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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 — 두 제국의 알고리즘

제3장: 실리콘밸리라는 생태계 — 왜 AI가 여기서 터졌는가


도입부: 타이난의 소년

1973년 봄, 태국 방콕. 쿠데타의 먼지가 채 가라앉지 않은 도시에서 한 가족이 결단을 내렸다. 아버지는 정유공장 엔지니어였고 어머니는 교사였다. 대만 남부 타이난(台南) 출신인 그들은 5년 전 아버지의 일 때문에 방콕으로 건너왔지만, 거리에 탱크가 나타나는 나라에 아이들을 더 둘 수는 없었다. 비행기 표 두 장을 샀다. 아이들의 몫이었다. 부모의 몫은 없었다. 열 살짜리 형과 아홉 살짜리 동생, 두 소년이 먼저 떠났다. 목적지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삼촌이 사는 워싱턴 주 타코마(Tacoma)였다.

아홉 살짜리 젠슨 황(Jensen Huang)은 영어를 한 마디도 몰랐다. 삼촌은 좋은 기숙학교를 찾았다고 믿었다. 실제로 형제가 보내진 곳은 켄터키 주 시골의 오네이다 침례교 학교(Oneida Baptist Institute) — 퇴학당한 문제 학생들이 모인 교화 학교였다. 첫날 밤 룸메이트는 칼에 찔린 상처가 있는 열일곱 살짜리였다. 소년의 일과는 100명분의 화장실을 청소하는 것이었고, 형은 학교 담배 농장에서 일했다. 부모와의 연락은 카세트테이프를 녹음해 우편으로 주고받는 것이 전부였다. 2년 뒤 부모가 오리건 주 비버턴(Beaverton)에 도착했고, 형제는 그제야 가족과 다시 합쳤다. 소년은 공립학교에 편입해 2학년을 건너뛰었다.

그로부터 19년이 지났다. 1992년, 젠슨 황은 스탠퍼드 전기공학 석사를 마쳤다. 같은 해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캘리포니아 주 산타클라라의 작은 사무실을 빌렸다. 자본은 벤처캐피털(Venture Capital, VC)에서 받은 200만 달러가 전부였다. 회사 이름은 NVIDIA. 무엇을 만들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그래픽 칩이라는 방향만 있었다.

2025년 11월, NVIDIA 분기 실적 발표 현장. 젠슨 황이 마이크 앞에 섰다. 그의 오른손에는 쪽지 하나가 있었다.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3분기 총매출 570억 달러. 데이터센터 매출만 512억 달러. 12개월 누적 총매출 1,871억 달러. 삼성전자 연간 총매출의 78%를, 이 한 회사가 혼자 달성한 것이다. 창업 이래 주가는 수만 배 상승했고, 한때 시가총액 세계 1위를 기록했다.

같은 날, 워싱턴 D.C.의 어느 관료 사무실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H-1B 비자 수수료를 최대 10만 달러(약 1억 4,000만 원)로 인상하겠다는 제안을 최종 검토하고 있었다. 젠슨 황 같은 이민자들이 미국에서 일하기 위해 쓰는 비자였다.

이 두 장면 —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기술 회사의 분기 실적과, 그 회사를 만든 이민자들을 막으려는 정책 — 사이의 거리가 이 챕터의 주제다.


젠슨 황의 이야기는 개인의 성공담이 아니다. 성공담으로 읽으면 핵심을 놓친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타이난에서 온 이민자 소년이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기술 기업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대만에 남았다면 — NVIDIA는 탄생했을까. 베이징으로 갔다면 — 지금과 같은 NVIDIA가 가능했을까. 런던을 선택했다면 — 2025년 1,871억 달러 매출의 회사가 영국에서 나왔을까.

대답은 개인이 아니라 생태계에 있다. 젠슨 황이 천재라는 사실보다, 그 천재가 착륙한 곳이 실리콘밸리였다는 사실이 더 결정적이다. 같은 비행기에 탔더라도 목적지가 달랐다면, 그 소년은 오늘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을 셈이다.

이 챕터는 실리콘밸리라는 생태계의 구조적 조건을 분해한다. VC 자본, 군사 기술의 민간 전환, 이민 인재, 대학 연구 파이프라인이라는 네 축이 어떻게 맞물려 AI 혁명의 진원지를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 축 하나하나가 지금 어떤 압력을 받고 있는지. 마지막으로, 이 생태계의 구조가 250년 전 산업혁명기 영국의 혁신 클러스터와 어떤 점에서 닮았고 어떤 점에서 다른지.


섹션 A: 자본의 가속기 — VC 생태계와 메가라운드의 시대

2025년, 세계 AI 스타트업들이 받은 벤처캐피털 투자 총액은 2,110억 달러였다. 전년 대비 75% 증가한 수치다. 이 돈의 60%가 베이 에어리어(Bay Area), 즉 샌프란시스코에서 팰로앨토(Palo Alto)까지 이어지는 약 80킬로미터 반경 안에 쏟아졌다. 1,270억 달러가 단 하나의 도시권에 집중된 것이다.

숫자를 체감하기 위해 비교가 필요하다. 2025년 한국의 전체 국방예산은 약 590억 달러였다. 이 한 도시권에 쏟아진 AI 투자금은 한국 국방예산의 두 배를 넘는다. 그리고 이것은 정부 예산이 아니다. 민간 투자자들의 돈이다.

샌프란시스코 로컬 기준으로 분해하면 집중도가 더욱 뚜렷하다. 로컬 AI 투자 1,260억 달러 중 1,130억 달러가 단 92개 기업으로 흘러들어갔다. 이들 모두 1억 달러 이상의 메가라운드(mega-round)를 받은 기업들이다. 나머지 수백 개의 AI 스타트업이 나눠 가진 것은 130억 달러에 불과하다. 자본 집중이 단지 미국으로, 단지 베이 에어리어로가 아니라, 베이 에어리어 안에서도 극소수로 좁혀지고 있다.

