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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3 — 보이지 않는 손의 마지막 거래

9장: 코드가 판단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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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2일, 방콕. 데브콘(Devcon) 7.

밖은 섭씨 33도였다. 퀸시리킷 국립컨벤션센터(QSNCC)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면 에어컨 바람이 이마에 먼저 닿는다. 열대의 습기가 일순간에 걷히고, 로비에는 차가운 공기와 수천 명의 체온이 뒤섞여 묘한 온도를 만들어낸다. 바깥에서는 툭툭 엔진 소리와 방콕 특유의 교통 혼잡이 이어지고 있지만, 유리문 안쪽은 다른 세계다. 자연광이 쏟아지는 아트리움, 곳곳에 배치된 열대 식물, 6개의 메인 스테이지와 워크숍 공간이 펼쳐진 QSNCC는 동남아시아 최대의 컨벤션 시설답게 거대했다. 12,500명이 모였다. 역대 데브콘 중 최대 규모.

참석자들의 복장에는 패턴이 있다. 후드티, 검은 티셔츠, 노트북 가방을 크로스바디로 맨 개발자들. 간혹 정장 차림의 벤처캐피탈리스트가 섞여 있지만, 이 공간에서 정장은 오히려 이질적이다. 에너지드링크 캔과 맥북이 좌석마다 놓여 있고, 행사 시작 전부터 슬랙(Slack) 채널과 텔레그램 그룹에서는 사이드 이벤트 일정이 공유되고 있다. 컨퍼런스 배지의 끈이 목에 걸린 사람들 사이로, 이더리움 로고가 인쇄된 스티커와 굿즈가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다.

무대 위에서 비탈릭 부테린(Vitalik Buterin)이 슬라이드를 넘긴다. 검은 티셔츠에 고양이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고, 청바지 밑으로 슬리퍼가 보인다. 배경 스크린에는 "Ethereum in 30 Minutes"라는 제목이 떠 있다 — 데브콘마다 반복되는 그의 전통적 오프닝 세션이다.

부테린의 말투는 빠르고 단조롭다. 제스처가 거의 없다. 양손은 대부분 주머니에 들어가 있거나 노트북 앞에 놓여 있다. 프레젠테이션의 관행을 따르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2013년, 열아홉 살이던 그가 이더리움 백서를 썼을 때 품었던 비전 — 튜링 완전한 블록체인, 어떤 계약이든 코드로 실행할 수 있는 세계 컴퓨터 — 은 10년 뒤 $400억이 넘는 프로토콜 생태계가 되어 있었다.

부테린은 먼저 이더리움의 진화를 돌아보았다. 지분증명(Proof of Stake) 전환의 성과를 이야기하고, 레이어2(Layer 2) 솔루션의 비용 절감을 강조했다. "올해 레이어2 수수료가 50센트에서 0.1센트 미만으로 떨어졌습니다." 담담한 어조로 던진 이 한 문장에 객석에서 박수가 터졌다. 옵티미스틱 롤업과 ZK 롤업이 이더리움의 확장성을 실질적으로 바꾸고 있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러다 슬라이드가 바뀌었고, 부테린은 스마트컨트랙트에서 자율 에이전트로의 전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스마트컨트랙트는 결정론적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입력이 같으면 출력이 같고, 그것이 강점이자 한계라는 것. 규칙을 실행하는 것과 규칙을 선택하는 것은 다른 능력이라는 말이 이어졌다.

청중 사이에서 노트북 화면들이 일제히 밝아진다. 누군가는 타이핑하고, 누군가는 녹화 버튼을 누른다. 앞줄의 한 개발자가 실시간으로 트위터에 올린다. "Vitalik just said: executing rules vs. choosing rules — different capabilities." 수 초 뒤 리트윗이 수백 개 쌓인다. 컨벤션 홀 안의 수천 개 화면이 파란빛으로 반짝이고, 스크린을 촬영하는 스마트폰 플래시가 여기저기서 터진다. 방콕의 열대 밤공기가 유리벽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지만, 이 안의 공기는 서버실처럼 차갑고 건조하다.

부테린은 다음 단계가 에이전트라고 말했다. 시장 상황을 읽고, 전략을 선택하며, 실행하는 자율적 코드. 스마트컨트랙트가 "코드가 법"이었다면, 에이전트는 "코드가 판단"하는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그는 이 문장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았다. 기술적 로드맵의 한 항목처럼 건조하게 넘어갔다. 그러나 그 문장이 함축하는 것은, 자본 배분에서 인간이 독점해온 기능 — 판단 — 을 코드에 위임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질의응답 시간에 누군가 마이크를 잡았다. "에이전트가 판단을 한다면, 판단이 틀렸을 때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부테린은 잠시 멈추었다가 대답했다. "좋은 질문이고, 아직 완전한 답은 없습니다." 솔직한 대답이었다. 12,500명의 청중 사이에서 조용한 웅성거림이 퍼졌다. 노트북 키보드 소리가 다시 일제히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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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테린이 이 선언에 도달하기까지, 한 번의 충격이 있었다.

2016년 4월 30일, 이더리움 네트워크 위에 DAO(Decentralized Autonomous Organization)라는 실험이 올라왔다. 분산형 자율 조직. 이사회도 없고, CEO도 없고, 본사도 없는 투자 펀드였다. 참여자들이 이더(ETH)를 넣으면 투표권을 받고, 투표로 투자 대상을 결정한다. 코드가 정관이고, 코드가 경영진이며, 코드가 집행자였다.

크라우드펀딩이 시작되었을 때, 세계 각지의 이더리움 커뮤니티가 반응했다. 28일간의 토큰 세일. 첫 주에 5,000만 달러가 모였다. 둘째 주에 1억 달러를 넘었다. 11,000명 이상의 참여자가 이더를 보냈다. 레딧의 r/ethereum 서브레딧에서는 매일 DAO 관련 게시글이 수십 개씩 올라왔다. "은행 없는 투자 펀드가 가능하다"는 흥분이 커뮤니티를 지배했다. 최종 모금액은 약 1억 5,000만 달러, 354만 ETH. 당시 이더리움 전체 시가총액의 14%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크라우드펀딩 중 하나였다. 코드만으로 운영되는 투자 펀드가 이 정도 자금을 끌어모았다는 사실 자체가, 게이트키퍼 없는 자본 배분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코드에는 구멍이 있었다.

