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점심시간의 해고 문자
2023년 11월 30일, 목요일. 점심시간 직전이었다.
KB국민은행 콜센터 업무를 수행하던 도급사 소속 상담사 약 240명의 스마트폰에 해고 예고 통지서가 동시에 도착했다. 계약 종료 통보였다[주1]. 김현주(가명)는 도시락 뚜껑을 열다 말았다. "점심시간 전에 받았으니 밥을 먹을 수가 없잖아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 모르는 거잖아요."
사전 고지는 없었다. AI 상담 시스템이 도입된 사실조차 정식으로 통보받지 못했다. 상담사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고객들의 항의 전화를 통해서였다. "AI 상담사가 뭐야?" 화를 내는 고객에게 답을 할 수 없어서, 상담사들이 직접 전화를 걸어보며 인지하기 시작했다.
현진아(가명)는 해고 후 이렇게 말했다. "결국 우리가 그 AI를 학습시킨 당사자 아닙니까? 오류를 잡기 위해 수많은 직원들이 동원되었고, 우리가 텍스트를 수정했고, 그 데이터가 활용될 것입니다."
자기 파괴적 노동의 구조였다. 상담사들은 AI가 틀린 답변을 할 때마다 오류를 수정했다. 수정된 데이터는 AI의 학습 자료가 되었다. AI가 더 정확해질수록, 상담사의 자리는 좁아졌다. 그들은 자신을 대체할 기계의 교사였고, 수업이 끝나자 교실에서 쫓겨났다.
김현주는 20년을 일했다. "제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전문성이 '효율성'이라는 단어 하나에 하룻밤 사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그런데 해고를 통보한 것은 KB국민은행이 아니었다. 상담사들은 KB 소속이 아니었다. 도급사 — 하청업체 — 소속이었다. KB는 AI를 도입했고, 도급사는 인력을 줄였다. 원청은 책임의 바깥에 있었다. 간접고용이라는 구조가 해고의 책임마저 외주화한 것이다.
3장에서 우리는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피해자들을 보았다. 은행이 설계한 금융 상품이 집을 앗아갔다. 피해자들은 그 상품의 구조를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할 필요도 없다고 들었다. "안전합니다"라는 말을 믿었다. 9장의 콜센터 상담사들도 같은 구조 안에 있다. 그들이 매일 수정한 데이터는 AI의 성능을 높였고, AI의 성능이 높아진 날 그들은 문자 한 통으로 사라졌다. 효율성이라는 이름 아래, 이전에는 금융 혁신이 집을 빼앗았고 지금은 AI 혁신이 직업을 빼앗는다.
한 상담사는 이렇게 증언했다. "아이 둘을 혼자 키우는 솔로 맘이 있었어요... 이것은 단순히 누군가의 일자리를 잃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몰아넣는 상황입니다."
2. 세 계층의 전환
콜센터 상담사만이 아니다. AI가 밀어내는 사람들은 세 겹으로 쌓여 있다.
블루칼라 — 알고리즘의 부하
7장의 이 기사가 돌아온다. 그의 이야기는 더 어두워진다.
새벽 2시. 수원 원룸의 어둠 속에서 이 기사의 스마트폰 화면이 켜졌다. 알림 하나. "귀하의 계정이 일시적으로 제한되었습니다." 배달복을 벗다 말고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이유는 없었다. 앱 고객센터를 눌렀다. 챗봇이 떴다. "기준 위반으로 인한 제한." 어떤 기준인가요? 같은 답. 다시 물었다. 같은 답. 타이핑 애니메이션만 반복되었다 — 마치 생각하는 척하는 기계처럼. 전화 상담을 시도했다. 대기 음악만 흘렀다. 40분을 기다리다 끊었다. 다시 걸었다. 같은 음악.
