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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3 — 보이지 않는 손의 마지막 거래

12장: 600년의 환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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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1일, 대서양 상공 35,000피트.

에어프랑스 447편의 조종석은 어두웠다. 리우데자네이루를 떠나 파리로 향하는 야간 비행. 에어버스 A330-200의 계기판에서 수백 개의 표시등이 안정적으로 빛나고 있었고, 플라이 바이 와이어(fly-by-wire) 시스템이 35,000피트의 순항 고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좌석 228석이 만석이었다. 브라질에서 유럽으로 돌아가는 여행객들, 출장을 마친 사업가들, 파리 경유편을 타려는 승객들이 잠들어 있었다. 자정을 넘긴 시각, 대서양 위에는 별도 달도 없었다 — 기체를 둘러싼 것은 열대수렴대의 거대한 구름뿐이었다.

기장 마르크 뒤부아(Marc Dubois), 58세. 1988년 에어프랑스에 입사한 이래 비행시간 10,988시간을 기록한 베테랑이었다. 그 중 기장으로서의 비행이 6,258시간, A330 기종 경력이 1,700시간이었다. 남미 노선은 2007년 A330/A340 사업부에 배치된 이후 16차례 운항한 익숙한 구간이었다. 그러나 그 10,988시간 중 실제로 그가 조종간을 잡고 비행한 시간은 극히 일부였다. 직전 6개월간 비행시간은 346시간이었지만, 그중 그가 실제로 기체를 조종한 시간 — 이착륙에 국한된 — 은 약 4시간에 불과했다. 나머지 342시간 동안 그는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뒤부아는 예정된 교대 휴식에 들어갔다. UTC 기준 02시 01분 46초. 남은 두 부기장이 조종석을 맡았다.

오른쪽 좌석, 조종을 담당하는 PF(Pilot Flying) — 피에르세드릭 보냉(Pierre-Cédric Bonin), 32세. 2003년 에어프랑스에 입사했고, 총 비행시간 2,936시간, 그중 A330 경력은 807시간이었다. 남미 노선은 A330/A340 사업부에 2008년 배치된 이후 5차례 운항했다. 고고도에서의 수동 비행 경험은 제한적이었다.

왼쪽 좌석, 모니터링을 담당하는 PM(Pilot Monitoring) — 다비드 로베르(David Robert), 37세. 1998년 입사, 비행시간 6,547시간, A330 경력 4,479시간. 프랑스 국립민간항공학교(ENAC) 출신으로 남미 노선을 39차례 운항한 경험 많은 부기장이었다. 그러나 로베르는 조종에서 관리 직무로 이동한 시기가 있었고, 최근에는 항공사 운항센터의 관리 업무를 겸하고 있었다.

02시 06분, 보냉이 객실에 방송했다. "곧 난기류 구역에 진입합니다." 적도 부근의 열대수렴대. 거대한 적란운이 대서양 위에 탑처럼 솟아 있었다. 높이 15킬로미터 이상, 내부에는 과냉각 수증기와 얼음 결정, 강한 상승기류와 하강기류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레이더 화면에 찍힌 구름의 붉은 얼룩을 보고 로베르가 코스 변경을 논의했지만, 구름 사이의 빈 공간을 찾아 비행을 계속하기로 했다.

02시 10분 05초. 기체가 구름 속으로 진입한 직후, 피토관에 얼음 결정이 끼기 시작했다. 피토관(pitot tube)은 기체 외부에 돌출된 작은 금속 튜브로, 전방에서 밀려오는 공기의 압력을 측정하여 비행 속도를 계산하는 센서다. 원리는 단순하다 — 튜브 전면의 구멍으로 공기가 들어오면, 그 동적 압력과 정적 압력의 차이에서 속도를 역산한다. 18세기 프랑스 수학자 앙리 피토가 발명한 이래 항공학의 기본 도구가 된 장치. 금융에 비유하자면, 시장의 "속도"를 측정하는 호가창과 같다 — 그것이 막히면 시장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에어버스 A330에는 세 개의 피토관이 장착되어 있다 — 이중화 설계다. 그러나 적도 상공 35,000피트의 과냉각 수증기가 세 개의 센서를 거의 동시에 막았다. 어떤 계기는 과속을 표시했고, 다른 계기는 저속을 표시했다. 조종석의 양쪽에서 서로 다른 속도가 표시되는 상황. 신뢰할 수 있는 속도 데이터가 없으면 자동 비행은 불가능하다.

