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4년 가을, 레너드 호너(Leonard Horner)는 랭커셔의 한 면직물 공장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지질학자였다. 에든버러 왕립학회 회원이었고, 에든버러 대학교의 학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돌과 지층을 연구하던 그가 이제 공장과 아동을 연구해야 했다. 1833년 공장법이 그를 영국 최초의 유급 공장감독관(Factory Inspector) 4명 중 한 사람으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4명.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전체를 4명이 감독해야 했다. 호너에게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북부가 배정되었다. 나머지 3명 — 리카즈, 하웰, 손더스 — 이 영국의 나머지를 나누어 맡았다. 연간 예산은 약 7,000~8,000파운드. 그것이 전부였다.
공장 문을 밀고 들어갔다. 방적기의 소음이 벽을 때렸다. 솜먼지가 공기를 탁하게 만들었다. 9세 미만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기계 사이를 기어 다니며 끊어진 실을 잇고 있었다. 법에 따르면 이 아이들은 여기 있으면 안 되었다. 1833년 공장법은 9세 미만의 섬유 공장 고용을 금지했다. 9세에서 13세 사이 아동은 하루 8시간, 그리고 교육 2시간을 받아야 했다.
호너는 공장주에게 아이들의 나이를 물었다. 공장주는 출생증명서가 없다고 답했다. 1837년 이전에는 출생등록 제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아이의 나이를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법률은 있었다. 집행할 수단이 없었다.
호너는 이 현실을 상세히 기록했다. 그의 보고서는 의회에 제출되었고, 후속 입법의 증거 기반이 되었다. 지질학자가 지층을 기록하듯, 그는 공장의 실태를 층위별로 기록했다.
법률이 있다는 것과 법률이 작동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수직공의 고통과 아크라이트의 시스템이 동시에 존재한 사회가 그 격차에 적응하는 데는, 말 그대로 100년이 걸렸다.
1. 33년의 무시 — 왜 첫 대응이 늦었나
수력 방적기(water frame) 특허가 출원된 1769년부터 세면, 영국 최초의 공장법이 제정된 1802년까지 33년이 걸렸다. 그 법은 사문화되었다. 첫 실효적 규제가 등장한 1833년까지 세면 64년이다. 왜 이토록 오래 걸렸는가.
첫 번째 장애물은 이데올로기였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1776년에 출판되었다. 자유방임(laissez-faire)은 시대의 지배적 원리가 되었다. 정부의 개입은 "자유 계약(freedom of contract)"의 침해로 간주되었다. 아동의 노동을 규제하는 것조차 가정에 대한 국가의 침범으로 여겨졌다.
두 번째 장애물은 정보의 부재였다. 1830년대 이전에는 공장 노동 조건에 대한 체계적 데이터가 존재하지 않았다. 문제의 규모를 아무도 정확히 몰랐다. 1832년 새들러 위원회(Sadler Committee)가 의회에서 아동 노동자들의 증언을 청취한 것이 최초의 체계적 조사였다. 정보가 가시화되기까지만 63년이 걸린 셈이다.
세 번째 장애물은 정치적 대표성의 부재였다. 1832년 이전, 영국 성인 남성의 약 5~7%(추정)만이 투표권을 가졌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그 가족에게는 정치적 목소리가 없었다. 규제 대상인 공장주가 종종 지역 치안판사(Justice of the Peace)를 겸직했다. 가해자가 심판관이었다.
1802년 최초의 공장법(Health and Morals of Apprentices Act)은 이 세 가지 장애물을 고스란히 반영했다. 면직물과 양모 공장의 교구 도제(parish apprentice)에게만 적용되었다. 노동 시간을 12시간으로 제한했다. 읽기, 쓰기, 산수 교육을 제공하도록 했다. 그리고 집행관을 두지 않았다.
지역 치안판사 2명이 무급 방문원을 임명하도록 되어 있었다. 방문 빈도는 이론상 연 1회였으나, 다수의 공장은 한 번도 방문을 받지 못했다. 법률의 제정자인 로버트 필 1세(Robert Peel the Elder) 자신이 면직물 공장주였다. 내부자 개혁가(insider reformer)의 한계가 여기에 있었다 — 자기 산업에 실효적 규제를 부과할 유인이 약했다.
