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수진의 대출 신청서
2026년 봄, 판교.
김수진(44세)은 핀테크 사무실 창가 자리에서 파일을 펼쳤다. 6장에서 국민은행 강남지점의 서랍을 비운 뒤, 8개월이 지났다. 서랍 속 제안서의 한 줄 — AI가 아니오라고 할 때, 당신의 그러나가 필요합니다 — 이 이제 김수진의 업무 지침이 되었다.
강남지점 3층의 넓은 사무실과 달리, 핀테크 사무실은 좁다. 책상 열두 개가 개방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벽에는 모니터 대신 화이트보드가 걸려 있다.
직함은 "비정형 심사 전문역"이다. 국민은행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직함이다. AI가 거절한 대출 신청서만 다루는 자리. 국민은행에서는 벌칙이었던 일이 여기서는 직함이 되었다.
동료 열한 명 중 김수진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없다. 대부분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다. 코드를 짜고 데이터를 분석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김수진의 일은 다르다. 화면이 아니라 파일을 읽는다. 숫자가 아니라 사람을 읽는다.
어제 점심시간에 옆자리의 29세 데이터 엔지니어가 김수진에게 물었다. "수진 씨는 AI가 거절한 건 어떻게 판단해요. 기준이 뭐예요." 김수진은 잠시 생각했다. 기준. 20년간 은행 창구에서 쌓인 것들 — 서류 뒤의 눈빛, 말투의 온도, 사업 계획서에 적히지 않은 결의. 그것을 "기준"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김수진 자신도 확신하지 못했다. "경험이요." 대답하고 나서 그 말이 얼마나 빈약한지를 느꼈다. 이 사무실에서 "경험"은 데이터 셋의 크기를 뜻한다. 김수진이 말하는 "경험"은 데이터 셋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44세. 이 사무실에서 김수진의 나이는 기술적 장벽이 아니라 정서적 거리다. 회식 자리에서 웃음의 맥락이 다르고, 슬랙 채널의 밈을 알아보지 못한다. AI보다 나은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압박보다, 그 판단의 근거를 이 세대의 언어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 더 무겁다.
파일에 붙은 라벨은 빨간색이다. AI 거절 건. 신청자: 이순자(60세), 서울 은평구 갈현동 전통시장, 반찬가게 운영 18년.
AI 신용평가 4.0의 판정은 명료했다. 신용점수 하위 20퍼센트. 매출 불규칙. 담보 없음. 거절. 세 단어로 이순자씨의 18년이 요약되었다.
김수진은 30분 동안 파일을 들여다보았다. 재무제표 너머를 읽는 시간이었다.
은평구 갈현동 아파트 분양 시기마다 매출이 40퍼센트 급증하는 패턴이 보였다. 아파트 입주가 시작되면 새 주민들이 반찬가게를 찾는다. 그 주민들이 단골이 되면 비수기에도 매출이 유지된다. 18년간 반복된 패턴이다.
AI는 매출의 불규칙성을 보았다. 김수진은 불규칙성 안의 규칙을 보았다.
시장 상인회 총무 10년. 네이버 블로그 후기 200건 이상. 단골 카카오톡 주문 그룹 47명.
이순자씨의 대차대조표에는 나타나지 않는 항목들이다.
블로그 후기 200건은 마케팅이 아니라 18년간 반찬 맛이 변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상인회 총무 10년은 시장 내 인적 보증이었다 — 총무를 10년 맡긴다는 것은 상인 30여 명이 이 사람의 성실함을 10년간 확인했다는 뜻이다. 단골 47명의 정기 주문은 현금흐름의 안전판이었다.
AI가 읽은 것은 숫자였다. 김수진이 읽은 것은 신뢰로 만들어진 매출이었다.
김수진은 승인을 결정했다. 사용한 것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20년간 은행에서 쌓은 패턴 인식이었다.
6장에서 강남지점의 서랍에서 꺼낸 제안서가 약속한 것을, 김수진은 이제 실행하고 있었다. 국민은행의 서랍에서 핀테크의 사무실로 옮겨간 것은 직장이 아니라 판단의 좌표였다. 같은 눈으로, 같은 것을 읽되, 다른 장소에서 읽는다.