보이지 않는 상사에게 해고당한다는 것은, 항의할 창구도 없다는 뜻이었다. 계정 비활성화 — 플랫폼의 해고 통보. 근로계약서는 없다. 고용주도 없다. 실업급여를 신청하려 해도 접수가 되지 않는다. "비자발적 실직"을 증명해야 하는데, 알고리즘의 계정 정지가 해고인지 계약 만료인지 법적으로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7장의 비 오는 날이 보여주듯, 안전과 생계 사이에서 매번 생계를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 알고리즘의 설계였다.
학술 연구에 참여한 한 배달 라이더는 이렇게 증언했다. "AI가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물량을, 어떤 경로로 배분할지를 정한다[주2]." 5장에서 본 청두의 하루 평균 1명의 사상자가 보여주듯, 알고리즘이 설계한 속도는 사람의 한계를 넘는다[주3]. 한국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2024년 7월, 하루 15~17시간 배달을 유튜브에 기록하던 한 인기 라이더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라이더유니온이 산재 증언 집회를 열었고, 서울시는 플랫폼 노동자 노조 최초의 공식 법적 지위를 부여했다[주4].
배달의민족의 시장점유율은 2023~2024년 기준 약 60%에 달했다. 그 시장을 움직이는 라이더들의 실업급여 수급률은 0.68%에 불과했다[주5]. 이 기사의 월수입은 280만 원이었다 — 하루 10~12시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달린 대가였다. 플랫폼 종사자 전체 월평균은 145만 원에 불과했다[주6]. 산재보험은 특수고용직에 의무 적용이지만 opt-out(적용 제외 신청)이 허용되어 실효성이 떨어졌고, 고용보험은 가입 자체는 가능했지만 플랫폼 기업이 '사용자'로 인정받기를 거부하면서 실제 가입률은 처참했다.
화이트칼라 — 합격증의 배신
"태어날 시기를 잘못 잡은 건가요? 죽도록 공부했는데 일자리가 초토화됐습니다."
한 청년 구직자의 말이다. CPA — 공인회계사 시험. 합격률 한 자릿수의 관문을 통과한 사람들이 취업하지 못하고 있었다. 2025년 코호트 기준, 합격자 약 1,200명 중 10월까지 수습 자리를 확보한 인원은 338명에 불과했다 — 약 72%가 미취업 상태였다[주7].
박현진(가명)은 5년을 준비했다. 대학 졸업 후 학원과 고시원을 오가며 세 번 떨어진 끝에 합격증을 받았다. 합격 통보 문자를 받은 날 밤, 그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는 울었다. 그는 이제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6개월 만에 무너졌다. 대형 회계법인의 서류 전형에서 연속으로 떨어졌다. 중견 회계법인도, 소규모 세무법인도 마찬가지였다. "면접까지 간 곳이 두 군데였어요. 둘 다 AI 도입 이후 주니어를 많이 줄이고 있다고 했습니다." 같은 해 합격한 동기 중 절반 이상이 비슷한 상황이었다. 합격자 모임 단체 채팅방에는 취업 성공 소식보다 불합격 공유가 더 많았다.
"1년 차 수습 회계사를 가르치는 것보다 AI를 사용하는 것이 시간과 비용 측면에서 절약된다고 선배들이 이야기하더라고요." 15년 차 시니어 회계사 황병찬은 더 단호했다. "예전처럼 많은 주니어 회계사를 뽑는 것은 현재 시대 흐름과 맞지 않습니다."
IT 헤드헌터 노상범은 구조를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기업 입장에서는 연봉 5천만 원 이상을 주고 주니어 개발자를 뽑는 것보다 월 30만 원짜리 AI를 1년 쓰는 것이 훨씬 가성비가 높으니까요."
연봉 5천만 원 대 월 30만 원. 167배의 가격 차이. 국제 비교 데이터에서 이미 임금 역전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OECD 직종별 임금 분석에 따르면 AI 대체 노출도가 높은 사무·행정직과 대체 노출도가 낮은 기능직 사이의 임금 프리미엄이 수렴하는 경향이 관측된다 — 손으로 하는 일이 머리로 하는 일보다 비싸지는 세계의 전조다. Goldman Sachs(2023)는 회계·데이터 처리 업무의 40~60%가 자동화 가능하다고 추산했다. 박현진의 합격증이 닿은 시장이 그곳이었다.