"벤처캐피털"이라는 이름이 이미 부적절하다. 전통적 VC 라운드는 시리즈 A 기준으로 500만~5,000만 달러 수준이다. 2025년에는 그 개념 자체가 무너졌다.


2026년 2월, 앤트로픽(Anthropic)이 시리즈 G 라운드를 발표했다. 300억 달러. 한 번의 자금 조달 규모가 한국 연간 방위비의 절반을 넘었다. 이 라운드에서 아마존이 400억 달러 이상을 전략적으로 투자했고, 구글이 200억 달러를 더했다. 기업가치는 3,800억 달러가 됐다.

오픈에이아이(OpenAI)의 기업가치는 5,000억 달러를 향하고 있었다. 2015년 비영리법인으로 창업된 이 조직이 10년 만에 이 규모에 도달했다. 일론 머스크의 xAI는 600억 달러 수준에서 거래됐다. 데이터 라벨링 스타트업 스케일 에이아이(Scale AI)의 기업가치는 1,350억 달러였다. 코딩 보조 도구 커서(Cursor)를 만드는 애니스피어(Anysphere)는 연간반복수익(Annual Recurring Revenue, ARR) 10억 달러를 돌파했다.

이 숫자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하나다. AI 투자는 벤처캐피털의 영역을 이미 벗어났다. 국가 예산 규모의 단일 라운드, 클라우드 공급 확보를 위한 빅테크의 "지분 전쟁" — 이것은 준(準)국가적 규모의 투자다. 투자자들이 수익 회수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 규모의 베팅은 수익 계산을 넘어선 전략적 포지셔닝에 가깝다. 아마존이 앤트로픽에 투자한 이유는 클로드(Claude) AI 수익 배분권이 아니라, 앤트로픽이 훈련에 사용하는 클라우드 플랫폼이 AWS(아마존 웹 서비스)가 되기 때문이다.


왜 이 돈이 다른 곳이 아니라 여기에 모이는가. 지리가 아니라 구조를 보면 답이 보인다.

실리콘밸리의 VC 생태계는 세 가지 구조적 특성에서 세계 다른 어느 곳과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첫째는 실패 허용 문화다. 미국 파산법 챕터 11(Chapter 11)은 재생 중심으로 설계됐다. 회사를 말아먹어도 창업자가 재기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연쇄 창업자(serial entrepreneur)"는 멸시의 대상이 아니라 신뢰의 근거다. 한 번 실패한 창업자에게 투자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돈을 내미는 역설이 실제로 작동한다. 실패의 경험이 정보 자산이 되는 시장이다. 이것은 미국인의 낙관주의라는 문화적 특성이 아니라, 파산법과 세금 제도, 투자 관행이 수십 년에 걸쳐 형성한 제도적 구조다.

둘째는 멱함수 분포(power law) 투자 모델이다. 세쿼이아 캐피털(Sequoia Capital), 안드레센 호로위츠(Andreessen Horowitz, a16z) 같은 주요 VC들은 포트폴리오의 1~2개 기업이 100배 수익을 내면 나머지 실패를 모두 상쇄하는 구조로 운영한다. 이것은 실패를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포함한" 수익 모델이다. 따라서 이들은 성공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불확실성 속에서도 베팅한다. 실패하더라도 포트폴리오 전체 손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고, 성공했을 때 전체 수익을 뒤집을 수 있는 구조다.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이 모델이 "자본이 아이디어의 불확실성을 허용하는 유일한 생태계"를 의미한다.

셋째는 네트워크 밀도(network density)다. 스탠퍼드 대학교, UC버클리, 세쿼이아 캐피털, 안드레센 호로위츠, 구글, 메타, 오픈에이아이, 앤트로픽이 모두 50킬로미터 반경 안에 있다. 창업자가 아이디어를 들고 VC를 만나러 가는 데 차로 20분이 걸린다. 그 VC 파트너가 어제 저녁 같은 파티에서 스탠퍼드 교수를 만났다. 그 교수의 박사 과정 학생이 내일 오전 그 VC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본다. 이 순환 — 아이디어에서 자본까지, 연구에서 창업까지 — 의 속도가 세계 다른 어느 도시와도 다르다.

이 밀도는 우연이 아니다. 스탠퍼드 대학교의 프레드릭 터만(Frederick Terman) 교수가 1950년대 HP(Hewlett-Packard)의 창업자들을 지도하고, 그들에게 학내 서버와 사무공간을 제공하면서 시작됐다. 산업과 대학의 거리를 물리적으로 좁히는 선택이 수십 년에 걸쳐 하나의 생태계를 만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멈출 필요가 있다. VC 생태계를 미국의 본질적 우위로 서술하면 절반의 진실만 보이기 때문이다.

2025년, 글로벌 오픈 가중치(open-weight) AI 모델 상위 10개 중 9개가 중국산이었다(ChinaTalk, 특정 벤치마크 기준). 딥시크(DeepSeek), 알리바바(阿里巴巴)의 치엔원(通义千问, Qwen), 바이트댄스(字节跳动, ByteDance)의 더우바오(豆包), 바이두(百度)의 어니(文心一言, ERNIE), 화웨이(华为)가 지원하는 판구(盘古) 계열 — 이 모델들은 VC 메가라운드 없이 만들어졌다. 자본이 혁신의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미국에서는 2,110억 달러의 투자금이 오픈에이아이, 앤트로픽, xAI 등 소수에 집중됐다. 중국에서는 정부 보조금, 대형 인터넷 기업의 내부 자금, 그리고 딥시크처럼 헤지펀드가 지원하는 개인 연구자 그룹이 각자의 방식으로 AI를 밀었다. 결과는 이렇다. 미국은 자본 규모에서 압도적으로 앞서고, 중국은 오픈 모델의 다양성과 배포 속도에서 앞선다. 어느 쪽이 장기적으로 더 중요한지는 여전히 열린 질문이다.