그 실행의 근거는 단순했다. 6장의 성동구 식자재 유통업체와 같은 구조다. AI가 거절한 건에서 서류 뒤의 사람을 읽고 승인했고, 그 업체는 정상 상환 중이었다. 같은 판단을 다른 이름으로, 다른 사무실에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국민은행에서는 그 판단이 "AI 불일치 1건"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 판단이 존재 이유다.
2. AI가 보지 못하는 것: 대차대조표의 거짓말
S&P 500 기업의 무형자산 비중은 1975년 17퍼센트에서 2020년 90퍼센트로 뛰었다. 오션 토모(Ocean Tomo)의 추적이 보여주는 반세기의 이동이다.
기업 가치의 대부분이 공장이나 장비가 아니라 브랜드, 특허, 고객 관계, 조직 역량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채워졌다.
바루크 레브(Baruch Lev)는 더 직접적으로 말했다. 현대 재무제표는 기업 가치의 약 20퍼센트만 설명한다고. 나머지 80퍼센트는 대차대조표 바깥에 있다.
회계학의 언어로 표현하면, 재무제표는 기업의 과거를 기록하는 도구이지 미래를 예측하는 도구가 아니다. 레브가 2001년 저서에서 제시한 이 진단은 20년이 지난 뒤 더 극적으로 확인되었다. 2020년대의 기업 가치는 재무제표로 설명할 수 있는 범위를 거의 완전히 벗어났다.
기업에서도 대차대조표가 거짓말을 하는데, 개인은 더하다. 기업은 적어도 분석가들이 무형자산의 존재를 알고 있다. 주가순자산비율(PBR)이 1을 크게 넘는 기업에 대해, 시장은 장부에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개인에게는 그런 인정 체계가 없다.
이정훈의 급여 명세서에는 숫자만 적혀 있다. 하이퐁 공장에서 실제로 쌓고 있는 것 — 공장장 응우옌의 신뢰, "한국 선생님"이라는 호칭, 소리만으로 금형 정렬 오차 0.3밀리미터를 잡아내는 사람이라는 평판 — 은 어디에도 기재되지 않는다.
6장에서 응우옌이 노트를 펼치고 이정훈의 28년을 받아 적기 시작한 순간, 이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보이지 않는 자산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 노트는 응우옌의 것이지만, 노트에 적힌 지식의 원천은 이정훈이다. 원천이라는 지위가 이정훈의 보이지 않는 자산이다.
김수진의 판단 이력도 마찬가지다. 핀테크에서 8개월간 AI 거절 132건 중 47건을 승인했고, 연체율은 4.2퍼센트로 업계 평균 이하다. 이 기록은 어떤 장부에도 없다. 인사 파일에는 "비정형 심사 전문역"이라는 직함만 적혀 있다.
20년간 서류 뒤의 사람을 읽어온 경력이 47건이라는 숫자로 압축되어 있지만, 그 47건 각각에 담긴 30분의 판단 과정은 기록되지 않는다.
레브의 분석은 기업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개인에게 적용하면 괴리는 더 극적이다.
기업은 적어도 무형자산을 "영업권"이나 "지적재산권"이라는 항목으로 부분적으로나마 인식한다. 인수합병 시 영업권 평가가 이루어지고, 특허의 시장 가치가 산정된다.
개인의 판단력, 신뢰 관계, 경험적 직관은 어떤 회계 항목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이력서에는 근무 기간과 직함만 남는다. 그 기간 동안 무엇을 읽고, 누구를 믿고,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는 기록 체계 바깥에 있다.
3. 보이지 않는 자산의 경제학: 4S
조너선 하스켈(Jonathan Haskel)과 스티안 웨스트레이크(Stian Westlake)는 2017년 저서 Capitalism without Capital에서 무형자산의 네 가지 특성을 정리했다. 확장성(Scalability), 매몰성(Sunkenness), 파급성(Spillovers), 시너지(Synergies). 이 프레임워크는 기업의 무형자산 — 소프트웨어, 데이터베이스, R&D, 조직 설계 — 을 분석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것을 기업이 아니라 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이 12장의 이론적 시도다.