박현진은 지금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5년을 준비한 자격증은 지갑 속에 있다. "다음 시험을 준비하는 후배들한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글로벌 — 같은 파도, 다른 높이
아마존은 2033년까지 60만 명 규모의 신규 채용을 로봇으로 대신할 수 있다고 내부 추산했다[주8]. 미국 기술 업계에서는 2024~2025년에 걸쳐 대규모 감원이 이어졌다[주9][주10]. 같은 소매업에서 월마트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 210만 직원의 대규모 재교육에 투자하며 해고가 아니라 업스킬링을 선언했다[주11]. 안전망은 기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다.
그 사이, 한 텔레비전 스튜디오에서는 패널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기업들에 들었는데 AI가 가장 활용하고 싶은 곳이 뭐냐 했더니 콜센터라고 해요. 민원 업무 받는 게 감정도 심하다 보니까 AI가 대신 받아주면... 받는 사람 쪽에서는 스트레스 받거나 이런 일이 없어져서 많이 좋은데."
스튜디오의 조명 아래에서 "상담사 스트레스 해방"을 축하하는 순간, 현실에서는 240명의 상담사가 점심시간에 해고 통지를 받고 밥을 먹지 못하고 있었다. 두 세계 사이의 거리는 카메라 한 대 너비였고, 인식의 간극은 수십 년이었다.
고려대학교 구교준 교수는 이 간극을 정확히 짚었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지 않겠냐고 묻습니다. 생길 가능성은 높습니다. 하지만 그 시점은 적어도 20~30년 후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큰 문제는 기술이 도입되는 향후 10~20년 동안 당장 일자리를 잃게 될 청년들입니다."
10년에서 20년. 이것이 안전망의 공백기다.
그러나 이 서사에는 반대쪽 렌즈도 있다. AI가 일자리를 "대체"만 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기술이 직업을 파괴하는 동시에 변형하고 창출한다는 사실이다. 산업혁명 초기 러다이트 운동이 직조기를 부쉈을 때, 영국 섬유 산업의 고용은 오히려 급증했다 — 기계가 생산 비용을 낮추자 수요가 폭발했고, 기계를 다루고 유지하는 새로운 직종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ATM이 은행 창구 직원을 대체할 것이라는 1990년대의 공포는 빗나갔다. ATM이 지점 운영 비용을 낮추자 은행은 더 많은 지점을 열었고, 미국 은행 직원 수는 2000년대까지 오히려 증가했다. AI 분야에서도 이미 "프롬프트 엔지니어", "AI 트레이너", "AI 윤리 컨설턴트" 같은 5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직종이 등장하고 있다. WEF의 2025년 보고서가 전망한 순증가 7,800만 개라는 수치는 이 창출 효과를 반영한다[주12].
문제는 총합이 아니다. 문제는 시차다. 사라지는 일자리의 속도와 생겨나는 일자리의 속도가 다르다. 산업혁명 후에도 장기적으로 고용은 증가했지만, 그 "장기"는 한 세대 이상이었다. 그 세대가 겪은 고통은 통계의 총합에 잡히지 않는다. 구교준 교수의 말처럼, 20~30년 뒤의 새 일자리는 지금 해고된 사람에게 위안이 되지 않는다. AI가 일자리를 만들 것이라는 낙관과, 그 사이의 공백에서 사람들이 물에 잠긴다는 현실은 모순이 아니라 동시에 참이다.
3. 0.68%의 안전망
숫자 하나가 이 장의 무게를 담고 있다.
0.68%.
