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1년 5월 1일, 런던 하이드 파크.
유리와 철골로 된 건물이 햇빛을 받아 빛났다. 수정궁(Crystal Palace). 길이 약 564미터, 높이 약 39미터(IP11-020). 기존의 느릅나무를 베지 않고 그 위에 덮개를 씌운 구조였다. 빅토리아 여왕이 개막을 선언했다. 약 10만 점 이상의 전시물이 진열되었고, 그 절반이 영국과 제국의 산물이었다(IP11-021).
증기기관, 면직물, 도자기, 철도 모형, 수확기, 인쇄기. 영국이 세계에 선언하는 자리였다. 우리가 만들었다. 우리가 최고다. 6개월간 약 604만 명이 방문했다(IP11-021). 《타임스》는 이 박람회를 "인류 역사의 전환점"이라 불렀다.
그런데 전시장의 한쪽 구석에서 불편한 사실이 관찰자들의 눈에 들어왔다. 프로이센관에 전시된 크루프(Krupp)의 강철 대포. 미국관의 콜트(Colt) 리볼버와 맥코믹(McCormick) 수확기. 이 물건들은 영국의 전시품과 달랐다. 더 크고, 더 정밀하고, 더 체계적이었다.
Bairoch(1982) 기준으로, 1860년 영국의 세계 제조업 점유율은 약 19.9%였다(IP11-022). 1851년도 비슷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통계상 정점은 30년 뒤인 1880년, 약 22.9%에서 왔다(IP11-022). 그러나 수정궁의 영국인들에게 1851년은 정점처럼 보였다. 정점에 선 사람은 자신이 정점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왜냐하면 정점에서 보이는 풍경은 사방이 아래이기 때문이다.
Ch.10에서 우리는 적응에 100년이 걸린 사회를 보았다. 그 적응의 대가가 여기서 드러난다. 이 장에서 우리는 두 개의 질문을 다룬다. 왜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시작되었는가. 그리고 왜 영국은 그 혁명의 다음 단계를 놓쳤는가. 두 질문의 답은 연결되어 있다. 영국을 일으킨 조건이, 반세기 뒤 영국을 가두는 함정이 되었다.
1. 왜 영국이었나 — 다섯 개의 열쇠
Ch.7에서 우리는 증기기관과 면직물이라는 기술 자체를 살펴보았다. 같은 장의 말미에서 앨런, 모키르, 포머란츠, 노스와 웨인개스트 — 네 학자의 설명을 개관했다. 여기서는 그 논의를 다섯 가지 구조적 조건으로 재편한다. 패권 이동의 비교 분석에 사용할 프레임을 세우기 위해서다.
왜 이 기술은 프랑스가 아니라, 네덜란드가 아니라, 중국이 아니라 영국에서 탄생했는가. 학자들은 이 질문을 놓고 반세기 넘게 논쟁해왔다. 다섯 학자, 다섯 개의 답. 누가 옳은가. 아마 모두가 옳다. 산업혁명은 다섯 개의 열쇠가 모두 필요한 자물쇠였다.
첫 번째 열쇠: 제도.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영국 의회가 확보한 것은 단순한 재산권이 아니었다. 조세와 차입에 대한 의회의 통제권이었다. 왕은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걷거나 돈을 빌릴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만든 결과는 역설적이었다. 제한된 왕권이 더 많은 세금을 가능하게 했다. 1700년에서 1815년 사이 영국의 조세 수입은 약 16배 증가했다(IH11-008). 같은 기간 인구는 2배 증가에 그쳤다. 의회가 승인한 세금이기에, 납세자의 저항이 적었다.
국채 시장도 이 신뢰 위에 건설되었다.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났을 때 영국 국채는 약 7억 4,500만 파운드에 달했다(IH11-007). GDP 대비 약 250%. 그런데도 1688년 이후 영국 정부는 한 번도 디폴트하지 않았다. 이 기록이 이자율을 낮추었다. 이자율이 낮으면 장기 투자가 가능해진다. 아크라이트가 크롬포드에 공장을 지을 수 있었던 것도 이 저금리 환경 덕분이었다.