시스템은 설계된 대로 행동했다 — 오토파일럿을 해제한 것이다.

비행 컴퓨터의 제어 모드가 "정상 법칙(Normal Law)"에서 "대체 법칙(Alternate Law)"으로 전환되었다. 정상 법칙에서는 컴퓨터가 조종사의 입력을 해석하고 비행 한계를 자동으로 보호한다 — 실속에 가까운 조작을 하면 컴퓨터가 거부한다. 대체 법칙에서는 그 보호가 해제된다. 조종사가 하는 대로 비행기가 움직인다. 자유도가 높아진 것이지만, 보호막이 벗겨진 것이기도 했다.

갑자기, 두 부기장의 손에 비행기가 맡겨졌다.

02시 10분 06초. 보냉이 말했다. "내가 조종합니다(J'ai les commandes)." 로베르가 답했다. "알겠습니다(D'accord)." 그리고 보냉은 사이드스틱을 뒤로 당겼다. 기수가 올라갔다.

이것이 결정적 실수였다. 그러나 실수라고 부르기에는 더 깊은 맥락이 있다. 에어버스의 사이드스틱은 보잉의 조종간과 달리, 왼쪽과 오른쪽이 기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보냉이 스틱을 당기고 있어도, 로베르의 스틱은 중립 위치에 있다. 로베르가 보냉의 입력을 시각적으로 확인하지 않는 한, 상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손끝으로 느낄 수 없다. 보잉의 조종간이라면 한쪽이 당기면 다른 쪽도 따라 움직여 즉각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에어버스의 설계 철학 — 컴퓨터가 중재하므로 기계적 연결은 불필요하다 — 이 정상 법칙 아래서는 합리적이었지만, 대체 법칙으로 전환된 순간 치명적 맹점이 되었다.

조종석에 경고음이 울렸다. "STALL, STALL." 실속 경고다. 실속이란 날개 위의 공기 흐름이 박리되는 것으로, 비행기가 양력을 잃는다는 뜻이다. 항공학교 1학년 과정에서 배우는 내용이다. 교과서적 대응은 명확하다 — 조종간을 앞으로 밀어 기수를 내리고, 속도를 회복한다. 그러나 보냉은 반대로 행동했다. 조종간을 계속 당겼다. 기수가 올라갔다. 받음각(angle of attack)이 증가하면서 양력이 더 줄어들었다.

BEA(프랑스 항공사고조사국)의 최종 보고서(2012년 7월 5일 발간)는 이 순간의 역설을 기록한다. 실속 경고는 비행 내내 75차례 울렸다. 75차례. 너무 자주 울렸기 때문에 — 속도 데이터 불일치로 경고가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했기 때문에 — 조종사들은 경고 자체를 신뢰하지 못했다. 경고의 과잉이 경고의 무력화를 낳은 것이다. 피토관이 일시적으로 해빙될 때 속도 데이터가 잠깐 유효해지면 경고가 꺼졌다가, 다시 막히면 켜졌다. 그 반복이 경고음의 긴급성을 소멸시켰다. 시스템은 위험을 정확히 감지하고 있었지만, 위험의 신호가 너무 빈번하게 출현하면서 소음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금융 시스템에서도 반복되는 패턴이다 — 리스크 모형이 너무 자주 "위험"을 울리면, 트레이더들은 경고를 무시하기 시작한다. "양치기 소년"은 447편의 조종석에서도 작동했다.

더 기괴한 역설이 있었다. 받음각이 너무 높아지면 — 속도가 너무 낮아지면 — 실속 경고 시스템 자체가 입력 데이터를 "비합리적"이라고 판단하여 경고를 멈추는 설계가 있었다. 보냉이 스틱을 당겨 속도가 더 떨어지면 경고가 꺼졌고, 로베르가 스틱을 앞으로 밀어 속도가 약간 회복되면 경고가 다시 울렸다. 올바른 조치를 하면 경고가 울리고, 잘못된 조치를 하면 경고가 멈추는 상황. 시스템의 피드백이 정반대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02시 11분 40초. 기장 뒤부아가 조종석으로 복귀했다. 기체는 이미 분당 3,000미터 이상의 속도로 하강하고 있었다. 받음각이 40도에 달했다 — 정상 비행의 받음각은 2~5도다. 엔진은 거의 100퍼센트 출력으로 가동 중이었지만, 양력을 잃은 기체는 엘리베이터 안처럼 수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뒤부아의 음성이 블랙박스에 기록되었다. "우리가 뭘 하고 있는 거야?(Mais qu'est-ce qui se passe?)" 그리고 몇 초 뒤, "10도 기수를 내려(Dix degrés d'assiette)." 그러나 보냉의 사이드스틱은 여전히 뒤로 당겨져 있었다. 뒤부아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 에어버스의 사이드스틱은 기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니까.