플랫폼·프리랜서 고용보험 가입자의 실업급여 수급률(benefit receipt rate)이다. 가입률이 아니다. 가입률 자체는 약 46.4%(2022년 기준)로, 가입은 되어 있다. 그러나 실업급여를 실제로 받는 비율은 0.68%에 불과하다. 일반 임금근로자의 수급률 6.24%와 비교하면 약 9분의 1 수준이다. 출처는 일하는시민연구소·유니온센터의 2024년 10월 보고서 '제도 밖 불안정노동자의 사회안전망 사각지대 개선'이다.
왜 가입은 되어 있는데 수급을 못하는가. 네 가지 벽이 있다. 첫째, 플랫폼 노동의 특성상 소득이 불규칙하여 월 80만 원 소득 기준 충족이 어렵다. 둘째, "비자발적 실직"의 증명이 난관이다 — 알고리즘이 계정을 비활성화하면 그것이 해고인지 계약 만료인지 법적으로 불분명하다. 셋째, 플랫폼 기업이 "플랫폼의 귀책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확인서 발급을 거부한다. 넷째, 행정 절차의 복잡성 앞에서 결국 신청을 포기한다.
2025년 휴먼 라이츠 워치(HRW)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주요 7개 긱 플랫폼 중 6개가 불투명한 임금 산정 알고리즘을 사용하고 있었다[주13]. 노동자는 업무를 완료한 뒤에야 보수를 알 수 있었다. 기그 노동자의 3분의 1 이상이 계정 비활성화를 경험했고, 그 중 절반 가까이는 이후 "오류"로 확인되었다. 알고리즘의 실수로 해고당할 확률이 거의 절반이라는 뜻이다. 한국이라고 다를 이유는 없다.
한국의 플랫폼 노동자 규모를 보자. 수치가 두 가지 존재하는 이유부터 짚어야 한다. 2021년 고용노동부·한국고용정보원의 '플랫폼 종사자 규모와 근무실태' 조사는 두 가지 정의를 사용한다. 광의 — 플랫폼을 통해 일감을 얻는 모든 사람(부업·간헐적 참여 포함)은 약 220만 명(15~69세 취업자의 8.5%)이다. 협의 — 알고리즘이 직접 업무를 배정하고, 이를 주된 소득원으로 삼는 전업 종사자는 같은 해 약 66만 명(2.6%)에 불과하다[주14]. 2023년 기준으로는 협의 정의 기준 88만 3,000명으로, 전년 79만 5,000명 대비 11.1% 증가했다[주15]. 비임금 노동자 전체 — 배달 라이더, 특수고용직, 프리랜서를 모두 포함하면 — 862만 명을 넘는다.
이 862만 명 위에 놓인 안전망은 종이보다 얇다.
현행 근로기준법 제24조는 경영상 해고 요건을 명시한다.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성, 해고 회피 노력, 합리적 기준의 대상자 선정, 50일 전 통보 및 협의. 그러나 이 요건은 "근로자"에게 적용된다. 플랫폼 노동자는 법적으로 "개인사업자"다. 근로기준법 바깥에 있다. 부당해고 구제도, 산재보험 자동 적용도, 퇴직금도 없다.
2024년 7월 25일, 대법원이 움직였다. TADA 앱 기반 운전기사를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한 것이다[주16]. 형식이 아니라 실질을 보겠다는 최초의 대법원 판결이었다. 같은 해 EU는 플랫폼 노동 지침을 통과시켜 플랫폼 노동자를 근로자로 추정하고, 입증 책임을 기업에 전환했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반대다 — 노동자가 스스로 근로자임을 증명해야 한다. 2025년에는 대법원이 노동자 지위 판단 기준을 더 완화하는 추가 판결을 내렸고, 같은 해 3월부터 프리랜서·비정규직·플랫폼 노동자 대상 법률·교육 지원이 확대되었다. 중요한 진전이었다. 그러나 배달 라이더, 콜센터 상담사, 프리랜서 번역가 — 개별 소송, 개별 판결이 필요하다. 한 건 한 건, 한 사람 한 사람.
