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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0월 19일 월요일, 오전 7시. 뉴욕증권거래소(NYSE).
맨해튼 남단 브로드 스트리트 18번지. 거래소 정문의 코린트식 기둥 여섯 개가 아직 어둠이 남은 하늘을 향해 서 있다. 1903년에 완공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파사드 — 조지 포스트(George B. Post)가 설계한 이 건물은 월스트리트의 얼굴이다. 기둥 사이로 이른 아침의 찬 공기가 흘러들어왔다. 10월 뉴욕의 새벽은 차갑다. 허드슨 강에서 올라온 안개 냄새와 월스트리트의 아침 — 커피 카트에서 피어오르는 김, 택시 매연, 바닥에 버려진 신문의 잉크 냄새 — 가 섞여 있었다. 그날 아침 《뉴욕타임스》의 1면 머리기사는 금요일의 108포인트 폭락이었다.
평소라면 개장 두 시간 전의 거래소 플로어는 고요하다. 말굽 모양의 거래 포스트(post) 17개가 늘어선 넓은 홀에서, 스페셜리스트들이 커피를 마시며 장부를 정리하는 시간이다. 플로어의 면적은 약 3,300제곱미터 — 축구장의 절반 크기다. 천장은 22미터 높이. 아치형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아래로 쏟아지면, 거래 포스트의 나무와 금속 표면이 은은하게 빛난다. 성당 같은 공간에서, 자본주의의 예배가 매일 오전 9시 30분에 시작된다. 각 포스트는 팔각형 또는 말굽 형태로, 안쪽에 스페셜리스트와 서기, 전화 담당자가 자리를 잡고, 바깥쪽에서 플로어 브로커들이 주문을 외친다. 포스트 위의 전광판에는 종목 약칭과 최근 체결가가 깜빡인다.
이 아침은 달랐다.
플로어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개장까지 아직 두 시간 반이 남았는데, 트레이더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주말 동안 벌어진 일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요일, 다우존스 지수가 하루 만에 108포인트 하락했다. 4.6% 하락. 사상 최초의 100포인트 하락이었다. 그 전주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사흘간 누적 하락폭이 250포인트에 달했다. 일주일 만에 다우존스 사상 최고치에서 17%가 빠진 것이다. 그리고 주말 동안 아시아와 유럽 시장이 무너졌다. 시간순으로 따라가면 이렇다. 금요일 밤 뉴욕이 폭락한 뒤, 날짜변경선을 넘어 월요일 아침이 된 시드니에서 먼저 시장이 열렸다. 호주 주식시장이 3.7% 하락하며 출혈의 서막을 열었다. 이어서 도쿄가 열렸고, 닛케이 지수가 2.5% 빠졌다. 그 다음은 홍콩이었다. 항셍지수는 월요일 하루에 11.1% 폭락했고, 거래소 이사장 로널드 리(Ronald Li)가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 4일간 휴장을 선언했다. 닫힌 시장은 공포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공포를 숙성시켰다. 홍콩 거래소가 일주일 뒤 다시 열렸을 때, 항셍지수는 추가로 33.3%가 폭락했다. 런던 FTSE 100은 10.8% 빠졌다. 지구가 한 바퀴 도는 동안, 공포가 시차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시드니에서 도쿄로, 도쿄에서 홍콩으로, 홍콩에서 런던으로.
이제 그 공포가 뉴욕에 도착할 차례였다.
NYSE는 그날 아침 DOT(Designated Order Turnaround) 시스템을 한 시간 일찍 열었다. 증권사들이 주문을 미리 입력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준 것이다. 그 한 시간 동안 증권사들은 평소의 네다섯 배에 달하는 주문을 시스템에 밀어 넣었다. 대부분 매도 주문이었다. 개장 벨이 울리기 전, DOT에 쌓인 매도 주문은 1,400만 주, 약 5억 달러 규모에 달했다.
스페셜리스트들의 "북(book)" — 매수와 매도 주문이 적힌 장부 — 에는 주말 동안 쌓인 매도 주문이 빼곡했다. 매수 주문은 거의 없었다. 스페셜리스트란, 특정 종목의 매매를 중개하고 유동성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다. 시장이 일방적으로 한쪽으로 쏠릴 때, 반대편에 서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의무가 있다. 모두가 팔겠다고 할 때, 사야 하는 사람. NYSE 규정은 스페셜리스트에게 "질서 있는 시장(orderly market)"을 유지할 의무를 부과했다. 매수자가 없으면, 자기 자본으로 주식을 사들여야 했다. 이 아침, 그 의무가 짓누르는 무게는 전례 없는 것이었다. 자기 돈으로 폭포를 막아야 하는 상황.
존 펠프스(John Phelan) NYSE 회장은 아직 출근하지 않은 시간에 전화를 받았다. 해병대 출신의 펠프스는 1980년부터 NYSE의 사장, 1984년부터 회장 겸 CEO를 맡고 있었다. 트레이더 출신으로, 플로어의 공기를 읽는 데 능숙한 사람이었다. SEC와 백악관에서 같은 질문이 왔다: "시장을 열어야 하느냐?" 아시아와 유럽이 무너진 뒤 뉴욕까지 열면, 전 세계적인 연쇄 붕괴가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였다. 홍콩은 이미 시장을 닫았다. 뉴욕도 닫아야 하는 것 아닌가.
펠프스의 대답은 명확했다: "시장을 닫으면 다시는 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는 시장의 생리를 알고 있었다. 거래소를 닫으면 팔고 싶은 사람은 팔 수 없고, 공포는 해소되지 않으며, 재개장의 순간에 지금보다 더 큰 매도 쓰나미가 밀려올 것이다. 홍콩이 그 증거가 될 터였다. 시장은 열어야 한다. 열려 있어야 가격이 발견되고, 가격이 발견되어야 균형점이 잡힌다. 그것이 시장의 논리다. 이론적으로는.