1819년 면직물 공장법(Cotton Mills Act)은 한 걸음 나아갔다. 교구 도제뿐 아니라 자유 아동(free children)에게까지 적용 범위를 넓혔다. 9세 미만 고용 금지, 16세 미만 12시간 제한. 로버트 오웬이 원안에서 제시한 10세 미만 금지, 10.5시간 상한은 의회를 통과하면서 대폭 약화되었다.
핵심은 이것이다. 여전히 전용 감독관이 없었다. 기존 치안판사에 의존했다. 공장 전문 지식이 없는 판사가, 자신의 사회적 동료인 공장주를 규제해야 했다. 자가 보고(self-reporting)가 유일한 증거였다. 법은 존재했으나 작동하지 않았다.
명목적 규제에서 실효적 규제로의 전환에 31년이 걸렸다. 1802년에서 1833년까지. 집행관 0명에서 4명으로. 이 31년의 간극이 "적응에 100년"의 첫 번째 구조적 원인이었다.
2. 명목에서 실효로 — 4명의 감독관이 바꾼 것
1833년 공장법은 무엇이 달랐는가.
첫째, 1832년 새들러 위원회의 충격이 있었다. 아동 노동자들이 의회에서 증언했다. 증언의 편향성이 지적되자, 왕립위원회가 재조사했다. 결론은 같았다. 정보가 가시화되자, 무행동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해졌다.
둘째, 같은 해 1832년 대개혁법(Great Reform Act)이 유권자를 약 50만 명에서 약 81만 명으로 확대했다. 약 62% 증가. £10 이상의 도시 가구주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다. 산업 부르주아가 의회에 진입했다. 이것은 역설적이었다 — 공장주에게 투표권을 준 법률이, 바로 다음 해에 공장을 규제하는 법률의 통과를 가능하게 했다.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유급 공장감독관 4명이 임명되었다. 이것이 결정적 차이였다.
호너를 포함한 4명의 감독관은 전국을 순회하며 공장을 방문했다. 위반 사례를 기록했다. 기소했다.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감독관의 보고서는 후속 입법의 증거가 되었다. 데이터가 누적되자, 추가 규제의 논리적 근거가 쌓였다.
집행 메커니즘의 존재와 부재. 이것이 명목적 규제와 실효적 규제를 가르는 유일한 변수였다. 1802년과 1833년 사이에 아동 노동의 비인도성이 갑자기 발견된 것이 아니다. 비인도성은 처음부터 알려져 있었다. 달라진 것은 관찰하고 기록하고 기소하는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4명은 충분하지 않았다. 1836년에 약 8명, 1844년에 약 15~20명으로 늘었다. 1868년에 약 35명, 1878년에 약 50명 이상이 되었다.
적용 범위도 확대되었다. 1833년에는 면직물 공장에 한정되었다. 1860년 표백과 염색, 1864년 도자기와 성냥으로 넓어졌다. 1867년 전 공장, 1878년 전 산업으로 확산되었다. 한 산업의 규제가 전 산업으로 퍼지기까지 45년이 더 걸렸다.
이 과정에서 30년간 이어진 운동이 있었다. 10시간 운동(Ten Hours Movement)이다.
리처드 오스틀러(Richard Oastler)는 요크셔의 토지 관리인이었다. 토리 급진파. 1830년, 그는 리즈 머큐리(Leeds Mercury)에 서한을 보냈다. "수천 명의 동포가... 식민지 노예제의 희생자들보다 더 끔찍한 노예 상태에 있다." 이 서한의 제목은 '요크셔 노예제(Yorkshire Slavery)'였다. 대중 동원의 기폭제가 되었다.
애슐리 경(Lord Ashley, 이후 섀프츠베리 백작)은 귀족 개혁가였다. 1833년부터 1846년까지 의회에 10시간 노동법을 반복 제출했다. 번번이 부결되었다. 1842년에는 광산법을 주도하여 여성과 10세 미만 아동의 지하 광산 노동을 금지시켰다.