자본이 모든 것을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본이 없으면 특정 종류의 혁신은 불가능하다. GPT-4급 모델 하나를 훈련하는 데 약 1억 달러가 든다. 제미니(Gemini) 울트라는 그 이상이다. 이 규모의 투자를 소화할 수 있는 생태계는 지구상에 실리콘밸리와 중국 정부 주도 펀드 두 곳밖에 없다. AI의 최전선 경쟁은 자본이 필요한 구간과 인재가 필요한 구간이 다르다.


2025년 AI 투자 구조에서 하나 더 눈에 띄는 사실이 있다. 전체 AI 투자 5,600억 달러 중 3분의 1이 단 5개 기업에 집중됐다. 이것은 단순한 자본 집중이 아니라 구조적 결과다.

AI의 본질적 속성이 자본 집중을 요구한다. 컴퓨팅 스케일링(scaling) 법칙에 따르면, 모델의 성능은 학습에 사용하는 컴퓨팅 양에 비례해 향상된다. 따라서 더 좋은 모델을 만들려면 더 많은 GPU, 더 많은 데이터, 더 많은 전력이 필요하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돈이다. 규모의 게임에서는 자본이 큰 쪽이 유리하다.

그 결과가 "AI의 과두화(oligarchization)"다. 5개 기업이 AI 인프라 공급망을 장악하면, 나머지 스타트업은 이들의 API(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 응용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 위에서 얇은 응용 계층만 구축할 수 있다. 1800년대 철도 독점이 "철도 위 사업"의 자유를 제한했던 구조와 같다. 철도 회사가 운임을 올리면, 철도에 의존하는 농부가 손해를 봤다. 오픈에이아이가 API 가격을 올리면, 그 위에서 서비스를 구축한 스타트업이 손해를 본다.

이 구조는 실리콘밸리가 만든 혁신 생태계의 역설이기도 하다. 혁신을 가속하는 자본이, 그 자본이 충분히 축적되면 혁신을 제한하는 장벽이 된다.


섹션 B: DARPA에서 ChatGPT까지 — 군사 기술의 민간 전환

2004년 3월 13일 새벽, 네바다 주 모하비 사막(Mojave Desert). 기온은 영하에 가까웠다. 출발선 앞에 15대의 차량이 늘어섰다. 외관은 저마다 달랐다. 개조된 험비, 오프로드 트럭, 낡은 픽업. 그러나 이 차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운전석에 아무도 없었다. 바퀴 뒤에, 앞유리 뒤에, 조수석에도 — 사람이 없었다.

미 국방부 산하 국방고등연구계획국(Defens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DARPA)이 주최한 첫 번째 그랜드 챌린지(Grand Challenge)였다. 규칙은 단순했다. 240킬로미터를 혼자서 달리면 100만 달러. "혼자서"의 의미는 명확했다. 차 안에 인간이 없어야 했다. 완전 자율주행이어야 했다.

총성이 울렸다. 차량들이 출발선을 넘었다.

가장 멀리 간 차량이 11.9킬로미터에서 멈췄다. 바퀴가 울타리에 걸려 멈춰 선 것이다. 나머지 차량들은 그보다 적게 갔다. 어떤 차는 출발하자마자 뒤집혔다. 군 장성들은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언론은 이 대회를 "역대 최대의 로봇 실패 쇼"라고 비꼬았다. 100만 달러 상금은 주인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 "실패한 대회"가 세계 자율주행 산업의 씨앗이었다.

이듬해인 2005년 2회 대회에서 스탠퍼드 레이싱 팀의 차량 "스탠리(Stanley)"가 처음으로 전 코스를 완주했다. 이 팀의 핵심 인물 세바스티안 스런(Sebastian Thrun)은 이후 구글에 합류해 자율주행팀을 창설했다. 그 팀이 지금의 웨이모(Waymo)다. 2005년 대회의 다른 참가자들이 우버 자율주행팀(Uber ATG)의 핵심 엔지니어가 됐다. DARPA는 실패에 돈을 댔고, 그 실패가 산업을 만들었다.


미국 기술 혁신에는 하나의 패턴이 반복된다. 군사 위기 → DARPA 투자 → 기초기술 축적 → 민간 전환 → 산업 혁명.

인터넷의 기원은 1969년 ARPANET(아파넷)이다. 소련의 핵 공격을 받더라도 통신이 유지되는 분산형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한 군사 프로젝트였다. 그것이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이 됐고, 닷컴 붐이 됐고, 지금의 인터넷 경제가 됐다.

GPS는 1973년 군사 위치 추적 시스템 NAVSTAR로 시작됐다. 위성 24기를 올려 지구 어디서든 정확한 좌표를 파악하는 것이 원래 목적이었다. 1995년 민간에 개방된 뒤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이 됐다. 그 위에서 우버(Uber)와 에어비앤비(Airbnb)가 탄생했다. 우버의 비즈니스 모델 전체가 GPS 정확도에 의존한다.

음성인식은 1971년 DARPA의 병사 음성 명령 프로그램에서 시작해 시리(Siri), 알렉사(Alexa)가 됐다. 반도체 설계 자동화(Electronic Design Automation, EDA) 도구들도 방산 연구에서 파생됐다.

딥러닝과 AI도 같은 경로를 따른다. DARPA의 전략컴퓨팅이니셔티브(Strategic Computing Initiative, SCI)는 1983년부터 8억 5,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자율 육상 차량, 항공기 조종사 보조 시스템, 전함 지휘 AI를 목표로 삼았다. 직접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병렬 컴퓨팅 기초 기술과 신경망(neural network) 연구가 축적됐다. 2025년 미 국방부의 공식 AI 예산은 17억 달러였고, 이 숫자에 잡히지 않는 분류 예산은 훨씬 크다.


DARPA 모델의 핵심은 세 가지다.

첫째, 상시 직원이 없다. 모든 프로그램 매니저(Program Manager)는 4년 임기의 외부 영입이다. 대학 교수, 민간 연구소 연구원, 기업 엔지니어가 4년 계약으로 온다. 4년 후에는 돌아간다. 이 구조가 정치화와 관료화를 막는다. 4년 후 떠날 사람은 내부 사다리를 올라가는 데 관심이 없다. 자신이 맡은 프로그램의 성과에만 집중한다.