펠프스는 개장 전, 주요 증권사의 CEO들을 자기 사무실로 소집했다. 금요일의 폭락 이후 주말 동안 쌓인 매도 주문의 규모를 확인하고, 각 회사의 대응 태세를 점검했다. 백악관 비서실장 하워드 베이커와 전화를 연결하고, 새로 취임한 연준 의장 앨런 그린스펀에게도 연락을 취했다. 뉴욕 연준 총재 제럴드 코리건에게 전화를 걸어, 은행들의 신용 공급 상태를 확인했다. 시장이 무너지기 전에, 무너진 뒤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거래소를 닫지 않겠다. 개별 종목에 극심한 불균형이 발생하면 해당 종목의 거래를 일시 중단하고, 새로운 호가를 표시한 뒤 재개하겠다. 그러나 거래소 자체를 닫는 일은 없다." 이것이 그의 방침이었다.
개장 종이 울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플로어에는 비정상적인 소음이 맴돌았다. 고함이 아니라 웅성거림이었다. 수백 명의 트레이더들이 동시에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소리. DOT 시스템에 연결된 프린터가 종이를 뱉어내는 소리 — 찌이익, 찌이익, 끊임없이. 전화벨이 쉬지 않고 울리는 소리. 벌집이 흔들리기 직전의 웅웅거림 같았다. 트레이더들의 형형색색 메시 재킷 — 노랑, 빨강, 파랑, 초록, 소속 회사별로 다른 색 — 이 인파 속에서 뒤섞이며 움직였다. 평소라면 농담을 주고받을 시간인데, 이 아침에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9시 30분. 개장 벨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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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장과 동시에, 시세표시기(ticker)가 지연되기 시작했다.
다우존스 30개 종목 중 11개가 거래를 시작하지 못했다. S&P 500 종목 중 95개가 개장 불능 상태였다. 매도 주문이 쌓여 있는데 매수 주문이 없으니, 스페셜리스트가 시초가를 결정할 수 없었다. 거래가 성립하려면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모두 필요하다. 파는 사람만 있는 시장은, 시장이 아니다. NYSE 규정은 스페셜리스트에게 주문 불균형이 심할 경우 플로어 감독관(floor official)의 허가를 받아 개장을 지연할 수 있는 재량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 아침, 지연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블루칩 종목들이 줄줄이 거래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이 시카고의 선물시장은 이미 폭락하고 있었다. S&P 500 선물은 뉴욕의 현물 주식보다 먼저, 그리고 더 빠르게 떨어졌다. 선물과 현물의 가격 괴리가 벌어졌다. 정상적인 시장이라면 차익거래자들이 이 괴리를 좁힌다 — 싼 선물을 사고 비싼 현물을 팔거나, 그 반대를 한다. 그러나 이 아침, 현물 시장의 절반이 열리지 않은 상태에서 차익거래는 불가능했다. 가격 발견 기능이 마비되었다. 시카고와 뉴욕, 두 시장이 서로 다른 현실을 말하고 있었다.
10시. 다우존스는 이미 100포인트 이상 하락해 있었다. 플로어의 웅성거림이 고함으로 바뀌었다. 트레이더들은 목이 찢어져라 주문을 외쳤지만, 대부분 매도 주문이었다. "벌집 같은 굉음"이라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회고했다. 옆 사람의 말이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 22미터 높이의 천장이 소리를 반사하면서, 플로어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울림통이 되었다. 그러나 이 소리의 대부분은 한 방향 — 매도 — 을 향하고 있었다. 사겠다는 손짓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11시. DOT 시스템이 과부하에 걸렸다. DOT는 NYSE의 전자 주문 처리 시스템으로, 증권사의 주문을 거래소 플로어의 스페셜리스트에게 전달하는 통로였다. 1976년에 도입되어 1984년에 업그레이드되었고, 10만 주까지의 주문을 전자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현대의 눈으로 보면 원시적이었다. 주문은 프린터로 출력되어 종이 형태로 스페셜리스트에게 전달되었다. 거래 포스트 옆에 놓인 도트매트릭스 프린터들이 밀려드는 주문량을 감당하지 못했다. 종이가 끊임없이 토해져 나왔다. 핀이 종이를 치는 소리가 찌이익 찌이익 끊이지 않았다. 찢겨진 용지가 프린터 주변에 쏟아지고, 바닥에 매도 주문 종이가 쌓여 발목까지 차올랐다. 거래 포스트 주위는 종이의 바다가 되었다. 일부 프린터는 과열되어 멈추었고, 종이가 걸려 찢어진 채로 절반만 인쇄된 주문서가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서기들이 바닥에 엎드려 종이를 주워 스페셜리스트에게 건네는 장면이 벌어졌다.
시세표시기의 지연은 15분에서 30분으로, 30분에서 60분으로 늘어났다. 최대 75분까지 지연되었다. 스크린에 표시된 가격은 한 시간 전의 가격이었다. 아무도 현재 가격을 몰랐다. 전화기를 잡고 브로커에게 "지금 얼마냐"고 물어도, 브로커도 몰랐다. 주문을 넣었는데 체결되었는지 한 시간 넘게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가 이어졌다. 전장(戰場)의 안개(fog of war)가 금융 시장을 덮었다. 어떤 트레이더는 자기가 팔겠다고 낸 주문이 체결되었는지 아닌지 모른 채, 같은 종목을 또 팔겠다고 내놓았다. 이중 주문이 쌓이면서 매도 압력은 실제보다 더 부풀려졌다.
12시. 펠프스 회장이 플로어를 직접 돌며 스페셜리스트들을 독려했다. 해병대 출신 특유의 침착한 걸음걸이. 그의 존재감 자체가 메시지였다 — "NYSE는 이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 잠시 반등이 있었다. 200포인트 하락에서 120포인트 하락 수준으로 회복하는 듯 보였다. 트레이더들 사이에서 "바닥을 찍었나"라는 기대가 돌았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반등은 30분을 넘기지 못했다.
점심시간, 루머가 돌았다. "SEC가 시장을 폐쇄할 수도 있다." 이 루머의 출처는 불명확했지만, 전파 경로는 명확했다. 플로어 트레이더에서 브로커로, 브로커에서 기관투자자로, 기관투자자에서 기업 재무담당자에게. 루머는 공포를 배가시켰다. 논리는 단순했다: 시장이 닫히기 전에 팔아야 한다. 닫힌 시장에서는 팔 수 없으니까. 오후 1시, 투매가 재개되었다.
