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포럼의 병사
기원전 133년, 로마 포럼.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민회 연단에 서 있다. 호민관에 당선된 지 석 달째, 그는 토지법을 밀어붙이고 있다. 원로원은 반대한다. 광장은 사람들로 차 있다.
3월의 로마는 먼지가 많다. 포장되지 않은 땅에서 수천 명이 일으키는 먼지가 그라쿠스의 목소리와 함께 떠오른다.
군중 속에 한 병사가 서 있다.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다. 히스파니아에서 돌아온 지 넉 달, 나이는 서른다섯쯤 될 것이다. 7년 만의 귀향이다.
누마니티아 포위전에서 살아남았다. 칼에 베인 흉터가 오른쪽 팔뚝에 남아 있다. 군단의 세 번째 전역이었다. 싸울 때마다 로마를 위해 싸운다고 믿었다. 로마는 그에게 투구와 창을 들 자격을 주었고, 그 자격이 곧 시민의 자격이었다.
돌아와서 본 것은 올리브 나무였다.
아풀리아에 있던 그의 밭 — 8유게룸, 약 2헥타르 — 은 이웃 대지주의 라티푼디움에 흡수되어 있었다. 경계석이 사라져 있었다. 밀밭이었던 곳에 올리브가 줄지어 서 있었고, 그 사이를 걷는 것은 그의 가족이 아니라 노예들이었다.
자유인이 경작하던 땅에 비자유인이 서 있었다. 물리적으로는 같은 땅이다. 사회적으로는 전혀 다른 공간이 되어 있었다.
아피아누스가 기록한다. "자유 농민이 쫓겨난 자리에 노예가 채워졌다. 자유인은 군에 복무하여 오랫동안 집을 떠나야 했으나, 노예는 전쟁에 불려가지 않았으므로 방해받지 않고 번식했다."
시민의 부재가 시민의 기반을 파괴한 것이다. 로마를 위해 싸우러 간 사이에, 로마가 그를 지워버렸다.
그라쿠스의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진다. 플루타르코스가 기록한 연설이다. "로마를 위해 싸우고 죽는 이들은 세계의 지배자라 불리나, 자기 발을 딛고 설 한 뙘의 땅도 소유하지 못한다." 병사는 그 말을 듣는다. 자기 이야기다. 그가 히스파니아에서 로마의 적과 싸우는 동안, 로마의 부자가 그의 밭을 삼켰다.
그러나 병사가 잃은 것은 밭만이 아니다. 밭이 사라지면서 사라진 것들이 있다.
다음 센수스에서 그는 아씨두우스 — 재산 보유 시민 — 에서 프롤레타리우스로 재분류될 것이다. 군역 자격이 사라질 것이다. 켄투리아 민회에서의 투표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밭 8유게룸과 함께 "나는 로마 시민이다"라는 문장의 근거가 사라진 것이다.
그라쿠스가 말하는 동안, 병사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을 것이다. 칼을 쥐었던 손. 쟁기를 잡았던 손. 투표를 했던 손.
세 가지 행위가 하나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빠지면 나머지도 무너진다. 지금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다.
2. 삼각구조: 토지, 군복무, 정체성
로마 공화정의 시민은 세 꼭짓점으로 이루어진 삼각형 위에 서 있었다.
첫 번째 꼭짓점은 토지다. 제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만든 것으로 전해지는 시민 분류 체제에서, 재산이 시민의 등급을 결정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제1등급 시민의 재산 기준은 10만 아세스 이상, 제5등급은 약 1만 1,000아세스 이상이었다. 더 많이 가진 자가 더 무거운 갑옷을 입었다. 제1등급은 투구, 흉갑, 정강이 가리개, 방패, 검, 창을 자비로 갖추었다. 제2등급은 흉갑이 빠졌다. 제3등급은 정강이 가리개도 빠졌다. 제5등급은 투석기만 들었다.
전장에서 네가 무엇을 입고 있는지가 네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해주었다. 갑옷은 재산의 물리적 번역이었다.
두 번째 꼭짓점은 군복무다.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17세에서 46세 사이의 시민 남성은 보병 기준 최소 16회의 연간 전역을 수행해야 공직에 출마할 자격이 주어졌다.
