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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5 — 사이의 전략

11장: 칩과 배터리 — 한국의 두 날개


1. 이천의 심장

2024년 가을,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SK하이닉스 이천 캠퍼스의 M16 팹 내부에서는 HBM3E 12단 적층 양산 라인이 24시간 가동되고 있었다. 12층짜리 DRAM 다이를 수직으로 쌓아 올리는 공정 — TSV(실리콘관통전극)로 각 층을 관통하고, 마이크로범프로 접합하고, 열 방출을 위한 비전도성 필름을 한 겹씩 삽입하는 작업이 반복됐다. 완성된 HBM3E 한 개의 두께는 약 775마이크로미터. 사람 머리카락 열 가닥을 나란히 놓은 것보다 얇은 구조 안에, 36기가바이트의 데이터를 초당 1.18테라바이트 속도로 주고받는 능력이 담겨 있었다.

이 부품이 엔비디아의 H200 GPU에 탑재된다. H200 하나에 HBM3E가 여섯 개 들어간다. 전 세계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가 연간 수십만 개의 H200을 배치하고, 그 GPU 하나하나에 SK하이닉스의 HBM이 실려 있다. AI 혁명의 핵심 부품이 이천의 클린룸에서 나온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SK하이닉스를 "AI 인프라의 핵심 파트너"라고 공개적으로 불렀다. 외교적 수사가 아니었다. 2024년 기준 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의 점유율은 62퍼센트. 2위 마이크론 21퍼센트, 3위 삼성전자 17퍼센트.

SK하이닉스가 공급을 멈추면 엔비디아의 AI 가속기 생산이 즉각 차질을 빚는다. 4장에서 TSMC의 실리콘 방패를 보았다. 한국에도 방패가 있는가. HBM이 그 질문에 대한 가장 가까운 답이다.

그러나 이 방패의 유효기간은 정해져 있다. 마이크론이 HBM3E 양산을 본격화하고, 삼성이 발열 문제를 해결하면 62퍼센트라는 점유율은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방패의 날카로움은 기술 격차에서 나오고, 기술 격차는 시간에 녹는다.


2. 반도체 — 거인의 두 얼굴과 빈 허리

숫자로 보자. 2024년 한국의 반도체 수출은 1,419억 달러 — 약 190조 원. 전년 대비 43.9퍼센트 성장이었고, 사상 최고치였다. 총수출 6,838억 달러의 20.8퍼센트를 반도체 하나가 차지했다. 2025년에는 1,734억 달러로 다시 기록을 갈아치웠다. 반도체는 한국 수출의 심장이다.

이 심장에는 두 개의 방이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DS부문)는 2024년 매출 131조 원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글로벌 반도체 매출 1위를 탈환했고, 점유율 10.5퍼센트로 인텔을 다시 제쳤다. DRAM에서는 여전히 세계 1위, NAND 플래시에서도 32.8퍼센트로 선두를 지켰다. 삼성과 SK하이닉스를 합치면 DRAM 세계 시장의 70.5퍼센트, NAND의 52.6퍼센트를 한국이 쥐고 있다.

그러나 같은 삼성에 균열이 있다.

파운드리 — 남의 칩을 대신 만들어주는 위탁생산 — 에서 삼성의 점유율은 2024년 4분기 기준 8.1퍼센트. TSMC의 67.1퍼센트와의 격차는 59퍼센트포인트다. 2022년 세계 최초로 3나노 GAA(게이트올어라운드) 공정을 도입했지만, 수율 문제가 반복됐다. 퀄컴, 엔비디아 같은 대형 고객들이 TSMC로 옮겨갔다.

2나노 공정에서 삼성은 수율 55~60퍼센트를 달성했다고 보고했으나, TSMC는 같은 시기 65퍼센트에 도달해 있었다. 65퍼센트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 이 선을 넘으면 대형 고객이 일정을 확정하고 주문을 고정하기 시작한다. 삼성이 그 선 아래에 머무는 동안, 퀄컴과 엔비디아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기술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고객 신뢰의 문제다. 수율 불안정과 일정 지연이 반복되면서 "2티어" 이미지가 굳어졌다.