2시. 다우존스가 300포인트 아래로 빠졌다. 스페셜리스트들의 자본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기 돈으로 주식을 사들여 시장의 균형을 잡아야 하는 의무가 있었지만, 살수록 가격은 더 떨어졌다. 사면 살수록 손실이 불어났다. 의무와 생존이 충돌하고 있었다. 일부 스페셜리스트 회사는 이날 하루에 자기자본의 대부분을 잃었다.
3시. 마지막 90분은 자유낙하였다.
매수 호가(bid)가 사라졌다. IBM, GE, 엑손 같은 우량주조차 살 사람이 없어 가격이 수직으로 떨어졌다. IBM은 전일 종가 135달러에서 장중 104달러까지 추락했다 — 하루에 23%의 하락. 당시에는 서킷 브레이커 — 지수가 일정 수준 이상 급락하면 거래를 자동 중단시키는 장치 — 가 존재하지 않았다. 브레이크 없는 차가 절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일부 종목에서는 스페셜리스트가 아예 매수 호가를 제시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었다. 매수자가 없는 주식은 가격이 존재하지 않는다 — 가격은 거래의 결과이지, 거래 없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오후 4시, 마감 종이 울렸다. 펠프스 회장이 직접 마감 벨을 눌렀다.
다우존스 개장가: 2,247.06. 종가: 1,738.74. 장중 최저: 1,677. 하락폭: 508포인트. 하락률: 22.61%. 1929년 대공황의 검은 목요일(12.8%)과 검은 화요일(11.7%)을 더한 것보다 큰 낙폭이었다. 하루 만에.
6억 400만 주가 거래되었다. 평소의 3.5배. 시스템 한계로 많은 거래가 마감 후 수 시간이 지나서야 확인되었다. 하루 만에 약 5,000억 달러 — 미국 GDP의 10%가 넘는 금액 — 이 증발했다.
마감 종이 울리자, 플로어에는 환호 대신 침묵이 내려앉았다. 안도가 아니었다. 멍한 침묵이었다. 비싼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넥타이를 풀어헤친 채, 거래 포스트에 등을 기대고 있는 사람들. 시세판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아무도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바닥에는 종일 토해져 나온 프린터 용지가 수북했다 — 체결된 주문, 체결되지 않은 주문, 절반만 인쇄된 주문이 뒤엉켜 있었다. 청소부가 쓸어 담기까지 몇 시간이 걸릴 분량이었다. 22미터 높이의 천장 아래, 자본주의의 성당이 잔해로 덮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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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전주의 하락세, 아시아와 유럽의 연쇄 폭락, 미 하원의 M&A 세제 법안, 무역 적자 발표 — 원인은 여러 가지가 거론되었다. 그러나 22.6%라는 전례 없는 하루 하락폭을 설명하려면, 거시경제적 배경만으로는 부족하다. 경제 펀더멘탈은 나빴지만, 22.6%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1987년의 미국 경제는 성장하고 있었다. 실업률은 하락 중이었다. 기업 이익은 견조했다. 하루에 22%가 빠질 이유가 경제 안에는 없었다.
브래디 위원회(Brady Commission) —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사태 조사를 위해 구성한 대통령 직속 태스크포스 — 의 결론은 명확했다. 폭락의 규모를 키운 것은 포트폴리오 인슈어런스(portfolio insurance)였다.
포트폴리오 인슈어런스는 4장에서 다룬 블랙-숄즈 공식의 직계 후손이다. 이 전략의 기원은 19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UC 버클리의 재무학 교수 헤인 릴란드(Hayne Leland)가 어느 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영감을 얻었다. 연기금 운용자가 "주가가 오를 때는 수익을 누리고 싶지만, 떨어질 때는 보호받고 싶다"고 말한 것이다. 릴란드는 생각했다 — 이것은 풋옵션의 수익 구조와 같다. 그렇다면 풋옵션을 직접 사지 않고, 블랙-숄즈 공식의 역산으로 그 수익 구조를 '복제'할 수 있지 않을까.
릴란드는 동료 마크 루빈스타인(Mark Rubinstein)과 함께 이 아이디어를 다듬었다. 루빈스타인은 옵션 이론의 전문가로, 블랙-숄즈 모형의 실무 적용에 정통했다. 1980년, 두 사람은 금융업 경력의 존 오브라이언(John O'Brien)과 함께 LOR Associates를 설립했다. 회사명은 세 사람의 성의 첫 글자를 따온 것이다.
핵심 아이디어는 간단했다: 주식 포트폴리오가 떨어질 때, 자동으로 선물을 매도해서 손실을 상쇄한다. 보험처럼 작동한다. 주가가 올라가면 수익을 누리고, 내려가면 선물 매도로 손실을 방어한다. "주식을 팔지 않고도 하락장을 방어할 수 있다"는 매력적인 약속이었다. 연기금의 이사회에 "원금을 보전하면서도 주식 상승장에 참여할 수 있다"고 설명하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기술적으로는 이런 구조다. 블랙-숄즈 모형에서 풋옵션(주가 하락 시 이익을 주는 파생상품)의 가격 결정 공식을 이용해, 풋옵션의 수익 구조를 선물 거래로 복제한다. 주가가 떨어지면, 컴퓨터가 "주식 비중을 줄이고 현금 비중을 늘려라"고 계산한다. 실제로 주식을 파는 것은 비용이 크고 느리니, 대신 S&P 500 선물을 매도한다. 이것을 동적 헤지(dynamic hedging)라 부른다. "동적"이라는 말은, 시장 상황에 따라 헤지 비율을 계속 조정한다는 뜻이다. 주가가 1% 떨어지면 선물을 조금 팔고, 2% 떨어지면 더 팔고, 5% 떨어지면 대량으로 판다. 하락폭이 커질수록 매도량이 늘어나는 구조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경사진 언덕에서 공이 굴러 내려간다. 공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더 세게 브레이크를 밟아야 한다. 포트폴리오 인슈어런스는 이 브레이크를 자동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에는 빠진 것이 있다 — 같은 언덕에서 같은 방향으로 같은 브레이크를 밟는 공이 수백 개라면? 브레이크를 밟는 행위 자체가 언덕을 더 가파르게 만든다면?
1987년 10월 기준, 약 600억에서 1,000억 달러 규모의 기관 자금이 포트폴리오 인슈어런스 프로그램의 관리를 받고 있었다. LOR만의 보호 자산 규모가 500억 달러에 달했다. 이것은 동시에 500억 달러 규모의 자동 매도 프로그램이 시장 하락 시 동시에 작동한다는 뜻이었다.