이정훈의 4S를 먼저 본다. 축적한 프레스 공정 감각은 사용해도 닳지 않는다. 하이퐁에서 쓰든, 자카르타에서 쓰든, 한 번의 사용이 감각을 소모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용할수록 정교해진다. 프레스 라인 12대의 소리를 6개월간 들으면서, 이정훈의 귀는 베트남 공장의 고유한 소리 패턴까지 흡수했다. 확장성이다.
그러나 베트남 공장장 응우옌과의 신뢰 관계는 이정훈이 하이퐁을 떠나면 회수할 수 없다. 6개월간 매일 라인을 함께 걸으며 쌓은 관계는, 이정훈의 몸에 남지만 이정훈의 계좌에는 남지 않는다. 매몰성이다.
이정훈의 기술이 응우옌의 노트로, 응우옌의 노트가 다른 라인 관리자에게로, 그 관리자의 경험이 또 다른 공장의 매뉴얼로 퍼진다. 이정훈이 통제할 수 없는 확산이다. 파급성이다.
그리고 판단력, 응우옌 네트워크, 6장에서 박상호가 연결해준 한국계 공장 생태계 — 이 세 가지가 결합될 때, 각각의 합보다 큰 가치가 생긴다. 프레스 감각만 가진 기술자는 많고, 베트남 네트워크만 가진 브로커도 있다. 둘 다 가진 사람은 이정훈뿐이다. 시너지다.
김수진의 4S도 같은 구조로 읽힌다. AI 거절 건에서 "서류 뒤의 사람을 읽는" 판단 패턴은 반찬가게에도, 식자재 납품업체에도, 프리랜서 소득 패턴에도 재사용된다. 업종이 달라도 비정형 신호를 읽는 기술은 동일하다. 확장성이다. 국민은행 20년과 핀테크 8개월에 걸쳐 훈련한 그 눈은 다른 직종으로 전환하면 거의 전이되지 않는다. 금융 심사의 눈으로 제조업 품질을 판단할 수는 없다. 매몰성이다.
김수진이 승인한 이순자씨의 성공 사례가 다른 핀테크의 심사 기준에 참조된다면, 김수진의 판단이 김수진의 통제를 벗어나 확산되는 것이다. 파급성이다. 그리고 금융 경력 20년, 비표준 케이스 판단력, 전통시장 상인 네트워크의 결합이 시너지다. 세 가지 중 하나만 가진 사람은 많다. 셋을 동시에 가진 사람은 드물다.
하스켈과 웨스트레이크가 기업에서 발견한 4S는 개인에게도 작동한다. 차이가 있다면, 기업의 무형자산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측정되고 거래된다는 것이다.
개인의 무형자산은 측정되지도, 거래되지도 않는다. 그것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오직 결과로만 나타난다 — 이순자씨의 정상 상환, 응우옌의 불량 500개 방지처럼.
4. 이정훈의 보이지 않는 자산: 베트남 공장 네트워크
로버트 퍼트남(Robert Putnam)은 사회적 자본을 두 유형으로 나누었다. 결속형(bonding)과 교량형(bridging).
결속형은 같은 집단 내부의 유대다 — 같은 교회의 신자들, 같은 동네의 이웃들, 같은 공장의 동료들. 이정훈이 아산 공장에서 가졌던 것이 결속형 자본이었다. 같은 라인에서 일한 동료들과의 유대. 그러나 그 자본은 사원증 반납과 함께 소멸했다. 결속형 자본은 집단을 떠나면 대부분 증발한다.
교량형은 서로 다른 집단을 잇는 연결이다 — 다른 산업, 다른 문화, 다른 언어를 가진 집단 사이의 다리.
이정훈이 하이퐁에서 구축하고 있는 것은 교량형 자본이다. 한국 제조 생태계의 28년 경험과 베트남 제조 생태계의 현장 감각 사이에 다리를 놓고 있다. 이 다리를 놓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한국 공정을 아는 사람은 많고, 베트남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한국 서보 프레스의 소리와 베트남 기계식 프레스의 소리를 모두 들어본 귀, 아산 공장의 품질 기준과 하이퐁 공장의 현실적 제약을 모두 이해하는 머리 — 이 둘을 동시에 갖춘 사람은 흔치 않다.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의 인격적 신뢰 개념이 여기에 적용된다. 루만은 신뢰를 두 층으로 구분했다. 시스템 신뢰는 제도에 의존한다 — 은행을 신뢰하는 것은 은행원 개인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예금보험제도를 신뢰하는 것이다. 인격적 신뢰는 반복적 상호작용을 통해 개인 사이에 축적된다.