군복무는 의무인 동시에 특권이었다. 싸울 자격이 있다는 것은 시민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증명이었다. 개선식에서 장군이 전리품을 과시할 때, 그 뒤를 따르는 병사들은 자신이 제국 확장의 주체라는 사실을 확인받았다. 전리품은 부의 원천인 동시에 공적 인정이었다.
세 번째 꼭짓점은 정치적 발언권이다. 센수스 등급이 켄투리아 민회에서의 투표 단위를 결정했다. 더 많이 가진 자의 투표가 더 무거웠다. 이것은 불평등이었지만, 구조 안에 있는 불평등이었다. 구조 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시민의 자격이었다.
세 꼭짓점은 순환했다. 토지를 가진 자가 군에 복무하고, 군에 복무한 자가 정치에 참여하고, 정치에 참여한 자가 토지를 지켰다.
킨킨나투스의 일화가 이 순환을 집약한다. 기원전 458년, 원로원이 위기 상황에서 그를 독재관으로 불렀을 때, 그는 밭을 갈고 있었다. 사절단이 도착하자 아내에게 토가를 가져오라 말했다. 땀을 닦고 토가를 입은 뒤 독재관직을 수락했다. 16일 만에 적을 물리치고, 독재관직을 내려놓고, 다시 쟁기 뒤로 돌아갔다.
이 일화가 2,000년 넘게 반복적으로 인용된 이유는, 그것이 사실이어서가 아니다. 역사적 정확성은 논란의 대상이다. 이 일화에 힘이 있는 이유는, 그것이 로마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밭을 가는 사람이 나라를 구하고, 나라를 구한 사람이 다시 밭으로 돌아간다. 농부-전사-시민이라는 삼위일체. 토지는 출발점이자 귀환점이었다.
대 카토는 농업론의 서문에서 적었다. "선조들이 훌륭한 사람을 칭찬할 때, 그를 훌륭한 농부이자 훌륭한 경작자라 불렀다. 이것이 최고의 찬사였다." 그리고 덧붙인다.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가장 위험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마지막 구절이 핵심이다. 토지에 묶인 인간은 안정적이다. 토지에서 풀려난 인간은 위험하다. 카토가 찬양한 것은 농업의 생산성이 아니라 농업의 사회적 기능이었다 — 시민을 제자리에 묶어두는 것.
삼각구조를 정체성의 관점에서 번역하면 이렇다. 토지는 "내가 이 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소속감이었다. 군복무는 "내가 이 공동체를 지킨다"는 존재 증명이었다. 투표권은 "내가 이 공동체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주체성이었다.
세 꼭짓점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로마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구성했다. 어느 하나가 빠지면, 나머지가 지탱되지 않았다.
3. 프롤레타리우스 — 자식밖에 남지 않은 자
삼각구조 아래에 놓인 자들이 있었다.
다섯 등급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시민. 재산이 최저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 이들을 부르는 이름이 프롤레타리우스(proletarius)였다.
어원은 라틴어 프롤레스(proles), "자손"이다. 겔리우스가 기록한다. "프롤레타리이라 불리는 자들은 마치 국가에 자식을 제공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페스투스의 어휘집도 같은 어원을 지지한다 — "국가에 자식만을 봉사하는 자."
이 정의를 풀어보면 이렇다. 세금을 낼 재산이 없다. 무장을 갖출 재산이 없다. 따라서 군에 복무할 수 없다. 정치적 발언권이 실질적으로 없다.
그가 국가에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생물학적 재생산 — 미래의 시민이 될 수 있는 아이들 — 뿐이다. 당신을 부르는 이름이 "자식밖에 내놓을 게 없는 자"일 때, 그것은 경제적 상태의 묘사가 아니라 존재론적 위치의 선고다.
1권에서 우리는 이 단어를 경제적 전락의 지표로 사용했다. 같은 단어를 다시 읽자. 프롤레타리우스라는 명명 자체가 정체성 박탈의 언어적 수행이었다.
프롤레타리우스에게는 또 다른 이름이 있었다. 카피테 켄시(capite censi) — "머리로만 세어지는 자." 다른 시민은 재산으로 세어진다. 재산이 곧 그의 사회적 표지다. 프롤레타리우스는 머리 — 물리적 존재 — 로만 세어진다. 모든 사회적 속성을 벗겨냈을 때 남는 것은 벌거벗은 생물학적 존재뿐이다.