여기에 치명적인 맹점이 있었다. 이 모델은 시장 유동성이 무한하다고 가정했다. 언제든지, 원하는 만큼, 원하는 가격에 선물을 매도할 수 있다고 전제했다. 블랙-숄즈의 수학이 요구하는 전제였다 — 연속적인 거래, 마찰 없는 시장, 무한한 유동성. 수학적으로는 필요한 가정이었지만, 현실에서는 성립하지 않는 가정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수백억 달러 규모의 자금이 모두 같은 알고리즘을 사용하고 있다. 시장이 1% 떨어지면, 이 알고리즘들이 동시에 선물 매도 주문을 쏟아낸다. 선물 매도가 쏟아지면 선물 가격이 더 떨어진다. 선물 가격이 떨어지면 차익거래자들이 현물 주식을 판다. 현물 주식이 떨어지면, 포트폴리오 인슈어런스 알고리즘이 "더 팔아야 한다"고 계산한다. 매도가 매도를 부르는 피드백 루프. 하락이 매도를 낳고, 매도가 하락을 낳고, 하락이 더 큰 매도를 낳는다.
보험이 사고를 만든 것이다.
화재보험은 불이 나면 보상해주지만, 보험에 가입한다고 불이 나지는 않는다. 자동차 보험은 사고 후에 작동하지, 보험금 청구가 사고를 유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포트폴리오 인슈어런스는 달랐다. 보험에 가입한 사람들이 동시에 보험금을 청구하는 행위 자체가 화재를 일으키는 구조였다. 보험이 재난을 예방하는 것이 아니라, 보험이 재난의 원인이 되는 역설.
10월 19일 당일, 포트폴리오 인슈어런스 프로그램들은 약 60억 달러 규모의 선물 매도를 쏟아냈다. 당일 선물 매도의 15~20%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오전에 집중된 매도는 시장의 하락세를 가속시켰고, 오후에는 프로그램들이 오전에 실행하지 못한 매도 주문까지 쏟아내면서 마지막 90분의 자유낙하를 촉발했다. 매수자가 사라진 시장에서, 이 물량은 가격을 절벽 아래로 밀어냈다.
블랙-숄즈 공식이 가정한 세계 — 시장이 연속적으로 움직이고, 유동성이 충분하며, 가격이 정규분포를 따르는 세계 — 는 이 날 존재하지 않았다. 가격은 "어제 100이면 오늘 99" 식으로 연속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100에서 78로 점프했다. 공식이 전제한 세계가 깨지자, 공식에서 파생된 전략이 깨짐을 증폭시켰다.
공식이 공식 자체를 무너뜨린 것이다. 4장에서 다룬 맥켄지의 "수행성" 개념의 어두운 이면이었다. 공식이 시장을 만들 수 있다면, 공식이 시장을 파괴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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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그린스펀이 한 문장을 발표했다.
앨런 그린스펀(Alan Greenspan)은 1987년 8월에 상원 인준을 받고 연준 의장에 취임했다. 뉴욕 출신. 줄리아드 음악학교에 다니다 경제학으로 전향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아인 랜드(Ayn Rand)의 자유방임주의 철학에 심취했고, 포드 행정부에서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인플레이션 억제에 능통하고, 모호한 언어의 달인이라는 평을 받는 인물이었다. 취임 두 달하고 여덟 일 만에, 금융 역사상 최악의 하루를 맞은 것이다. 연준 의장으로서의 첫 번째 시험이,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시험이 되었다.
19일 당일에는 즉각적인 개입을 자제하고 상황을 주시했다. 폭풍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먼저 파악해야 했다.
20일 화요일 아침, 장 개장 전에 짧은 성명이 나왔다:
"연준은 경제와 금융 시스템을 지원하기 위해 유동성을 공급할 준비가 되어 있다(The Federal Reserve, consistent with its responsibilities as the Nation's central bank, affirmed today its readiness to serve as a source of liquidity to support the economic and financial system)."
한 문장이었다. 그러나 이 한 문장이 시스템 붕괴를 막았다. 은행들이 증권사에 대한 대출을 끊으려 하고 있었다. 전날의 손실 규모를 감안하면, 증권사들의 지급능력이 의심스러웠으니까. 증권사가 고객의 마진콜에 응하려면 은행에서 돈을 빌려야 하는데, 은행이 돈줄을 조이면 증권사가 무너진다. 증권사가 무너지면 결제 불이행이 발생하고, 결제 불이행은 도미노처럼 퍼진다. 제럴드 코리건 뉴욕 연준 총재는 전날 밤부터 주요 은행의 CEO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증권사에 대한 대출을 유지하라고 설득하고 있었다. "여러분이 대출을 끊으면, 증권사가 무너집니다. 증권사가 무너지면, 여러분의 대출금도 회수하지 못합니다. 연준이 뒤에 있습니다." 코리건의 설득은 날것의 위협과 보증이 섞인 것이었다. 그린스펀의 성명은 이 설득에 공식적 권위를 부여한 것이다.
시장은 반등했다. 10월 20일, 다우존스는 102포인트 올랐다. 5.9% 상승. 그러나 이날도 오전에는 아슬아슬한 순간이 있었다. S&P 500 선물이 12% 하락 상태에서 시카고 상품거래소가 거래를 일시 중단했고, NYSE에서도 일부 종목의 거래가 멈추면서 시장 폐쇄 직전까지 갔다. 골드만삭스와 살로몬 브라더스가 대규모 매수에 나서면서 반등이 시작되었다. 위기의 가장 날카로운 순간은 지나갔다.
그러나 위기 이후의 대응이 만들어낸 역설은, 블랙먼데이의 폭락 자체보다 더 의미심장했다.
브래디 위원회는 포트폴리오 인슈어런스와 프로그램 트레이딩이 폭락을 키웠다고 결론 내렸다. 보고서는 핵심 권고를 담고 있었다. 첫째, 서킷 브레이커 도입. 지수가 일정 수준 이상 급락하면 거래를 일시 중단하는 장치다. 1988년 10월, NYSE는 서킷 브레이커를 공식 도입했다 — 다우존스가 250포인트 하락하면 1시간 중단, 400포인트 하락하면 2시간 중단. "인간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자"는 취지였다. 알고리즘의 속도에 인간의 판단이 따라가지 못했으니, 강제로 멈춰 세우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장 참여자들은 정반대의 교훈을 얻었다.
