수익으로 전환했는가. 리콴유는 어떻게 말레이시아에서 쫓겨난 작은 섬을 1인당 소득 67,000달러의 금융 허브로 만들었는가.
그 역사에서 하나의 법칙이 도출된다. 우리는 그것을 "불가결성의 다섯 가지 조건"이라 부를 것이다.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을 뿐 아니라 번영하는 나라들이 공유하는 특성. 기술적 독점, 공급망 비대칭, 제도적 유연성, 인재 생태계, 안보와 경제의 균형. 이 다섯 조건을 갖춘 나라를 우리는 "불가결 노드(Indispensable Node)"라 부른다. 어느 편도 쉽게 배제하거나 대체할 수 없는 존재.
2022년 10월,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의 수출통제에서 유예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 한국이 불가결 노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미국도 한국 없이는 안 됐다. 그러나 "가까운" 것과 "확실한" 것은 다르다. 2025년 8월, 미국은 무기한 유예를 취소하고 연간 라이센스 체제로 전환했다. "영구 면제"의 환상은 3년 만에 끝났다.
불가결성은 영원하지 않다. 이 책은 그것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전략에 대한 것이다.
일곱 개의 거울
역사에서 법칙을 추출한 뒤, 우리는 현재로 돌아온다. 그리고 일곱 개의 나라를 거울로 삼아 한국의 얼굴을 비춰본다.
대만은 TSMC라는 단 하나의 기업으로 지정학적 방패를 만들어냈다. 전 세계 첨단 파운드리의 90퍼센트. 대만을 공격하면 세계 AI 혁명이 멈춘다. 그 "실리콘 방패"는 한국이 HBM으로 구축하려는 전략의 원형이다. 그러나 방패는 동시에 덫이기도 하다. 미국이 TSMC를 애리조나로 이전시키면, 방패는 사라진다.
이스라엘은 전쟁터에서 유니콘을 키운다. 8200부대 출신 청년들이 만든 사이버보안 스타트업이 320억 달러에 구글에 인수된다. 안보 위기가 혁신의 동력이 되는 역설. 한국도 징병제가 있지만, 군 복무가 스타트업 인큐베이터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싱가포르는 규제를 상품으로 판다. 홍콩이 무너지자, 패밀리오피스가 4년 만에 5배 늘었다. 국가보안법 한 줄이 수조 달러의 자본을 이동시켰다. 자본은 신뢰를 구입하지 않는다. 임차할 뿐이다. 그리고 임대료를 가장 합리적으로 제시하는 나라가 이긴다.
네덜란드는 ASML이라는 유일무이한 기업이 전 세계 반도체의 최상류를 장악한다. EUV 노광기의 세계 유일 공급자. 그런데 그 독점의 "스위치"를 쥐고 있는 것은 네덜란드가 아니라 미국이다. 기술 병목의 권력과 그 권력의 정치학.
인도네시아는 니켈이라는 카드를 들고 있다. 수출 금지 한 방으로 EV 배터리 공급망 전체를 재편했다. 그러나 니켈 정련의 75퍼센트를 중국 기업이 장악하고, 바다는 붉게 물들고 있다. 자원이라는 카드의 유효기간은 얼마나 되는가.
UAE는 석유가 마르기 전에 미래를 사려 한다. 3,300억 달러의 국부펀드로 AI에 투자하고, 중국 파트너를 끊고 미국 편에 서는 피벗을 실행한다. 자본으로 불가결성을 살 수 있는가.
일본은 한국의 거울이다. 잃어버린 30년, 고독사 76,000명, 인구 감소. 그러나 동시에 라피더스라는 2나노 반도체 국가 프로젝트와 TSMC 구마모토 공장으로 반도체 부활을 꿈꾼다. 일본의 오늘은 한국의 내일인가. 아니면 한국은 다른 길을 갈 수 있는가.
일곱 개의 거울 속에서 한국의 모습이 비친다. 어떤 거울에서는 가능성이 보이고, 어떤 거울에서는 경고가 보인다. 그 모든 상(像)을 겹치면,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의 윤곽이 드러난다.
이 책의 여정
이 책은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 "불가결성의 원형"에서는 역사 속 사이의 전략가들을 만난다. 한자동맹의 상인, 네덜란드의 무역업자, 스위스의 은행가, 싱가포르의 건국자. 그들의 성공과 실패에서 불가결성의 법칙을 귀납한다.
제2부 "일곱 개의 거울"에서는 현재 미중 경쟁 속에서 각자의 생존 전략을 실행하는 일곱 나라를 방문한다. 대만의 실리콘 방패, 이스라엘의 안보 혁신, 싱가포르의 규제 플랫폼, 네덜란드의 기술 병목, 인도네시아의 자원 사다리, UAE의 주권자본 피벗, 일본의 부활과 쇠퇴. 각 거울에서 한국의 모습을 비춰본다.
제3부 "한국, 사이에 서다"에서는 거울을 내려놓고 한국 자체를 정면으로 본다. 반도체와 배터리라는 두 날개, 규제 경직성과 인구 절벽이라는 두 약점, K-컬처와 재벌이라는 양면적 자산. 그리고 기술 혁신의 그림자 속에서 밀려나는 사람들 — 공장에서, 은행에서, 자영업 현장에서 자리를 잃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제4부 "불가결의 전략"에서는 진단을 처방으로 전환한다. 공급망 대전환 속에서 한국의 좌표를 설정하고, 불가결 노드의 다섯 조건으로 한국을 점수 매기고, 읽은 자의 실행 전략을 제시한다.
4권의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제도의 속도가 국가의 운명을 가른다. 그렇다면 한국은? AI 기본법이 국회에서 3년 반을 표류하는 동안, 싱가포르는 세계 최초의 AI 거버넌스 프레임워크를 시행했고, 중국은 4개월 만에 생성형 AI 규제를 통과시켰다. 한국의 제도는 한국의 기술을 따라잡고 있는가?
그러나 역설이 있다. 느린 제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은 불가결하다. SK하이닉스의 HBM 없이는 엔비디아의 AI 가속기를 만들 수 없고, 삼성의 메모리 없이는 세계의 데이터 센터가 작동하지 않는다. 이것은 한국의 제도가 느려도 된다는 뜻인가? 아니면, 제도가 빨라진다면 한국이 지금보다 훨씬 더 불가결해질 수 있다는 뜻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여행을 시작한다. 먼저 13세기 뤼베크의 항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