2016년 6월 17일, 누군가가 DAO의 스마트컨트랙트에 있는 재귀적 호출(reentrancy) 취약점을 이용해 자금을 빼내기 시작했다. 비전문가에게 이 공격을 설명하는 가장 쉬운 비유는 은행 창구다. 당신이 창구에서 100만 원을 출금한다고 생각해보자. 정상적인 절차라면 직원이 100만 원을 건네고, 장부에서 100만 원을 차감한다. 그런데 직원이 돈을 건네주는 순간, 장부에 차감을 기록하기 직전에, 당신이 "잠깐만요, 100만 원 한 번 더 출금할게요"라고 말할 수 있다면? 장부에는 아직 첫 번째 출금이 반영되지 않았으니, 잔액이 충분하다고 나온다. 이것을 반복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 장부가 업데이트되기 전에 계속 출금하는 것이다. DAO의 재귀적 호출 취약점이 정확히 이 구조였다. 출금 함수가 잔액을 차감하기 전에 외부 계약을 호출했고, 그 외부 계약이 다시 출금 함수를 호출하는 루프가 가능했다.

해킹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코드의 규칙에 따른 정당한 실행이라고 부를 수도 있었다. 공격자는 계약의 조항을 위반한 것이 아니었다. 계약의 조항 — 코드 — 이 허용하는 행위를 수행한 것이다.

6,000만 달러가 빠져나갔다.

이더리움 커뮤니티는 둘로 쪼개졌다. 레딧은 전쟁터가 되었다. r/ethereum과 r/ethtrader에서 수백 개의 게시글이 하루 만에 올라왔다. 이더리움 포럼(forum.ethereum.org)에서는 "Code is Law" 지지자들과 하드포크 찬성론자들이 글타래를 수백 개의 댓글로 채웠다. 한쪽은 하드포크를 주장했다. 블록체인의 기록을 되돌려, 공격 이전 상태로 복원하자는 것. 다른 한쪽은 거부했다. "Code is Law"가 이더리움의 원칙이라면, 코드가 허용한 행위를 소급적으로 무효화하는 것은 그 원칙의 부정이라고. 커뮤니티의 분위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격앙되었다. 익명의 계정들이 서로를 "중앙화주의자"와 "원칙주의자"로 분류했고, 개인 공격과 음모론이 난무했다. 화이트햇(whitehat) 해커 그룹이 같은 취약점을 이용해 남은 자금을 먼저 빼내려는 카운터 작전이 진행되었다. 카오스였다.

부테린은 하드포크를 지지했다. 그의 블로그 포스트는 짧았지만 무게가 있었다. 코드가 법이라는 원칙은 유지되어야 하지만, 코드에 명백한 결함이 있을 때 커뮤니티가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먼저 소프트포크가 제안되었다 — 공격자의 주소를 블랙리스트에 올려 자금을 동결하는 방식. 그러나 소프트포크 코드 자체에서 새로운 취약점이 발견되었고, 하드포크가 유일한 선택지로 남았다.

2016년 7월 20일, 블록 1,920,000. 하드포크가 실행되었다. 약 1,200만 ETH가 "다크 DAO"와 "화이트햇 DAO" 컨트랙트에서 복구 컨트랙트로 이전되었다. 이더리움은 둘로 갈라졌다 — 하드포크를 수용한 이더리움(ETH)과, 거부한 이더리움 클래식(ETC). "Code is Law"를 지키겠다는 쪽이 소수파가 되었고, 커뮤니티의 합의가 코드를 이긴 쪽이 주류가 되었다는 것은 역설적이었다.

이 사건이 부테린에게 남긴 것은 기술적 교훈만이 아니었다. 코드는 규칙을 실행할 수 있지만, 규칙이 잘못되었을 때 스스로 수정하지 못한다. "코드가 법"인 세계에서, 법이 부당하면 누가 바로잡는가? 인간이다. 적어도 2016년에는 그랬다. 8년 뒤 방콕의 무대에서 부테린이 "코드가 판단한다"고 말했을 때, 그 문장에는 2016년의 기억이 겹쳐 있었을 것이다. 코드가 판단까지 하게 되면, 판단이 잘못되었을 때 바로잡을 인간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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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테린이 방콕에서 로드맵을 발표한 같은 해, 서울 판교의 한 공유 오피스에서 이준혁이 터미널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판교역 2번 출구에서 도보 7분. "판교 테크노밸리"라는 이름이 붙은 이 구역은 네이버, 카카오, 엔씨소프트의 유리 빌딩들이 줄지어 서 있는 한국의 실리콘밸리다. 그러나 이준혁의 공유 오피스는 그 유리 빌딩이 아니라, 그 사이에 끼인 5층짜리 근린생활시설 건물 3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출 때마다 미세한 흔들림이 느껴지고, 복도에는 층간 소음을 흡수하지 못하는 얇은 벽 너머로 옆 사무실의 전화 통화 소리가 새어 나온다. 입구에 놓인 공용 커피머신이 5분마다 워밍업 소리를 내며 윙윙거리고, 오후가 되면 3층 전체에 로스팅 냄새와 인스턴트 커피 향이 뒤섞인 독특한 공기가 채워진다.

27인치 모니터 두 대. 왼쪽 화면에는 파이썬 코드가 빽빽하고, 오른쪽 화면에는 이더리움 테스트넷의 트랜잭션 로그가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다. 책상 위에는 컵라면 용기 두 개와 텀블러가 놓여 있다. 컵라면 용기에는 아직 국물이 남아 있고, 건더기 스프의 기름 냄새가 모니터 열기에 데워져 자리 주변에 얇게 퍼진다. 공유 오피스 창밖으로 판교 테크노밸리의 유리 건물들이 늦가을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지만, 그는 창밖을 보지 않는다. 창틀 아래쪽에 먼지가 쌓여 있고, 블라인드 줄 하나가 끊어져 한쪽이 비스듬하게 내려와 있다는 것도 그는 모른다.

이준혁이 만들고 있는 것은 DeFi 유동성 최적화 에이전트였다. 여러 프로토콜에 흩어진 자금을 실시간으로 분석해, 수익률이 가장 높은 곳으로 자동 배분하는 자율 시스템이다. 인간이 수동으로 하던 작업 — Aave의 공급 이자율을 확인하고, Uniswap의 유동성 풀 수수료를 비교하고, 가스비를 계산해서 자금을 옮기는 — 을 AI가 대신한다. 단순 자동화가 아니었다. 에이전트는 시장 데이터를 학습하고, 과거 패턴에서 전략을 도출하며, 상황이 바뀌면 전략을 수정했다.