DOT 시스템의 지연, 프린터의 과열, 전화기의 불통 — 이 모든 것이 보여준 것은 인간과 아날로그 시스템의 한계였다. 주문을 넣었는데 체결 여부를 한 시간 동안 모르는 상황. 시세표시기가 현재가 아니라 과거를 보여주는 상황. 전화로 주문을 내는데 전화가 불통인 상황. 스페셜리스트가 자기 자본 한도를 초과하면서까지 매수에 나섰지만, 물량을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
규제 당국은 "알고리즘이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시장 참여자들은 "아날로그가 더 위험하다"고 결론 내렸다. 문제는 알고리즘이 너무 빨리 달린 것이 아니라, 인프라가 알고리즘을 따라가지 못한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블랙먼데이 이후, 월스트리트는 전자 거래 인프라를 축소한 것이 아니라 비약적으로 확장했다. 더 빠른 시스템, 더 큰 용량, 더 정교한 알고리즘. 소방관이 "불이 위험하다"고 말하는 사이, 건축가는 더 큰 난로를 짓고 있었다. 난로가 커질수록 불의 효율은 높아지지만, 불이 날로를 벗어났을 때의 피해도 커진다.
그린스펀의 한 문장도 역설을 남겼다. "연준이 위기 시에 개입할 것이다"라는 선례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그린스펀 풋(Greenspan Put)"이라 불리게 된다 — 시장이 크게 떨어지면 연준이 구해줄 것이라는 기대. 시장 참여자들이 더 큰 위험을 감수하게 만드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의 씨앗이 심어진 것이다. 보험이 있으면 더 과감해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안전벨트를 매면 더 빨리 달린다. 구명조끼를 입으면 더 깊은 물에 들어간다.
23년 뒤인 2010년 5월 6일, 다우존스 지수가 오후 2시 32분부터 36분 만에 약 998포인트를 급락했다가 반등했다. 장중 최저점에서 지수는 9,872까지 빠져 전일 대비 9.2% 하락했다. 플래시 크래시. 1987년에는 인간이 비명을 지르는 거래소에서 하루가 걸린 폭락이, 2010년에는 인간이 개입할 틈도 없이 분 단위로 벌어졌다. 프린터가 종이를 토해내던 1987년의 아날로그 시장은 사라졌고, 광케이블과 마이크로초 단위의 알고리즘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결과는 같았다 — 가격의 급락, 유동성의 증발, 그리고 인간의 무력감. "평소에는 효율적이고, 가끔 재앙적인" 알고리즘 시장의 패턴은, 1987년에 시작되어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5
블랙먼데이의 잿더미가 채 식기도 전에, 한 남자가 새로운 판을 짜고 있었다.
존 메리웨더(John Meriwether). 살로몬 브라더스(Salomon Brothers)의 전설적인 채권 차익거래 데스크 수장. 마이클 루이스(Michael Lewis)의 '라이어스 포커(Liar's Poker)'에서 "살로몬의 황제"로 묘사된 인물이다.
메리웨더는 시카고 남부 로즐랜드 출신이다. 아일랜드계 가톨릭 가정에서 자랐다.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를 마친 뒤, 1973년 살로몬 브라더스에 입사했다. 채권 거래 데스크에 배치받았고, 4년 만인 1977년에 차익거래 그룹의 수장이 되었다. 그의 팀이 살로몬의 전체 수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0%에서 100% 사이를 오갔다. 회사의 나머지 모든 부서를 합친 것보다, 이 한 팀이 더 많은 돈을 벌었다.
'라이어스 포커'에서 루이스가 묘사한 메리웨더는 조용하지만 치명적인 남자였다. 살로몬의 회장 존 거트프로인트가 메리웨더에게 "천만 달러를 걸고 라이어스 포커를 하자"고 도전했을 때, 메리웨더는 대담한 역제안을 했다 — 뒷방에서 조용히 돈을 버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지, 도박사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벌이는 게임의 규모는 거트프로인트의 판돈보다 훨씬 컸다.
1991년, 부하 직원 폴 모저가 미 국채 입찰에서 허위 입찰을 넣어 규정 한도(발행량의 35%)를 초과하는 물량을 확보한 사실이 드러났다. 메리웨더는 직접 조작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모저의 보고를 받고도 즉각 당국에 알리지 않은 책임을 졌다. CEO 거트프로인트, 사장 토머스 스트라우스와 함께 사임했다. SEC에 5만 달러의 민사 벌금을 내고 3개월간 거래 정지 처분을 받은 뒤, 살로몬을 떠났다.
떠난 사람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은퇴하거나, 더 크게 시작하거나.
1994년 2월 24일, 메리웨더는 코네티컷 주 그리니치에서 새 펀드의 첫 거래를 실행했다. 롱텀 캐피탈 매니지먼트(Long-Term Capital Management), 약칭 LTCM. 초기 자본금 10억 1,000만 달러. 이름부터 자신감이 넘쳤다. "장기 자본 관리" — 장기적으로, 자본을 관리하겠다는 선언.
그리니치. 맨해튼에서 메트로노스(Metro-North) 기차로 40분 거리의 이 코네티컷 해안 마을은, 1990년대부터 헤지펀드의 수도가 되어가고 있었다. 스팀보트 로드(Steamboat Road)는 "헤지 로(Hedge Row)"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펀드 사무실이 밀집해 있었다. LTCM의 사무실은 항구 근처 오스프리 하우스(Osprey House)라는 건물에 있었다. 연간 임대료 150만 달러. 맨해튼의 유리 타워가 아니라, 나무에 둘러싸인 조용한 저층 건물. 잔디밭과 주차장이 있고, 조용한 복도에서는 트레이딩 데스크의 전화벨 소리와 블룸버그 터미널의 알림음이 들렸다. 월스트리트의 소음에서 벗어나, 수학과 모델에 집중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1996년에는 직원이 150명으로 늘었고, 런던과 도쿄에도 사무실을 열었다.