HBM에서도 삼성은 뒤처졌다. 2023~2024년, 삼성의 HBM3E는 발열과 전력 소비 문제로 엔비디아 인증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 HBM 시장 점유율 17퍼센트. SK하이닉스의 62퍼센트와 비교하면 같은 한국 기업이라고 믿기 어려운 격차다. 삼성은 파운드리에서 TSMC와 싸우면서, 동시에 메모리에서 SK하이닉스에도 밀리는 두 전선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반면 SK하이닉스는 "HBM 집중"이라는 명확한 전략으로 역대 최고 실적을 올렸다. 2024년 매출 66.19조 원, 영업이익 23.47조 원 — 모두 창사 이래 최고 기록이다. 전년 대비 매출 성장 102퍼센트. HBM이 DRAM 매출의 4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다.

7장에서 ASML이 EUV 노광장비 분야에서 세계 독점적 위치를 가진 것을 보았다. SK하이닉스는 HBM에서 그 ASML에 가장 근접한 독점 구조를 만들었다.

용인에서는 다음 페이지가 준비되고 있다. SK하이닉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 1팹 투자액만 31조 원 — 약 215억 달러. 2025년 3월 착공, 2027년 완공 목표다. 4개 팹에 협력사 50개 이상이 입주하는 세계 최대 메가팹 복합단지가 될 것이라고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선언했다. 장기 투자 규모는 600조 원 이상.

삼성 역시 평택에서 P5 팹에 30조 원 이상을 투입하고 있으며, 5년간 450조 원 — 약 3,100억 달러를 AI와 반도체에 쏟아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정부가 주도하는 경기 반도체 메가클러스터는 622조 원을 2047년까지 투입한다. 9장에서 UAE가 MGX를 통해 AI 인프라에 1,000억 달러 투자를 목표로 삼은 것을 보았다. 논리는 같다 — 미래 기술 패권의 지분을 지금 확보하지 않으면, 나중에 살 수 없다는 판단. 한국의 600조 원과 UAE의 1,000억 달러는 규모도 배경도 다르지만, 그 아래의 계산은 하나다.

그러나 이 거대한 투자 위에 빈 허리가 있다. 소부장 — 소재, 부품, 장비 — 생태계의 취약성이다.

한국 반도체 장비의 자급률은 약 20퍼센트에 불과하다. 나머지 80퍼센트는 수입에 의존한다. 7장에서 ASML의 EUV 장비 한 대가 2억 2,000만 달러 — 약 3,000억 원이며 이 기계를 만들 수 있는 회사가 지구상에 단 하나라는 것을 보았다. 삼성과 SK하이닉스의 모든 첨단 팹이 이 네덜란드 소도시의 기계에 의존한다.

EUV뿐이 아니다. 식각 장비의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와 램 리서치(미국), 검사 장비의 KLA(미국), 측정 장비의 도쿄일렉트론(일본) — 핵심 장비의 공급선은 미국과 일본에 집중되어 있다.

소재에서도 병목은 깊다. 2019년 7월, 일본이 한국에 대한 포토레지스트, 불화수소(에칭 가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세 가지 핵심 소재의 수출 규제를 강화했을 때, 한국 반도체 산업 전체가 흔들렸다. 일본은 포토레지스트 글로벌 시장의 87~91퍼센트를 장악하고 있다.

10장에서 일본이 소재의 무기화를 선택한 장면을 보았다 — 한국은 그 무기화의 직접적 대상이었다. 이후 한국 정부와 기업은 소재 국산화에 투자했고, 불화수소의 국산화율은 상당 수준 올라갔다. 그러나 EUV용 극자외선 포토레지스트처럼 최첨단 소재에서는 여전히 일본산 의존이 지속된다. 7장에서 ASML의 해자가 30년의 축적이었듯, 소재의 해자도 수십 년의 노하우로 만들어진다. 국산화 선언만으로 넘을 수 있는 장벽이 아니다.