고도 10,000피트. 남은 시간은 1분이 채 되지 않았다. 로베르가 마침내 깨달았다. "그가 스틱을 계속 당기고 있어(Il est en montée, le gamin, il est en montée)!" 뒤부아가 명령했다. "아니, 아니, 올리지 마!" 너무 늦었다. 02시 14분 25초, 보냉이 말했다. "젠장, 우리 추락하는 거야, 이건 사실일 리 없어(Putain, on va taper... C'est pas vrai)!" 3초 뒤 기록이 멈추었다. 02시 14분 28초.

3분 30초 — 어떤 기록에 따르면 4분 23초. 오토파일럿이 해제된 순간부터 대서양 수면에 충돌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228명 전원이 사망했다. 기체는 대서양 해저 3,900미터 깊이에 가라앉았고, 블랙박스가 회수된 것은 거의 2년 뒤인 2011년 5월이었다.

사고 조사가 밝혀낸 가장 불편한 사실은, 기계의 결함이 사고의 핵심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BEA 보고서에 따르면, 피토관의 얼음은 약 1분 후 해빙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토파일럿은 재작동이 가능한 상태였다. 엔진은 정상이었고, 기체 구조에도 문제가 없었다. A330은 안전한 비행기였다 — 당시까지 A330 기종의 사고율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문제는 그 수십 초의 공백 동안 수동 비행을 떠안은 인간이, 가장 기본적인 절차 — 기수를 내리고 속도를 회복하는 것 — 를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왜 수행하지 못했을까. BEA 보고서는 여러 요인을 나열한다. 속도 표시의 불일치. 고고도 수동 비행 경험의 부족. 경고의 과잉에 의한 인지 과부하. 사이드스틱의 비연동 설계. 상황 인식(situation awareness)의 결여. 그러나 그 모든 요인의 밑바닥에 있는 것은 하나였다.

오토파일럿이 비행의 99퍼센트를 처리하는 시대에, 나머지 1퍼센트를 위한 인간의 능력이 조용히 퇴화하고 있었다.

447편의 조종사들은 무능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뒤부아는 비행시간 11,000시간의 베테랑 기장이었고, 보냉과 로베르도 각각 수천 시간의 비행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수천 시간 중 수동 비행의 비중은 극히 작았다. 뒤부아의 경우 6개월간 346시간의 비행 중 직접 조종한 시간은 4시간. 비율로 따지면 1.2퍼센트. 나머지 98.8퍼센트의 시간 동안 그의 역할은 비행이 아니라 모니터링이었다. 시스템이 올린 플래그를 확인하고, 이상이 없으면 승인한다. 3장의 여신심사위원회에서 위원장이 하는 일과 구조적으로 같다.

이 역설은 항공 분야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동화의 역설(Automation Paradox)은 시스템이 안전해질수록, 시스템이 실패할 때 인간은 더 위험해진다는 원리다. 의료 분야에서도 같은 패턴이 관찰된다. AI 보조 진단 시스템이 X선 판독의 정확도를 높인 병원에서, 시스템이 다운된 날 방사선과 전문의의 오진율이 평상시보다 유의미하게 높았다는 연구가 있다. 시스템이 대부분의 이상 소견을 잡아내주니까, 인간의 눈이 미세한 병변을 놓치는 빈도가 높아진 것이다. 자율주행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레벨 3 자율주행 — 시스템이 대부분의 운전을 처리하되, 비상시 인간이 개입하는 단계 — 에서 운전자의 반응 시간이 일반 운전보다 느려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시스템을 믿고 있다가 갑자기 핸들을 잡아야 할 때, 인간의 반응은 준비된 상태보다 수초 늦다. 그 수초가 생사를 가른다.