둘째, 실패 포트폴리오 전략이다. 10개 프로그램 중 하나만 성공해도 충분한 예산 구조로 운영된다. "완전한 기술 이전" 원칙에 따라 DARPA가 개발한 기술은 민간이 상업화한다. 기관이 성과물을 독점하지 않는다. 이 원칙이 인터넷, GPS, 음성인식이 모두 민간으로 이전된 이유다.

셋째, 목표의 개방성이다. 그랜드 챌린지는 "240킬로미터를 자율주행으로 완주하라"는 구체적 목표를 제시했지만, 어떻게 할지는 전혀 지정하지 않았다. 카메라를 쓸지, 라이다(LiDAR, 레이저 기반 거리 측정 장치)를 쓸지, 어떤 소프트웨어를 쓸지 — 팀들이 각자 방법을 찾았다. 그 과정에서 자율주행에 필요한 기술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전했다.

이것이 중국의 국가 AI 프로그램과 대조되는 지점이다. 중국의 차세대 AI 발전 계획(新一代人工智能发展规划)은 목표를 명확히 제시한다. 2030년까지 AI 분야 세계 1위. 각 세부 분야에 예산을 배분하고 목표를 할당한다. 이 하향식(top-down) 접근은 명확한 목표가 있을 때 강하다. 딥시크처럼 "주어진 자원으로 최대 효율의 모델 훈련"이라는 목표가 명확할 때, 중국의 방식은 놀라운 결과를 낸다.

그러나 DARPA의 그랜드 챌린지처럼 "무엇이 필요한지조차 몰랐던 것"을 발견하는 데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 1회 대회가 완전한 실패로 끝났을 때, 만약 중국 방식의 관료 체계가 이 대회를 운영했다면 — 2회 대회는 없었을 것이다.

두 경로 모두 작동한다. 다만 무엇을 잘 만드느냐가 다르다. 미국의 경로는 의도적 실패를 통한 발견이고, 중국의 경로는 목표 지향적 자원 배분이다. AI 시대에는 이 두 경로가 서로 다른 종류의 혁신을 만들고 있다.


DARPA의 유산이 AI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 있다. 2012년 이미지넷(ImageNet) 대회다.

매년 열리는 이 이미지 인식 대회에서, 토론토 대학교의 제프리 힌튼(Geoffrey Hinton) 교수 팀이 출품한 알렉스넷(AlexNet)이 이미지 인식 오류율을 26%에서 15%로 낮췄다. 이전 최고 기록 대비 11퍼센트포인트 차이는 연구자들이 예상하지 못한 격차였다. 그것은 개선이 아니었다. 단절이었다.

구글은 즉각 움직였다. 힌튼의 스타트업 DNNresearch를 4,400만 달러에 인수했다. 이 인수가 이후 구글 브레인(Google Brain)을 낳았다. 구글 브레인에서 2017년 "어텐션이 전부다(Attention Is All You Need)" 논문이 나왔다. 트랜스포머(Transformer) 구조. 오늘날 GPT, 클로드(Claude), 제미나이(Gemini) 모두 이 논문의 직접 후손이다. 현존하는 거의 모든 대형언어모델(Large Language Model, LLM)의 뿌리가 이 한 편의 논문에 있다.

계보를 정리하면 이렇다. DARPA의 전략컴퓨팅이니셔티브(1983) → 신경망 기초 연구 → 이미지넷 대회(2012, AlexNet) → 구글 브레인 → 트랜스포머 논문(2017) → 오픈에이아이 GPT 시리즈 → 챗GPT(2022) → 전 세계 AI 붐. 이 경로는 우연이 아니다. 미국 기술 생태계가 70년간 다듬어온 "군사 투자 → 기초연구 → 민간 상업화"라는 구조의 산물이다.


섹션 C: 이민이라는 산소 — H-1B 위기와 인재 전쟁

AI의 핵심 인물 목록을 만들어보자.

젠슨 황(Jensen Huang) — NVIDIA 최고경영자. 대만 출신. 일리야 수츠케버(Ilya Sutskever) — 오픈에이아이 공동창업자. 러시아 출생, 이스라엘에서 성장. 앤드루 응(Andrew Ng) — 구글 브레인(Google Brain) 공동창업자. 영국 출생, 홍콩과 미국에서 성장. 얀 르쿤(Yann LeCun) — 메타 AI 수석 과학자. 프랑스 출신. 데미스 하사비스(Demis Hassabis) — 구글 딥마인드(DeepMind) 최고경영자. 영국-싱가포르 혼혈. 제프리 힌튼(Geoffrey Hinton) — 딥러닝의 아버지, 2024년 노벨물리학상. 영국 출신, 캐나다 거점.

이 여섯 명 중 미국 태생은 한 명도 없다.

이것은 사례 나열이 아니다. 이민자 개인들이 특별히 능력이 뛰어난 것이라는 주장도 아니다. 구조적 사실이다. 미국 AI·컴퓨터과학(CS) 박사 과정 재학생의 약 70%가 외국 태생이다. 미국 국립과학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 NSF) 데이터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창업자 중 이민자 비율은 55%에 달한다(카우프만 재단 Kauffman Foundation 기준). 2000~2010년 미국 특허의 공동 발명자 중 이민자 비율은 25.6%였다.

수식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미국의 AI 능력 = 미국 토종 인재 + 전 세계에서 끌어온 인재. 두 번째 항을 제거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실리콘밸리는 지금의 실리콘밸리가 아닐 것이다.


2025년 9월, 트럼프 행정부는 H-1B 비자 수수료를 최대 10만 달러로 인상하겠다는 계획을 공표했다. 기존 수수료 구조는 460달러에서 6,460달러 범위였다. 최대 인상 시 200배가 넘는 상승이다.

명목상 이유는 "미국인 일자리 보호"였다. 실제 작동 방식은 다르다.