응우옌이 이정훈을 처음 본 날, 경계했다. 한국에서 온 53세 남자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6장에서 보았던 그 장면이다 — 프레스 라인 세 번째 기계에서 소리가 달랐고, 금형 정렬 핀 0.3밀리미터를 귀로 잡아냈고, 응우옌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 뒤 매일 이어진 라인 점검, 불량 예방, 기술 전수의 반복이 인격적 신뢰를 쌓았다. 한 번의 정확한 판단이 관심을 끌고, 반복된 정확한 판단이 신뢰를 만든다. 시스템이 보증하지 않는 곳에서, 개인의 반복이 보증을 만든 것이다.
6개월이 지나자 변화가 일어났다. 인근 공장에서 비공식 자문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박상호 네트워크의 다른 한국계 공장들이 이정훈을 찾았다. 프레스 라인 이상음 진단, 금형 수명 예측, 품질 관리 체계 수립. 주말에 전화가 왔다. 평일 저녁에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응우옌의 인격적 신뢰가 임계점을 넘어, 응우옌이 아닌 사람에게까지 전이된 것이다 — 퍼트남이 말한 교량형 자본의 작동 방식이다.
"한국 기술자"라는 집단 브랜드가 발판이었다. 삼성, 현대, LG가 수십 년간 쌓아온 품질 관리의 유산이 "한국에서 온 사람"이라는 라벨에 압축되어 있다. 이정훈은 그 집단 브랜드를 발판으로, 개인 트랙레코드로 강화했다. 집단의 평판 위에 개인의 실력을 얹은 것이다. 집단 브랜드는 첫 번째 문을 열어주지만, 두 번째 문부터는 개인의 이름이 열어야 한다. 이정훈의 이름이 두 번째 문을 열기 시작한 것이 6개월째의 변화다.
이 자산은 급여 명세서에 없다. 하이퐁 공장의 회계 장부에도 없다.
그러나 베트남 공장들이 다음 프로젝트를 이정훈에게 먼저 연락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전화번호가 돌고, 이름이 회자되고, "하이퐁에 한국 사람 있는데"라는 문장이 공장과 공장 사이를 건넌다.
보이지 않는 자산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수익을 만든다.
5. 김수진의 보이지 않는 자산: 판단의 평판
조지 애컬로프(George Akerlof)의 레몬 시장 이론은 정보 비대칭이 시장을 붕괴시키는 구조를 보여주었다.
중고차 시장에서 판매자는 차의 상태를 알고 구매자는 모른다. 그 비대칭이 시장의 평균 품질을 끌어내린다. 좋은 차의 소유자는 제 값을 받지 못하므로 시장에 나오지 않고, 나쁜 차만 남는다.
마이클 스펜스(Michael Spence)의 신호 이론은 그 비대칭을 해소하는 메커니즘을 제시했다. 학력이 신호이고, 자격증이 신호이고, 경력이 신호다. "나는 양질의 노동자다"를 증명하는 방법.
김수진의 판단 평판은 새로운 종류의 신호다.
AI가 표준 케이스를 처리할수록, 인간 심사역에게 도달하는 건은 비표준 케이스뿐이다. 6장에서 국민은행의 예외 건이 40건에서 12건으로 줄었다. 핀테크로 옮긴 김수진에게는 반대의 구조가 작동한다. AI가 거절한 132건 전체가 비표준이다. 표준 케이스는 이미 AI가 자동 승인했으므로, 김수진의 책상에는 어려운 건만 쌓인다.
비표준 케이스에서의 인간 판단 가치가 상승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쉬운 건은 기계가 다 처리했으므로, 남은 건은 모두 어렵다. 어려운 건에서 맞히는 사람의 가치는 올라갈 수밖에 없다.
AI 거절 132건 중 47건 승인, 연체율 4.2퍼센트. 이 숫자가 김수진의 판단 자본이다. "김수진이 승인한 건"이라는 라벨이 스펜스의 신호처럼 작동한다. 이순자씨의 반찬가게에 투자한 것은 핀테크 회사이지만, 그 투자를 보증한 것은 김수진의 이름이다.