메리웨더가 영입한 파트너 목록은 월스트리트의 역사상 가장 화려한 진용이었다. 로버트 머튼(Robert Merton)과 마이런 숄즈(Myron Scholes). 4장에서 다룬 블랙-숄즈 옵션 가격 결정 모형의 공동 창시자들이다. 1997년, 이 두 사람은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다. LTCM의 파트너로 재직하는 동안이었다. 노벨상 위원회가 "파생상품 가격 결정의 새로운 방법을 개발한" 공로를 치하하는 동안, 그 방법의 한계가 현실에서 시험대에 오르고 있었다. 여기에 데이비드 멀린스(David Mullins) —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 부의장 — 까지 합류했다. 살로몬 시절 메리웨더 밑에서 일했던 에릭 로젠펠드, 래리 힐리브랜드, 빅터 하가니 등 채권 차익거래의 정예 멤버들도 합류했다. 학계 최고의 두뇌, 규제 당국의 인맥, 그리고 실전에서 검증된 트레이더들이 한 지붕 아래 모인 것이다.
투자자를 모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 어려운 것은 투자자를 거절하는 것이었다. 최소 투자 금액은 1,000만 달러. 3년간 환매(redemption) 불가. 수수료는 운용보수 2%에 성과보수 25% — 업계 표준인 "2 and 20"보다 높았다. 그런데도 이탈리아 중앙은행, 중국은행, 쿠웨이트 연기금, 각국의 대학 기금이 줄을 섰다. 노벨상 수상자가 운용하는 펀드에 돈을 넣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월스트리트의 신분 증명이었다.
LTCM의 전략은 수렴 차익거래(convergence arbitrage)라 불렸다. 핵심 논리는 이렇다: 시장에서 수학적으로 비슷해야 하는 두 자산의 가격이 일시적으로 벌어지면, 비싼 쪽을 팔고 싼 쪽을 산다. 시간이 지나면 가격이 수렴하고, 양쪽 모두에서 이익이 난다.
예를 들어, 미국 국채에는 "신규 발행(on-the-run)" 국채와 "기존 발행(off-the-run)" 국채가 있다. 둘 다 미국 정부가 보증하는 채권이니 신용 위험은 동일하다. 그러나 신규 발행 국채가 더 활발하게 거래되므로 약간 더 비싸다. 이 가격 차이는 — LTCM의 모델에 따르면 — 반드시 좁혀진다. 시간이 해결해준다.
문제는, 이 가격 차이가 너무 작다는 것이었다. 0.1% 미만의 스프레드에서 유의미한 수익을 내려면, 엄청난 규모로 베팅해야 했다. LTCM은 레버리지를 사용했다. 자기자본의 25배에서 30배에 달하는 차입. 0.1%의 스프레드에 25배 레버리지를 곱하면, 자기자본 대비 2.5%의 수익이 된다. 이런 거래를 수십 개 동시에 운용하면 연 40%의 수익률이 나온다. 수학적으로는 완벽했다.
초기 성과는 경이적이었다.
1994년(운용 첫해, 10개월) 약 20%, 1995년 43%, 1996년 41% — 수수료를 뺀 후의 수치다. 같은 기간 S&P 500이 연 20~30%를 올린 것과 비교해도 압도적이었고, 변동성은 훨씬 낮았다. "천재들의 펀드"라는 명성이 붙었다. 월스트리트의 주요 은행들은 LTCM과 거래하는 것 자체를 영광으로 여겼다. 골드만삭스, JP모건, 메릴린치, 도이체방크, UBS — 이 은행들은 LTCM에 레버리지를 제공하면서도, 정작 LTCM이 어떤 포지션을 보유하고 있는지는 상세히 알지 못했다. 천재들을 믿었다.
1997년, 수익률이 17%로 떨어졌다. S&P 500은 33%를 올렸다. LTCM의 전략을 모방한 다른 펀드들이 같은 기회를 쫓으면서 경쟁이 격화되었기 때문이다. 차익거래의 스프레드가 줄어들고 있었다.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돈의 양은 줄어드는데, 그 돈을 쫓는 펀드는 늘어나는 상황.
메리웨더는 이 문제에 대해 역설적인 해법을 선택했다. 1997년 말, 투자자들에게 자본금 27억 달러를 강제 반환했다. 운용 자산을 줄인 것이 아니라, 자기자본을 줄이면서 레버리지 비율을 더 높인 것이다. 더 적은 원금으로, 더 큰 판돈을 걸겠다는 결정. 광맥이 좁아지면, 드릴을 더 깊이 박는다. 투자자들은 반발했지만, 메리웨더의 답은 간명했다 — 자기자본이 줄면 수익률이 올라간다. 그것이 수학이었다.
1998년 초, LTCM의 자본금은 약 47억 달러였다. 총 자산은 1,250억 달러 이상. 레버리지 비율은 약 27배. 그리고 파생상품의 명목 가치 — 실제 현금이 오가지는 않지만 계약서에 적힌 금액 — 는 약 1조 2,500억 달러에 달했다. 1998년 미국 GDP의 약 15%에 해당하는 규모가 그리니치의 조용한 사무실에서 관리되고 있었다. 잔디밭 너머로 보이는 항구의 요트들이 평화롭게 흔들리는 동안, 그 건물 안에서는 세계 경제의 15%에 해당하는 계약이 블룸버그 터미널의 화면 위를 흘러가고 있었다.
6
1998년 8월 17일, 러시아가 국채 지급을 중단했다.
러시아 정부는 루블화 방어를 포기하고, 국채(GKO)에 대해 모라토리엄 — 채무 지급 유예 — 을 선언했다. 루블은 폭락했다. 8월 17일 이전 달러당 약 6.3루블이었던 환율은, 9월 2일 중앙은행이 완전 자유변동환율제로 전환한 뒤 달러당 21루블까지 치솟았다. 석 달 만에 화폐 가치가 3분의 1로 줄어든 것이다.
아시아 금융위기의 여파가 러시아까지 밀려온 것이다. 1997년 7월 태국 바트화 폭락에서 시작된 위기가 인도네시아, 한국을 거쳐 러시아에 도달하기까지 약 1년이 걸렸다. 아시아의 경기 둔화는 원유를 비롯한 원자재 수요를 위축시켰다. 유가가 1997년에서 1998년 사이 33% 넘게 추락했다. 러시아 수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원유와 천연가스의 가격이 무너지면서, 이미 취약했던 재정이 버틸 수 없었다.