존 필든(John Fielden)은 공장주였다. 면직물 공장을 소유하면서 10시간법을 의회에 제출한 사람이었다. 자기 공장에서 먼저 10시간 근무를 시행했다. 자기 이익에 반하는 입법을 추진한 내부자. 100년 전 로버트 필 1세와 같은 위치에 있었으나, 더 멀리 나아간 사례였다.
이 세 사람의 30년 캠페인은 1847년에 결실을 맺었다. 10시간법(Ten Hours Act)이 의회를 통과했다. 여성과 18세 미만은 하루 10시간을 초과하여 일할 수 없게 되었다.
통과 경위는 역사의 비선형성을 보여준다. 1846년 곡물법 폐지에 분노한 토리 보호주의자들이 자유무역파에 대한 보복으로 10시간법에 찬성표를 던졌다. 30년간의 개혁 운동이, 정치적 우연에 의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제도 변화는 직선으로 오지 않는다.
공장주들은 즉시 우회로를 찾았다. 릴레이 시스템(relay system). 여성과 아동을 교대로 배치하여, 개인당 10시간을 지키면서 공장은 15시간 이상 가동하는 방식이었다. 성인 남성은 규제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여전히 12시간 이상 일했다. 법의 문자는 준수하되 취지는 위반하는 전략이었다.
호너는 이 릴레이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의회에 보고했다. 1850년, 타협이 이루어졌다. 고정 근무 시간(오전 6시~오후 6시)이 설정되었다. 실 노동 10.5시간, 토요일 7.5시간. 릴레이 시스템은 폐지되었다. '정상 노동일(normal working day)'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규제 → 회피 → 재규제. 이 순환이 법의 문자가 아닌 법의 실질을 만들어냈다.
노동자들이 개별적으로 보호받는 것과,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공장법이 위로부터의 보호를 제공했다면, 노동조합은 아래로부터의 조직화를 시도했다.
그 경로는 더 험난했다. 1799년 단결금지법(Combination Acts)이 노동자 결사를 전면 금지했다. 최대 3개월 투옥. 프랑스 혁명의 공포가 배경이었다. 고용주의 결사는 사실상 묵인되었다. 비대칭 규제의 전형이다.
1824년 단결금지법이 폐지되었다. 파업이 물밀듯 일어났다. 다음 해 의회는 부분적으로 되돌렸다. 임금과 노동시간 교섭만 합법으로 남았다. 합법화 — 반동 — 재합법화. 이 순환도 공장법의 규제-회피-재규제와 동일한 구조였다.
1834년, 도싯주 톨퍼들(Tolpuddle)의 농업 노동자 6명이 비밀 선서를 한 혐의로 오스트레일리아에 유배되었다. 톨퍼들 순교자(Tolpuddle Martyrs). 약 80만 명이 사면 청원에 서명했다. 1836년 사면, 1838년 귀국. 합법이되 처벌 가능한 모순의 극적 표현이었다.
1868년, 맨체스터에서 노동조합회의(Trades Union Congress, TUC)가 창설되었다. 대의원 34명, 조합원 약 118,000명. 개별 노조에서 전국 조직으로의 전환이었다. 1871년 노동조합법(Trade Union Act)이 노조에 최초의 완전한 법적 지위를 부여했다. 기술 기점 대비 102년 후였다. 1875년 평화적 피케팅이 합법화되어 실질적 단결권이 완성되었다. 106년.
노동법(64년), 노조(55년), 참정권(63년). 이 세 영역의 첫 실효적 대응은 기술 기점 이후 55~64년 사이에 수렴했다. 교육만이 101년으로 현저히 늦었다. 이 차이의 구조적 원인을 교육 섹션에서 본다.
3. 새로운 계층의 탄생 — 중산층이라는 발명
노동법이 아래로부터의 보호를 만들고 있는 동안, 사회의 중간에서는 전혀 새로운 계층이 형성되고 있었다.