프랑스는 달랐다. 절대 왕정 아래서 왕은 자의적으로 과세하고, 특권을 팔고, 채무를 부인할 수 있었다. 투자자의 신뢰가 낮았고, 이자율은 높았다. 대혁명 전까지 약 30개 이상의 내부 관세 구역(IH11-027)이 국내 시장을 분절시켰다. 길드(corps de metiers)는 1791년에야 폐지되었다(IH11-028). 영국 길드가 17세기에 사실상 무력화된 것에 비해 약 150년의 지연이었다.
두 번째 열쇠: 에너지. 영국은 석탄 위에 앉아 있었다. 사우스웨일스, 미들랜즈, 요크셔에서 석탄, 철, 석회석이 반경 약 20~30마일 이내에 공존했다(IH11-014). 영국의 어떤 지점에서도 바다까지 약 70마일(113km) 이내였다(IH11-013). 석탄을 수운으로 운반하는 비용이 대륙보다 압도적으로 낮았다.
네덜란드는 1700년 기준 1인당 GDP가 약 2,130달러로 영국(약 1,630달러)보다 높았다(IH11-025).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다. 금융 시장도, 상업 문화도, 재산권 보호도 영국 못지않았다. 모든 조건이 있었다. 석탄만 빼고. 네덜란드의 주 에너지원은 이탄(peat)이었고, 이탄의 열량 밀도는 석탄의 약 1/3에서 1/2에 불과했다(IH11-026). 앨런의 핵심 논거가 여기에 있었다. 임금이 높아도, 에너지가 비싸면 기계화의 경제적 인센티브가 성립하지 않는다.
세 번째 열쇠: 인력. 인클로저 운동이 농촌을 비웠다. 1750년에서 1850년 사이 의회 인클로저법이 약 4,000건 통과했고, 약 680만 에이커의 농경지가 대상이 되었다(IH11-003). 잉글랜드 농업 인구 비중은 1700년 약 55~60%에서 1850년 약 22%로 하락했다(IH11-004). 토지를 잃은 소농들이 도시로 이동했다. 공장은 그들을 흡수했다.
동시에 농업 생산성이 올라갔다. 4코스 윤작과 턴립 도입으로 곡물 수확량이 약 40~60% 증가했다(IH11-005). 더 적은 농민이 더 많은 식량을 생산했다. 밀려난 농민에게 공장이라는 대안이 있었다는 사실이, 로마와의 결정적 차이였다. 로마의 밀려난 소농에게는 빵과 서커스밖에 없었다.
네 번째 열쇠: 문화. 아크라이트는 가발 제조업자 출신이었다.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사람이 영국 최대의 산업가가 되었고, 1786년에 기사 작위를 받았다. 프랑스에서 이것은 불가능했다. 데로장스(derogeance) 규정에 따르면, 귀족이 상업에 종사하면 귀족 지위를 상실했다(IH11-021). 영국에서는 장자상속(primogeniture) 제도로 차남 이하가 상업과 전문직에 진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매클로스키는 이 차이를 "부르주아적 존엄(Bourgeois Dignity)"이라 불렀다(IH11-020). 비판도 있다. 앨런은 "수사의 변화"를 정량화하거나 반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반론했다. 매클로스키 자신도 "규모와 석탄이라는 추가 조건이 필요했다"고 인정했다.
다섯 번째 열쇠: 금융. 은행이 자본을 순환시켰다. 영국 지방 은행(country banks)은 1750년 약 12개에서 1810년 약 800개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IH11-011). 공장주가 발행한 어음(bill of exchange)을 지방 은행이 할인 매입하고, 이를 런던 롬바드 스트리트에서 재할인했다. 1800년경 어음 유통량은 약 3억~5억 파운드로 추정되며, 경화 유통량의 약 10~15배에 달했다(IH11-012). 사실상의 민간 신용 화폐였다.
로이드 커피하우스에서 시작된 해상 보험 시장(IH11-009)은 대서양 무역의 리스크를 개인에서 시장으로 이전시켰다. 보험이 없었다면 대서양 횡단 무역의 규모 확대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섯 개의 열쇠. 제도, 에너지, 인력, 문화, 금융. 1760년대 영국만이 이 다섯 가지를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에너지가 없었다. 프랑스는 제도가 막혀 있었다. 중국의 산서성에는 세계 최대급 석탄이 있었으나, 경제 중심인 양쯔강 삼각주까지 약 1,000~1,500km의 내륙 운송이 필요했다(IH11-029). 석탄이 있어도 쓸 수 없었다.