2025년, 정부는 「일하는 사람의 권리에 관한 기본법」을 1호 노동 법안으로 추진했다.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안전, 공정 계약, 적정 보수, 사회보장 접근 등 8가지 권리를 부여한다는 내용이었다. 노동계의 반응은 차가웠다. "법 조항 대부분이 '노력해야 한다', '권장할 수 있다'는 선언적 문구에 그쳐 사용자에게 실질적 의무를 부과하지 못한다[주17]."
권리는 선언했지만, 보호는 없었다.
4. 역사의 선례 — 안전망은 항상 피 흘린 뒤에 왔다
이 책은 처음부터 하나의 패턴을 추적해왔다. 제도는 위기보다 느리다는 것.
2장에서 우리는 영국 공장법(1833)을 보았다. 아크라이트가 방적기 특허를 획득한 1769년부터 64년이 걸렸다. 그 64년 동안 수만 명의 아이들이 하루 16시간을 일했다. 3장에서 우리는 미국 금융 규제를 보았다. 대공황이 터진 1929년부터 사회보장법(1935)까지 6년,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를 막지 못한 규제 공백은 다시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되었다.
1장의 로마로 돌아가면 간극은 더 길어진다. 라티푼디움이 소농을 밀어내기 시작한 기원전 264년부터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개혁 시도(기원전 133년)까지 130년. 가이우스의 곡물법까지 합치면 140년.
안전망은 항상 피를 본 뒤에 왔다. 표로 정리하면 이렇다.
로마 공화정: 라티푼디움과 소농 몰락 → 가이우스의 곡물법(기원전 123년) → 100년 이상의 지연. 영국 산업혁명: 아동 노동 → 공장법(1833) → 64년. 미국 대공황: 대량 실업 → 사회보장법(1935) → 6년. AI 전환: 구조적 고용 대체 → ? → 진행 중.
시간이 짧아지고 있다는 것이 희망일 수 있다. 그러나 짧아지는 이유가 위기의 속도가 빨라졌기 때문이라면, 안전망의 속도도 그에 맞춰 빨라져야 한다.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이 패턴에는 1장에서 분석한 5가지 구조 중 두 가지가 특히 강하게 작동한다.
첫째, 위기의 점진성이다. AI 대체 실업은 서서히 진행된다. 번역가가 줄고, 상담원이 줄고, 데이터 입력 직원이 줄지만, 각각은 극적인 사건이 아니다. 240명의 콜센터 해고는 뉴스에 나왔지만, 수습 자리를 구하지 못한 CPA 합격자 개개인의 좌절은 뉴스가 되지 않는다. 소농이 한 세대에 걸쳐 밀려났듯, AI 대체는 한 직종씩, 한 사무실씩 진행된다. 거시 고용 지표에 아직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WEF는 2030년까지 9,200만 개의 일자리가 대체되고 1억 7,000만 개가 새로 생긴다고 전망한다 — 순증가 7,800만 개. 이 낙관적 총합 뒤에 전환기의 혼란이 숨어 있다. 누적 파국이 각 시점의 감지 임계를 넘지 못하는 현상 — 로마에서도, 맨체스터에서도, 월스트리트에서도 반복된 구조다.
둘째, 합의 비용이다. 한국의 전국민 고용보험은 2020년에 선언되었다. 2021년 특수고용직 12개 직종에 적용이 시작되었고, 2022년 플랫폼 종사자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실제 가입률과 수급률은 처참하다. 적용 대상을 늘리는 것과 실질적 보호를 제공하는 것 사이에는 합의 비용이라는 거대한 간극이 있다. 플랫폼 기업은 "사용자"로 인정받기를 거부한다. 보험료 분담을 둘러싼 협상은 지지부진하다. 호민관 한 사람의 거부권이 개혁을 막았듯, 이해관계자 한 집단의 저항이 전체 안전망의 실효성을 무력화한다.