신흥시장의 한 국가가 빚을 못 갚겠다고 선언한 것이 왜 코네티컷의 헤지펀드를 무너뜨렸는지를 이해하려면, LTCM 모델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가정을 들여다봐야 한다.
LTCM의 모델은 자산 가격 간의 상관관계(correlation)를 기반으로 작동했다. "A가 오르면 B도 오른다"는 역사적 패턴을 이용해 포지션을 구성했다. 위험한 자산은 위험한 자산끼리, 안전한 자산은 안전한 자산끼리 비슷하게 움직인다는 가정. 이 상관관계가 유지되는 한, LTCM의 포지션은 서로를 헤지해주었다. 한쪽에서 손실이 나면 다른 쪽에서 이익이 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이탈리아 국채에서 손실이 나면 독일 국채에서 이익이 나고, 덴마크 모기지 채권의 손실은 스왑 포지션의 이익으로 상쇄된다. 수십 개의 포지션이 정교한 그물망처럼 서로를 지탱하는 구조.
러시아 모라토리엄은 이 상관관계를 폭파시켰다.
공포에 빠진 투자자들은 위험 자산이면 무엇이든 팔았다. 러시아 국채뿐 아니라, 브라질 국채, 이탈리아 국채, 모기지 채권, 회사채, 신흥국 통화 —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돈은 단 하나의 목적지로 향했다: 미국 국채. "안전자산 선호(flight to quality)"라 불리는 현상이다. 모든 위험 자산이 동시에 떨어지고, 모든 안전 자산이 동시에 오르는 일방통행. 평상시에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던 자산들이, 공포 앞에서는 모두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상관관계가 갑자기 1로 수렴한 것이다. 분산투자의 마법이 사라진 순간이었다.
LTCM이 "곧 좁혀질 것"이라고 베팅한 스프레드가, 역사상 유례없는 속도로 벌어졌다. 수렴할 것이라 믿었던 가격들이 발산(divergence)했다. 좁은 강을 건너도록 설계된 다리가, 하룻밤 사이에 대양 위에 놓인 셈이었다.
한 달 만에 LTCM은 자본금의 44%인 18억 달러를 잃었다. 8월 한 달. 연초부터 따지면 자본의 52%, 25억 달러가 증발했다.
9월 2일, LTCM은 투자자들에게 서한을 보냈다. 8월의 손실을 공개한 것이다. 이 서한이 시장에 퍼지면서, LTCM의 곤경이 공개적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LTCM의 곤경이 알려지자, LTCM과 같은 포지션을 보유한 다른 펀드들이 먼저 빠져나가려 했다. 같은 배에서 구명보트를 먼저 차지하려는 경쟁. LTCM이 보유한 것과 같은 종류의 자산들이 추가로 매도되면서, 스프레드는 더 벌어졌다. LTCM의 손실이 커질수록, 다른 펀드들의 탈출 압력이 커졌고, 탈출 압력이 커질수록 LTCM의 손실은 더 커졌다. 블랙먼데이의 피드백 루프가, 채권 시장에서 반복되고 있었다.
9월에 들어서자 매주 5억 달러씩 증발했다. 9월 21일 월요일 하루에만 5억 5,300만 달러가 사라졌다. LTCM 역사상 최악의 하루였다 — 모델이 예측한 최대 일일 손실의 다섯 배에 달하는 규모. 자본금은 6억 달러 미만으로 추락했다. 1,250억 달러의 자산을 6억 달러의 자본으로 떠받치고 있는 형국. 레버리지 비율은 200배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니치의 사무실에서, 블룸버그 터미널의 화면은 붉은 숫자로 가득했다. 노벨상 수상자 두 명이 자신들의 모델이 현실과 어긋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머튼과 숄즈가 만든 공식의 세계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확률이 100년에 한 번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공식의 확률을 존중하지 않았다. 파트너들의 점심시간은 짧아지고, 사무실의 불은 밤늦게까지 꺼지지 않았다. 잔디밭의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는 소리만 새벽의 정적을 깨뜨렸다.
LTCM이 무너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LTCM과 거래한 상대방은 14개 이상의 대형 금융기관이었다. LTCM이 파산하면, 1조 2,500억 달러 규모의 파생상품 계약이 강제 청산된다. 이 물량이 시장에 쏟아지면, 모든 금융기관의 포지션이 연쇄적으로 타격을 받는다. 골드만삭스가 LTCM과 체결한 스왑 계약이 무효화되면, 골드만삭스는 그 계약으로 헤지하고 있던 다른 포지션에서 손실을 입는다. 그 손실을 메우기 위해 골드만삭스가 자산을 팔면, 그 자산을 보유한 다른 은행도 손실을 입는다. 도미노의 첫 조각이 넘어지면, 멈출 곳이 없다. 월스트리트 전체가 한 배에 타고 있었고, 그 배가 가라앉고 있었다.
9월 18일, LTCM의 경영진이 뉴욕 연준 총재 윌리엄 맥도노(William McDonough)에게 연락했다. 이틀 뒤인 9월 20일, 뉴욕 연준의 팀이 그리니치의 LTCM 사무실을 방문했다. 장부를 열어보니, 상황은 외부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나빴다.
9월 23일 수요일, 뉴욕 연준 건물 10층 회의실. 리버티 스트리트 33번지. 맨해튼의 하늘이 보이는 이 회의실에 월스트리트의 CEO들이 집결했다. 골드만삭스, 메릴린치, 모건스탠리, JP모건, UBS, 도이체방크, 바클레이스, 크레디스위스. 네 분의 양복에 넥타이를 맨 남자들이 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맥도노의 메시지는 간단했다: LTCM을 살리든지, 금융 시스템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든지. 선택은 여러분의 것이지만, 결과는 모두의 것이다.
그날 저녁 6시경, 합의가 이루어졌다. 14개 금융기관이 36억 2,500만 달러를 출자했다. LTCM 지분의 90%가 채권단으로 넘어갔다. 메리웨더와 파트너들은 모든 지분을 잃었다. 노벨상 수상자 두 명의 개인 재산도 대부분 증발했다.