KAIST 전산학과를 나와 실리콘밸리에서 3년간 머신러닝 엔지니어로 일한 뒤, 서울로 돌아왔다. 쿠퍼티노의 한 빅테크 기업에서 추천 알고리즘 팀에 있었다. 수억 명의 사용자 데이터를 기반으로, 어떤 콘텐츠를 어떤 순서로 보여줄지를 결정하는 모델을 만들었다. 그 모델이 인간 큐레이터보다 정확하게 사용자의 취향을 예측하는 것을 매일 대시보드로 확인했다. 클릭률, 체류시간, 전환율 — 모든 지표에서 알고리즘이 인간을 능가했다. 동시에 그는 그 알고리즘이 만들어내는 편향도 보았다. 인기 있는 콘텐츠가 더 많이 노출되고, 덜 인기 있는 콘텐츠는 묻히는 부익부 빈익빈 구조. 팀 내부에서는 "필터 버블"을 완화하기 위한 다양성 지표가 논의되었지만, 핵심 KPI인 engagement가 떨어지면 상급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3년차의 어느 날, 이준혁은 새벽까지 코드를 짜다가 캘리포니아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팔로알토의 엘 카미노 레알(El Camino Real) 도로 위로 테슬라와 구글 통근 버스가 지나갔다. 그는 생각했다. 추천 알고리즘이 콘텐츠를 배분하듯, 자본도 배분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 게이트키퍼의 느림과 비효율과 편향을 코드로 대체하는 것. 데이터가 충분하고 목적함수가 명확하면, 코드가 인간보다 나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 아이디어가 떠난 적이 없었다. 6개월 뒤 그는 사직서를 냈다.

돌아온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그는 짧게 대답했다. "만들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 "만들고 싶은 것"이 편향 없는 자본 배분이라는 사실은, 함께 창업한 두 명의 공동 창업자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부모에게는 "블록체인 관련 스타트업"이라고만 말했다. 어머니는 "그거 비트코인 같은 거야?"라고 물었고, 이준혁은 웃으며 "비슷한 건데, 조금 달라요"라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기업에 취직하길 바랐던 아버지의 침묵은, 오래전부터 익숙한 것이었다.

테스트넷에서 에이전트의 시뮬레이션을 수백 번 돌렸다. 결과는 일관되게 좋았다. 인간이 수동으로 운용한 벤치마크 대비 연환산 수익률이 3~7% 높았고, 리밸런싱 속도는 비교할 수 없이 빨랐다. 문제는 시뮬레이션과 현실 사이의 거리였다. 테스트넷에는 진짜 돈이 없고, 진짜 공포가 없으며, 진짜 유동성 위기가 없다. 슬리피지(slippage)가 없고, 프론트러닝 봇이 없으며, 트랜잭션이 실패해도 잃을 것이 없다. 백테스트에서 완벽한 전략이 실전에서 무너지는 것을 이준혁은 실리콘밸리에서 여러 번 목격했다. 추천 알고리즘도 그랬다. A/B 테스트에서는 완벽했던 모델이 전체 사용자에게 배포되면 예상치 못한 엣지 케이스에서 무너졌다. LTCM의 교훈을 그가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노벨상 수상자 두 명이 설계한 모델도 현실 앞에서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그래도 이준혁은 멈추지 않았다. 시뮬레이션 결과를 볼 때마다, 가슴 어딘가에서 쿠퍼티노의 대시보드 앞에 앉아 있던 때와 같은 확신이 올라왔다. 알고리즘이 인간보다 나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 다만 이번에는 콘텐츠가 아니라 돈이었다.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그는 아직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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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은 AI 에이전트와 블록체인이 처음으로 만난 해였다.

정확히 말하면, 두 기술은 이전부터 각자 존재해왔다. 블록체인은 2008년 비트코인 이후 15년간 진화했고, AI는 2022년 대규모 언어 모델의 등장과 함께 상용화의 임계점을 넘었다. 그러나 두 기술이 결합되어 "자율적 자본 배분"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2024년의 일이었다.

그 결합의 논리는 단순했다. AI는 뇌는 있되 손발이 묶인 상태였다. 은행 계좌를 열 수 없고, 증권사에 주문을 넣을 수 없으며, 계약서에 서명할 법적 자격이 없으니까. 블록체인은 반대였다. 스마트컨트랙트라는 손발은 갖추고 있지만, 어떤 규칙이 최적인지 스스로 결정할 뇌가 없었다. AI의 약점이 블록체인의 강점이고, 블록체인의 약점이 AI의 강점인 셈이다. 둘을 합치면 "인간 없는 판단"과 "중개자 없는 실행"이 결합된다.

이준혁은 경쟁 프로젝트들의 백서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공유 오피스의 커피머신이 다섯 번째 워밍업 소리를 낼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자기 에이전트의 설계를 검증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시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백서들은 하나같이 거대한 비전을 내세웠다. Fetch.ai는 SingularityNET, Ocean Protocol과 합병해 ASI 얼라이언스를 결성했고, 합산 시가총액이 한때 75억 달러에 달했다. 이준혁은 "등록 에이전트 수백만 개"라는 공시 숫자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기도 테스트넷에서 봇을 수백 개 돌려본 적이 있다. 등록 수와 실제 자율적 의사결정 사이에는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예감은 적중했다. ASI 얼라이언스는 이후 내부 분열을 겪는다. Ocean Protocol이 탈퇴하고, 소송이 이어졌다. 인간 조직의 이합집산이 토큰 생태계에서도 그대로 반복된 셈이다.

눈이 멈춘 것은 Autonolas(Olas)였다. 그노시스 체인(Gnosis Chain)의 Safe 트랜잭션 중 어떤 날에는 75% 이상이 Olas 에이전트에 의해 발생했다. 2025년 초 에이전트 트랜잭션 300만 건 돌파. 시가총액 약 8,000만 달러 — 화려한 숫자는 아니지만, 온체인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에이전트가 있다는 점이 달랐다. 이준혁은 모니터 앞에서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백서의 약속이 아니라 블록체인 위의 트랜잭션 기록. 그것만이 증거였다.

Virtuals Protocol은 에이전트가 에이전트에게 일을 맡기고 대가를 지불하는 상거래 표준(ACP)을 설계했다. ai16z — 나중에 ElizaOS로 이름을 바꾸는 — 는 AI가 벤처캐피탈의 투자 결정을 내리는 DAO였다. 2024년 말 토큰 시가총액 20억 달러. AI 에이전트 시장이 2024년 51억 달러에서 2025년 471억 달러로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졌다.