구조를 정리하면 이렇다. 한국은 메모리 칩이라는 완성품에서는 세계 1위이지만, 그 칩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장비와 소재에서는 미국, 일본, 네덜란드에 종속되어 있다. 앞서 본 ASML 장비에는 미국 기술이 포함되어 있어, 미국이 네덜란드를 통해 간접적 거부권을 행사한다. 한국은 그 이중 병목의 끝에 있는 나라다 — 장비는 ASML에, ASML은 미국에, 소재는 일본에 묶여 있다.

3장의 불가결성 5조건으로 한국 반도체를 평가하면, 기술적 대체 불가성은 HBM에서 강하고 파운드리에서 약하다. 공급망 핵심 노드로서의 위치는 메모리에서 확고하다. 그러나 한국 반도체의 방패는 날카롭지만, 그 날카로움은 HBM이라는 한 점에 집중되어 있고, 방패를 만드는 도구는 남의 것이다.


3. 배터리 — 하락하는 날개

한국 배터리 산업의 궤적은 반도체와 정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2020년, LG에너지솔루션 24퍼센트, 삼성SDI 6퍼센트, SK이노베이션 6퍼센트 — 한국 3사 합산 점유율은 36퍼센트였다. 세계 전기차 배터리 시장의 3분의 1 이상을 한국이 쥐고 있었다.

5년 후인 2025년, 그 숫자는 15퍼센트로 줄었다. 절반 이하로 떨어진 것이다. 같은 기간 중국 업체들의 합산 점유율은 69퍼센트로 치솟았다. CATL 39.2퍼센트, BYD 16.4퍼센트 — 이 두 기업만으로 한국 3사 전체를 압도한다.

하락의 원인은 세 겹이다.

한국 기업들이 NCM(니켈·코발트·망간) 배터리에 올인하는 동안, 중국은 LFP(리튬인산철) 기술로 저가 시장을 장악했다. 중국 국내 시장에서 LFP 채택률은 79.4퍼센트에 달한다. 그 여파는 유럽까지 번졌다. 2021년 한국이 70퍼센트를 차지하던 유럽 시장에서, 2024년에는 중국이 49.7퍼센트로 한국의 45퍼센트를 넘어섰다. 여기에 EV 수요 둔화가 겹치며 한국 기업들을 직격했다. 공장 가동률은 LG에너지솔루션 47.6퍼센트, SK온 43.6퍼센트로 추락했다. CATL이 가동률 90퍼센트를 유지하는 것과 극명한 대비다.

BYD라는 존재가 특히 위협적이다. 배터리 셀에서 반도체, 전기 모터, 완성차 조립까지 수직 통합을 완성한 기업. 2024년 427만 대 이상의 신에너지차를 판매해 연간 기준 테슬라를 처음 넘어섰다. 8장에서 인도네시아의 니켈 수출 금지가 자원 사다리 전략이었음을 보았다. BYD는 그 사다리의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자다 — 배터리 원료부터 완성차까지 전체 가치사슬을 장악했다.

그러나 한국 배터리에는 아직 싸울 무기가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의 폴란드 브로츠와프 공장은 유럽 최대 배터리 공장이다 — 연산 86기가와트시, 직원 9,500명. 폭스바겐, 아우디, 포르쉐, 메르세데스-벤츠에 셀을 공급한다.

미국에서는 조지아에 한국산 EV 클러스터가 형성됐다. 현대차 메타플랜트 아메리카 — 76억 달러 투자, 연간 50만 대 생산 능력 — 를 중심으로 SK온 배터리 공장, LG에너지솔루션 합작 공장, 현대모비스를 비롯한 5개 계열사가 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전고체 배터리라는 다음 판도 준비 중이다. 삼성SDI는 "슈퍼갭" 기술로 에너지 밀도 900와트시/리터 이상을 목표로 하며, 2027년 양산을 선언했다. 10장에서 일본의 토요타가 같은 2027년을 겨냥하고 있음을 보았다. 현행 리튬이온에서 전고체로의 전환은 판 자체를 바꿀 수 있다 — 발화 위험 제거, 에너지 밀도 20~50퍼센트 향상, 10분 충전. 이 전환에서 선두를 잡으면 CATL의 지배를 우회할 수 있다. 실패하면 현재의 하락세가 고착된다.