H-1B 비자는 매년 쿼터가 있다. 일반 쿼터 6만 5,000건, 석사 이상 학위자 추가 쿼터 2만 건. 수요는 매년 쿼터를 수십 배 초과한다. 추첨으로 선발한다. 이 비자의 절반 가까이가 전문·과학·기술 서비스 분야에 집중된다. AI 연구자,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데이터 과학자가 주요 직군이다.

수수료가 10만 달러가 되면 구조가 바뀐다.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대형 기업은 연봉이 30만~50만 달러인 엔지니어를 채용할 때 추가로 10만 달러를 낼 수 있다. 그러나 시드 단계의 AI 스타트업은 다르다. 직원 1명을 채용할 때 연봉의 절반에 가까운 비용이 비자 수수료로 나간다. 소규모 혁신 주체들이 인재 경쟁에서 구조적으로 불리해진다. 실리콘밸리 생태계의 저변이 좁아지는 것이다.


역설이 여기 있었다. 트럼프 행정부 내부에서도 충돌이 일어났다.

정부효율부(DOGE)를 이끌던 일론 머스크가 공개적으로 H-1B를 옹호했다. NVIDIA 같은 기업이 없었다면 AI 시대 미국의 위상도 없었을 것이라는 논리였다. 공동 수장 비벡 라마스와미(Vivek Ramaswamy)도 같은 입장이었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MAGA 진영이 이민 정책을 두고 내부 분열을 보였다. 실리콘밸리의 논리가 정치 진영의 경계를 가로질렀다.

기업들은 즉각 반응했다. 캐나다와 영국에 법인을 설립하거나 원격근무 체제로 전환했다. 이 움직임이 세 개의 전선을 만들었다.


첫 번째 전선은 캐나다다.

2025년 11월, 캐나다 연방정부가 H-1B 비자 소지자 대상 영주권 패스트트랙 프로그램을 승인했다. H-1B를 가진 외국인이 캐나다 영주권을 빠르게 취득할 수 있는 경로를 열어준 것이다. 밴쿠버와 토론토는 이미 "실리콘밸리 북부(Silicon Valley North)"라는 별명을 얻은 지 오래였다. 구글과 아마존은 각각 밴쿠버와 토론토에 주요 AI 연구소를 두고 있다. 트럼프의 문닫기가 캐나다에게 어부지리가 된 셈이다.

이것은 국가 간 인재 경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신호다. 과거의 인재 유치 경쟁은 "어느 나라가 더 좋은 대학을 가졌는가"였다. 지금은 "어느 나라가 비자를 더 빨리, 더 싸게 내주는가"로 이동했다.

두 번째 전선은 인도다.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는 2025년 인도에서만 3만 3,000명을 채용했다. 전년 대비 18% 증가다. 이것은 단순한 인건비 절감이 아니다. 미국에서 채용할 수 없게 되는 만큼, 기업이 인재가 있는 곳으로 이동한다.

동시에 미국에서 공부한 인도 유학생의 30~40%가 귀국을 선호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배경은 세 가지다. 첫째, 벵갈루루(Bengaluru)와 하이데라바드(Hyderabad)의 스타트업 생태계가 성숙했다. 둘째, 미국 이민의 불확실성이 커졌다. 셋째, 인도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귀국 후의 기회가 늘었다. "굳이 미국에서 불안한 비자 상태로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에 이전과 다른 답이 나오고 있다.

세 번째 전선은 중국이다.

2025년 10월 1일, 중국 정부는 STEM 인재를 대상으로 한 전용 비자, K비자를 출시했다. 5년 복수 입국, 세금 혜택, 주거 지원 패키지를 포함한다. 노리는 대상은 하나다.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계 2~3세대, 그중에서도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중국계 AI 연구자들이다.

중국의 K비자는 단순한 비자 정책이 아니다. "역디아스포라(reverse diaspora)" 전략이다. 1970~1980년대 대만·홍콩 출신들이 미국으로 이민해 실리콘밸리를 만들었듯, 중국은 지금 그 흐름을 뒤집으려 한다. 중국에서 미국으로 간 인재를 중국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 K비자의 세금 혜택은 그 유인의 경제적 표현이다.


미국이 문을 닫을수록 이 세 전선에서 인재가 빠져나간다. 인재는 물과 같다. 막으면 다른 곳으로 흐른다.

반사실(counterfactual)을 상상해보자. 만약 1973년 젠슨 황의 부모가 미국 대신 영국을 선택했다면. 일리야 수츠케버가 이스라엘을 떠나 캐나다로 갔다면. 얀 르쿤이 파리의 CNRS(국립과학연구센터)를 고집했다면. 제프리 힌튼이 토론토를 끝내 떠나지 않았다면.

이 반사실은 순수한 가정이 아니다. H-1B 수수료 10만 달러가 만들어낼 미래에 대한 사고 실험이다. 오늘의 정책이 20년 뒤의 인재 지형을 만든다. AI 역사의 핵심 인물들이 미국에 오지 않았다면 — 오늘의 AI 지형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그 "달랐을 것"의 크기가 이민 정책의 진짜 장기 비용이다.

단기 비용은 눈에 보인다. 스타트업 채용 비용 증가, 기업의 캐나다·인도 이전. 장기 비용은 보이지 않는다. 다음 세대의 젠슨 황이 오리건 주가 아닌 토론토의 공립학교에 앉아 있을 수도 있다는 것. 미국의 AI 패권을 자신의 이민 정책이 잠식하는 구조 — 그것이 이 정책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악의 결과다.


섹션 D: 대학이라는 발전소 — 스탠퍼드에서 오픈에이아이까지

1998년, 스탠퍼드 컴퓨터과학과. 두 명의 박사 과정 학생이 학내 서버를 써서 검색 엔진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다. 래리 페이지(Larry Page)와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 지도교수가 VC를 소개했다. 산타클라라의 차고에서 회사가 시작됐다. 회사 이름은 구글이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두 천재가 만났다는 것이 아니다. 지도교수가 VC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VC가 다음 날 만나줬다는 것이다. 대학 서버에서 첫 미팅까지의 거리가 물리적으로 20분이었다는 것이다. 이 지리적 밀도가 스탠퍼드를 단순한 대학이 아니라 기업 제조기로 만든다.