기술이 가능성을 열었다. 자본과 제도가 방향을 결정했다. 그리고 지리적 행운이 장소를 정했다. 어느 하나의 변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2. 왜 영국은 놓쳤나 — 다섯 가지 함정
1880년, Bairoch(1982) 기준으로 영국의 세계 제조업 점유율은 약 22.9%로 정점을 찍었다(IP11-015). 1913년에 약 14%로 하락했다. 같은 기간 미국은 약 15%에서 약 32%로 올라갔다(IP11-016). 독일은 약 8.5%에서 약 14.8%로 상승했다(IP11-023).
중요한 구분이 있다. 영국은 무너진 것이 아니다. 1인당 GDP는 1870년 약 3,190달러에서 1913년 약 4,921달러로 54% 성장했다(IB11-014). 보통의 영국인은 부모 세대보다 더 부유하고, 더 오래 살고, 더 많은 교육을 받았다. "쇠퇴"는 개인의 삶이 아니라 국가적 위상의 상대적 후퇴였다. 다른 나라들이 더 빨리 올라간 것이다.
그 이유는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생산성 정체. 경제사학자들은 이것을 "클라이맥테릭(climacteric)"이라 부른다. 전환기적 급락을 뜻하는 의학 용어에서 차용한 개념이다. 영국의 총요소생산성(Total Factor Productivity, TFP) 성장률이 1856~1873년 약 0.8%에서 1873~1899년 약 0.1%로 추락했다(IB11-004). 이전 시기의 1/8 수준이었다. 1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 — 증기기관, 면직물, 철 — 이 수확 체감(diminishing returns)에 도달한 결과였다.
둘째, 교육 실패. 이것이 가장 깊은 구조적 원인이었다. Ch.10에서 우리는 영국의 의무 교육이 프로이센보다 117년 늦었다는 사실을 보았다(IB11-005). 그 지연의 대가가 여기서 나타난다.
1차 산업혁명은 정규 교육 없이도 가능했다. 아크라이트, 스티븐슨, 와트 — 대부분의 산업 혁신이 "팅커링(tinkering)"에서 나왔다. 그러나 2차 산업혁명은 달랐다. 화학, 전기, 내연기관은 체계적 과학 지식을 전제로 했다. 이 전환 앞에서 영국의 교육 체계는 무력했다.
이튼, 해로, 럭비 등 9대 퍼블릭스쿨(public school)의 교육 과정은 1870년까지 약 80%가 라틴어와 그리스어였다(IB11-008). 클래런던 위원회(1864)는 "과학 교육은 자유 교육의 필수 부분이 아니다"라고 결론 내렸다. 영국 엘리트 교육의 목표는 산업가가 아니라 신사(gentleman)를 만드는 것이었다. 크리켓이 화학보다 중요했다.
독일은 달랐다. 1870년까지 9개의 기술대학(Technische Hochschule)이 설립되어 있었다(IC11-003). 리비히(Liebig)가 기센 대학에서 확립한 실험실 교육 모델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독일 대학은 1870년대에 연간 약 500명, 1900년대에 약 1,000명의 화학 박사를 배출했다(IB11-006). 영국 전체의 과학 졸업자가 연간 약 700명이던 시절, 독일은 약 3,000명을 배출하고 있었다(IC11-007).
셋째, 젠틀맨 자본주의. 런던 시티(City of London)의 해외 투자 규모는 1913년 약 40억 파운드에 달했다(IB11-009). 세계 해외 투자의 약 44%였다. 해외 투자 평균 수익률은 약 5.7%, 국내 투자 수익률은 약 4.6%였다(IB11-010). 합리적 투자자라면 해외에 투자하는 것이 당연했다.
케인과 홉킨스(Cain & Hopkins)는 이 현상의 배후에 "젠틀맨 자본가"가 있다고 주장했다. 시티의 금융업자, 보험업자, 해운업자들은 토지 귀족과 문화적으로 동질적이었다. 같은 퍼블릭스쿨을 나왔고, 같은 클럽에 다녔다. 제조업을 경시했다. 아크라이트의 아들이 공장을 확장하는 대신 윌러슬리 성을 짓고 지주 생활을 한 것이 이 문화의 전형이었다.