4. 규칙의 전쟁

2022년 8월 16일, 바이든 대통령이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서명했다. 한국 배터리 3사는 처음에 환호했다. 미국 현지 생산에 대한 막대한 보조금이 중국 기업을 배제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부 조항 속에 낯선 단어가 있었다 — FEOC(우려 외국 기업). 중국 정부의 통제를 받는 기업이 공급한 핵심 광물이나 배터리 부품을 포함한 차량은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조항이었다.

한국 배터리 기업들의 공급망 전체가 흔들렸다. 리튬 정제의 80퍼센트 이상, 코발트 정제의 70퍼센트, 음극재 생산의 91퍼센트가 중국이다. FEOC 규정을 준수하려면 공급망을 통째로 재설계해야 한다.

포스코퓨처엠이 전남 광양에 전구체 공장을 짓고, 중국산 중간재 없는 양극재 생산을 시작한 것은 이 압박의 산물이다. 정부도 9.7조 원 — 약 71억 달러의 정책금융으로 공급망 전환을 지원했다.

IRA는 보조금 법안의 외피를 쓴 공급망 분리 명령이었다. 핵심은 단순하다 — 중국을 배제하라. 미국 내 배터리 셀 생산에 대해 킬로와트시당 35달러, 모듈에 10달러의 세액공제를 지급하되, 중국산 소재가 포함되면 전액 박탈한다. UBS 추산에 따르면 한국 배터리 3사가 미국 공장을 풀 가동하면 연간 약 80억 달러 — 약 11조 원의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돈의 조건이 공급망의 재설계다.

반도체에서도 같은 규칙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삼성전자 시안 NAND 공장은 삼성 전체 NAND 생산의 약 40퍼센트를 담당한다. SK하이닉스의 우시 공장은 DRAM의 약 40퍼센트를 생산한다. 미국이 2025년 8월 VEU(검증된 최종사용자) 지위를 취소했을 때, 이 공장들의 운명이 불투명해졌다.

120일 후 연간 허가제로 전환되며 일단 숨을 돌렸지만, 구조는 바뀌었다. 매년 미국 정부에 장비 종류와 수량을 신청하고, 승인을 받아야 한다. "영구 면제"는 없다. 프롤로그에서 2022년 10월 삼성 시안 공장이 수출통제의 벼랑 끝에 섰던 순간을 보았다. 그 긴장은 해소된 것이 아니라 연례 행사가 됐다.

트럼프 행정부는 규칙의 전쟁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렸다. 2025년 7월 서명한 법안으로 소비자 EV 세액공제를 종료시켰다. 현대차가 210억 달러 미국 투자를 발표한 직후, 혜택이 삭감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약속 후 철회. 4장에서 TSMC가 아리조나에 1,650억 달러를 투자하면서도 미국 정치의 변덕에 노출된 것을 보았다. 한국 배터리 기업들도 같은 구조 안에 있다.

중국은 중국대로 규칙을 쓴다. 배터리 핵심 광물의 정제를 장악한 중국을 완전히 배제하면 비용이 급등하고 공급이 불안해진다. 배제하지 않으면 미국의 FEOC 규정에 걸린다.

IRA는 기회이면서 족쇄다. FEOC는 방패이면서 올가미다. 미국과 중국이 각각 자국에 유리한 규칙을 쓰고, 한국은 양쪽의 규칙을 동시에 따라야 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이것이 규칙의 전쟁이다. 칩과 배터리라는 무기를 쥐고 있지만, 그 무기의 사용 조건은 다른 나라가 정한다.


5. 위기 — 추격자, 빈자리, 마르는 파이프라인

위기는 바깥에서도, 안에서도 온다.