"우리는 지금 다시 '피 흘리기 전' 단계에 있는가?"
구교준 교수의 말을 다시 떠올린다.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는 데 20~30년, 기존 일자리가 사라지는 데 10~20년. 그 사이의 10년이 안전망의 공백이다. 역사가 말해주는 것은, 그 공백이 메워지는 시점은 항상 누군가 충분히 피를 흘린 뒤라는 사실이다.
5. 다른 나라들의 실험
피를 흘리기 전에 안전망을 짤 수 있는가. 몇 가지 실험이 진행 중이다.
핀란드 — 기본소득의 질문
2017년, 핀란드는 장기 실업자 2,000명에게 취업 여부와 관계없이 매달 560유로를 2년간 지급하는 세계 최초의 국가 단위 기본소득 실험을 시작했다. 결과는 통념을 뒤집었다. 취업일수는 대조군보다 연간 6일 더 많았고, 정신 건강이 유의미하게 개선되었다[주18]. "돈을 받으면 일을 안 한다"는 전제가 틀렸다. 정부는 실험을 연장하지 않았지만 — 정치적 비용이 컸다 — "노동 의지 상실"이라는 반론은 이 데이터 앞에서 힘을 잃었다.
덴마크 — 해고가 쉬운 나라의 역설
덴마크의 '황금 삼각형(flexicurity)': 해고가 쉽고(유연성), 실업자는 기존 임금의 최대 90%를 최장 2년간 받으며(소득 보장), 정부가 재훈련과 취업 알선을 의무 제공한다(능동적 노동시장 정책 지출 GDP 대비 약 2%, OECD 최고)[주19][주20]. 셋이 동시에 맞물릴 때, 해고는 파국이 아니라 전환이 된다. 2009년 오덴세 린되(Lindø) 조선소가 폐쇄되며 약 2,600명이 일자리를 잃었을 때, EU 세계화조정기금과 덴마크 직업훈련 시스템이 에너지 기술·로봇공학 분야로의 전환을 지원했다. 조선소 부지에는 지금 로봇 클러스터가 들어서 있다.
그러나 AI 전환에도 유효할 것인가? AI가 대체하는 지식 노동은 AI가 이미 더 잘하고, 재훈련의 목적지인 "AI가 아직 못하는 곳"의 경계는 매달 이동한다. 또한 덴마크의 노조 조직률(약 70%)과 한국(약 13%)의 차이는, 같은 설계도로 짠 그물이 다른 무게를 버티는 문제다.
6. 거울 — 두 번째 물
3장에서 우리는 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라는 첫 번째 물이 밀려왔을 때, 둑은 없었다. 수백만 가구가 집을 잃었다. 미국에서만 600만 건 이상의 주택 압류가 이어졌다.
두 사건의 구조는 놀랍도록 닮아 있다. 3장의 상품 설계자들은 MBS(모기지 담보 증권)가 수십만 건의 개별 대출을 묶어 위험을 분산한다고 말했다. 9장의 플랫폼 기업들은 AI가 수백만 건의 개별 상담을 처리해 효율을 높인다고 말한다. 두 경우 모두, 시스템의 수혜자와 비용 부담자는 달랐다. 금융 혁신의 수익은 월스트리트에 집중되었고 손실은 모기지 대출자에게 분산되었다. AI 혁신의 생산성은 플랫폼 기업에 집중되고 전환 비용은 해고된 노동자에게 분산된다.
브룩슬리 본이 10년 전에 경고했지만 그린스펀과 루빈과 서머스가 막았고, 경고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을 때는 이미 600만 가구가 물에 잠긴 뒤였다. 뒤늦게 도드-프랭크법이라는 둑을 쌓았지만, 이미 물에 잠긴 사람들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그린스펀은 의회 증언석에서 말했다. "네, 저는 결함을 발견했습니다." 인정은 사후에 왔다.