447편 이후 항공업계는 수동 비행 훈련을 강화했다. 고고도 실속 회복 훈련이 의무화되었고, EASA(유럽항공안전청)와 FAA(미국연방항공청)가 관련 지침을 개정했다. 그러나 훈련의 빈도를 늘리는 것과 실제 위기에서 대응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시뮬레이터에서는 실패해도 죽지 않는다. 실전에서만 작동하는 긴장감이 있고, 그 긴장감은 일상적으로 수동 비행을 하지 않는 한 유지되지 않는다. 근육의 기억은 반복으로만 유지된다.


2

이 사고를 자본 시장에 대입하면, 비유가 아니라 구조가 보인다.

시스템이 정상 작동하는 동안, 인간은 시스템에 기대어 자신의 판단 근육을 쓰지 않게 된다. 신용등급이 AAA라고 적혀 있으면 직접 실사를 나가지 않고, 리스크 모형이 "안전"이라고 표시하면 스트레스 시나리오를 돌려보지 않으며, 알라딘이 "리밸런싱 필요 없음"이라고 하면 포트폴리오를 다시 들여다보지 않는다.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높아질수록, 시스템이 실패할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줄어든다. 그것이 447편의 조종석에서 일어난 일이고, 자본 시장에서도 매일 조용히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2010년 5월 6일 오후 2시 32분, 뉴욕.

그날 아침부터 시장의 분위기는 불안했다. 그리스 재정위기가 유럽 전역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었고, 아테네에서는 긴축 반대 시위가 폭력으로 번져 3명이 사망했다. S&P 500은 장 초반부터 하락세였다. 오후에 접어들면서 매도 압력이 강해졌다.

2시 32분, 캔자스의 자산운용사 와델 앤 리드(Waddell & Reed)가 E-Mini S&P 500 선물 7만 5,000계약(약 41억 달러 규모)의 매도를 개시했다. 기존 주식 포지션에 대한 헤지 목적이었다. 문제는 실행 방식이었다. 매도 알고리즘이 "직전 1분간 거래량의 9퍼센트에 해당하는 속도"로 주문을 내도록 설정되어 있었는데, 가격이나 시간에 대한 고려(regard to price or time)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CFTC와 SEC의 공동 보고서가 기록한 표현이다.

가격이 떨어지면 거래량이 줄고, 거래량이 줄면 알고리즘의 "9퍼센트"에 해당하는 절대 수량도 줄어야 했지만, 이미 시장에 나온 물량이 유동성을 흡수하고 있었다. 초고빈도 매매(HFT) 알고리즘들이 그 물량을 서로에게 떠넘기기 시작했다. "핫포테이토(hot potato)" 효과 — 뜨거운 감자를 서로에게 던지듯, 알고리즘이 매수한 선물을 밀리초 만에 되팔고, 다른 알고리즘이 그것을 사서 다시 팔았다. 거래량은 폭증했지만 실질적인 유동성은 증발했다. 유동성이라는 것은 가격이 안정적일 때만 존재하는 허상일 수 있다는 것을 플래시 크래시가 증명했다.

9분 만에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가 약 1,000포인트 추락했다. 998.5포인트. 당시까지 장중 최대 하락폭이었다. 1조 달러 이상의 시가총액이 30분도 안 되어 증발했다. 개별 종목에서는 초현실적인 가격이 출현했다. 액센추어(Accenture)의 주가가 0.01달러로 떨어졌다가 복구되었고, 프록터앤드갬블(Procter & Gamble)은 몇 초 만에 37퍼센트가 빠졌다. 애플 주식이 100,000달러에 거래된 기록도 있었다 — 매수 주문이 증발하면서, 시장가 주문이 호가창의 맨 끝에 걸려 있던 비현실적 가격에 체결된 것이다. 호가창이 피토관이라면, 이 순간 호가창은 완전히 막혀 있었다.

2시 45분 28초, 시카고상품거래소(CME)의 스톱 로직 기능(Stop Logic Functionality)이 발동하여 E-Mini 거래가 5초간 일시 중단되었다. 2시 45분 33초 거래가 재개되자 가격이 안정되기 시작했고, 3시경부터 시장이 반등하여 급락분의 대부분을 회복했다. 그날 종가는 시초가 대비 약 3.2퍼센트 하락으로 마감되었다.