11장에서 피렌체의 메디치 심사역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서명했던 것과 같은 구조다. 3권에서 600년간 금융에서 가장 비싼 기능은 판단이었다. 그 판단 자본이 AI 시대에 개인의 가장 복제하기 어려운 자산이 된다.
판단 자본에는 복리 효과가 있다. 이순자씨의 정상 상환이 김수진의 평판을 높인다. 높아진 평판이 더 복잡한 케이스의 의뢰를 유인한다. 그 케이스에서의 성공이 평판을 한층 더 높인다. 성공이 다음 기회를 끌어오고, 그 기회에서의 성공이 다시 평판을 쌓는다.
은행 20년의 경험이 핀테크 8개월의 성과에 복리로 작용하고 있다. 국민은행에서 20년간 쌓은 것이 8개월 만에 결과를 내는 이유는, 20년이 없었다면 8개월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수진은 20년간 은행의 심사 시스템에 충실했다. 그 시스템이 AI로 대체되었을 때, 역설적으로 20년의 충실함이 "AI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이 되었다.
그러나 이 틈새에는 유효 기간이 있다. AI 4.0이 비정형 데이터 — 네이버 블로그 리뷰, 카카오톡 커뮤니티 평판, 배달앱 주문 패턴 — 를 학습하기 시작했다. 김수진이 이순자씨의 파일에서 읽은 바로 그것을 기계가 배우고 있다. 6장에서 이미 예고된 흐름이다. AI 3.0이 40건을 12건으로 줄이는 데 3년이 걸렸고, 4.0이 비정형 영역을 잠식하는 속도는 더 빠를 수 있다.
역설이 여기에 있다. AI가 김수진의 판단을 배울수록, 김수진의 판단이 학습 데이터가 된다.
김수진이 승인한 47건의 결과 — 상환율, 연체율, 부도율 — 가 AI의 다음 버전을 훈련시킨다. 김수진이 이순자씨를 승인한 근거 — 블로그 후기, 상인회 경력, 단골 네트워크 — 가 AI 5.0의 비정형 변수로 편입될 수 있다.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고, 제자가 스승을 대체하는 구조다. 응우옌이 이정훈의 노트를 받아 적고, 그 노트가 디지털화되면 이정훈이 필요 없게 되는 것과 같다.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자산은 모두 유효 기간이 있는 자산이다. 6장에서 우리가 이미 보았던 것 — 영구적이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6. 불가결성 프리미엄의 개인판
5권에서 ASML의 P/E 38배가 삼성의 8-12배를 압도한 구조를 보았다. 그 프리미엄의 원천은 대체 불가능성이었다. 세계에서 EUV 노광장비를 만들 수 있는 기업은 ASML뿐이다. 삼성은 메모리 시장의 지배자이지만, SK하이닉스가 있고, 마이크론이 있다. 대체 가능한 것과 대체 불가능한 것 사이에 P/E 배수 3-5배의 격차가 벌어진다.
같은 논리가 개인에게 적용된다.
이정훈의 불가결성은 AI와 함께 풀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경험적 판단력에 있다. 센서 3,200개의 데이터를 분석하는 AI도 있고, 프레스 소리를 듣는 베트남 관리자도 있다.
그러나 한국 서보 프레스의 이상음과 베트남 기계식 프레스의 이상음을 모두 구별하면서, 그 판단을 신뢰하는 관계 네트워크까지 갖춘 사람은 이정훈뿐이다.
판단력과 신뢰의 결합이 불가결성을 만든다. 판단력만으로는 교체 가능하다 — 더 젊고 더 정확한 기술자가 나타날 수 있다. 신뢰만으로는 문제를 풀 수 없다 — 응우옌이 아무리 이정훈을 신뢰해도, 이정훈이 소리를 듣지 못하면 불량을 잡지 못한다. 둘이 결합될 때 대체 불가능성이 생긴다.
김수진의 불가결성은 AI가 놓치는 좋은 사람을 찾아내는 능력에 있다. 신용점수 하위 20퍼센트에서 정상 상환자를 가려내는 눈. 재무제표 너머의 블로그 후기 200건과 상인회 총무 10년을 읽는 눈.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이 드물기에 프리미엄이 붙는다.