스탠퍼드의 계보를 추적하면 실리콘밸리의 역사가 된다. 구글(래리 페이지·세르게이 브린, 스탠퍼드 박사 과정), 야후(제리 양 Jerry Yang, 스탠퍼드), HP(휼렛과 패커드 William Hewlett·David Packard, 스탠퍼드 공대), 선마이크로시스템즈(Sun Microsystems, 스탠퍼드), 시스코(Cisco, 스탠퍼드), 그리고 NVIDIA(젠슨 황, 스탠퍼드 전기공학 석사).

이 계보는 우연의 집합이 아니다. 밴니바 부시(Vannevar Bush)가 2차 세계대전 직후 설계한 "과학 — 끝없는 프런티어(Science — The Endless Frontier)" 보고서에서 시작됐다. 정부 연구비를 대학에 지원하고, 대학이 기초연구를 하고, 그 연구가 민간 산업으로 이전되는 모델이었다. 스탠퍼드의 프레드릭 터만 교수가 이 원칙을 캠퍼스에 구현했다. 학내 산업단지를 만들고, 졸업생들이 캠퍼스 근처에서 창업하도록 독려했다. "대학-기업-VC" 삼각형이 1950년대에 설계되어 70년간 작동한 결과가 지금의 실리콘밸리다.


AI 연구 파이프라인의 구체적 흐름을 따라가면 그 삼각형의 작동 방식이 드러난다.

2012년, 제프리 힌튼의 알렉스넷이 딥러닝 혁명을 열었다. 토론토 대학교 연구가 구글에 4,400만 달러에 인수됐다. 구글 브레인이 형성됐다. 2017년, 구글 브레인 연구자 8명이 "어텐션이 전부다" 논문을 발표했다. 트랜스포머 구조가 AI 연구의 표준이 됐다.

2018년, 트랜스포머를 기반으로 오픈에이아이가 GPT-1을 발표했다. 2020년 GPT-3, 2022년 챗GPT. 2021년, 오픈에이아이에서 핵심 연구자들이 나와 앤트로픽을 창업했다. 2023년, 앤트로픽이 클로드를 출시했다. 2025년, 앤트로픽 ARR은 140억 달러였고 2026년 목표는 260억 달러였다.

모든 가지가 하나의 뿌리로 연결된다. DARPA → 대학 연구 → 구글 인수 → 오픈에이아이 → 앤트로픽 → 전 세계 AI 서비스. 이 계보가 스탠퍼드라는 발전소를 통해 흐른다.


스탠퍼드 인간중심AI연구소(Stanford Human-Centered AI Institute, HAI)는 연간 예산 약 1억 달러, 200명 이상의 교수진을 보유한다. 이 연구소가 발간하는 AI 인덱스 리포트(AI Index Report)는 세계 AI 연구 현황을 측정하는 기준 데이터가 됐다. AI 분야의 논문 수, 투자금, 인재 분포를 매년 집계해 발표한다.

MIT의 컴퓨터과학·인공지능 연구소(CSAIL, Computer Science and Artificial Intelligence Laboratory)는 심층강화학습과 로봇공학의 허브다. 아이로봇(iRobot), 드롭박스(Dropbox)가 이곳에서 나왔다. UC버클리의 BAIR(Berkeley AI Research Lab, 버클리 AI 연구소)는 오픈소스 LLM 연구의 중심으로, 데이터브릭스(Databricks)와 코히어(Cohere)가 이곳 연구자들이 만들었다. 카네기멜론(Carnegie Mellon University, CMU)의 컴퓨터과학과는 자연어처리(Natural Language Processing, NLP)와 음성인식의 기초를 닦았다. 스케일 에이아이(Scale AI), 듀오링고(Duolingo)가 CMU 계보다.


중국이 이 모델을 복제하려 시도하고 있다는 점도 짚어야 한다.

칭화대학교(清华大学)는 중국 최고의 공과대학으로, AI 연구 규모를 빠르게 키우고 있다. 베이징대학교(北京大学)와 함께 중국 정부의 집중 투자를 받는다. 중국 정부는 "일류 대학, 일류 학과(一流大学, 一流学科)" 이중 일류 계획을 통해 100개 이상의 대학과 학과를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했다. 딥시크를 만든 연구자들 중 상당수가 중국 상위권 대학 출신이다.

그러나 두 가지 차이가 아직 격차를 만든다.

하나는 스핀오프 생태계다. 실리콘밸리에서는 대학을 나온 연구자가 스타트업을 차리고 VC에서 자금을 받아 성장하는 순환이 자연스럽다. 중국에서도 이 순환이 있다. 그러나 정부 자금 의존도가 높고, 플랫폼 경제를 지배하는 바이두·알리바바·텐센트·화웨이의 흡인력이 커서 독립 창업보다 대기업 취직이 더 매력적인 경우가 많다. 또한 2021~2023년 중국 정부의 빅테크 규제 강화로 민간 AI 투자 환경이 불확실해진 측면도 있다.

다른 하나는 학술 개방성이다. 세계 AI 연구의 사실상 표준 학술지와 학회 — NeurIPS, ICML, ICLR — 에 중국 연구자들의 논문 제출과 채택이 늘고 있다. 그러나 중국 내부에서 발표된 연구가 외부와 완전히 공유되는 속도는 여전히 차이가 있다. 이것은 국가 역량의 문제가 아니라 정보 환경의 구조적 차이다.

격차가 좁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딥시크의 등장이 그 증거다. 그러나 격차가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빠르게 좁혀지는지는 계속 관찰이 필요한 문제다.