9장의 패턴은 같다. 간접고용 구조가 책임을 외주화했고, AI 도입이 인력 감축의 유인이 되었고, 해고 통지는 점심시간에 도착했다. 언젠가 어떤 기업의 대표가 "AI 전환 과정에서 부족한 점이 있었다"고 인정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인정이 올 때, 김현주의 그날 점심은 돌아오지 않는다. 박현진의 5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이 기사가 새벽 2시에 받은 계정 제한 알림은 그의 수입을 이미 줄였다.
3장과 9장의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피해자들이 그 구조를 만드는 데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서브프라임 대출자들은 매달 이자를 납부하며 금융 시스템의 수익 기반을 만들었다. 콜센터 상담사들은 매일 오류를 수정하며 AI의 학습 데이터를 만들었다. 참여의 대가는 배제였다. 두 번째 물도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지금, 두 번째 물이 밀려오고 있다.
첫 번째 물은 금융 혁신이라는 이름이었다. 두 번째 물은 AI 혁신이라는 이름이다. 첫 번째 물은 집을 빼앗았다. 두 번째 물은 직업을 빼앗는다. 두 경우 모두 핵심 단어는 "효율성"이었다. 효율적인 금융 상품, 효율적인 자동화. 효율성의 과실은 소수에게 집중되고, 효율성의 비용은 다수에게 분산된다.
KBS 추적60분의 나레이션이 물었다. "AI의 등장은 과연 인간 노동의 해방일까요, 아니면 추방일까요?"
답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안전망이 없다면,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산업연구원(KIET)은 국내 AI 대체 위험 일자리를 327만 개로 추산했다[주21]. 스탠퍼드 디지털경제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에서 AI 고노출 직종의 22~25세 초기 경력 고용은 약 16% 상대적으로 감소했다[주22]. "AI 워싱(AI washing)" — 실제 AI 도입과 무관하게 비용 절감을 "AI 전환"으로 포장하는 현상 — 이 확산되고 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1,006명의 글로벌 경영진 대상 조사에서 AI 솔루션 배포 준비가 된 기업은 14%에 불과했고, 실제 운영 중인 곳은 11%였다[주23]. AI의 실제 영향이 과장될 수 있다. 그러나 과장 여부와 무관하게, 해고된 사람은 이미 해고되었다.
안전망이 없다면, 누가 그물을 짤 것인가.
대법원의 TADA 판결은 실 한 가닥이었다. 핀란드의 실험은 설계도의 일부였다. 덴마크의 유연안전성은 다른 기후에서 검증된 직물이었다. 월마트의 업스킬링은 민간이 자발적으로 짠 한 조각이었다. 그러나 아직 그물은 없다.
미약한 희망이 있다면 이것이다. 역사에서 안전망은 항상 뒤늦게 왔지만, 한 번도 오지 않은 적은 없었다. 로마에서도 가이우스의 곡물법은 결국 통과했다. 맨체스터에서도 공장법은 결국 시행되었다. 월스트리트에서도 도드-프랭크법은 결국 만들어졌다. 문제는 "올 것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전에 물에 잠길 것인가"다.
김현주는 아직 새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이 기사는 내일도 비가 오면 헬멧 위로 빗줄기를 맞으며 알고리즘이 배정한 경로를 달릴 것이다. 새벽 2시의 계정 제한 알림은 해제되었지만, 다음번에는 해제되지 않을 수도 있다. 박현진의 합격증은 서랍 속에 있다. 이들에게 20~30년 후의 새로운 일자리는 위안이 되지 않는다.
한편, 실리콘밸리에서 해고된 6자릿수 연봉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이 음식 배달 앱을 켜고 있다. 알고리즘이 그들에게 경로를 배정한다 — 바로 그들이 만드는 것을 도왔던 종류의 소프트웨어가. 구조적 아이러니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기술로 기술을 규제하려는 시도를 본다. 레그테크(RegTech) — 규제 기술. 느린 제도가 빠른 기술을 따라잡기 위해 기술 자체를 도구로 삼는 실험이다. 싱가포르의 AI 거버넌스 프레임워크부터 호주의 참담한 실패까지. 안전망을 짜는 것이 "무엇으로" 짜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면, 10장은 그 재료를 검토한다.