ASML의 불가결성은 특허와 수출 규제로 보호된다. 네덜란드 정부와 미국 정부의 정치적 결정이 ASML의 독점을 강화한다.
이정훈과 김수진의 불가결성은 어떤 문서에도 기재되지 않는다. 특허도 없고, 수출 규제도 없다. 그러나 둘 다 진짜 자산이다. 전자는 시가총액에 반영되고, 후자는 "다음에도 이 사람에게 맡기자"는 결정에 반영된다.
형태가 다를 뿐, 불가결성이 프리미엄을 만드는 구조는 같다.
그러나 불가결성이 항상 보상받는 것은 아니다. 11장의 최은정이 그 증거다.
가장 불가결한 돌봄이 가장 저평가되어 있다. 시급 12,000원. 할머니의 흐린 날을 읽는 7년의 경험이, 요양보호사 자격증 취득에 필요한 6개월과 같은 가격으로 취급된다. 7년의 관계적 지식과 6개월의 공식 교육이 동일한 시급으로 환산되는 구조다.
마리아나 마추카토(Mariana Mazzucato)의 가치론이 이 모순을 설명한다. 가치 추출이 GDP에 높게 측정되고, 가치 창출이 누락되는 구조. 금융 트레이더가 파생상품으로 수익을 올리면 GDP에 기록된다. 최은정이 할머니의 손을 잡으면 장기요양보험 수가의 한 줄로 기록된다.
한국 수치로 보면 금융보험업이 GDP의 5.7퍼센트를 차지하고, 장기요양 급여비는 GDP의 0.5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러나 가정 내 무급 돌봄을 포함하면 돌봄의 경제적 가치는 GDP의 15-20퍼센트에 달한다는 추정이 있다. 측정 시스템이 가치를 왜곡하고 있다.
김수진의 판단은 금융 시스템 안에서 가격이 매겨진다. 최은정의 판단은 수가표의 한 줄로 환원된다. 둘 다 AI가 대체할 수 없는 판단이다. 둘 다 보이지 않는 자산이다. 그러나 하나는 보상받고, 하나는 보상받지 못한다. 그 차이는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측정 시스템의 차이다.
이 전환이 모두에게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최은정의 시급 12,000원이 증명한다.
7. 새로운 대차대조표: 감가하는 자산과 증가하는 자산
AI 시대에 전통적 자산이 감가하고 있다.
학력의 신호 가치가 약화된다. GPT-4가 변호사 시험 상위 10퍼센트를 기록하고, 의사 국가시험 합격선을 넘을 때, "이 사람은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인지 능력이 있다"는 신호의 희소성이 사라진다. 학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학위가 보증하던 것의 가치가 하락하는 것이다.
김수진의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장과 CFA 1차 합격 이력은 20년 전에는 강남지점 배치의 근거였다. 지금은 AI도 CFA 시험을 통과한다. 학위가 보증하던 인지 능력을 AI가 복제하는 순간, 학위는 "이 사람이 할 수 있다"의 증거에서 "이 사람이 해왔다"의 기록으로 전환된다.
자격증은 능력 인증에서 신뢰 보증으로 기능이 전환된다. 의사 면허가 "이 사람이 진단할 능력이 있다"를 증명하던 시대에서, "이 사람에게 진단을 맡겨도 된다"를 보증하는 시대로 이동한다.
11장에서 보았듯, EU AI Act가 고위험 영역에 인간 감독 의무를 부과한 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책임의 문제다. 자격증은 능력의 증거에서 책임의 증거로 변환 중이다.
단순 경력의 가치가 하락한다. 같은 일을 10년 반복한 경력은 AI가 루틴을 처리하는 세계에서 의미가 줄어든다. 이정훈이 아산에서 같은 프레스 라인을 운영한 경력은, AI 품질 예측 시스템 앞에서 "구식 데이터"로 분류되었다.
경력의 길이가 아니라 경력 안에서 무엇을 축적했는지가 문제다. 28년 동안 소리를 들은 것과, 28년 동안 같은 버튼을 누른 것은 다르다. 전자는 암묵지의 축적이고, 후자는 루틴의 반복이다. AI가 대체하는 것은 후자다.