중국 CXMT(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는 2024년 매출이 2년 전의 세 배인 약 30억 달러를 넘어섰다. DDR5 제품을 출시했고, 주요 업체와의 기술 격차를 1~2세대로 좁혔다. 2024년 한국 검찰은 전 삼성 직원 10명을 CXMT에 10나노 DRAM 기술을 유출한 혐의로 기소했다. 삼성의 기술이 CXMT의 추격을 가속했을 가능성이 있다.

10장에서 일본이 1988년 세계 반도체 시장의 51퍼센트에서 2019년 10퍼센트 이하로 추락하는 데 30년이 걸렸음을 보았다. 그리고 회복하는 데 다시 30년이 필요했다. 라피더스가 의미하는 교훈은 이것이다 — 반도체를 잃으면 되찾기까지 한 세대가 걸린다.

배터리에서 추격은 이미 추월로 바뀌었다. CATL의 공장 가동률 90퍼센트는 규모의 경제가 만든 비용 우위의 물리적 증거다. 중국 정부는 CATL과 BYD에 각각 연간 최소 20억 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한다. 한국 3사의 가동률 50퍼센트 이하와 비교하면, 이것은 기술 격차가 아니라 구조적 격차다.

그러나 안에서의 위기가 더 근본적이다. 사람이 없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72 — 세계 최저다. 서울은 0.64. 이 숫자가 반도체와 배터리에 어떻게 연결되는가. 출산율은 20년 후 노동시장의 선행 지표다. 0.72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아이가 적다는 것이 아니다 — 2040년대에 삼성 평택과 SK하이닉스 용인 팹을 채울 엔지니어 풀이 지금 결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반도체 팹 한 곳을 운영하려면 수천 명의 고도로 숙련된 엔지니어가 필요하다. EUV 노광장비를 조작하고, 공정 결함을 진단하고, 수율을 올리는 작업은 대학원 수준의 물리학과 화학, 그리고 수년간의 현장 경험을 요구한다. 배터리 소재 연구와 셀 설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인력의 파이프라인이 마르고 있다.

한국의 이공계 기피 현상은 이미 구조화됐다. 의대 정원 확대 논쟁이 보여주듯, 최상위 학생들은 공학과 과학이 아니라 의학으로 몰린다. 2024년 의대 증원 정책을 둘러싼 전공의 파업이 수개월간 의료 체계를 마비시켰다.

이 갈등의 이면에는 더 깊은 문제가 있다 — 반도체 공정 엔지니어의 연봉이 개원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구조에서, 가장 똑똑한 청년들이 클린룸이 아니라 수술실을 선택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그러나 국가적으로는 재앙이다.

4장에서 대만의 이중 경제를 보았다. TSMC 엔지니어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칩을 만들면서도 집을 살 수 없다고 말하는 나라. 대만에서도 반도체 인력 충원 미달이 3만 4,000명에 달한다. 한국은 대만보다 인구 감소 속도가 빠르다. 대만의 합계출산율 0.87에 비해 한국은 0.72 — 세계에서 가장 먼저, 가장 빠르게 인력 절벽에 도달하는 나라다.

해외 유출도 심각하다. AI 인력의 미국행이 가속되고 있다. 구글, 메타, 오픈AI 같은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한국의 석·박사급 AI 연구자를 빨아들인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AI 반도체를 만들려면 AI를 이해하는 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인력이 한국을 떠나고 있다.

4장에서 TSMC가 아리조나 공장을 위해 대만 엔지니어 1,000명을 이주시킨 장면을 보았다. 한국에서는 국가가 보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 떠난다. 더 높은 연봉, 더 나은 연구 환경, 더 개방적인 문화를 찾아서.

합계출산율 0.72의 장기 영향은 아직 본격적으로 도달하지 않았다. 그 충격이 노동시장에 나타나는 것은 2040년대다. 그러나 반도체와 배터리 투자의 시간표는 지금이다. 용인 클러스터가 완공되는 2027년, 경기 메가클러스터가 완성되는 2047년 — 그때 팹을 채울 엔지니어는 어디서 오는가.

10장에서 일본의 고독사 76,020명이라는 숫자를 보았다. 인구 절벽은 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다. 한국은 일본보다 20년 압축된 속도로 같은 경로를 밟고 있다.