오토파일럿이 해제된 것이다. 가격 센서가 고장 난 것이다. 그리고 수동 조종간을 잡아야 할 인간 트레이더들은, 447편의 부기장과 구조적으로 동일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평소에 알고리즘이 처리하던 매매를 갑자기 인간이 떠맡아야 했고, 인간은 밀리초 단위로 변하는 호가창 앞에서 실질적인 판단을 내릴 시간이 없었다.

이후 자본 시장에서 "오토파일럿 해제"는 반복되었다. 그리고 매번, 인간이 조종간을 잡아야 할 순간에 인간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2015년 8월 24일, 중국 증시가 8.5퍼센트 급락한 여파로 미국 시장 개장과 동시에 다우존스가 1,000포인트 이상 하락했다. 2016년 1월 4일, 중국이 새해 첫 거래일에 도입한 서킷 브레이커가 29분 만에 발동했는데, 서킷 브레이커 자체가 패닉을 가속화시켰다 — 거래가 중단되기 전에 빠져나가려는 매도가 몰려든 것이다. 4일 뒤인 1월 7일, 개장 30분도 되지 않아 다시 서킷 브레이커가 발동했고, 중국 당국은 도입 나흘 만에 서킷 브레이커 제도를 폐지했다. 안전장치가 위험을 악화시킨 사례 — 447편의 실속 경고가 "옳은 행동을 하면 울리고 틀린 행동을 하면 꺼지는" 역전 피드백을 제공한 것과 구조적으로 같았다.

2018년 2월 5일, "볼마게돈(Volmageddon)". VIX 지수가 하루 만에 115퍼센트 급등했다 — 17.31에서 37.32로. 변동성에 역방향으로 베팅하던 XIV(VelocityShares Daily Inverse VIX Short-Term ETN)가 하루 만에 자산의 90퍼센트 이상을 잃었다. 19억 달러가 6,300만 달러로. 자기강화 루프가 자기파괴 루프로 전환되는 데 걸린 시간은 몇 시간이었다.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고, 자본 시장의 자동화 비율은 그보다 더 빠르게 올라가고 있다. 2024년 기준으로 미국 주식 거래의 60~70퍼센트(추정치)가 알고리즘에 의해 실행된다. 블랙록의 알라딘은 14조 달러에 달하는 자산에 대해 매일 아침 리스크 리포트를 생성하고, 포트폴리오 매니저들은 그 리포트가 지시하는 리밸런싱을 확인하고 승인한다. 이더리움 위의 스마트컨트랙트는 12초마다 대출 승인과 청산을 자동으로 집행하며, AI 에이전트는 밀리초 단위로 유동성 풀 사이를 이동하며 차익을 추구한다.

이 시스템들이 정상 작동하는 동안, 인간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확인한다. 모니터링한다. 플래그를 검토한다. 도장을 찍는다. 3장에서 여신심사위원회의 위원장이 했던 것처럼. 10장에서 서윤아가 알라딘의 VaR 위반 플래그를 확인했던 것처럼. 인간은 시스템의 바깥이 아니라 시스템의 안에서, 점점 더 좁아지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을 확인하는 것.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을 승인하는 것. 뒤부아 기장이 346시간 중 4시간만 조종간을 잡았듯이.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이다. 다음번 오토파일럿이 해제될 때 — 알고리즘이 서킷 브레이커에 걸리고, 오라클 가격이 왜곡되고, 유동성이 증발하는 그 순간에 — 조종간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 남아 있을 것인가. 그리고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실속 회복 절차를 기억하고 있을 것인가.


3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적어도 세 가지가 있다. 그리고 그 답들은 서로 양립하기 어렵다.

첫 번째는 오토파일럿을 유지하되, 기장을 조종석에 남겨두는 것이다. AI와 알고리즘이 자본 배분의 대부분을 처리하고, 인간은 비상시에 개입한다. 블랙록의 알라딘이 이미 보여주고 있는 모델이다. 서윤아 같은 분석가가 매일 아침 리스크 리포트를 확인하고, 시스템이 올린 플래그를 검증하며, 이상이 없으면 승인한다. 시스템은 일관적이고, 편향에서 자유로우며, 인간의 감정적 동요에 흔들리지 않는다. 평상시에 이것은 가장 효율적인 구조다.