반대로 증가하는 자산이 있다.
신뢰 자본은 AI가 복제할 수 없다. 응우옌이 이정훈을 신뢰하는 것은 이정훈의 이력서를 읽었기 때문이 아니라, 소리만으로 0.3밀리미터를 잡아내는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직접 경험에 기반한 신뢰는 데이터로 전환되지 않는다. AI가 이정훈의 판단 기준을 학습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응우옌이 이정훈에게 느끼는 신뢰를 학습할 수는 없다. 신뢰는 관계의 산물이지 정보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수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순자씨가 김수진을 믿고 매출 자료를 솔직하게 공유한 것은, AI가 요청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물었기 때문이다. 신뢰가 정보를 만들고, 그 정보가 더 나은 판단을 가능하게 한다.
판단 평판은 비표준 케이스의 희소성이 높아질수록 가치가 올라간다. AI가 표준을 더 많이 처리할수록, 남은 비표준은 더 어려워지고, 그 어려운 건에서의 성공률이 평판을 만든다. 김수진의 4.2퍼센트 연체율이 그 평판의 숫자적 표현이다.
돌봄 관계 자본은 수요 폭발과 공급 부족 사이에서 가치가 급상승하고 있지만, 가격에는 반영되지 않는다. 한국이 초고령사회에 진입하면서 장기요양 수급자는 2030년 150만에서 170만 명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그러나 요양보호사 이직률은 30-40퍼센트를 유지한다.
수요는 폭발하고 공급은 이탈한다. 시장 논리라면 가격이 올라야 하지만, 장기요양보험 수가에 묶여 있으므로 가격은 움직이지 않는다. 최은정이 302호 할머니의 흐린 날을 읽는 7년의 관계는, 숫자로는 잡히지 않지만 대체 불가능하다. 새로운 요양보호사가 오면 최은정의 일을 이어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할머니의 흐린 날을 아는 데 또다시 몇 년이 걸릴 것이다.
의미 부여 자본은 AI가 콘텐츠를 무한히 생산할수록 드러난다. "유한한 인간이 시간을 들여 만든 것"의 희소성. 11장에서 에츠이(Etsy)의 수제품 시장이 AI 생성 콘텐츠의 폭발에도 연간 약 130억 달러 규모를 유지하는 것이 그 증거였다.
이 네 자산은 상호 강화한다. 신뢰가 쌓이면 더 어려운 케이스가 맡겨지고, 그 케이스에서의 성공이 판단 평판을 높이고, 높아진 평판이 더 깊은 신뢰를 만든다. 돌봄의 관계가 깊어지면 의미 부여의 토양이 된다. 최은정이 할머니의 단호박죽을 기억하는 것은 돌봄이면서 동시에 의미다.
네 자산의 순환이 임계점을 넘으면 가속이 붙는다. 이정훈이 하이퐁 첫 날 프레스 라인 앞에 섰을 때, 아무도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0.3밀리미터 하나가 임계점을 넘기는 데 걸린 시간은 30분이었지만, 그 30분의 전제 조건은 28년이었다. 일단 임계점을 넘으면 신뢰가 신뢰를 부르고, 평판이 기회를 부르고, 기회가 평판을 높인다.
피터 드러커는 "측정할 수 없으면 관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격언은 반세기 동안 경영의 원칙이었다. 12장의 도발은 이것이다. 측정되지 않는 자산이 가장 빠르게 증가하고, 가장 복제하기 어렵다. 드러커의 격언이 유효한 세계에서, 유효하지 않은 것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되는 역설.
한국의 특수성이 이 역설을 증폭한다. 한국 가계 자산의 75-80퍼센트가 부동산에 집중되어 있고, 금융 자산은 20-25퍼센트에 불과하다. 측정 가능하고, 거래 가능하고, 담보로 잡을 수 있는 자산에 가계의 거의 전부를 걸어놓은 구조다.
AI 전환기에 직업의 가치가 재편될 때, 직업에서 나오는 소득으로 유지되는 부동산 자산이 동시에 흔들리는 이중 위험이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자산을 쌓아야 할 시기에, 보이는 자산에 모든 것을 걸어놓은 구조적 취약성이다.