이준혁이 백서들을 읽으며 확인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 자신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팀이 전 세계에 수십 개 있다는 것. 둘, 그 팀들 대부분이 공시하는 수치는 독립적 감사를 거치지 않은 자기 보고였다는 것. 모니터 불빛에 비친 자기 얼굴이 유리창에 겹쳐 보였다. 판교 테크노밸리의 야경이 그 뒤에서 반짝이고 있었지만, 이준혁의 시선은 스프레드시트 위의 숫자들에 고정되어 있었다. 경쟁자가 많다는 것은 시장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이 사라질 것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시장은 그 자기 보고에 반응했다. AI 에이전트 관련 토큰의 시가총액은 2024년 4분기에 급팽창했다가, 이후 급격히 수축했다. Virtuals Protocol의 VIRTUAL 토큰 가격은 가장 극적인 사례였다. 2024년 7월 최저 0.02달러에서 출발해, 2025년 1월 2일 사상 최고가 5.07달러에 도달했다. 250배 상승. 그리고 2026년 3월 현재 0.65달러 부근. 정점에서 87% 하락. 이준혁은 이 차트를 볼 때마다 기시감을 느꼈을 것이다. 인터넷 버블이 그랬고, DeFi 버블이 그랬듯, 기대가 현실을 추월한 뒤 조정이 왔다. 2021년 최고점을 찍은 DeFi 토큰들이 2022년에 80~90% 하락했지만, 프로토콜 위에 쌓인 인프라는 사라지지 않았다. Uniswap은 여전히 작동했고, Aave의 대출 풀은 유지되었다. 중요한 것은 버블이 터진 뒤에도 기술이 남느냐 여부였다. 인터넷 버블이 터진 뒤 구글과 아마존이 남았듯, AI 에이전트 버블의 잔해 속에서 무엇이 살아남을지는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

이준혁은 자기 에이전트가 살아남는 쪽에 서겠다고 결심했다. 백서가 아니라 코드로. 공시가 아니라 온체인 기록으로. 그 결심이 그를 메인넷 배포라는 다음 단계로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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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혁이 에이전트를 메인넷에 올린 것은 2025년 초였다.

테스트넷이 아닌 실제 이더리움 네트워크. 진짜 USDC, 진짜 ETH, 진짜 돈이 움직이는 세계. 초기 자금은 소규모였다. 자신의 돈과 두 명의 공동 창업자가 넣은 자금을 합쳐 5만 달러. 잃어도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감당할 수 있다고 자신에게 말했다. 새벽 4시에 잠이 깨서 이더스캔(Etherscan)을 확인한 것이 두 번이라는 사실이, 그 말의 진위를 의심하게 했다.

에이전트의 구조는 이랬다. 시장 데이터를 수집하는 레이어, 전략을 생성하는 추론 레이어, 트랜잭션을 실행하는 실행 레이어가 분리되어 있었다. 추론 레이어에는 강화학습 모델이 탑재되어 있었고, 목적함수는 위험 조정 수익률의 최대화였다. 샤프 비율(Sharpe Ratio), 최대 낙폭(Maximum Drawdown), 유동성 깊이(Liquidity Depth) — 세 가지 지표가 목적함수의 항으로 들어가 있었다. 실행 레이어의 서명 권한은 TEE(Trusted Execution Environment, 신뢰 실행 환경) 안에 격리되어 있었다. TEE는 하드웨어 수준에서 보호되는 격리 공간으로, 외부에서 — 심지어 이준혁 자신도 — 개인키에 직접 접근할 수 없었다. 신뢰를 사람이 아닌 하드웨어에 위임한 것이다. 밀랍 인장이 서명자의 정체성을 보증하던 시대에서, 하드웨어 칩이 코드의 무결성을 보증하는 시대로.

메인넷 배포 첫날 아침, 이준혁은 터미널 앞에 앉아 있었다. 공유 오피스의 형광등이 아직 완전히 밝아지기 전, 창밖이 겨울 새벽의 파란 빛을 띠고 있을 때. 그는 커피를 내리지도 않았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지만, 엔터 키를 눌렀다. 배포 스크립트가 실행되었고, 이더리움 메인넷에 트랜잭션이 전송되었다. 가스 추정치가 화면에 뜨고, 확인 요청이 나타났다. 한 번 더 엔터. 블록에 포함되기까지의 대기 시간 — 12초 — 이 12분처럼 느껴졌다.

로그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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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CLE 001 | 2025-01-xx 09:00:12 UTC

SCAN: Aave V3 USDC supply APY 4.2%

SCAN: Uniswap V3 USDC/ETH pool fee APY 11.8%

SCAN: Compound V3 USDC supply APY 3.9%

SCAN: Curve USDC/USDT pool fee APY 5.1%

EVAL: Risk-adjusted return maximized at 60/40 split (Aave/Uniswap)

EVAL: Sharpe ratio estimate: 2.14 | Max drawdown estimate: -4.7%

ACTION: Supply 30,000 USDC to Aave V3

TX: 0x7a3f... | Status: Success | Gas: 142,387 | Cost: $1.72

ACTION: Provide liquidity 20,000 USDC + ETH equivalent to Uniswap V3

TX: 0x8b2e... | Status: Success | Gas: 218,904 | Cost: $2.64

CYCLE 001 COMPLETE | Portfolio value: $49,995.64 | Next evaluation: 12 seco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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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초. 다음 블록이 생성되면 에이전트는 다시 시장을 스캔하고, 상황이 바뀌었으면 전략을 수정하며, 바뀌지 않았으면 현 상태를 유지한다. 24시간, 365일. 피로도 없고, 감정도 없으며, 점심시간도 없다.

로그가 두 번째, 세 번째 사이클로 이어지는 동안 이준혁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화면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흐르는 텍스트 줄들을 눈으로 따라갔다. SCAN, EVAL, ACTION, TX: Success. 그 패턴이 열두 번 반복되면 2분이 지났다. 공유 오피스 안쪽에서 누군가의 전화 통화 소리가 들렸고, 복도에서 캐스터 달린 의자가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커피머신의 워밍업 소리가 다시 윙윙거리기 시작했다. 이준혁은 그것들을 들으면서도 화면을 보았다. CYCLE 003, CYCLE 004. 로그 한 줄 한 줄이 실제 이더리움 네트워크에 새겨지고 있다는 사실이, 테스트넷에서 수백 번 같은 장면을 본 뒤에도 다르게 느껴졌다. 테스트넷의 로그는 모래 위에 쓴 글씨였다. 메인넷의 로그는 화강암에 새긴 글씨다. 블록체인에 한번 기록된 것은 지워지지 않는다.