로마인의 이름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프라이노멘(개인명), 노멘(씨족명), 코그노멘(가문명).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서 "툴리우스"는 씨족을, "키케로"는 가문 내 분파를 지시한다. 이름이 곧 계보이고, 계보가 곧 사회적 위치였다.
프롤레타리우스라는 범주명은 이 개별적 이름 체계를 무화시키는 집합적 명명이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든, 당신은 프롤레타리우스다. 개별적 정체성이 집합적 범주에 흡수되는 경험이다.
5년마다 실시된 센수스는 단순한 인구조사가 아니었다. 클로드 니콜레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그것은 시민적 존재를 공적으로 확인하는 의례였다.
켄소르 앞에 출두해 재산을 신고하고, 등급을 배정받는다. 이 과정은 공개적이었다. 네가 어떤 등급에 속하는지를 공동체 전체가 안다.
경기장의 좌석 배정, 공적 행렬에서의 위치, 장례의 규모까지 센수스 등급에 연동되었다. 프롤레타리이는 전체 193개 켄투리아 중 단 1개의 켄투리아에 몰려 있었다. 투표는 마지막에 진행되었는데, 대개 그 전에 이미 다수결이 확정되었다.
투표권은 있되 투표의 기회가 없는 상태였다.
가난한 것과 분류 체계 밖에 놓인 것은 질적으로 다른 경험이다. 제5등급은 서열의 바닥이지만 여전히 서열 안에 있다. 프롤레타리우스는 서열 자체에서 이탈한 범주다.
12표법의 한 단편이 이 구조를 법적으로 확인한다. "재산 보유 시민에 대해서는 재산 보유 시민이 보증인이 되어야 한다. 프롤레타리우스에 대해서는, 누구든 원하는 자가 보증인이 될 수 있다."
아씨두우스의 보증인은 같은 등급의 시민이어야 한다. 프롤레타리우스의 보증인은 아무나 되어도 된다. 법적으로도 그의 존재는 가벼운 것이었다.
19세기에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개념을 로마에서 가져왔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트는 계급 의식의 주체였다. 로마의 프롤레타리이는 달랐다 —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이전에 개별적 정체성을 상실한 자들이었다.
계급 이전에 존재가 먼저 흔들린 것이다.
4. 라티푼디움이 빼앗은 것
1권에서 우리는 아풀리아의 소농이 경계석이 사라진 밭 앞에 선 장면을 보았다.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올리브 나무였다. 그의 안에서 사라진 것은 "나는 이 땅의 주인이다"라는 문장이었다.
1권은 라티푼디움에 의한 소농 축출을 경제적 관점에서 분석했다. "이탈-복지 파이프라인"이라는 프레임이었다 — 생산성 폭발, 소농 이탈, 복지 수요, 재정 압박. 그 분석은 정확하다. 그러나 불완전하다.
경제적 분석은 "무엇을 잃었는가"에 답하지만, "잃은 것이 그 사람에게 무엇이었는가"에는 답하지 않는다.
같은 사실을 정체성 관점에서 재구성하면, 소농의 토지 상실은 다중의 정체성 박탈이 된다.
시민적 정체성이 사라진다. 토지를 잃으면 센수스 등급이 하락한다. 최악의 경우 프롤레타리우스로 전락한다. 켄소르가 공적인 의례를 통해 선고한다 — "너는 더 이상 아씨두우스가 아니다."
군사적 정체성이 사라진다. 재산 기준 이하로 떨어지면 군역에서 배제된다. "이 나라를 위해 싸울 자격"을 잃는다. 그라쿠스의 연설은 경제적 부정의의 고발로 읽히지만, 정체성의 고발이기도 했다. 싸울 자격이 있는 자가 설 땅이 없다는 것은 존재론적 모순이다.
세대적 정체성이 끊어진다. 소농의 밭은 할아버지가 개간하고 아버지가 물려받은 것이었다. 토지 상실은 개인의 경제적 좌절이 아니라 세대 간 연속성의 절단이었다.