매클로스키(1970)는 반론했다. 영국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자본을 가장 높은 수익률이 있는 곳에 합리적으로 배분한 것이라고. 이 반론에는 일리가 있다. 단기적으로는. 장기적으로 국내 산업 기반이 공동화(hollowing out)되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넷째, 경영의 실패. 앨프레드 챈들러(Chandler)는 1990년 저작 《규모와 범위(Scale and Scope)》에서 세 나라의 기업 경영을 비교했다. 미국은 "경쟁적 관리 자본주의"였다. 전문 경영인이 대규모 수직 통합 기업을 운영했다. 독일은 "협력적 관리 자본주의"였다. 은행과 기업이 결합하고 카르텔이 시장을 조정했다. 영국은 "개인적 자본주의(personal capitalism)"였다. 가족이 경영하고, 전문 경영인을 거부하고, 소규모를 유지했다.
1913년 영국 200대 기업의 약 52%가 개인 기업 또는 비공개 파트너십이었다(IB11-012). 미국에서는 이미 공개 주식회사가 주류였다. 챈들러가 말하는 "3중 투자" — 생산 설비, 유통망, 관리 조직에 대한 동시 투자 — 를 영국 기업은 하지 않았다. BASF는 1913년 약 6,500명의 연구·기술 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IB11-015). 영국 전체 화학 산업의 R&D 규모를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다섯째, 제국의 안락함. 영국 수출 중 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870년 약 25%에서 1913년 약 37%로 상승했다(IB11-013). 제국 시장에서는 기술적 우위 없이도 관세와 정치적 관계만으로 판매가 가능했다. 혁신의 긴급성이 소멸했다. 유럽과 미국 시장을 잃은 면직물이 인도와 아프리카로 흘러갔다. 저기술 제품을 보호된 시장에 파는 구조가 고착되었다.
조지프 체임벌린(Joseph Chamberlain)은 1903년에 관세 개혁을 주장했다. 독일과 미국이 관세 뒤에서 산업을 키우는 동안 영국만 무방비라고 경고했다. 1906년 총선에서 대패했다. 자유무역은 빅토리아 영국의 국가적 정체성이었다. 과거의 성공 공식을 바꿀 수 없었다.
3. 도전자의 부상 — 독일의 과학, 미국의 규모
영국이 놓친 것을 누가 주웠는가.
독일: 과학이 산업이 되다. 합성 염료의 역사가 모든 것을 압축한다.
1856년, 런던. 18세의 윌리엄 헨리 퍼킨(William Henry Perkin)이 런던 왕립화학대학의 다락방에서 퀴닌을 합성하려다 실패했다(IC11-008b). 석탄 타르 찌꺼기를 알코올에 녹이자 보라색 빛이 번졌다. 모브(mauve). 세계 최초의 합성 염료였다. 퍼킨은 아버지, 형과 함께 그린포드에 공장을 세웠다(IC11-008). 1870년, 영국은 합성 염료 세계 시장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었다(IB11-007).
1913년, 영국의 점유율은 약 10%로 쪼그라들었다. 독일은 약 88%를 장악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퍼킨의 스승인 아우구스트 빌헬름 폰 호프만(Hofmann)은 독일인이었다. 1845년 앨버트 공의 초청으로 런던에 왔다(IC11-009b). 20년간 영국 화학자를 양성한 뒤, 1865년 베를린 대학으로 돌아갔다(IC11-009b). 그의 제자들 중 독일로 돌아간 화학자들이 BASF(1865), 바이엘(1863), 회흐스트(1863)의 핵심 인력이 되었다(IC11-009). 영국이 훈련시킨 인재가 독일의 산업적 무기가 된 것이다.
BASF에는 1900년경 약 150명의 박사급 화학자가 상시 근무하고 있었다(IC11-011). 같은 시기 영국 기업에는 정규 R&D 부서 자체가 거의 없었다.
퍼킨의 발견은 개인의 천재성이었다. BASF의 지배는 시스템의 산물이었다. Ch.9에서 아크라이트에 대해 말한 것 — "기술이 아니라 시스템을 만든 사람" — 이 국가 수준에서 반복되었다. 발명(invention)과 혁신(innovation)은 다르다. 발명은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다. 산업화(scaling)는 교육, 제도, 자본의 생태계가 갖추어진 곳에서만 가능하다.