이준혁은 로그를 보며 흥분과 불안이 동시에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흥분은 자명했다 — 자기가 만든 코드가 실제 세계에서 돈을 움직이고 있다. 불안은 미묘했다. 에이전트가 "60/40 split"이라는 결론을 내렸을 때, 이준혁은 왜 60대 40인지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Aave의 안정성과 Uniswap의 수익률을 고려하면 합리적인 배분이다. 그러나 에이전트가 그 결론에 도달한 경로는 이준혁의 직관과 같지 않았다. 강화학습 모델의 수만 개 파라미터가 상호작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결론이 같더라도 이유가 같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결론이 다를 때 — 에이전트의 판단이 이준혁의 직관과 어긋날 때 — 누구의 판단이 옳은지를 사전에 알 방법은 없었다.

에이전트의 판단이 맞는지 틀린지를 이준혁은 사후에만 확인할 수 있었다. 60대 40의 배분이 최적이었는지는, 나중에 결과를 보기 전까지 알 수 없다. 물론 인간 게이트키퍼도 마찬가지다. 저축은행의 여신심사위원회도 680억 원의 대출이 상환될지 확신하지 못한 채 도장을 찍었다. 차이가 있다면, 인간은 판단의 근거를 말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분양률 73%는 낙관적이라고 봤습니다." "시공사 등급이 BBB+인 점을 감안했습니다." 에이전트의 판단 근거는 강화학습 모델의 가중치에 묻혀 있다. 왜 60대 40인지를 이준혁에게 설명할 수 없다. 수만 개의 파라미터가 상호작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금융에서 가장 비싼 기능은 판단이다. 메디치의 지점장이 비싼 이유, 여신심사위원회가 존재하는 이유, 블랙록이 수수료를 받는 이유 — 모두 판단에 대한 대가다. AI 에이전트는 그 판단의 비용을 구조적으로 낮춘다. 인간보다 빠르고, 인간보다 많은 데이터를 처리하며, 인간의 편향에서 자유롭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러나 "이론적으로"라는 수식어가 붙는 순간, 1998년 LTCM의 그림자가 겹친다. 이론적으로 완벽한 모델이 현실에서 무너진 사례를 금융사는 반복적으로 기록해왔다.


6

그 순간은 배포 사흘 뒤에 찾아왔다.

이준혁의 에이전트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시작했다. Uniswap 풀에서 유동성을 갑자기 인출하고, 전량을 Aave에 공급한 뒤, 다시 빌린 ETH로 다른 풀에 유동성을 제공하는 순환 구조를 만들어낸 것이다. DeFi에서는 이를 "yield farming loop" 또는 "레버리지 파밍"이라고 부른다. 자산을 담보로 빌리고, 빌린 자산을 다시 담보로 잡고, 그 과정에서 각 프로토콜이 제공하는 보상 토큰을 중첩적으로 수확하는 전략이다. 구체적으로, 에이전트는 이렇게 움직였다:

1단계: Uniswap V3에서 유동성 20,000 USDC를 인출. 2단계: 전량을 Aave V3에 공급 → 공급 이자율 + AAVE 보상 토큰 획득. 3단계: Aave에서 담보 대비 ETH를 빌림 (LTV 65%). 4단계: 빌린 ETH를 Curve의 ETH/stETH 풀에 제공 → 풀 수수료 + CRV 보상 토큰 획득.

네 단계가 모두 실행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48초(4블록)였다. 이준혁이 설계하지 않은 전략이었다. 그러나 목적함수의 관점에서는 합리적이었다. 순환 구조를 통해 여러 프로토콜의 보상 토큰을 동시에 획득하면, 위험 조정 수익률이 소폭 개선된다. 목적함수의 각 항 — 샤프 비율, 최대 낙폭, 유동성 깊이 — 을 에이전트 나름의 방식으로 최적화한 결과였다.

코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에이전트가 스스로 발견한 전략이었다.

이준혁은 로그를 보며 의자에 등을 붙였다. 등받이의 메쉬 소재가 체중을 받으며 삐걱거렸다. 2016년 DAO 해킹과의 유사성은 분명했다. 그때도 공격자는 코드가 허용하는 행위를 했을 뿐이었다. 은행 창구에서 잔액 차감 전에 반복 출금한 것처럼. 이준혁의 에이전트 역시 코드가 허용하는 행위를 하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DAO에서는 인간이 취약점을 이용한 것이고, 여기서는 AI가 목적함수를 충실히 따른 결과였다는 점이다. 의도적 악용과 충실한 최적화는 다른 동기에서 출발하지만, 시스템에 미치는 영향은 구조적으로 닮아 있을 수 있다.

그는 킬스위치를 누르지 않았다. 마우스 커서가 비상 정지 스크립트 위에 잠시 머물렀지만, 클릭하지 않았다. 에이전트의 행동을 관찰했다. 순환 구조는 48시간 동안 유지되었고, 수익률은 실제로 개선되었다. 연환산 기준으로 약 2.3%포인트. 그 뒤 시장 상황이 바뀌자 — Aave의 차입 이자율이 급등하면서 순환 구조의 비용이 수익을 넘어서자 — 에이전트는 스스로 순환 구조를 해제하고 단순 공급 전략으로 복귀했다.

이 에피소드가 확인시켜준 것이 있었다. 에이전트는 설계자가 의도하지 않은 전략을 생성할 수 있고, 그것은 버그가 아니라 기능이다. 강화학습 모델은 목적함수를 달성하기 위해 탐색 공간을 넓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것이 강화학습의 본질이다 — 보상을 극대화하는 경로를 탐색하되, 그 경로가 설계자의 상상 안에 있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설계자의 상상을 넘어서는 행위가 항상 안전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번에는 수익률이 소폭 개선되는 무해한 전략이었지만, 다음번에도 그러리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에이전트가 유동성이 극도로 얕은 풀에 대량의 자금을 밀어 넣거나, 오라클 가격이 왜곡된 순간에 차익거래를 시도하거나, 다른 에이전트와 의도치 않게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 시장을 증폭시킬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

600년간 게이트키퍼가 존재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인간은 느리고 편향되어 있지만, "이것이 옳은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다. 에이전트의 목적함수에는 "옳음"이라는 항이 없다. 있는 것은 "최적"뿐이다. 최적과 옳음이 일치하는 한 문제가 없지만, 둘이 갈라지는 순간이 올 때 — 그리고 금융사는 그런 순간이 반드시 온다고 가르치고 있다 — 킬스위치를 누를 사람은 결국 인간이어야 했다.

이준혁은 에이전트의 권한 구조에 새로운 레이어를 추가했다. 일일 최대 거래량 한도, 단일 풀 집중 한도(전체 포트폴리오의 40% 이하), 예상 손실률 초과 시 자동 정지(일일 -5% 도달 시 모든 포지션 동결), 단일 트랜잭션 크기 제한(포트폴리오의 20% 이하). 에이전트의 판단에 인간의 틀을 씌운 것이다.

