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알프스로의 후퇴
1940년 7월 25일, 스위스 중부 뤼틀리 초원.
649년 전 스위스 연방의 시조가 맹세를 나눈 바로 그 장소에 스위스군 최고사령관 앙리 기장 장군이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650명의 장교들이 도열해 있었다. 6주 전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했다. 스위스는 이제 나치 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에 사방이 둘러싸인 섬이었다. 히틀러의 참모본부에는 이미 "타넨바움 작전" — 스위스 침공 계획 — 이 놓여 있었다.
기장 장군의 명령은 명료했다. 레뒤 나시오날(Reduit national). 국가 요새. 적이 침공하면 국경과 도시를 포기한다. 전군은 알프스 산중으로 후퇴한다. 생모리스, 생고타르, 자르간스 — 세 축을 중심으로 산속에 파묻힌 포병 진지, 터널, 병참 시설에서 무기한 저항한다. 도시를 내줘도 좋다. 산을 내주지 않으면 된다.
이 전략의 논리는 비용 계산이었다. 스위스를 점령해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알프스 요새를 함락하는 데 드는 비용이 더 크도록 만드는 것. 중립은 선언이 아니라 가격표였다. "우리를 침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대가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다."
독일은 결국 침공하지 않았다. 알프스 요새의 군사적 비용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스위스가 제공하는 금융 서비스, 물자 공급, 외교 통로는 침공하지 않아야 더 가치 있었다. 중립은 두 방향으로 작동했다. 스위스는 자신을 지키고, 강대국들은 스위스의 쓸모를 보존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 쓸모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따라왔다.
2. 중립의 수익화 — 스위스의 선택
"사이에 서기"는 무료가 아니다. 그렇다면 "사이에 서기"로 돈을 버는 것은 가능한가. 스위스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유일한 나라다.
1934년, 스위스 연방은 은행법 제47조에 은행 비밀 조항을 삽입했다. 고객 정보를 외국 기관이나 제3자에게 공개하면 형사 처벌을 받는다. 이 한 줄의 법이 스위스를 세계의 금고로 만들었다. 2018년 스위스은행협회 추산에 따르면 스위스 은행들은 6조 5,000억 달러 — 약 8,450조 원 — 의 자산을 보유하며, 이는 전 세계 국경을 넘는 자산의 약 25퍼센트에 해당한다. 취리히 반호프슈트라세의 단아한 건물들 아래에는 수백억 달러의 귀금속과 자산이 잠들어 있었다. 화려한 간판도 없었다. 오래된 파사드에 작은 명패만 붙어 있을 뿐이었다.
제네바는 다른 종류의 수익화를 보여준다. 40개 이상의 국제기구, 180개 이상의 상주 공관, 400개 이상의 NGO가 이 도시에 집결해 있다. UN 유럽 본부, WHO, WTO, ILO, ICRC — 모두 제네바에 있다. 연간 약 8,000건의 국제 회의가 열린다. 어느 강대국의 수도도 아닌 곳, 어느 동맹에도 속하지 않는 나라 — 그래서 모두가 여기서 만날 수 있다. 스위스 정부는 제네바 국제구역 운영에 연간 약 10억 스위스프랑 — 약 1조 5,000억 원 — 을 투자한다. 그 대가로 16만 개의 일자리와 수십억 프랑의 경제적 파급효과를 얻는다.
금융, 외교, 그리고 산업. 스위스의 제약 산업은 수출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노바티스와 로슈는 세계 제약 시장을 이끄는 거대 기업이다. 시계 산업은 1970~80년대 일본의 쿼츠 공세로 시장 점유율이 85퍼센트에서 15퍼센트로 추락했지만, 스위스는 시계를 시간 측정 도구에서 신분의 상징으로 재정의하며 되살렸다. 제네바에는 글렌코어, 비톨, 트라피구라 같은 세계 5대 에너지 거래 회사들도 모여 있다. 어느 진영에도 팔 수 있되 대체할 수 없는 것을 만든다 — 이것이 스위스 산업 전략의 일관된 원리다.
1장에서 우리는 한자동맹이 물류와 신용과 정보의 세 겹 독점으로 200개 도시의 네트워크를 구축한 것을 보았다. 스위스의 수익화 모델도 세 겹이다. 금융, 외교, 기술 특화 — 이 세 층위가 서로를 강화하며 "사이"를 수익으로 전환한다. 차이가 있다면, 한자동맹의 독점은 네덜란드 상인의 혁신에 의해 100년도 안 되어 붕괴했지만, 스위스의 세 겹 구조는 하나가 침식되어도 나머지가 버티는 포트폴리오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은행 비밀주의가 2010년대 이후 사실상 종식되었지만, 제약과 국제기구 허브는 건재하다.
그러나 이 수익화에는 도덕적 대가가 따랐다.