이 패턴은 합성 염료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마이클 패러데이가 전자기 유도(1831)를 발견하고,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전자기장 방정식(1865)을 완성했다. 두 사람 모두 영국인이었다. 그 과학을 산업으로 전환한 것은 독일의 지멘스(Siemens)와 AEG, 미국의 GE와 웨스팅하우스였다. 베세머 전로(1856)도 영국의 발명이었다. 1913년 철강 생산량은 영국 770만 톤, 독일 1,760만 톤, 미국 3,180만 톤이었다(IB11-011).
독일 모델의 효율성만 서술하면 과장이 된다. 독일의 산업화는 권위주의 국가 구조 위에 세워졌다. 비스마르크는 사회보험을 도입했다. 건강보험(1883), 산재보험(1884), 노령연금(1889)(IC11-022). 동시에 반사회주의법(1878~1890)으로 사회주의 조직을 금지했다(IC11-023). 채찍과 당근. 프로이센의 3급 투표제 아래서 납세액 상위 4%가 투표권의 1/3을 보유했다(IC11-024). 경제적 성공과 정치적 민주주의는 별개의 문제였다. 이 모델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라는 재앙으로 귀결되었다.
미국: 대륙이 공장이 되다. 미국의 무기는 규모였다. 1869년 대륙횡단철도가 완공되었다(IC11-027). 1910년까지 미국 철도 총연장은 약 38만 6,698km에 달했다(IC11-028). 독일의 약 6.3배, 영국의 약 15.5배. 이 철도가 대륙을 하나의 시장으로 연결했다.
1870년에서 1910년 사이 미국 인구는 약 3,860만에서 약 9,220만으로 2.4배 늘었다(IC11-029). 1820년에서 1920년까지 유럽에서 약 3,360만 명이 미국으로 이민했다(IC11-046). 앤드루 카네기는 스코틀랜드에서 13세에 이민 온 소년이었다.
카네기 철강의 1900년 연간 생산량은 약 400만 톤이었다(IC11-036). 같은 해 영국 전체 철강 생산이 약 500만 톤이었다. 미국의 한 기업이 영국 전체 산업의 80%에 해당하는 생산을 했다.
챈들러가 "보이는 손(visible hand)"이라 부른 것이 여기에 있었다(IC11-033). 스탠더드 오일, US Steel, GE. 이 기업들은 시장의 가격 기능에 의존하지 않았다. 전문 경영인이 생산에서 유통까지 수직 통합하는 새로운 조직 형태를 만들었다. 스탠더드 오일은 1880년에 미국 석유 정제의 약 90%를 차지했다(IC11-034). 등유 가격은 1870년 갤런당 약 26센트에서 1885년 약 8센트로 69% 하락했다(IC11-044). 독점의 효율이 가격 하락을 만들었다. 다만 이 가격 하락에 경쟁자 축출을 위한 약탈적 가격 설정(predatory pricing)이 포함되어 있었는지는 논쟁 중이다.
1911년 대법원이 스탠더드 오일을 34개 회사로 해체했다(IC11-043). 해체 후 후계 회사들의 합산 시가총액이 원래 기업의 시가총액을 초과했다. 독점을 해체하자 더 큰 가치가 생겨난 역설이었다. 이것은 현대 빅테크 규제 논쟁의 원형이다.
미국에도 대가는 있었다. 마크 트웨인은 이 시대를 "도금 시대(Gilded Age)"라 불렀다(IC11-050). 겉은 화려하고 속은 부패했다. 상위 1%의 부 점유율은 약 25~30%(1890)에서 약 40~45%(1913)로 확대되었다(IC11-051). 1900년에 10~15세 아동의 약 18.2%, 약 175만 명이 노동 현장에 있었다(IC11-052). 홈스테드 파업(1892)에서 12명이 죽었고, 풀먼 파업(1894)에서는 연방군이 투입되어 30명 이상이 사망했다(IC11-054).