4대 재벌 — 삼성, SK, 현대, LG — 의 매출이 GDP의 40.8퍼센트를 차지하는 구조에서, 칩과 배터리의 미래는 곧 소수 재벌의 의사결정에 달려 있다. 자본 집중이 효율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단일 실패점을 만들기도 했다.

삼성 파운드리의 수율 문제는 기술의 문제이면서 조직의 문제다. TSMC가 수십 년간 축적한 제조 노하우 — 장비 세팅의 미세 조정, 결함 패턴의 암묵적 지식 — 를 따라잡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 동안 고객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삼성이 HBM4에서 엔비디아 루빈 플랫폼 공급사로 선정된 것은 반전의 시작일 수 있다. 그러나 파운드리에서의 만회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6. 공식 체크포인트 — 두 날개의 현재 좌표

핵심 공식을 적용하면, 한국의 칩과 배터리는 공식의 두 번째 단계에 서 있다.

기술 혁신은 있었다. SK하이닉스의 HBM, LG에너지솔루션의 미국·유럽 공장망, 삼성SDI의 전고체 배터리 연구. 자본 집중도 있었다 — 삼성의 5년간 450조 원, SK하이닉스 용인 600조 원, 정부의 반도체 메가클러스터 622조 원. 재벌이라는 구조가 이 집중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공식의 세 번째 단계 — 사회적 불안 — 의 징후가 보인다. 배터리 소재 업체들의 매출이 급감하고, 해외 공장 확대가 국내 공동화 우려를 낳고 있다. 반도체 호황의 과실이 소수 대기업에 집중되는 구조는 4장에서 본 대만의 이중 경제와 닮았다. TSMC 엔지니어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칩을 만들면서도 집을 살 수 없다고 말했던 것처럼, 한국에서도 반도체 호황이 체감 경기와 괴리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기술 혁신에서 자본 집중으로, 자본 집중에서 사회적 긴장으로. 공식의 네 번째 단계 — 제도 재설계 — 가 뒤따를 수 있는가. K-Chips Act로 세액공제를 25퍼센트까지 확대하고, AI 기본법을 세계 두 번째로 제정한 것은 제도적 대응의 시작이다. 그러나 10장에서 일본이 종신고용과 합의 문화라는 사회적 관성에 막혀 제도 재설계에 실패한 30년을 보았다. 한국의 재벌 중심 구조가 빠른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강점이면서, 동시에 혁신의 방향이 소수의 판단에 좌우되는 취약점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7개의 거울을 보았다. 대만은 TSMC라는 하나의 칼날로 세계를 붙잡았다. 네덜란드는 ASML이라는 독점으로 병목을 만들었다. 인도네시아는 니켈이라는 자원을 사다리로 삼았다. 일본은 30년을 잃고 나서야 다시 반도체에 베팅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불가결성은 어디에 있는가. HBM이라는 날카로운 칼날 하나, 그리고 아직 전열을 정비 중인 배터리라는 다른 한 날개. 그러나 칼날을 만드는 도구 — 장비와 소재 — 는 남의 것이고, 칼날을 잡을 사람 — 엔지니어 — 은 줄어들고 있다. 두 날개가 모두 필요하다. 한쪽만으로는 사이에서 버틸 수 없다.

칩과 배터리가 한국의 방패인가, 족쇄인가. 정확한 답은 "둘 다, 동시에"다. SK하이닉스 HBM처럼 대체 불가능성이 높을수록 방패 효과가 강해진다. 삼성 파운드리처럼 대체 가능성이 있을수록 족쇄 리스크가 커진다. 배터리처럼 추격당하는 영역에서는 방패가 얇아진다. 그리고 방패를 쥘 손이 비어 가고 있다.

두 날개의 강도를 결정하는 것은 기술만이 아니다. 제도, 인력, 그리고 강대국 사이에서의 외교적 균형 — 다음 장에서 그 사이의 전략을 본다.


11장 끝 — 리서치 소스: R-06, R-07, C-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