농장의 일부에는 조상의 무덤이 있었다. 파렌탈리아 축제 때 조상에게 제물을 바치던 곳이다. 토지를 잃는다는 것은 조상과의 의례적 연결도 잃는 것이었다.
공간적 정체성이 사라진다. 농촌에서 그는 자신의 시간과 공간의 주인이었다. 라레스 — 가정과 경작지의 수호신 — 에 대한 제의는 농경력의 핵심 의례였다. 콤피탈리아는 농장 경계의 교차로에서 거행되는 축제였다.
도시로 이주하면 이 모든 것이 사라진다. 배급일, 살루타티오 시간, 일용 노동의 리듬에 종속된다. 인슐라 5층의 작은 라라리움에서 라레스 숭배를 이어갈 수 있었지만, 그것은 농장 경계석에서의 제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경험이었다.
대 플리니우스가 적었다. "라티푼디움이 이탈리아를 망쳤다." 한 문장이다. 그러나 이 문장이 진단하는 것은 이탈리아의 생산량이 아니다. 이탈리아의 시민적 기반이다. 대농장이 밭을 삼켰을 때, 밭과 함께 삼켜진 것은 소농의 소득이 아니라 소농의 정체성이었다.
경제적 빈곤과 정체성 빈곤은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되, 환원할 수는 없다. 1권에서 보았듯이 곡물배급은 성인 남성 최소 필요 열량의 65~75퍼센트를 제공했다. 일용 노동과 스포르툴라로 나머지를 보충할 수 있었다. 도시 프롤레타리이가 기아 직전까지 내몰린 것은 아니었다 — 최소한의 생존은 보장되었다.
그런데도 그라쿠스의 토지법에 대중이 격렬히 반응한 것,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에 프롤레타리이가 대거 지원한 것, 클로디우스의 무상 배급법에 대한 열광적 지지 — 이 모든 반응은 순전한 경제적 합리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곡물배급으로 배를 채울 수 있는 상황에서 왜 땅을 요구했는가.
경제적 관점에서는 비합리적이다 — 이미 도시에 정착한 프롤레타리이가 다시 소농이 되는 것의 경제적 이점은 불분명하다. 정체성 관점에서는 완전히 합리적이다. 땅은 시민적 존재의 근거였다. 땅을 되찾는 것은 정체성의 회복이었다.
1권에서 크라수스와 소농의 "4대 구조적 비대칭" — 자본 접근성, 정보 접근성, 규모의 경제, 시간 지평 — 을 경제적 관점에서 분석했다. 여기에 다섯 번째 비대칭을 추가할 수 있다. 정체성의 비대칭이다.
크라수스에게 정체성은 축적의 부산물이었다 — 부가 정치적 영향력이 되고, 정치적 영향력이 사회적 인정이 되었다. 소농에게 정체성은 축적의 전제 조건이었다 — 토지가 있어야 시민이고, 시민이어야 군인이고, 군인이어야 발언권이 있었다.
크라수스는 정체성의 초과 상태에서 움직였고, 소농은 정체성의 결핍 상태에서 밀렸다.
5. 정체성을 빌리는 자들
토지에서 밀려난 소농은 로마로 이주했다. 그들이 도시에서 찾은 정체성의 대용물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 파트론-클리엔트 관계다.
매일 아침 해 뜨기 전, 클리엔트는 파트론의 도무스 현관에 줄을 섰다. 토가를 입어야 했다 — 이것은 형식적 복장 규정이자 사회적 의무였다. 가난한 클리엔트에게 깨끗한 토가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다. 마르티알리스가 풍자한다 — 새벽 3시에 토가를 걸치고 더러운 골목을 지나 파트론 집까지 걸어가야, 6.25세스테르티우스의 스포르툴라를 받을 수 있었다.
1권에서 우리는 이 장면을 생존 전략으로 읽었다. 정체성의 관점에서 다시 읽자.
살루타티오는 세 가지를 수행했다. 사회적 위계의 공적 확인 — 나는 클리엔트이고 저 사람은 파트론이다. 호혜적 의무의 일상적 재확인 — 나는 경의를 바치고, 그는 보호를 제공한다. 그리고 사회적 소속감의 유지 — 파트론이 있다는 것은 이 도시에서 나를 아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파트론이 없는 클리엔트는 사회적 고아였다.