3. 나치 황금의 그림자
스위스 중립의 가장 어두운 장은 2차 세계대전 중에 쓰여졌다.
나치 독일은 유럽 각국 중앙은행과 유대인 희생자들로부터 대량의 금을 약탈했다. 강제수용소 희생자들의 금니에서 금을 추출하기까지 했다. 이 약탈 금의 상당량이 스위스 국립은행을 통해 세탁되었다. 1998년 스위스 정부가 설립한 베르지에 위원회(Bergier Commission)의 추산에 따르면, 스위스 국립은행은 4억 4,000만 달러(1940년대 기준)의 나치 황금을 수령했으며 그 절반 이상이 약탈 금이었다. 2024년 가치로 환산하면 약 85억 달러 — 약 11조 원이다. 약 91톤의 나치 황금이 스위스 은행들을 통해 세탁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 반환된 것은 3.6톤에 불과했다.
유대인 자산 문제는 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전쟁 전과 전쟁 중 유대인들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 스위스 은행에 예금을 맡겼다. 전후 유족들이 찾아왔을 때, 스위스 은행들은 사망자의 사망 증명서를 요구했다. 나치가 학살한 희생자들에게 사망 증명서를 발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 은행들은 계좌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 1990년대 이 문제가 폭발했고, 1998년 스위스 은행들은 12억 5,000만 달러 — 약 1조 6,000억 원 — 의 합의금 지급에 동의했다.
프롤로그에서 우리는 "사이"가 전략적 자산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스위스의 역사는 그 자산의 다른 면을 보여준다. 어느 편에도 서지 않으면서 두 편 모두와 거래하는 것 — 그 중립의 실체는 도덕적 회색지대였다. 중립은 무죄가 아니었다. 중립은 전략이었고, 전략에는 대가가 있었다.
미국의 아이젠스타트 보고서는 더 날카로운 주장을 담았다. "스위스가 중립국으로서 필요한 수준을 넘어 나치를 지원함으로써 전쟁을 연장했다." 이것이 수익화형 중립의 본질적 딜레마다. 양쪽 모두와 거래하며 번영하되, 그 거래의 도덕적 결과에 대한 책임을 어디까지 지느냐는 문제.
4. 전략적 인내 — 핀란드의 길
스위스가 중립의 수익화를 보여준다면, 핀란드는 중립의 인내를 보여준다.
1939년 11월,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했다. 인구 370만의 소국이 1억 7,000만의 대국에 맞서 105일간 저항했다. 대가는 혹독했다. 약 25,000명이 사망했고, 영토의 9퍼센트를 소련에 할양했다. 42만 명 이상의 난민이 열흘 안에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을 떠나야 했다. 1941년에는 독일 편에 서서 소련에 재도전했지만 — 계속전쟁 — 다시 패배하며 더 많은 영토를 잃었다.
두 전쟁이 남긴 교훈은 잔혹할 만큼 명료했다. 소련과 직접 충돌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나 완전한 굴복도 선택지가 아니다. 이 두 사실의 긴장 속에서 핀란드의 제3의 길이 탄생했다.
1948년 핀란드는 소련과 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YYA)을 체결했다. 소련의 안보 요구를 수용하되, 내부적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유지하는 이중 전략이었다. 서방 세계는 이것을 "핀란드화(Finlandization)"라고 불렀다 — 굴욕의 이름이었다. 강대국에 고개를 숙이고 자율성을 포기한 약소국의 비참한 처신이라는 낙인.
그러나 핀란드 안에서 이것은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전략적 인내.
우르호 케코넨 대통령은 26년간(1956~1982) 이 전략을 실행했다. 소련 지도자들과 30회 이상 정상회담을 가졌다.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대한 공개적 비판을 자제했다. 1958년 "야간 서리 위기" 때 소련이 주핀란드 대사를 소환하고 무역 협상을 중단하자 — 사실상의 내정 간섭 — 케코넨은 내각을 교체하며 위기를 넘겼다. 굴욕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 굴욕의 표면 아래에서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핀란드와 소련의 무역은 5년 단위 쌍무무역협정으로 운영됐다. 사실상 물물교환이었다. 핀란드는 목재와 기계류를 수출하고 소련 원유를 수입했다. 1980년대 초 소련 무역 비중은 핀란드 전체 수출의 25퍼센트 이상에 달했다. 이 안정적 시장 위에서 핀란드 기업들은 서방 시장을 겨냥한 경쟁력을 키웠다.
가장 극적인 사례가 노키아다. 1865년 목재 펄프 공장으로 출발한 이 회사는 소련 시장에 자동전화교환기와 통신장비를 공급하며 수익 기반을 쌓았다. 소련 무역은 노키아에 두 가지를 동시에 제공했다. 안정적 수익과 기술 개발의 자원. 소련 붕괴(1991) 이후 주요 시장을 잃은 노키아는 사업 구조를 전면 재편했고, 1990년대 후반 세계 최대 휴대전화 제조사로 부상했다. 소련 무역은 족쇄가 아니라 도약대였다.