영국의 1차 산업혁명 모델과 독일·미국의 2차 산업혁명 모델 사이의 간극이 패권의 방향을 결정했다. 소규모 가족 기업, 장인적 전문성, 로컬 시장 대 체계적 R&D, 전문 경영, 대륙적 규모.
4. 퍼킨의 마지막 실험실 — 패권 이동의 개인적 풍경 [L4]
1874년, 그린포드.
윌리엄 헨리 퍼킨은 36세에 공장의 문을 닫았다(IC11-008b). 18년 전, 이 자리에서 석탄 타르 찌꺼기가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그 색이 빅토리아 시대의 패션을 바꾸었다. 모브색 드레스가 런던 사교계를 휩쓸었고, 퍼킨은 부자가 되었다.
퍼킨이 공장을 닫은 1874년, 영국 합성 염료 산업은 이미 독일에 추월당하고 있었다. 스승 호프만이 베를린으로 돌아간 지 9년. 호프만의 제자들이 세운 BASF, 바이엘, 회흐스트는 퍼킨이 혼자서 할 수 없었던 것을 해내고 있었다. 박사급 화학자를 수백 명 단위로 고용하고, 체계적 연구를 통해 새로운 염료를 매년 쏟아내고 있었다.
퍼킨은 은퇴 후 순수 화학 연구에 전념했다. 서리(Surrey)의 자택에 개인 실험실을 꾸렸다. 쿠마린 합성, 자기장과 분자 구조의 관계. 아름다운 연구였다. 1906년, 합성 염료 발견 50주년을 기념하여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의 화학회가 공동으로 축하 행사를 열었다. 퍼킨 메달이 제정되었다.
축하의 자리에 참석한 독일 화학자들의 수가 영국 화학자들보다 많았다는 사실이, 반세기의 이동을 말없이 증언했다. 1907년, 퍼킨은 세상을 떠났다(IC11-008b). 그해 독일 화학 산업의 수출은 약 2억 5,000만 달러에 달했다(IC11-013). 한 영국인이 발명한 산업이, 영국이 아닌 곳에서 꽃피었다.
발명가의 나라에서 혁신가의 나라로. 패권은 그렇게 이동한다. 크라수스나 아크라이트처럼 극적으로가 아니다. 조용히. 한 세대의 은퇴와 함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5. 패권 이동의 패턴 —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미국으로
영국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이전에도 같은 일이 있었다.
1670년대, 네덜란드 레이던(Leiden)의 직물 산업은 약 45,000명을 고용하고 있었다(IP11-013). 1795년에 약 5,000명이 남아 있었다. 89%가 사라졌다. 영국 면직물에 밀린 결과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1602)는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였고,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는 세계 최초의 증권 시장이었다(IP11-012). 네덜란드는 금융을 발명한 나라였다. 그런데도 밀렸다.
네덜란드의 쇠퇴 원인은 영국의 쇠퇴 원인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했다. 제조업 투자가 줄고 해외 대출이 늘었다. 길드 체계가 기술 전환을 막았다. 풍력과 수력에 매여 증기로 전환하지 못했다. 인구가 약 200만으로 규모에서 열세였다.
패권의 이동에서 반복되는 5가지 패턴이 있다.
금융화. 네덜란드도, 영국도, 제조업이 약해지면서 금융이 상대적으로 강해졌다. 영국의 산업 경쟁력은 1870년에 정점을 찍었으나, 시티 오브 런던의 금융 패권은 1914년까지 지속되었다. 44년의 간극. 이 기간 동안 영국은 "우리는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라는 착각 속에 있었다. 금융 패권의 지속이 산업 패권의 상실을 가린다.
교육 미스매치. 현 시대에 맞는 교육이 다음 시대에 부적합해진다. 영국의 비국교도 아카데미가 1차 산업혁명에는 적합했으나, 2차 산업혁명은 독일의 훔볼트 대학을 요구했다.
레거시 함정. 가장 먼저 건설한 인프라가 가장 먼저 노후화된다. 영국은 가스등에 막대한 투자를 한 상태에서 전기로 전환해야 했다. 런던의 공공 전력 공급이 시작된 것은 1891년이었다(IP11-007). 뉴욕(1882)과 베를린(1884)보다 7~9년 늦었다. 국가 전력망이 가동된 것은 1938년이었다(IP11-008). 약 600개 지방 자치체가 제각기 다른 전압과 주파수로 소규모 발전소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발자는 이 레거시 비용을 부담하지 않는다.