산업혁명 이전의 잉글랜드는 사실상 이층 사회였다. 그레고리 킹(Gregory King)의 1688년 사회 분류표가 이를 보여준다. 상층(귀족과 젠트리)이 약 1.2%를 차지했다. 하층(농민과 노동 빈민)이 약 60~65%였다. 'Middling sort'라는 표현은 있었으나, 자의식적인 사회 계급으로서의 중산층(middle class)은 존재하지 않았다.
'Middle class'라는 용어 자체가 1745년에 처음 문헌에 등장했다. 정치적 자의식을 가진 집단 정체성으로 정착한 것은 1790~1830년대였다. 에이사 브릭스(Asa Briggs)의 연구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의 충격이 이 용어의 확산을 가속시켰다.
패트릭 콜쿤(Patrick Colquhoun)이 1806년에 최초로 '상위 중산층'과 '하위 중산층'을 통계적 범주로 사용했다. 그의 추정에 따르면 전체 가구의 약 31.8%가 중산층에 해당했다. 연소득 약 £60에서 £5,000까지의 극히 넓은 범위였다. 내부의 이질성이 컸다.
이 중산층은 세 개의 하위 계층으로 구성되었다.
첫째, 공장주와 대상인. 수적으로 소수였다. 면직물 공장주(cotton master)는 1830년대에 약 600~900명. 이 중 약 60%가 기존 직물업 가문 출신이었고, 약 10~15%만이 아크라이트처럼 순수한 외부 진입자였다. 상위 100명이 산업 자본의 대부분을 통제했다.
둘째, 전문직. 변호사 약 10,000명(1800)에서 약 18,000명(1850)으로 성장했다. 의사·외과의는 약 15,000명(1800)에서 약 25,000명(1850)이 되었다. 토목 기술자들은 1818년에 토목공학회(Institution of Civil Engineers, ICE)를 설립했다. 리더(Reader)의 분석에 따르면 이것은 "길드의 근대적 재발명"이었다. 자격증, 시험, 전문직 단체를 통한 진입 장벽 구축이 중산층 형성의 제도적 메커니즘이었다.
셋째, 사무직. 가장 빠르게 성장한 범주였다. 29,000명(1851년 센서스)에서 370,000명(1901년 센서스)으로, 50년간 약 12.8배 성장했다. 은행, 보험, 무역, 철도 회사의 행정 수요가 폭발한 결과다. 사무직은 '깨끗한 손(clean hands)'의 비육체노동이라는 상징을 지녔으나, 임금은 숙련 노동자 수준이거나 그 이하였다.
1861년, 이사벨라 비턴(Isabella Beeton)이라는 25세 여성이 1,112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출판했다. 《가정 관리의 서(Beeton's Book of Household Management)》. 약 2,000개의 레시피와 가사 지침을 담았다. 1868년까지 약 200만 부가 팔렸다.
비턴은 서문에 이렇게 썼다. 한 가족을 이끄는 것은 한 기업을 이끄는 것과 같다고. 이 문장은 빅토리아 시대 중산층의 자기 이해를 압축한다.
중산층을 중산층으로 만든 것은 소득이 아니라 문화였다. 근면, 절제, 저축, 자기 개선. 해럴드 퍼킨(Harold Perkin)은 《근대 영국 사회의 기원》에서 이를 "중산층의 도덕 혁명"이라 불렀다. 귀족의 '세습된 여유'와 노동자의 '방탕' 사이에서, 중산층은 도덕적 차별화를 통해 정체성을 구축했다.
새뮤얼 스마일스(Samuel Smiles)의 《자조론(Self-Help)》(1859)이 이 가치 체계의 결정적 텍스트였다. 초판 2만 부가 즉시 소진되었고, 19세기 중 약 25만 부가 판매되었다. 300명 이상의 자수성가 사례를 수록했으며, 아크라이트를 대표 사례 중 하나로 포함했다. 이 책은 구조적 요인을 개인의 의지로 환원하는 생존자 편향의 제도화이기도 했다.
1851년 센서스에서 가정부(domestic servant) 약 100만 명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최대 단일 고용 범주였다. 가정부를 한 명이라도 고용할 수 있는가. 이것이 중산층의 최소 자격 요건이었다. 연소득 약 300파운드 이상이 필요했다.