서윤아의 하루를 구체적으로 상상해보자. 오전 7시, 여의도 사무실 도착. 4개의 모니터에 불이 들어온다. 왼쪽 두 대가 알라딘의 대시보드, 오른쪽 위가 블룸버그 터미널, 오른쪽 아래가 사내 메신저. 알라딘이 밤사이에 생성한 리스크 리포트가 화면 왼쪽에 정렬되어 있다. 포트폴리오 A, B, C, D... 각각에 대해 VaR, 크레딧 스프레드, 듀레이션 갭, 기대 하락률이 표시되어 있다. 플래그가 올라온 포트폴리오가 두 개. 서윤아가 클릭하면 상세 정보가 펼쳐지고, 시스템이 이미 리밸런싱 방안을 제안해놓고 있다. "한국 국채 10년물 비중 2% 축소, 미국 TIPS 2% 증가." 서윤아는 제안의 논리를 확인하고 — 글로벌 금리 상승 기대, 인플레이션 헤지 필요성 — 승인 버튼을 누른다. 오전 8시. 1시간 동안 두 건의 "판단"을 내렸다. 사실은 두 건의 "승인"을 내렸다.

그러나 447편의 교훈은 바로 여기에 있다. 비상시에만 개입하는 인간은, 비상시에 개입할 능력을 잃어간다. 모니터링은 근육이다. 쓰지 않으면 퇴화한다.

두 번째는 조종석에서 인간을 빼는 것이다. 오토파일럿을 완전히 맡기는 것이다. AI 에이전트가 자율적으로 자본을 배분하고, 스마트컨트랙트가 규칙을 집행하며, 블록체인이 모든 거래를 투명하게 기록한다. 이준혁이 만들고 있는 세계가 이것에 가깝다. 에이전트는 24시간 쉬지 않고 유동성 풀의 깊이를 계산하고, 가스비 대비 기대수익률을 최적화하며, 밀리초 단위로 트랜잭션을 실행한다. 감정이 없으니 공황 매도가 없고, 잠이 없으니 빈틈도 없다. 분양률 73퍼센트가 현실적인지 3시간 논쟁하지 않는다. 데이터가 있으면 판단하고, 없으면 유보한다.

그러나 이 구조에는 되돌릴 사람이 없다. 에이전트의 목적 함수가 설계자의 의도와 어긋나는 방향으로 자본을 움직이기 시작할 때, 멈추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어디에 있는가.

2022년 5월의 테라/루나가 그 답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사건의 시작은 5월 7일이었다. 두 개의 대형 주소가 앵커 프로토콜(Anchor Protocol)에서 3억 7,500만 UST를 인출했다. 앵커는 UST 보유자에게 연 20%의 이자를 약속하던 디파이 프로토콜이었다 — 지속 불가능한 이율이었지만, 높은 이자가 예치를 끌어들이고 예치가 생태계의 안정을 지탱하는 자기강화 루프가 작동하고 있었다.

5월 9일, 고래 투자자의 대량 매도와 커브 파이낸스(Curve Finance)에서의 UST 매도가 겹치면서 UST의 가격이 1달러 페그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0.985달러. 작은 이탈이었다. 그러나 알고리즘 안정화 메커니즘이 이 이탈을 복구하기 위해 작동했고, 그 작동이 파멸의 시작이었다. UST의 가치를 1달러로 되돌리기 위해 프로토콜은 LUNA를 발행하여 UST를 소각하는 메커니즘을 실행했다. LUNA가 더 발행될수록 LUNA의 가격이 떨어졌고, LUNA의 가격이 떨어질수록 UST 보유자들의 불안이 커졌으며, 더 많은 UST가 환매를 요청했고, 그러면 더 많은 LUNA가 발행되었다. "죽음의 나선(death spiral)." 코드는 설계된 대로 작동했다 — UST의 가치를 복원하기 위해 LUNA를 발행하라는 규칙을 충실히 수행했다. 규칙이 상황을 악화시킨다는 것을 인식하는 기능은 코드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5월 10일부터 12일 사이에 LUNA의 공급량은 4억 개에서 320억 개로 80배 팽창했다. 5월 12일, LUNA의 가격은 0.10달러 아래로 추락했다 — 한때 100달러가 넘었던 토큰이. UST는 0.10달러 이하로 떨어졌다. 72시간 만에 테라 생태계에서 약 500억 달러가 증발했고, 전체 암호화폐 시장에서 4,000억 달러 이상이 빠져나갔다. 보냉 부기장이 실속 상태에서 조종간을 당기고 있었을 때, 받음각 센서는 정확하게 40도를 표시하고 있었다. 데이터는 있었지만, 데이터가 "이것이 잘못되고 있다"고 말해주지는 않았다. 테라/루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멈추라고 말한 것은 코드가 아니라, 코드 밖의 인간이 공포에 질려 빠져나간 것이었다. 도권(Do Kwon), 테라의 설계자는 체포되었다. 사람이 설계한 코드가 사람 없이 작동하여 사람의 돈을 소멸시킨 사건. 그 코드에 "잠깐, 이게 맞나?"라고 묻는 0.5초는 없었다.