규모 열세. 네덜란드는 인구 200만으로 인구 500만의 영국에 밀렸다. 영국은 인구 4,100만으로 인구 9,200만의 미국에 밀렸다.
군사적 과부하. 제국을 유지하는 비용이 혁신에 투자할 자원을 잠식한다.
레이 달리오(Ray Dalio)는 《변화하는 세계 질서의 원칙(Principles for Dealing with the Changing World Order)》에서 제국의 흥망을 8가지 지표로 설명했다. 교육, 혁신, 경쟁력, 경제 산출, 무역, 금융 센터, 준비통화, 군사력. 이 지표들이 순차적으로 정점을 찍는다.
영국에 적용하면 순서가 보인다. 교육과 혁신이 먼저 정점을 찍었다(1850~1860년대). 금융과 통화가 마지막이었다(1870~1914년). 최초 정점(군사력, 1815)에서 최후 정점(파운드 스털링, 1914)까지 99년에 걸친 순차적 하강이었다.
달리오의 관찰과 이 책의 관찰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 달리오는 제국의 운명을 그렸다. 이 책은 제국 안에서 개인의 운명을 그린다. 국가 수준의 패권 이동은 투자자에게 지형을 보여준다. 개인은 그 지형 위에서 경로를 선택한다. "밀린 자"와 "읽은 자"를 가르는 것은 지형이 아니라 경로다. 퍼킨은 자발적으로 공장을 떠났다. 그의 뒤를 이을 영국 화학자는 충분하지 않았다. 개인의 선택이 쌓여 국가의 궤적이 된다.
패권 절정기의 길이를 비교하면 하나의 패턴이 드러난다. 네덜란드 약 70년, 영국 약 50년, 미국은 1945~1970년 약 25년(IP11-017). 매 전환마다 약 1.4~2.0배씩 짧아진다. 3개의 사례로 법칙을 주장할 수 없다. 이것은 관찰된 패턴이다. 기술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패권의 절정기도 압축되는 것일 수 있다.
영국 콘솔(Consols) 채권의 수익률이 이 패턴의 금융적 프록시(proxy)를 제공한다(IP11-018). 1880~1900년에 약 2.8~2.9%로 최저를 기록했다. 최대 신뢰. 산업 패권이 이미 하락 중이던 시기에 금융 신뢰는 정점이었다. 1920년에 수익률은 약 5.3%로 급등했다. 89% 상승. 패권 상실의 가격이었다.
투자자에게 이 패턴이 말해주는 것이 있다. 패권 전환기에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자산은 쇠퇴하는 패권국의 국내 제조업이 아니었다. 도전국의 성장 산업이었다. 그리고 패권국의 금융 중개였다. 1870~1914년의 "읽은 자"는 영국 면직물 공장에 투자한 사람이 아니다. 미국 철도 채권과 시티 오브 런던의 금융 서비스에 자본을 배치한 사람이었다.
6. 전환부 — 산업혁명에서 AI 시대로
Part 2를 마무리하자.
우리는 증기와 면직물에서 시작했다(Ch.7). 공장 시스템과 금융 혁신을 보았다(Ch.8). 수직공의 몰락과 아크라이트의 부상을 나란히 놓았다(Ch.9). 적응에 100년이 걸린 사회를 관찰했다(Ch.10). 그리고 이 장에서, 영국이 패권을 얻고 잃는 과정을 추적했다.
반복되는 공식이 보인다. 기술이 생산성을 폭발시킨다. 자본이 소수에게 집중된다. 사회적 불안이 확산된다. 제도가 재설계된다. 그러나 재설계가 너무 느리면, 패권이 이동한다. 로마에서는 공화정이 무너졌다. 영국에서는 다른 나라가 추월했다.
1851년 수정궁에서 세계를 내려다보던 영국이, 60년 뒤 추월당했다. 그 추월의 속도는 다음 전환에서 더 빨라진다.
영국의 사례는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1차 산업혁명이 근육을 대체했다면, 다음 폭발은 무엇을 대체하는가.
답은 이미 시작되었다. 세 번째 폭발. 이번에는 인지(cognition)가 자동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