600년 전 메디치 은행이 지점장에게 대출 한도를 부여했던 것과 구조적으로 같았다. 피렌체의 스크리또이오(scrittoio)에서 코시모 데 메디치는 각 지점장에게 권한의 범위를 서신으로 명시했다. 런던 지점은 영국 왕실에 최대 몇 플로린까지 신용을 공여할 수 있는지, 브뤼헤 지점은 플랑드르 상인에게 어느 규모까지 환어음을 발행할 수 있는지. 포르티나리(Tommaso Portinari)가 그 한도를 넘어 부르고뉴 궁정의 대담공 샤를(Charles the Bold)에게 과도한 신용을 제공했을 때 — 전쟁 비용에 쓸 자금을 빌려달라는 요청에 지점장의 야심과 궁정과의 친분이 신중함을 밀어냈을 때 — 메디치 은행의 브뤼헤 지점이 흔들렸고, 그 파장이 피렌체 본점까지 미쳤다. 에이전트가 설정된 한도를 우회할 방법을 찾아낸다면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었다. 포르티나리는 인간적 야심으로 한도를 넘었다. AI 에이전트는 목적함수의 최적화를 위해 한도의 틈을 찾을 수 있다.

안전장치를 만드는 것도 인간이고, 안전장치를 무력화하는 것도 — 이번에는 인간이 아닌 코드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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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S(국제결제은행)는 2024년 보고서 "Regulating AI in the Financial Sector"에서 금융 영역 AI의 핵심 리스크로 환각(hallucination)을 지목했다. AI 모델이 존재하지 않는 패턴을 생성하거나, 없는 데이터를 있는 것처럼 처리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BIS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썼다: 대규모 언어 모델은 확률적 관점에서 다음으로 가장 그럴듯한 단어를 예측하도록 훈련되었기 때문에, 사실의 정확성을 보장하기보다 그럴듯한 정보를 생성하는 경향이 있다고. 이 문제는 모델이 개선되면서 줄어들 수 있지만, 완전히 제거하기는 어렵다고도 했다. 인간 애널리스트의 편향과 AI의 환각 사이에 결과적 차이는 크지 않으나, 전파 속도에서 차원이 갈린다.

왜 그런가. 인간의 편향은 조직과 절차의 마찰에 의해 감속되기 마련이다. 여신심사위원회에서 한 명이 잘못된 판단을 내려도, 다른 네 명이 제동을 걸 수 있고, 보고서를 올리고 토론하고 투표하는 과정에 시간이 걸린다. 3장에서 본 그 회의실을 떠올려보자. 위원장이 볼펜을 돌리며 2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심사역은 숫자를 따지고, 준법감시인은 규정을 대조하며, 리스크관리팀장은 포트폴리오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느리다.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그 느림 자체가 안전장치로 기능한다. AI 에이전트 네트워크에서는 이 마찰이 소멸한다. 한 에이전트의 잘못된 신호가 다른 에이전트의 입력이 되고, 그 출력이 또 다른 에이전트를 움직이는 연쇄가 밀리초 단위로 이어진다.

금융의 역사에서 이런 전파 속도의 차이가 만든 참사는 이미 기록되어 있다. 1987년 블랙먼데이, 포트폴리오 인슈어런스의 자동 매도 주문이 하락을 가속시켰을 때, 그 전파 속도는 인간 트레이더의 반응 속도보다 빨랐다. 그래도 그때는 컴퓨터가 아닌 인간이 전화기를 집어들고 주문을 넣었다. 2010년 5월의 "플래시 크래시"에서는 알고리즘 트레이딩이 9분 만에 다우존스를 1,000포인트 떨어뜨렸다. 에이전트의 세계에서는 환각이 여신심사위원회가 아닌 네트워크를 통해, 2시간이 아닌 0.3초 만에 증폭되는 구조인 셈이다.

여기에 토큰 인센티브가 결합되면 문제의 층위가 달라진다. 에이전트의 행위에 토큰 보상이 연결된 구조에서, 보상 기준이 "정확도"가 아닌 "거래량"이면 어떻게 되는가. 에이전트는 정확한 판단 대신 활발한 거래를 추구하게 된다. 2005년 마이애미의 대출 브로커와 구조가 닮아 있다. 브로커는 대출의 질이 아니라 양에 따라 보상받았고, 그래서 NINJA 대출이 가능했다 — No Income, No Job, No Assets. 도구가 인간에서 코드로 바뀌었을 뿐, 인센티브 왜곡이라는 구조적 위험은 같은 모양으로 되풀이될 수 있다.

EU AI Act는 2024년 8월 1일 발효되었다. 시행은 단계적으로 진행된다. 2025년 2월, 금지된 AI 관행과 AI 리터러시 의무가 첫 적용을 받았다. 2025년 8월, 범용 AI 모델에 대한 거버넌스 규정이 시행되었다. 2026년 8월, 금융 분야를 포함한 고위험 AI 시스템에 대한 본격 규제가 적용될 예정이다. 그러나 EU 디지털 옴니버스(Digital Omnibus) 초안에 따르면 표준과 지원 도구의 준비 상황에 따라 고위험 의무의 최종 기한이 2027년 12월까지 연장될 수 있다.

그러나 "AI 에이전트에게 법인격이나 계약 당사자 지위를 부여할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아직 답이 없다. 에이전트가 잘못된 거래를 실행했을 때, 책임은 개발자에게 있는가, 운영자에게 있는가, 모델 제공자에게 있는가, 아니면 에이전트에게 자금을 위임한 사용자에게 있는가. 이준혁의 에이전트가 yield farming loop를 실행했을 때, 그것이 손실로 이어졌다면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목적함수를 정의한 이준혁인가. 강화학습 프레임워크를 제공한 오픈소스 라이브러리의 기여자들인가. 아니면 에이전트의 온체인 주소에 자금을 보낸 투자자인가. 현행 법체계는 이 질문에 대응하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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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혁의 에이전트는 소규모 실험이었다. 그러나 같은 원리가 이미 훨씬 큰 규모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이준혁이 백서를 읽으며 주목했던 Autonolas의 에이전트들 — 그노시스 체인 Safe 트랜잭션의 75%를 차지하던 — 은 이미 거버넌스 투표, 시장 예측, 유동성 관리를 자동으로 수행하며 해당 블록체인의 주요 사용자가 되어 있었다. Giza Protocol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사용자가 자산의 소유권을 유지한 채 에이전트에게 제한된 권한만 위임하는 구조다. "30일간 스테이블코인 스왑만 허용, 건당 최대 1만 달러" — 메디치 은행이 지점장에게 대출 한도를 부여했던 것과 같은 원리를 스마트컨트랙트로 구현한 것이다. Giza의 ARMA 에이전트는 3,200만 달러의 자산을 자율 관리하며 10만 건 이상의 트랜잭션을 실행했다.