주
- 오마이뉴스 2023.12, 한국일보 2023.12.11, MBC 뉴스데스크 2023.12.16. 정확한 인원(234명이 고용 승계 대상)과 AI 도입의 직접적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보도마다 차이가 있으며, 원청(KB국민은행)의 AI 상담 시스템 도입이 도급사의 인력 감축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되나, KB 측은 "도급사의 경영 판단"이라는 입장이다. 이후 전원 고용 승계(234명, 신규 도급사 두 곳)로 귀결되었다.
- Frontiers in Public Health, "Life against algorithmic management: a study on burnout and its influencing factors among food delivery riders", 2025; Urban Geography, "Riders driving at the limit of AI", 2024. 원문: "Artificial intelligence calculates the quantity and route together. It means that the AI sets up for whom, how much volume, and which route to allocate."
- 《人物》 2020.9.8 원문 대조 확인
- Business & Human Rights Resource Centre; Korea Herald
- 일하는시민연구소·유니온센터, '제도 밖 불안정노동자의 사회안전망 사각지대 개선', 2024.10. 여기서 '수급률'이란 고용보험 가입자 중 실업급여를 실제로 수령한 비율을 의미한다.
- 경향신문 2025.3.6; 한국고용정보원 2024 플랫폼 종사자 실태조사
- 한국공인회계사회 2025년 합격자 취업 현황. 10월 기준 집계이며, 이후 일부 추가 취업이 예상되나 구조적 미스매치는 지속.
- New York Times 2025.10 아마존 내부문서 입수 보도. "대체"가 아니라 "신규 채용 대신(in lieu of new hires)"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아마존 공식 입장은 "로봇이 새로운 직무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 Challenger, Gray & Christmas 2025 연간 보고서, 1,206,374건. 이는 '감원 계획 발표(announced job cut plans)'이며, 실제 집행 수치가 아님. 최대 단일 요인은 DOGE 연방정부 감축 약 29만 건(전체의 24%). AI를 직접 사유로 명시한 감원은 54,836건(전체의 4.5%).
- layoffs.fyi 2024 연간 집계
- Walmart 2021.7 공식 발표 "nearly $1 billion by 2026"(약 1조 3~4천억 원) 투자. CEO 더그 맥밀런 공개 발언 및 ESG 보고서.
- World Economic Forum, Future of Jobs Report 2025
- Human Rights Watch, "The Gig Trap: Algorithmic, Wage and Labor Exploitation in Platform Work in the US", 2025.5
- 고용노동부·한국고용정보원, 2021
- 한국고용정보원, 2024 플랫폼 종사자 실태조사
- 대법원 2024.7.25 선고. Lexology 분석 참조.
- 플랫폼노동희망찾기, 경향신문 2025.12.25 인용
- Kela,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 최종 보고서, 2020
- 오덴세 린되(Lindø) 조선소, 2009년 폐쇄 결정(A.P. 묄러-머스크). 약 2,600명 해고. EU 유럽세계화조정기금(EGF/2010/025, EGF/2011/008) 지원. EC Just Transition 프로젝트 파일, 유럽의회 결정문.
- OECD Employment Outlook; AEA Journal of Economic Perspectives, 2022
- 산업연구원(KIET), 2024.3 발간 보고서. AI 노출지수(AI exposure index) 상위 25%에 해당하는 직종의 종사자 규모.
- Brynjolfsson, Chandar & Chen, "Canaries in the Coal Mine? Six Facts about the Recent Employment Effects of Artificial Intelligence," Stanford Digital Economy Lab, 2025. ADP 급여 데이터 기반 미국 분석.
- Deloitte,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