교외에 빌라가 들어섰다. 1840~1870년대에 런던, 맨체스터, 버밍엄의 교외에 중산층 주거 지구가 형성되었다. 버밍엄의 에지바스턴(Edgbaston)에서는 칼소프 가문이 관리하는 약관이 공장과 주점의 건설을 금지했다. 노동자 지구와의 물리적, 도덕적 분리를 제도화한 것이다.
정치적 부상도 빨랐다. 1832년 대개혁법이 도시 중산층에 투표권을 부여했다. 1835년 도시자치체법(Municipal Corporations Act)이 178개 자치체를 재편하여 납세자 투표로 시의회를 선출하게 했다. 버밍엄, 맨체스터, 리즈에서 비국교도 상공인이 시장 다수를 차지했다. 중산층이 지방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결정적 승리는 1846년 곡물법(Corn Laws) 폐지였다. 반곡물법동맹(Anti-Corn Law League, ACLL)은 1838년에 설립되었다. 리처드 코번(Cobden)과 존 브라이트(Bright)가 이끌었다. 도시 산업가 대 지주 귀족의 대결이었다. 곡물법 폐지 후 10년간 밀 가격이 약 30~40% 하락했다. 이 가격 하락에는 국제 무역 확대와 운송비 감소 등 복합적 요인이 작용했으나, 중산층의 정치적 성년을 상징하는 사건임은 분명했다.
자수성가의 서사를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앤드루 마일스(Andrew Miles)의 연구에 따르면, 전체 세대 간 이동률은 약 30~40%였다. 하지만 장거리 이동은 5% 미만이었다. 노동자 계층에서 상위 중산층으로의 도약은 예외였다. 아크라이트와 같은 극적 상승은 규칙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이동은 인접 계층 간의 짧은 거리에서 일어났다.
4. 가장 느린 적응 — 교육이 101년 걸린 이유
노동법, 참정권, 노동조합. 이 세 영역의 제도적 적응이 기술 기점(1769년) 이후 약 55~64년 만에 첫 실효적 대응을 보인 반면, 교육은 101년이 걸렸다. 왜 교육이 가장 느렸는가.
데이터가 답을 준다. 1800년, 잉글랜드 남성 문해율은 약 67%였다. 1840년, 산업혁명의 최절정기를 지난 시점에서 남성 문해율은 여전히 약 67%였다. 40년간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여성은 약 50%에서 약 51%로. 사실상 정체였다.
산업화가 가장 역동적으로 진행된 시기에 문해율이 정체한 것이다. 아동 노동이 교육 기회를 체계적으로 파괴한 결과였다. 1788년 추정으로, 면직물 공장 노동자의 약 2/3가 아동이었다. 1816년에는 면직물 공장에서만 14세 미만 아동이 약 10만 명이었다. 5세 아이가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는 사회에서 학교에 갈 시간은 없었다.
교육의 역설이 여기에 있었다. 공장 시스템은 기계 조작, 시간 규율(time-discipline), 수리 능력, 문서 해독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요구했다. 같은 공장 시스템이 아동을 교육이 아닌 노동에 투입하여 그 기술의 공급을 파괴했다. 수요를 만들고 동시에 공급을 파괴하는 자기모순.
밋치(Mitch)의 1992년 연구는 중요한 발견을 담고 있다. 초기 산업화(1760~1840)에서 공식 교육의 직접적 생산성 기여는 제한적이었다. 아크라이트는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스티븐슨은 독학했다. 대부분의 산업 혁신이 정규 교육 밖에서 나왔다. 공장 노동에 대한 교육 프리미엄(wage premium for literacy)도 낮았다. 교육이 경제적으로 절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적 우선순위도 낮았다.
이 상황은 산업혁명의 2단계(1850년대 이후: 철도, 화학, 전기)에서 역전된다. 교육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졌을 때, 교육 인프라는 부재했다. 이 시차가 영국이 독일에 뒤처진 핵심 원인 중 하나였다. 프로이센은 1763년에 의무 교육을 도입했다. 영국은 1880년에야 도입했다. 117년의 차이.