1권 연결점: 혁신의 지리학 — 영국 공장 클러스터와 실리콘밸리


1권에서 우리가 본 것: 산업혁명기 영국의 혁신 생태계는 맨체스터(Manchester)와 버밍엄(Birmingham)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더웬트 강(River Derwent) 수력을 이용한 공장들이 집중됐고, 왕립학회(Royal Society)와 루나 협회(Lunar Society of Birmingham)가 지식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맨체스터 은행(Manchester Bank, 1771)이 산업자본을 공급하고 공장주-은행가 동맹이 혁신을 가속했다. 리처드 아크라이트(Richard Arkwright)는 방적기를 발명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방적기, 수력, 노동 규율, 자본을 연결하는 시스템 — 공장(factory)이라는 새로운 제도적 형태 — 을 설계한 사람이었다.


18세기 영국에서 방직 공장이 랭커셔(Lancashire)와 더비셔(Derbyshire)에 집중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공장을 돌리는 수력이 있었고, 그 공장에서 일할 노동자와 자본이 있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AI 기업이 샌프란시스코에서 팰로앨토까지 50킬로미터 반경에 집중된 이유도 같은 논리다. AI를 만드는 자본과 인재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자원의 내용은 달라졌다. 수력과 석탄 대신 VC 자본과 DARPA 자금. 방적기계 대신 GPU. 루나 협회의 월례 지식 교류 대신 NeurIPS(신경정보처리시스템학회)와 ICML(국제기계학습학회)의 연간 학술 발표. 그러나 혁신이 지리적 밀도를 필요로 한다는 법칙은 시대를 넘어 바뀌지 않았다.

더 정밀하게 대응시키면 구조적 동형성(isomorphism)이 보인다.

1760~1830년 영국 2010~2026년 실리콘밸리
맨체스터·더비셔 공장 클러스터 샌프란시스코~팰로앨토 50km 기술 클러스터
왕립학회 + 루나 협회 스탠퍼드 HAI + NeurIPS·ICML
아크라이트의 방적기 특허 독점 NVIDIA의 CUDA(쿠다) 소프트웨어 생태계 독점
공장주-은행가 동맹 (맨체스터 은행) VC-창업자 동맹 (세쿼이아-구글, a16z-코인베이스)
위그노(Huguenot) 직공 이민자 중국·인도·러시아·프랑스 박사 이민자
기계 수출 금지법 (1774~1843) 반도체 수출 통제 (EAR, Export Administration Regulations)
면방적기 특허 만료 후 확산 가속 트랜스포머 오픈소스화 후 LLM 확산 가속

이 대응은 역사의 반복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혁신 생태계가 작동하는 조건이 시대를 가로질러 유사하다는 것을 말한다. 자본, 지식 네트워크, 기술 독점, 이민 인재 — 이 네 가지 조건이 동시에 충족될 때 혁신의 진원지가 형성된다. 그리고 이 조건들 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진원지는 흔들린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도 하나 있다.

영국 산업혁명의 레버는 물리적이었다. 면화는 인도에서 배로 날라야 했다. 석탄은 탄광에서 캐야 했다. 공장은 수력이 흐르는 강변에 지어야 했다. 숙련 직공의 손 기술은 이전에 20년이 걸렸다. 혁신의 확산에는 물리적 한계가 있었다. 영국이 기계 수출을 법으로 금지한 1774~1843년 동안, 그 한계가 영국의 기술 패권을 연장했다.

실리콘밸리의 레버는 무형이다. 알고리즘은 복사 비용이 제로다. 딥시크가 이를 증명했다. 2025년 1월, 딥시크-R1이 공개됐을 때 실리콘밸리는 잠시 멈추었다. H800 GPU 2,048장. 미국 빅테크 AI 연구소가 쓰는 수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자원으로 만든 모델이 벤치마크에서 대등한 성능을 보였다. 딥시크는 미국의 오픈소스 연구들 — 트랜스포머 논문, 라마(LLaMA) 모델, 여러 기법들 — 을 흡수하고 자신만의 훈련 최적화를 더했다. 코드는 인터넷을 타고 국경을 넘었다.

이것이 AI 혁명이 산업혁명보다 훨씬 빠르게 전파되는 이유이자, 동시에 미국이 기술 우위를 유지하기가 더 어려운 이유다. 영국은 기계를 막았다. 미국은 알고리즘을 막기 어렵다.

아크라이트와 젠슨 황을 나란히 놓으면 하나의 공통점이 보인다. 둘 다 기계를 만든 것이 아니라, 기계 위에서 돌아가는 생태계를 설계했다. 아크라이트가 진짜로 만든 것은 크롬퍼드 밀(Cromford Mill) — 수력 동력, 교대 근무, 품질 관리, 도제 훈련이 통합된 공장 시스템이었다. 젠슨 황이 진짜로 만든 것은 GPU가 아니라 CUDA(Compute Unified Device Architecture, 쿠다)다. 2006년에 출시된 이 소프트웨어 플랫폼이 GPU를 범용 병렬 컴퓨팅 장치로 전환했다. 파이토치(PyTorch), 텐서플로우(TensorFlow)가 CUDA 위에서 돌아간다. 세상의 거의 모든 AI 모델이 CUDA를 통해 학습된다. AMD GPU로 전환하려면 수천만 줄의 최적화 코드를 다시 짜야 한다. 이 전환 비용이 NVIDIA의 GPU 시장 92% 점유율을 지탱하는 진짜 해자(moat)다.

아크라이트가 면사를 짜는 속도를 수십 배로 높였다면, 젠슨 황은 생각하는 속도를 수십 배로 높였다. 공통점은 기계가 아니라 기계를 둘러싼 시스템을 설계했다는 데 있다.

1권의 핵심 공식 — 기술 혁신 → 자본 집중 → 사회 불안 → 제도 재설계 — 이 AI 시대에 다시 작동하고 있다. 실리콘밸리 생태계가 AI 기술 혁신을 낳고, 그 기술이 자본을 집중시킨다. 앤트로픽 3,800억 달러, 오픈에이아이 5,000억 달러, NVIDIA 12개월 매출 1,871억 달러. 그 자본 집중이 사회 불안을 낳기 시작했다. 다음 챕터들에서 볼 것이다. 그리고 제도 재설계의 압력이 쌓이고 있다. 미국 각 주의 AI 규제 입법, 연방 차원의 논의. 18세기 영국에서 공장법이 64년 만에 제정됐듯, AI 시대의 제도 재설계가 그보다 빠른 속도로 올 수 있다. 아니면 늦을 수도 있다.