핀란드화가 핀란드에 준 것은 패배가 아니라 시간이었다. 소련이 살아있는 동안 생존하고, 소련이 사라지자 즉시 서방으로 전환할 수 있는 실력과 역량을 갖추는 시간.
5. 인내의 완성 — 188 대 8
소련이 붕괴하자 핀란드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1991년 소련 해체와 함께 YYA 조약이 종료됐다. 1995년 EU에 가입했다. 이 시점에서 핀란드는 공식적으로 "중립"이라는 단어를 버리고 "군사적 비동맹"으로 개념을 재정의했다. 그러나 비동맹도 영원하지 않았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핀란드 여론이 180도 전환했다. NATO 지지율이 약 25퍼센트에서 80퍼센트 이상으로 폭등했다. 여론의 전환은 극적이었지만, 그 이면의 의사결정은 80년간 축적된 합의 문화의 산물이었다. 핀란드 의회는 2023년 3월 1일 NATO 가입안을 표결에 부쳤다. 결과는 188 대 8. 전체 의석 200석 중 188석이 찬성했다.
이 숫자가 말해주는 것이 있다. 초당적 합의. 핀란드의 NATO 가입은 한 정당이나 한 대통령의 결정이 아니었다. 좌파부터 우파까지, 여당부터 야당까지 거의 만장일치로 결의한 것이다. 26년간 케코넨이 쌓아올린 전략적 인내가, 80년간의 위험 관리가, 단 하루의 표결로 완결됐다.
4권에서 우리는 제도의 속도가 국가의 운명을 가른다고 보았다. 핀란드의 188 대 8은 제도의 속도란 단순히 빠른 것이 아니라, 결정적 순간에 모든 역량을 하나로 모으는 능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의 5년 단임 대통령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외교 노선이 진동한다. 한 정부의 "균형외교"가 다음 정부의 "동맹 강화"로, 다시 그다음 정부의 "전략적 모호성"으로 뒤집히는 구조. 핀란드가 80년의 인내를 하루의 결단으로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 그 인내가 개인이 아니라 제도에 의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6. 냉전의 다른 실험자들
핀란드만이 아니었다. 냉전은 "사이"의 다양한 실험을 낳았다.
오스트리아는 1955년 국가조약으로 영구중립을 선언했다. 소련군 철수의 대가였다. 표면적으로는 강요된 선택이었지만, 오스트리아 정치 엘리트들은 이를 전략적 기회로 전환했다. 빈에 IAEA(1957)와 OPEC(1965)을 유치하고, 1979년에는 유엔 빈 사무소를 개설했다. 1961년 케네디와 흐루쇼프가 빈에서 만난 것처럼, 오스트리아는 동서 양측이 모두 접근할 수 있는 외교적 통로가 됐다. 중립 자체는 가치가 아니다. 중립이 만드는 공간을 무엇으로 채우느냐가 관건이었고, 오스트리아는 국제기구라는 구체적 자산으로 채웠다.
유고슬라비아의 티토는 더 급진적 실험을 시도했다. 1948년 소련과 결별한 뒤, 미국도 소련도 아닌 제3의 길 — 비동맹운동을 주도했다. 1961년 베오그라드에서 25개국이 참가한 제1차 비동맹 정상회의를 개최했고, 미소 양측으로부터 경제 원조를 받으며 양다리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나 티토가 1980년 사망하자 구심력이 사라졌다. 민족 갈등이 분출했고, 1991년부터 2001년까지 유고슬라비아는 해체 전쟁의 참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개인에 의존한 불가결성은 그 개인의 수명과 함께 끝난다. 스위스의 중립이 5세기를 버틴 것은 그것이 한 명의 지도자가 아니라 헌법과 국민투표로 제도화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이들과 달랐다. 냉전기 한국은 "사이 전략"의 사례가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선택을 고착시켰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미국의 안보 우산을 공식화했다. 핀란드나 오스트리아가 강대국 사이의 경계에서 중립을 택했다면, 한국은 분단선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경계선이었다. 중간에 설 공간이 구조적으로 없었다.
그러나 한국도 "사이"를 모색한 적이 있다. 1988년 노태우의 북방정책은 동맹 기반 위에서 전략 공간을 넓히려는 시도였다. 소련(1990), 중국(1992)과 차례로 국교를 정상화했다. 성과는 인상적이었지만, 이것은 진정한 중립이 아니라 "동맹 기반 위의 관계 확장"이었다. 소련 붕괴로 전략 환경 자체가 변했고, 북방정책은 완성되기 전에 시대와 함께 끝났다.