8. 문턱의 질문
6개월 후, 이순자씨는 정상 상환 중이었다.
AI의 예측은 거절이었다. 김수진의 판단은 승인이었다. 이 한 건에서 AI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화다. AI는 신용점수 하위 20퍼센트에 대한 통계적 판단을 내렸고, 그 판단은 확률적으로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위 20퍼센트의 평균 연체율은 높다. AI는 평균에 대해 옳았다.
김수진이 한 것은 평균에서 개인을 분리하는 일이었다. 이순자씨는 하위 20퍼센트의 평균이 아니라, 18년간 같은 자리에서 블로그 후기 200건을 쌓은 개별 인간이었다.
AI는 범주를 보았고, 김수진은 사람을 보았다. 둘 다 맞을 수 있다. 범주로서의 하위 20퍼센트는 위험하다. 그러나 이순자씨라는 개인은 위험하지 않았다. 통계적 진실과 개별적 진실이 충돌할 때, 누군가는 개별적 진실의 편에 서야 한다. 그것이 김수진이 한 일이다.
이 한 건의 중요성은 수익에 있지 않다. 소액 대출의 이자 수익은 미미하다. 중요한 것은 판단 평판의 한 줄이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132건 중 47건 승인, 연체율 4.2퍼센트. 이 숫자가 한 줄 더 길어졌다.
보이지 않는 자산이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증가했다.
이정훈도, 김수진도, 최은정도, 각자의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자산을 쌓고 있다.
이정훈의 자산은 하이퐁 공장 네트워크에 축적되고 있다. 응우옌의 노트, 인근 공장의 자문 요청, "한국 선생님"이라는 호칭. 김수진의 자산은 판단 이력에 축적되고 있다. 132건 중 47건, 4.2퍼센트의 연체율, "김수진이 승인한 건"이라는 레이블. 최은정의 자산은 302호 할머니와의 7년에 축적되어 있다. 흐린 날의 외로움을 읽는 눈, 단호박죽의 기억, "은정아"라는 이름.
셋 다 대차대조표에 없다. 셋 다 AI가 복제하지 못한다.
그러나 셋의 보상은 같지 않다. 김수진의 판단은 시장에서 가격이 매겨진다. 이정훈의 경험은 해외에서 가격을 찾았다. 최은정의 돌봄은 시급 12,000원에 묶여 있다.
보이지 않는 자산의 가치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왜곡되고 있다. 가장 복제하기 어려운 자산이 가장 낮은 가격에 거래되는 구조. 이것이 AI 시대의 대차대조표가 감추고 있는 가장 큰 거짓말이다.
1권에서 로마 공화정의 프롤레타리우스는 토지를 잃은 뒤 자녀를 낳는 것 외에 국가에 기여할 수단이 없는 자로 분류되었다. 그들이 가진 것 — 경작의 기술, 토양의 지식, 이웃과의 유대 — 은 토지 등기부에 기록되지 않았다. 기록되지 않은 것은 없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2,000년이 지났다. 기록 체계는 점토판에서 블록체인까지 진화했지만, 기록되지 않는 것을 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습관은 바뀌지 않았다.
이순자씨의 반찬가게가 18년간 쌓아온 단골 네트워크는, 로마 소농이 대대로 가꾸어온 토양의 지식과 구조적으로 같다. 둘 다 진짜 자산이다. 둘 다 기록되지 않는다. 둘 다,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빼앗기기가 쉽다.
"마지막 직업"이란 무엇인가. 다음 장의 질문이다.
보이지 않는 자산이 향하는 곳, 사회가 인간에게 맡겨두기로 선택한 것. 그 선택의 기준이 능력이 아니라 신뢰라는 것을 11장에서 보았다. 12장에서 보이지 않는 자산의 지도를 그렸다. 13장에서 그 지도 위에 "마지막 직업"의 좌표를 찍는다.
최은정의 시급은 12,000원이다. 그가 302호 할머니의 손을 잡고 앉아 있는 시간의 가치를 시장은 그렇게 매겼다. 보이지 않는 자산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보상받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당신이 쌓아온 것 중 대체 불가능한 것이 있다면 — 그것이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할 가능성을 감당할 수 있는가.
12장 끝 — 리서치 소스: R-10, R-12, C-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