공식 교육 시스템 밖에서 자발적 움직임이 있었다. 기계공학회(Mechanics' Institutes)가 그것이다. 1799년 조지 버크벡(George Birkbeck)이 글래스고에서 노동자 무료 강연을 시작했다. 1826년 약 100개, 1850년 약 610개에 회원 약 102,000명, 1860년에는 약 1,200개로 성장했다. 노동자가 스스로 만든 기술 교육 기관이었다.
한계도 있었다. 12시간 교대 근무 후 저녁 강연에 참석하기란 물리적으로 어려웠고, 점차 중산층 회원이 주류가 되었다. 그럼에도 정규 교육 체계 밖에서 기술 교육의 선구적 모델을 제시한 것은 사실이었다.
국가 차원의 전환은 1867년에 촉발되었다. 2차 선거법 개정으로 유권자가 약 140만 명에서 약 250만 명으로 약 2배 확대되었다. 도시 남성 노동자 대부분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정치인 로버트 로(Robert Lowe)는 말했다. "우리의 미래 주인들이 글자를 배우도록 설득해야 한다." 교육이 정치적 필요가 된 것이다.
1870년, W.E. 포스터(Forster)가 초등교육법을 의회에 제출했다. 포스터는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초등교육의 신속한 제공에 우리의 산업적 번영이 달려 있다." 학교 위원회(School Board)가 설립되었다. 자발적 학교가 부족한 지역을 보충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1880년까지 약 2,500개 학교 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약 3,500개의 신규 학교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포스터법은 '허용적(permissive)'이었지 '강제적(mandatory)'이 아니었다. 학교 위원회가 지역적으로 취학을 의무화할 수 있도록 허용했을 뿐, 의무는 아니었다. 진정한 의무 교육은 1880년 문델라법(Mundella Act)에서 왔다. 5~10세 모든 아동의 취학 의무화. 산업화 시작 이후 약 111년 뒤였다.
무상 교육은 1891년이 되어서야 실현되었다. 학생 1인당 10실링의 정부 보조금으로 초등교육이 사실상 무상화되었다. 가용(1870) → 의무(1880) → 무상(1891). 이 3부작이 완성되기까지, 최초의 공장 교육 조항(1802)부터 89년, 아크라이트의 특허(1769)부터 122년이 걸렸다.
교육이 가장 느린 이유는 구조적이었다. 노동법은 공장주라는 단일 이해관계자와 대립했다. 교육은 동시에 여러 기득권을 위협했다.
교회는 교육을 종교 단체의 영역으로 여겼다. 납세자는 교육세 부담을 꺼렸다. 공장주는 아동 노동력 상실을 두려워했다. 농촌 지주는 농번기 아동 노동력이 필요했다. 이 네 세력 모두를 동시에 설득하거나 압도해야 했기에, 교육 입법은 가장 느리고 가장 논쟁적인 영역이 되었다.
1900년, 남녀 모두의 문해율이 약 97%에 도달했다. 1800년의 정체에서 벗어나는 데 100년이 걸렸다. 의무 교육과 무상 교육의 제도적 힘이 만든 결과였다.
5. 왜 영국은 로마와 달랐는가 — 5가지 구조적 차이
3개 제도 영역의 첫 실효적 대응은 55~64년에 수렴했다. 교육만이 101년으로 현저한 이상치였다. 이 수치를 로마와 비교하면 주목할 만한 유사성이 나타난다.
로마에서 라티푼디움 확산(약 BC 200)부터 그라쿠스 개혁(BC 133)까지 약 67년. 산업혁명에서 공장 시스템(1769)부터 실효적 공장법(1833)까지 64년. 차이 3년. 최종 정착까지 — 로마 약 106년, 영국 약 109년. 차이 역시 3년.
2개의 사례로 법칙을 주장할 수 없다. 이것은 관찰된 유사성이다. 그러나 이 유사성은 질문을 던진다. 사회가 기술 변화에 적응하는 데 약 60~70년의 구조적 시간이 필요한 것인가. 변화의 인식, 측정, 대응에 걸리는 인간 사회의 관성이 비슷한 규모를 갖는 것인가.