그러나 도시의 파트론-클리엔트 관계는 농촌의 그것과 질이 달랐다. 농촌에서 파트론은 지역 유력자였고, 관계는 세대를 넘어 지속되었다. 도시에서 파트론은 정치적 야심가였고, 관계는 유동적이었다. 더 관대한 파트론이 나타나면 클리엔트는 이동했다.
정체성을 빌려 쓰되, 빌린 정체성은 언제든 반납될 수 있었다.
기원전 2세기 후반, 정치적 경쟁이 격화되면서 이 관계는 점점 더 대중 동원의 수단이 되었다. 그라쿠스 형제, 마리우스, 술라,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 이들은 모두 대규모 클리엔텔라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다.
프롤레타리이에게 이것은 역설적 상황이었다. 정체성의 근거로서의 파트론-클리엔트 관계가 약화되는 동시에, 정치적 도구로서의 관계는 강화되었다. 그들은 더 많이 동원되었지만, 더 적게 소속되었다.
둘째, 콜레기아(collegia) — 직업 조합이다.
1권에서 이미 언급했다. "콜레기아라는 직업 조합에 가입하면 장례 기금이라도 보장받을 수 있었다." 1권은 콜레기아를 경제적 상호부조 조직으로 묘사했다. 정체성의 관점에서 읽으면, 콜레기아는 그 이상이었다.
빵 만드는 자들의 콜레기움, 목수들의 콜레기움, 방직공들의 콜레기움. 각 콜레기움에는 수호신이 있었고, 정기적 회합이 있었으며, 공동 식사가 있었다. 장례 기금은 가장 실용적 기능이었다 — 로마에서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것은 사후의 사회적 소멸이었다.
헨릭 모우릿센이 폼페이와 오스티아의 묘비 비문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해방노예들은 자유인 시민보다 훨씬 높은 비율로 자신의 직업을 묘비에 새겼다. "나는 무엇이다"가 아니라 "나는 무엇을 했다" — 존재보다 행위로 정체성을 표현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정체성이 빈 사람일수록 기능으로 그 빈자리를 채우려 했다.
콜레기아가 프롤레타리이에게 제공한 것은 세 가지였다. 직업적 정체성 — "나는 방직공이다"라는 규정이 "나는 프롤레타리우스다"를 대체했다. 사회적 소속감 — 파트론이 없어도, 토지가 없어도, 콜레기움의 회원이라는 소속은 있었다. 사후의 존엄 — 장례가 치러진다는 보장은 "내가 죽어도 기억될 것이다"라는 최소한의 존재 보증이었다.
여기서 하나의 전환이 일어난다. 정체성의 근거가 "무엇을 소유하는가"에서 "무엇을 하는가"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토지에서 분리된 정체성이 기능에 묶인 정체성으로 바뀌는 최초의 움직임이다. 이 움직임은 2장에서 중세 길드의 형태로 완성되고, 3장에서 현대 경력의 형태로 발전한다.
국가는 콜레기아를 경계했다. 기원전 64년 원로원이 일부 콜레기아를 해산시켰다. 클로디우스가 다시 허용했다. 카이사르가 제한했고, 아우구스투스가 엄격히 통제했다.
반복적으로 억압하고 허용한 것은, 콜레기아가 단순한 상호부조를 넘어 프롤레타리이의 집단적 정체성과 조직력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6. 두 개의 의자
프롤레타리우스가 센수스에서 등급이 하락하는 순간이 있다.
켄소르 앞에 서서 재산을 신고한다. 켄소르가 기록을 확인하고 그의 이름 옆에 새로운 등급을 기입한다. 아씨두우스라는 글자가 지워지고, 프롤레타리우스라는 글자가 쓰인다.
이름은 같다. 이름 앞에 붙어 있던 사회적 수식어가 사라졌을 뿐이다.
하지만 그 수식어가 사라지면 이 도시에서 그는 다른 사람이 된다. 투표 단위가 바뀌고, 군역 자격이 사라지고, 경기장 좌석이 바뀌고, 장례의 규모가 달라진다. 같은 이름의 다른 존재.
2,100년 뒤, 아산.