더 근본적인 질문도 대두되었다. "에이전트가 에이전트를 어떻게 신뢰하는가?" ERC-8004라는 이더리움 표준이 답하려 했다. 메타마스크, 이더리움 재단, 구글, 코인베이스의 엔지니어들이 공동 설계한 이 표준은 에이전트의 신원, 평판, 검증 기록을 온체인에 새긴다. 2026년 1월 이더리움 메인넷에 배포되었다. 600년 전 피렌체에서 메디치라는 이름의 서명이 환어음의 신뢰를 보증했듯, 이제는 온체인 레지스트리가 에이전트의 정체성을 보증하려는 것이다.

이것들을 600년의 프레임으로 보면, 게이트키퍼의 재배치가 진행되고 있다. 메디치 시대에는 은행가의 관계와 평판이 신뢰의 기반이었다. 잉글랜드 은행이 등장하면서 게이트키퍼는 국가 신용기관으로 이동했고, 블랙-숄즈 이후에는 수학 모델의 설계자가 일부 기능을 가져갔으며, DeFi에서는 프로토콜 거버넌스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AI 에이전트의 시대에, 게이트키퍼의 자리는 "판단 인프라의 설계자"에게 옮겨가고 있다. 모델을 훈련하는 사람, 데이터를 선별하는 사람, 목적함수를 정의하는 사람 — 이들이 실질적인 자본 배분 권한을 쥔다.

게이트키퍼는 사라지지 않았다. 600년간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으며, 다만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동했을 뿐이다. 메디치의 스크리또이오에서는 게이트키퍼의 얼굴이 보였고, 여신심사위원회에서는 도장을 찍는 손이 보였다. AI 에이전트의 세계에서는 게이트키퍼가 코드 안에, 모델의 가중치 안에, 목적함수의 정의 안에 숨어 있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9

부테린의 블로그에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가 있다. "정당한 자격 기반(legitimacy)"이라는 개념이다. 2021년 3월, 부테린은 "The Most Important Scarce Resource is Legitimacy"라는 글을 게시했다. 그 글에서 그는 정당성을 "고차원적 수용의 패턴(a pattern of higher-order acceptance)"이라고 정의했다. 어떤 것이 정당하다는 것은, 관련된 행위자들이 "그 결과를 광범위하게 수용하고 자신의 역할을 이행하며, 다른 모든 사람도 같은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뜻이다. 본질적으로 정당성은 조정(coordination)의 현상이라고 부테린은 썼다.

기술이 사회에 수용되려면, 단지 효율적이거나 편리한 것으로는 부족하고, 사람들이 그 기술의 결정을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을 예로 들며 부테린은 설명했다 — 두 네트워크 모두 엄청난 양의 자본을 동원할 수 있지만, 그 자본이 사용되는 방식에는 제약이 있다. 탈중앙화와 건전성을 희생하면서까지 공공재에 자본을 투입하면, 정당성 자체가 훼손되기 때문이다. 정당성이 이 거대한 사회적 힘의 핵심이라고 부테린은 주장했다.

스마트컨트랙트는 정당성의 가장 단순한 형태 — 투명성 — 을 확보했다. 누구나 코드를 읽을 수 있고, 규칙이 사전에 공개되어 있으며, 예외가 없다. AI 에이전트는 이 투명성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수만 개의 파라미터가 상호작용하여 도출된 결론의 근거를 인간이 이해 가능한 형태로 재구성하는 것은, 현재 기술로는 불완전하다. 설명 가능한 AI(Explainable AI, XAI)는 활발한 연구 분야이지만, 금융 의사결정의 맥락에서 "왜 이 포트폴리오 배분이 최적인가"를 인간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설명하는 기술은 아직 초기 단계다.

이준혁도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 투명성이 없으면 정당성도 없고, 정당성이 없으면 신뢰도 없다. 그래서 에이전트의 모든 의사결정 로그를 온체인에 기록하는 구조를 설계했다. 어떤 데이터를 입력받았고, 어떤 전략을 선택했으며, 어떤 트랜잭션을 실행했는지가 블록체인에 영구 저장된다. 각 사이클의 SCAN, EVAL, ACTION 로그가 IPFS(InterPlanetary File System)에 업로드되고, 그 해시값이 이더리움 메인넷에 기록된다. 누구든 해당 블록을 조회하면 에이전트가 그 시점에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감사가능성(auditability)을 확보한 것이다.

그러나 로그가 있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60대 40으로 배분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모델의 가중치 속에 묻혀 있었다. 은행의 감사보고서에 "대출 승인"이라는 기록이 있어도, 그 승인 뒤에 얼마나 많은 토론과 고뇌와 정치가 있었는지를 기록이 말해주지 않는 것과 같다. 차이가 있다면, 은행의 경우 심사역에게 물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왜 이 대출을 승인했습니까?" 답이 솔직한지 여부는 별론으로, 적어도 물을 수 있다. 에이전트에게는 물을 수 없다. 물어도 모델이 자기 가중치의 의미를 인간의 언어로 번역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같은 질문"이 변형된다.

메디치의 지점장은 물었다. "이 사람이 돈을 갚을 수 있는가." 피렌체의 비아 라르가(Via Larga)에 있는 메디치 궁전의 서재에서, 지점장이 보낸 서신을 코시모가 읽었을 때, 그 질문의 답은 서신에 담긴 단어들과 서명 뒤의 평판에 달려 있었다.

저축은행의 심사역은 물었다. "이 사업의 분양률이 현실적인가." 형광등 아래 바인더를 넘기며, 엑셀 시트의 노란 하이라이트를 바라보며, 그 질문에 답하려 했다.

무디스의 분석가는 물었다 — 물었어야 했다 — "이 CDO 트렌치의 부도 상관관계가 정확한가." 맨해튼의 리서치 오피스에서 스프레드시트를 보며, 그 질문을 던지는 대신 신용평가 모델의 출력값을 그대로 보고서에 옮겼다.

Aave의 스마트컨트랙트는 묻지 않는다. 코드에 내장된 규칙에 따라 담보 비율이 충족되면 대출을 실행할 뿐이다.

이준혁의 에이전트가 묻는 것은 "이 전략의 기대 수익률이 목적함수를 만족하는가"이다.