유사성보다 중요한 것은 차이다. 로마는 적응에 실패하여 공화정이 무너졌다. 영국은 적응에 성공하여 민주주의의 기반을 넓혔다. 그 차이를 만든 5가지 구조적 요인이 있다.
첫째, 합법적 압력 경로의 존재. 로마의 호민관(tribunus plebis)은 이론적으로 평민의 보호 장치였으나, 거부권(intercessio)과 물리적 폭력으로 무력화되었다. 영국 의회는 불완전했으나 확장 가능했다. 1832, 1867, 1884, 1918, 1928년의 선거법 개혁이 배제된 집단을 체제 안으로 흡수했다.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가 존재하면, 혁명의 필요성은 줄어든다.
둘째, 정보 인프라. 로마의 원로원은 체계적 데이터 수집 없이 일화와 후원 관계에 의존했다. 영국은 1832년 의회 조사위원회, 1834년부터의 공장감독관 보고서, 1801년부터의 10년 주기 인구조사를 통해 측정 인프라를 구축했다. 측정할 수 없는 것은 규제할 수 없다. 측정이 가능해지자, 무행동이 정치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셋째, 점진적 개혁의 능력. 로마에서 그라쿠스의 토지법은 전면 재분배 아니면 전면 좌절이었다. 영국의 공장법은 1802, 1819, 1833, 1844, 1847, 1867, 1878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각 단계가 다음 단계의 기반이 되었다. 소프트웨어 개발의 반복(iteration)과 유사하다 — 작은 변경, 테스트, 확장.
넷째, 상설 집행 기구. 로마의 토지위원회(tresviri)는 4년간 활동한 후 BC 129년에 재판권을 박탈당했다. 임시 기구였다. 영국의 공장감독관은 1833년에 4명으로 시작했으나, 상설 기구로 존속하며 확대되었다. 집행 없는 규제는 수행적(performative)이다. 상설 기구만이 지속적 효력을 가진다.
다섯째, 경제 성장이라는 완충. 로마는 제로섬 토지 경제였다. 재분배는 한쪽에서 빼앗아 다른 쪽에 주는 것을 의미했다. 저항이 극대화되었다. 영국의 산업 경제는 성장하고 있었다. 사회적 지출을 기존 자산의 몰수 없이 추가할 수 있었다. 성장 경제에서는 적응이 양의 합(positive-sum)이다. 제로섬 경제에서는 적응이 곧 몰수이며, 폭력적 저항을 부른다.
단, 영국의 "성공"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 적응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식민지 수탈이라는 경제적 완충도 있었다. 성장하는 파이의 상당 부분이 제국의 착취에서 왔다는 사실은 영국 모델의 이전 가능성(transferability)에 중대한 단서를 붙인다.
6. 전환부 — 제도 적응 속도라는 투자 변수
100년의 적응을 요약하면 이렇다.
기술은 빠르다. 아크라이트의 공장 시스템은 10년 안에 면직물 산업을 재편했다. 제도는 느리다. 첫 실효적 규제에 64년, 전면 제도화에 109년이 걸렸다. 교육은 더 느려서 101년이 지나서야 국가 체계가 만들어졌다.
이 시차 자체가 투자 변수다. 기술이 배치되고 제도가 따라잡기까지의 시간 — 그 간극에서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 간극이 넓을수록 불평등은 커지고, 사회적 불안은 높아진다. 간극이 좁아지기 시작하면, 규제 환경이 바뀌고, 기존 사업 모델의 전제가 흔들린다.
영국의 사례는 적응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만 적응하는 동안 세계가 바뀌었다. 영국이 공장법과 교육법과 선거법을 만드는 100년 동안, 독일은 대학과 화학 산업을 건설했다. 미국은 대륙 횡단 철도와 새로운 규모의 경제를 만들었다.
왜 영국이었는가. 그리고 왜 영국은 놓쳤는가. 다음 장에서 우리는 패권의 이동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