이정훈이 사원증을 반납한다. 플라스틱 카드 한 장에 이름, 사번, 직급이 적혀 있다. 28년간 목에 걸고 다녔던 것이다.
인사팀 직원이 서류를 건넨다. 서명하는 데 3분이 걸린다. 카드를 내려놓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보다 짧다. 카드가 손에서 떠나는 순간,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생산기술부 부장 이정훈"이라는 문장이 해체된다. 남는 것은 "이정훈"이다.
이름은 같다. 이름 앞에 붙어 있던 것이 사라졌을 뿐이다.
한국어에는 첫 만남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질문이 있다. "뭐 하세요?" 직업을 묻는 것이지만, 사실상 정체성을 묻는 것이다. 로마 시민에게 "당신은 어떤 등급입니까?"가 곧 "당신은 누구입니까?"였던 것과 같은 구조다.
"삼성전자 부장"이라는 대답과 "지금은 쉬고 있습니다"라는 대답 사이의 거리는 소득의 거리가 아니다. 사회적 존재감의 거리다.
로마의 센수스와 한국의 명함. 5년마다 공적으로 갱신되던 시민 등급과, 첫 만남에서 건네는 직함이 적힌 종이. 두 제도 사이에 2,000년의 시간이 있지만, 수행하는 기능은 같다 — 당신이 이 공동체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즉시 가시화하는 것.
프롤레타리우스가 잃은 것은 밭이었다. 이정훈이 잃은 것은 사원증이었다. 둘 다 생산 수단을 잃은 것이 아니다. 정체성의 근거를 잃은 것이다.
밭이 없으면 시민이 아니고, 사원증이 없으면 "뭐 하세요?"에 답할 수 없다. 로마의 센수스가 시민을 등급으로 분류했듯이, 한국의 명함은 사람을 직함으로 분류한다. 분류 체계에서 이탈하는 순간 — 프롤레타리우스로 재분류되는 순간, 명함을 더 이상 건넬 수 없는 순간 — 사람은 투명해진다.
경제적 안전망은 있었다. 로마에는 곡물배급이 있었다. 한국에는 실업급여와 국민취업지원제도가 있다.
1권에서 본 테세라 프루멘타리아 — 곡물배급 토큰 — 는 재산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는 아직 시민이다"라는 최소한의 정체성 증명이었다. 줄에 선다는 것은 배를 채우는 행위인 동시에 시민 자격을 확인받는 행위였다.
그런데 배급 줄에 서는 것이 수치였듯이, 고용센터에 가는 것도 정체성의 하강으로 경험된다. 제도가 경제적 안전망을 제공하면서도 정체성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는 구조는 2,000년간 바뀌지 않았다.
이정훈은 분노하지 않았다. 프롤로그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보았다.
분노에는 부당함의 인식이 필요하다. 이정훈에게 일어난 일은 부당하지 않았다. 합리적이었다. AI가 더 정확했고, 더 빨랐고, 더 쌌다. 성과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 그것이 더 잔인한 부분이었다.
로마의 소농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라티푼디움이 더 효율적이었다. 노예 노동이 더 쌌다. 밀려나는 것이 부당해서가 아니라 합리적이어서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7. 마리우스의 해법, 공화정의 종말
정체성 위기에 대한 구조적 응답이 왔다. 기원전 107년, 집정관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군제를 개혁했다.
살루스티우스가 기록한다. "마리우스는 병사를 징집할 때 전통처럼 등급에 따라 하지 않고, 지원하는 자 중에서 받아들였으며, 대부분은 카피테 켄시였다." 재산 자격 요건이 사실상 폐지된 것이다.
프롤레타리이에게 군복무의 문이 열렸다. 그동안 "싸울 자격이 없다"고 선고받았던 자들이 처음으로 군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삼각구조의 첫 번째 꼭짓점(토지)을 우회하여 두 번째 꼭짓점(군복무)에 직접 접근하는 경로가 생긴 것이다.
군복무는 경제적 기회 — 급여, 전리품, 퇴직 시 토지 약속 — 인 동시에 정체성 회복의 경로였다. "나는 다시 싸울 자격이 있는 자다."
그러나 이 해법은 삼각구조 자체를 해체했다.