베어스턴스(Bear Stearns)만 참여를 거부했다. LTCM의 주요 청산 브로커였으면서도, "우리는 이미 충분한 리스크를 지고 있다"며 추가 출자를 거절한 것이다. 이미 LTCM에 대한 5억 달러 규모의 청구권을 행사한 상태였다. 이 거부는 월스트리트에서 오래 기억되었다. 연대가 필요한 순간에 등을 돌린 은행. 정확히 10년 뒤인 2008년 3월, 베어스턴스는 서브프라임 위기에서 가장 먼저 무너졌다. JP모건에 주당 2달러에 인수되었다 — 1년 전 주가 170달러의 99%가 증발한 가격. 1998년에 다른 은행들을 돕지 않았던 은행이, 2008년에 자기 자신을 구해줄 은행을 찾지 못한 것이다. 월스트리트의 기억력은 길다.
공적 자금은 투입되지 않았다. 민간 은행의 돈으로 해결되었다. 그러나 그 민간 은행들이 돈을 낸 것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연준의 회의실에 불려 와서 "당신들도 함께 가라앉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한다"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 논란의 씨앗이 여기서 뿌려졌다. 1987년 그린스펀의 한 문장에서 싹튼 이 씨앗은, 1998년 LTCM 구제에서 자라나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구제금융(TARP)에서 거목이 된다.
7
블랙먼데이와 LTCM. 11년의 간격을 두고 벌어진 두 사건은, 같은 질문을 서로 다른 규모로 던졌다.
공통점은 선명하다. 두 사건 모두, 수학적 모델의 가정이 극단적 상황에서 깨졌다. 포트폴리오 인슈어런스는 "시장에 항상 유동성이 있다"고 가정했다. LTCM은 "자산 가격의 상관관계가 유지된다"고 가정했다. 정상적인 시장에서 이 가정들은 대체로 맞다. 99%의 시간 동안 모델은 작동한다. 문제는 나머지 1%다.
정규분포 — 블랙-숄즈 모형의 수학적 기초 — 에서, 평균으로부터 4표준편차 이상 벗어나는 사건이 일어날 확률은 약 10만 분의 6이다. 하루가 하나의 관측이라면, 약 45년에 한 번 정도. 5표준편차 이상은 약 700만 년에 한 번. 6표준편차는 사실상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현실의 금융 시장에서는 어떤가. 블랙먼데이의 22.6% 하락은 25표준편차 이상의 사건이었다. 정규분포를 전제하면, 우주의 나이(138억 년)보다 긴 시간 동안 매일 시장이 열려도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다. 그러나 일어났다. LTCM의 손실도 마찬가지였다. 모델이 "100만 년에 한 번"이라고 계산한 시나리오가 한 달 만에 현실이 되었다.
문제는 정규분포에 있었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정규분포는 서울의 날씨를 예측하기에는 괜찮다. 대부분의 날은 영하 10도에서 영상 35도 사이에 있고, 영하 20도나 영상 40도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금융 시장은 서울의 날씨가 아니라, 전 세계의 지진과 더 비슷하다. 대부분의 날은 진동이 없지만, 지진이 일어나면 규모가 리히터 척도로 7이 될 수도, 9가 될 수도 있다. 작은 진동이 모여 큰 지진이 되고, 큰 지진의 여진이 또 다른 지진을 부른다. 금융 시장도 마찬가지다. 공포가 공포를 낳는 피드백 루프가 작동하면, 변동의 규모가 수학의 예측을 넘어선다.
현실 세계의 금융 데이터는 정규분포를 따르지 않는다. 극단적 사건 — 꼬리 리스크(tail risk) — 이 정규분포의 예측보다 훨씬 자주 발생한다. 종 모양 곡선(bell curve)의 양쪽 끝, "꼬리" 부분이 정규분포보다 두껍다. 통계학에서 이것을 "두꺼운 꼬리(fat tail)"라 부른다. 나심 탈레브가 나중에 "검은 백조(Black Swan)"라고 명명한 현상의 수학적 실체다.
4장에서 블랙-숄즈 공식은 "불확실성의 가격은 얼마인가"를 물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 — 변동성이라는 하나의 숫자 — 은 옵션 시장을 열었고, 파생상품 우주를 창조했으며, 금융의 언어를 영원히 바꿨다.
블랙먼데이와 LTCM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불확실성에 가격을 매길 수 있다는 확신 자체가, 불확실한 것은 아닌가.
뉴턴이 남해 버블에서 보여준 패턴이 반복되었다.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천재였지만, 인간의 광기를 계산하지 못했다. "천체의 궤도는 계산할 수 있지만, 인간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는 그의 탄식이 270년 뒤 그리니치의 사무실에서 울려 퍼졌다. 머튼과 숄즈는 노벨상을 받은 천재였지만, 시장의 극단을 모델에 담지 못했다. 도구는 바뀌었다. 환어음이 파생상품이 되었고, 직감이 미분방정식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혹은 인간이 만든 모델)이 완전한 합리성에 도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대답은 6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았다. 아니오.
LTCM의 파산은 시장에 경고를 남겼어야 했다. 노벨상 수상자 두 명이 만든 모델도 현실 앞에서 무너졌다는 사실은, 수학적 확실성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제기해야 했다. 그러나 월스트리트는 다른 교훈을 추출했다: "모델이 틀린 게 아니라 덜 정교했을 뿐이다."
LTCM은 채권 차익거래에 집중했다가 상관관계가 깨져서 무너졌다. 그렇다면 더 많은 자산을 묶고, 더 넓게 분산하고, 더 정교한 상관관계 모델을 쓰면 되지 않겠는가. 이 논리의 결정판이 CDO(부채담보부증권)였다.
더 복잡한 모델, 더 많은 레이어, 더 정교한 구조 — CDO는 이 욕망의 건축물이었다. 수천 개의 모기지를 하나로 묶고, 그 묶음을 다시 잘라 등급을 매기고, 잘린 조각들을 다시 묶어 또 등급을 매겼다. CDO의 CDO, 이른바 "CDO 스퀘어드(CDO-squared)"까지 만들어졌다. 이 구조를 완전히 이해하는 인간은 지구상에 거의 없었다. 그 사실이 위험 신호였지만,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LTCM의 교훈은 "겸손하라"였어야 했다. 그러나 추출된 교훈은 "더 정교해져라"였다. 그리고 그 정교함이 2008년의 서브프라임 위기로 이어진다.
6장에서, 그 이야기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