생태계의 압력점들: 네 축은 어디서 흔들리는가

생태계가 강하다는 것과 생태계가 영원하다는 것은 다르다. 지금 실리콘밸리의 네 축 각각에 압력이 가해지고 있다.

VC 자본 축의 압력은 과열이다.

앤트로픽의 ARR은 3년 연속 약 10배씩 성장했다. 2024년 말 10억 달러, 2025년 중반 70억 달러 런 레이트, 2026년 2월 140억 달러. 2026년 목표는 260억 달러다. 이 성장 속도는 실제로 경이롭다. 그러나 3,800억 달러 기업가치 대비로 보면, 2026년 260억 달러 ARR을 달성해도 기업가치 대비 매출 배수(P/S ratio)는 15배에 달한다. 역사적으로 지속 가능한 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 기업 배수의 두 배를 넘는다.

AI가 버블인지의 논쟁은 아직 결론이 없다. 버블이 터지려면 수익이 투자를 정당화하지 못해야 한다. 지금 투자자들이 걸고 있는 베팅은 "AI는 인터넷보다 큰 전환이고, 그 전환의 핵심 플랫폼을 가진 기업은 지금 가치보다 훨씬 커질 것"이라는 판단이다. 그 판단이 맞다면 버블이 아니다. 틀리다면 2000년 닷컴 버블의 재판이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다.

DARPA 유산 축의 압력은 민간화 속도다.

DARPA의 연간 예산은 약 40억 달러다. 오픈에이아이 단 한 번의 펀딩이 그보다 크다. 국방부 공식 AI 예산 17억 달러가 민간 AI 투자 2,110억 달러의 0.8%에 불과하다. 정부 주도 기초기술 개발의 상대적 비중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이것이 문제인 이유는 인센티브 구조 때문이다. 민간 자본은 18개월 내 수익화가 가능한 연구를 선호한다. DARPA가 했던 "10년 후 결실을 맺을 수 있는지조차 모르는" 기초연구에 민간 자본은 투자하지 않는다. 인터넷, GPS, 딥러닝의 기초는 모두 정부 자금으로 이루어진 "수익화 불가능한" 연구에서 나왔다. 그 흐름이 바뀌고 있다.

이민 인재 축의 압력은 앞서 자세히 살펴봤다. H-1B 수수료 인상의 역설, 세 개 전선에서의 인재 유출.

대학 파이프라인 축의 압력은 산학 관계의 역전이다.

AI 기업들이 대학 연구자를 대규모로 영입하면서 대학의 기초연구 인력이 줄어들고 있다. 2023년 기준, 미국 상위 AI 논문 저자의 70% 이상이 민간 기업 소속이었다. 대학이 기초연구를 한 뒤 기업이 응용한다는 순서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오픈에이아이, 구글 딥마인드가 직접 기초연구를 수행한다. 민간 기업의 기초연구 수행 능력이 높아지는 것은 단기적으로 효율적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수익성 있는 기초연구"와 "수익성 없지만 필요한 기초연구" 사이의 간극이 커질 위험이 있다.


한국 독자를 위해 하나 더 짚는다.

서울 수도권에는 AI 연구 인력, 투자 자본, 대학 연구소가 모두 있다. 물리적 거리도 짧다. 그러나 실리콘밸리와의 차이는 지리가 아니다. 스탠퍼드 졸업생이 VC를 만나러 가는 것과 KAIST(한국과학기술원) 연구자가 투자자를 만나는 것 사이의 차이는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 실패의 비용, 주식 기반 보상 체계의 성숙도, 규제 환경의 예측 가능성에서 온다.

실리콘밸리가 70년에 걸쳐 만들어진 생태계라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단번에 복제되지 않는다. 그리고 완전한 복제가 목표여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삼성전자가 NVIDIA에 HBM(High Bandwidth Memory, 고대역폭 메모리)를 납품하고, SK하이닉스가 AI 가속기 메모리를 공급하는 것 — 이것은 실리콘밸리 생태계의 설계 레이어와는 다른 방식으로 AI 시대의 부가가치를 획득하는 전략이다. 1권에서 본 "설계 레이어와 실행 레이어의 구분"이 국가 단위에서도 적용된다.


전환부: 자본의 다음 행선지

실리콘밸리는 VC 자본, DARPA 유산, 이민 인재, 대학 파이프라인이라는 네 축의 수렴 지점이다. 이 네 축은 70년에 걸쳐 층층이 쌓인 것이며, 어느 하나가 압력을 받으면 전체가 흔들린다. H-1B 위기는 세 번째 축을 건드리고, 민간 자본의 과열은 첫 번째 축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 생태계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그 결과물이 만드는 자본의 흐름이 다음 행선지를 향해 이동한다.

자본의 주소는 하나로 수렴된다. GPU. 그리고 GPU를 만드는 회사는 사실상 하나다. NVIDIA. 아홉 살에 영어 한 마디 못하고 오리건 주 공립학교에 앉았던 그 소년이 만든 회사.

실리콘밸리가 자본을 만들고, 그 자본이 GPU를 사고, GPU가 AI를 만들고, 그 AI가 다시 자본을 만든다. 이 순환은 달러라는 글로벌 혈액 순환 시스템과 맞물린다. GPU는 달러로 거래된다. AI 산업 전체가 달러라는 혈액형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 순환의 구조와 취약점을 — 다음 챕터에서 해부한다.


주요 출처: The Letter Two (2026.02.07), Venture Capital Journal (Crunchbase), Fortune (2025.09.22), Rest of World (2026), National Science Foundation, Kauffman Foundation, Anthropic 공식 발표 (2026.02), CNBC (2025.10.31, 2026.02.06), East Bay Times (2025.11.23), Bulletin of Atomic Scientists (202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