마리우스 이전, 군인은 곧 시민이었다.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자. 마리우스 이후, 군인은 직업 군인이 되어갔다. 자기 땅이 없는 자가 급여와 토지 약속을 위해 싸웠다.
군복무의 동기가 "공동체의 방어"에서 "개인의 생존"으로 이동했다.
결과는 충성의 대상 전환이었다. 토지를 가진 시민-군인은 국가에 충성했다. 자기 재산과 공동체의 안전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토지 없는 직업 군인은 자신에게 급여를 주고 전역 후 토지를 약속해줄 장군에게 충성했다.
그런데 원로원은 퇴역병에 대한 토지 약속을 반복적으로 저지했다. 폼페이우스의 동방 원정 퇴역병 토지 배분은 수년간 지연되었다. 국가가 정체성 회복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을 때, 병사들이 장군에게 더 강하게 의존하게 된 것은 배신의 결과가 아니라 합리적 정체성 투자의 결과였다.
"마리우스의 병사," "술라의 병사," "카이사르의 병사." 군단의 이름이 국가의 이름에서 개인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기원전 49년, 그를 따른 제13군단 병사들의 상당수는 갈리아에서 8년 이상 카이사르 아래에서 복무한 자들이었다. 그들에게 "로마"가 아니라 "카이사르"가 정체성의 준거점이었다.
역설이 있다. 프롤레타리이에게 군복무를 허용함으로써 개인적 수준에서의 정체성 회복 경로를 열었지만, 그 과정에서 "시민이 곧 군인"이라는 공화정의 핵심 정체성 구조를 해체했다. 부분의 치유가 전체의 파괴를 초래한 것이다.
시리즈의 공식이 여기서 처음 작동한다. 기술 혁신 — 노예 기반 대농장이라는 농업 기술 — 이 자본 집중을 초래했다. 라티푼디움이 토지를 삼켰다. 사회가 불안해졌다. 제도 재설계의 시도가 있었다 — 그라쿠스의 토지법,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그러나 그 제도 재설계가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았다. 정체성 구조의 문제를 경제적, 군사적 해법으로 풀려 했을 때, 해법이 새로운 문제를 만든 것이다.
직업이 정체성이라는 등식은 자연법칙이 아니었다. 그것은 특정한 시대가 만든 특정한 구성물이었다. 로마는 그 구성물을 토지 위에 세웠다. 토지가 사라지자 구성물이 무너졌다. 무너진 자리에서 새로운 구성물을 세우려는 시도는 더 큰 붕괴를 초래했다.
직업과 정체성을 묶는 방식은 시대마다 달랐고, 시대마다 깨졌다.
이것은 오래된 문제다. 로마만의 문제가 아니다.
8. 토지에서 손으로
로마에서 정체성은 토지에 묶여 있었다. 밭이 시민을 만들었고, 밭이 사라지면 시민도 사라졌다.
그런데 콜레기아에서 하나의 씨앗이 싹텄다. "나는 방직공이다," "나는 목수다" — 소유가 아니라 행위로 자신을 규정하는 방식. 토지에서 분리된 정체성이 기능에 묶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전환은 즉각적이지 않았고, 완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방향은 분명했다.
이 씨앗은 중세 유럽에서 꽃을 피운다. 1450년경 피렌체의 가구 장인이 완성된 캐비닛 뒷면에 자신의 이름과 길드 마크를 새긴다. 그의 직업은 생계 수단이 아니라 세계 속 자기 위치의 선언이다.
토지에서 손으로, 정체성의 근거가 이동한다.
이전의 확실한 답 — 토지가 곧 시민이고, 시민이 곧 정체성이다 — 은 사실은 한 시대의 구성물이었다. 그 구성물은 깨졌다. 깨진 자리에서 새로운 구성물이 만들어졌다. 그 새로운 구성물도 언젠가 깨진다.
직업이 정체성을 구성하는 방식은, 역사가 반복적으로 조립하고 해체해온 것이다. 로마의 밀밭에서 시작된 이 조립과 해체의 역사는, 피렌체의 공방에서 다음 형태를 찾는다.
문턱의 질문: 당신의 사원증 — 혹은 명함, 직함, 회사 이메일 주소 — 을 빼면, 당신은 누구인가.
1장 끝 — 리서치 소스: R-01, C-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