7. "사이의 전략" — 세 가지 유형
역사가 보여주는 "사이의 전략"은 세 가지 유형으로 정리된다.
수익화형. 스위스가 그 원형이다. 어느 편에도 서지 않되, 양쪽 모두와 거래한다. 금융, 외교, 기술 특화라는 세 겹의 독점으로 "사이"를 수익으로 전환한다. 이 유형의 전제 조건은 두 가지다. 복제 불가능한 지리적 이점 — 알프스라는 천연 요새 — 과 수백 년에 걸쳐 축적된 신뢰 자본. 한국이 이 모델을 직접 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반도에는 알프스가 없고, 북한이라는 실존적 위협이 있는 한 군사 동맹 없는 중립은 현실적이지 않다.
인내형. 핀란드가 그 원형이다. 강대국의 압력을 수용하되, 그 제약 안에서 장기적 자율성의 기반을 꾸준히 축적한다. 25,000명의 전사자라는 대가를 치르고, 26년간의 케코넨 외교를 견디고, 소련 붕괴를 기다렸다가 하루 만에 188 대 8로 방향을 전환한다. 이 유형의 핵심은 시간이다. 단기적 굴복을 장기적 독립의 조건으로 삼는 인내. 그리고 그 인내를 가능하게 하는 초당적 합의와 제도적 연속성.
편승형. 냉전기 한국이 그 원형이다. 한쪽 편에 명확히 서되, 그 동맹 관계 안에서 최대한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한다. 박정희의 한일 국교정상화(1965)는 역사적 적대감과 경제적 필요 사이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일본으로부터 무상 3억 달러와 차관 2억 달러를 받아 포항제철 건설에 투입했다. 안보는 미국에, 기술과 자본은 일본에, 노동력은 자국이 — 이 삼각 구도 위에서 한국은 수출 주도 산업화를 이뤄냈다.
세 유형 모두에 공통되는 것이 하나 있다. 중립이든 인내든 편승이든, 그것은 공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스위스는 나치 황금 세탁이라는 도덕적 대가를 치렀다. 핀란드는 25,000명의 목숨과 영토의 9퍼센트를 치렀다. 한국은 식민 지배국과의 정상화라는 역사적 감정의 대가를 치렀다. "사이에 서기"의 비용을 지불할 의지가 없으면, 불가결성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1권의 핵심 공식을 적용하면 구조가 선명해진다. 기술 혁신이 자본을 집중시키고, 집중된 자본이 사회 불안을 만들고, 사회 불안이 제도 재설계를 요구한다. 스위스에서 이 공식은 역방향으로 작동했다. 금융이라는 자본 집중이 나치 황금이라는 사회적 불안(도덕적 위기)을 만들었고, 1990년대 베르지에 위원회와 12억 5,000만 달러 합의금이라는 제도 재설계로 귀결됐다. 핀란드에서는 소련이라는 외부 압력이 기술 축적(노키아)을 촉발했고, 기술 자율성이 마침내 정치적 자율성 — NATO 가입 — 으로 전환됐다. 기술 역량이 외교적 독립의 물질적 기반이라는 것을, 핀란드는 80년에 걸쳐 증명했다.
한국은 지금 어떤 유형에 있는가. 냉전기의 편승형에서 벗어나, 기술적 불가결성 — HBM, 메모리 반도체, 배터리 — 이라는 새로운 레버리지를 쥐고 있다. 스위스처럼 중립을 선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느 편이지만 대체 불가능하다"는 포지션은 가능하다. 스위스가 알프스를 요새로 삼았다면, 한국은 팹을 요새로 삼을 수 있다. 전략의 형태는 다르지만 논리는 같다. "나 없이는 안 된다"는 불가결성.
문제는 그 불가결성을 유지할 제도적 기반이다. 핀란드의 188 대 8이 보여주듯, 결정적 순간의 합의 능력은 수십 년의 제도적 축적에서 나온다. 한국의 5년 단임제가 만드는 외교 노선의 진동 — 이것이 한국판 "사이 전략"의 가장 근본적 취약점이다.
스위스는 210년간 불가결성을 유지한 유일한 사례다. 그 비결은 시계도 금융도 제약도 아니었다. 시대마다 불가결성의 내용물을 재정의하는 적응 능력이었다. 한국의 질문도 같다. HBM이 끝날 때, 다음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다음"을 준비할 의지와 제도가 있는가.
다음 장에서 우리는 그 질문에 가장 극적으로 답한 인물을 만난다. 말레이시아에서 쫓겨난 섬을 1인당 GDP 91,000달러의 허브로 만든 남자 — 리콴유와 싱가포르의 설계된 불가결성이다.
2장 끝 — 리서치 소스: R-03, R-05, C-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