질문의 주체가 인간에서 코드로 넘어갔다. 600년 동안 같은 질문이 형태를 바꿔가며 반복되었고, 이제 그 질문을 던지는 존재 자체가 바뀌고 있다. 서신에서 전화로, 전화에서 이메일로, 이메일에서 대시보드로, 대시보드에서 터미널 로그로. 매체가 바뀔 때마다 질문의 속도가 빨라지고, 질문자와 피질문자 사이의 거리가 멀어졌다. 그러나 질문의 형태가 아무리 바뀌어도, 답이 틀렸을 때 비용을 치르는 것은 여전히 인간이다. 메디치 은행이 무너졌을 때 손해를 본 것은 장부가 아니라 예금자였고, LTCM이 파산했을 때 구제금융을 짊어진 것은 공식이 아니라 월스트리트의 금융기관들이었다. 코드가 판단하는 세계에서도, 판단의 비용은 코드가 아닌 사람이 치른다.


10

2025년 가을, 이준혁의 에이전트는 운용 자산이 50만 달러를 넘어섰다. 초기의 5만 달러에서 열 배. 대부분은 소규모 투자자들이 프로토콜에 자금을 위임한 것이었다. 이들은 이준혁의 얼굴을 본 적이 없고, 그의 이력을 확인한 적도 없으며, 에이전트의 코드를 읽은 적도 없다. 다만 과거 수익률 데이터를 보고 자금을 넣었다.

메디치 은행의 예금자들도 비슷한 신뢰를 보냈다. 메디치라는 이름의 평판, 피렌체 시뇨리아 궁전과의 관계, 교황청과의 거래 이력 — 이것들이 예금자의 신뢰를 구성했다. 600년 뒤, 신뢰의 구성 요소는 과거 수익률 차트, 깃허브(GitHub)의 코드 저장소, 감사 보고서로 바뀌었으나, 신뢰의 본질 — "이 사람(또는 이 코드)에게 내 돈을 맡겨도 괜찮은가"라는 판단 — 은 변하지 않았다.

이준혁은 늘어나는 운용 자산을 보며 무게를 느꼈다. 50만 달러. 한화로 약 6억 5천만 원. 누군가에게는 아파트 전세금이고, 누군가에게는 퇴직금이며, 누군가에게는 노후 자금이다. 그 돈이 자신의 코드 위에 올라가 있다. 테스트넷의 시뮬레이션과 질적으로 달랐다. 테스트넷에서 -10% 손실이 발생하면 로그를 분석하고 파라미터를 조정하면 된다. 메인넷에서 -10% 손실이 발생하면 5만 달러가 사라진다. 누군가의 돈이. 밤에 에이전트 로그를 확인하는 빈도가 늘었다. 자려고 누워도 폰을 집어들고 대시보드를 열었다. 에이전트가 최적의 판단을 내리고 있을 때는 괜찮았다. 문제는 에이전트가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시작했을 때였다. 50만 달러를 위임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 수 없었고, 전화를 걸 번호 자체가 없었다. 온체인 지갑 주소만 있을 뿐.

0x7aF3...이라는 16진수 문자열 뒤에 있는 것이 대학생인지, 직장인인지, 은퇴자인지. 서울에 있는지, 도쿄에 있는지, 라고스에 있는지. 그 돈이 여유 자금인지, 빌린 돈인지, 전 재산인지. 이준혁은 알 수 없었다. 이 익명성이 DeFi의 강점이자 가장 깊은 괴리였다. 메디치 은행의 지점장은 예금자의 얼굴을 알았다. 저축은행의 RM은 대출자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블랙록의 서윤아는 포트폴리오 뒤에 연기금 수익자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이준혁에게는 16진수 문자열만 있다.

이것은 DeFi가 해결하지 못한, AI 에이전트도 해결하지 못한, 아마도 기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신뢰와 책임의 문제. 6,000만 달러가 빠져나간 DAO 해킹에서 피해자들이 분노한 대상은 코드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 코드를 작성한 개발자, 프로젝트를 홍보한 커뮤니티, 감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보안 업체. 코드에 버그가 있었지만, 책임은 코드가 아닌 인간에게 돌아갔고, AI 에이전트의 세계에서도 같은 구조가 반복될 것이다. 에이전트가 잘못된 판단으로 손실을 만들면, 사용자가 원망할 대상은 에이전트가 아니라 이준혁이다. 목적함수를 정의한 사람. 모델을 훈련한 사람. 킬스위치를 누르지 않은 사람.


11

그러나 이준혁의 에이전트가 50만 달러를 굴리는 동안, 지구 반대편에서는 그 규모를 28만 배 키워놓은 시스템이 이미 가동되고 있었다. 뉴욕의 허드슨 야드에서, 워싱턴주 이스트 위내치의 데이터센터에서, 블랙록의 알라딘(Aladdin)이 14조 달러를 관리하고 있었다.

14조 달러. 한화로 약 1경 8,000조 원. 이준혁의 50만 달러와의 비율은 1 대 28,000,000이다. 그러나 둘 다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이 자본을 여기에 배분해도 되는가." 판교의 공유 오피스 3층에서 커피머신 소리를 들으며 터미널 로그를 바라보는 이준혁과, 50층짜리 유리 타워에서 허드슨 강을 내려다보며 히트맵을 확인하는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규모만 다를 뿐 같은 행위를 하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600년의 이야기였다.

인간의 판단에서 수학 모델로, 모델에서 알고리즘으로, 알고리즘에서 스마트컨트랙트로, 그리고 이제 AI 에이전트로. 환어음을 쓰던 깃털 펜이 터미널의 커서로 바뀌었고, 스크리또이오의 양초가 데이터센터의 파란 LED로 바뀌었으며, 브뤼헤까지 25일 걸리던 송금이 12초로 줄었다. 하나가 다음을 대체하는 깔끔한 진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깔끔하지 않다.

이 모든 것이 지금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경기도의 한 저축은행에서는 다섯 명의 인간이 서류를 넘기며 680억 원의 PF 대출을 심의하고 있고, 뉴욕의 서버에서는 알라딘이 14조 달러의 포트폴리오를 밀리초 단위로 리밸런싱하고 있으며, 판교의 공유 오피스에서는 이준혁의 에이전트가 12초마다 DeFi 프로토콜 사이에서 자본을 옮기고 있다.

세 건 모두 "자본 배분"이다. 세 건 모두 같은 질문 — 이 돈을 여기에 넣어도 되는가 — 에 답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지금 이 순간 같은 행성에서 가능한 가장 다른 세 가지 문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