세 번째는 비행기가 하나가 아니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자본 시장 전체를 단일한 시스템으로 보지 않고, 영역별로 다른 문법을 적용하는 것이다. 대규모 정형 자산 — 국채, 인덱스, 상장주 — 의 리밸런싱은 알고리즘이 처리한다. 소액의 국경 없는 거래 — 송금, 소액 대출, 마이크로페이먼트 — 는 프로토콜이 맡는다. 그리고 저신용 차주에 대한 비정형 대출, 전례 없는 구조의 투자, 데이터로는 포착되지 않는 정성적 판단이 필요한 영역은 여전히 인간이 맡는다. 세 개의 문법이 각자의 강점이 작동하는 곳에서 공존하는 구조다.

가장 현실적으로 보이지만, 경계는 항상 흐려진다는 문제가 있다. 알고리즘이 처리할 수 없다고 여겨지던 영역이 해마다 줄어들고 있으니까. 10년 전에는 기업 신용 분석이 인간의 고유 영역이었다. 재무제표의 숫자 뒤에 숨은 맥락, 경영진의 역량, 산업의 구조적 변화 — 이것들은 정량화할 수 없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날 AI는 재무제표를 읽고, 뉴스를 해석하고, 실적 발표 컨퍼런스콜에서 CEO의 어조와 단어 선택을 분석하여 신용등급 예측을 생성한다. 경계선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어쩌면 세 시나리오는 동시에 실현될 수도 있다. 세계 금융 시스템이 단일한 아키텍처로 수렴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미국의 자본시장은 두 번째 시나리오에 가까워지고, 중국은 디지털 위안을 통해 첫 번째와 두 번째의 혼합을 추구하며, 유럽은 세 번째 시나리오의 규제 프레임워크를 만들고 있다. 11장에서 살펴본 CBDC 지정학이 보여주듯, 자본 배분의 미래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가능성이 높다. 세 시나리오 모두 고유한 위험을 안고 있고, 어느 것이 주류가 될지는 기술이 아니라 각 사회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결국 "인간을 어디에 놓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4

2026년 초, 서울.

여의도의 한 호텔 로비 카페. 1월의 늦은 오후, 창밖의 한강은 겨울 안개에 잠겨 있고, 강 건너 여의도 증권가의 빌딩 불빛이 안개 속에서 흐릿하게 번진다. 카페의 천장은 높고, 한쪽 벽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재즈 피아노 선율이 낮은 볼륨으로 흐르고, 오후 4시의 카페는 여의도 금융가의 퇴근 전 시간대라 비교적 한산하다. 구석 자리에 두 잔의 커피가 놓인 테이블. 서윤아가 먼저 와 있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이 식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노트북을 펼쳐놓고 있었지만 화면은 보지 않고 있었다. 창밖의 강을 보고 있었다.

이준혁이 10분 늦게 도착했다. 패딩 재킷의 지퍼를 내리며 맞은편에 앉았다. 그의 손에는 맥북이 아니라 아이패드 하나가 들려 있었다. 판교에서 여의도까지 지하철로 한 시간 반.

이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다. 11장에서 이준혁이 금융위원회 참고인으로 출석한 날, 같은 건물에서 규제 기술(RegTech) 세미나가 열리고 있었고, 서윤아는 자산운용사 서울 오피스의 리스크 분석가로서 그 세미나에 참석해 있었다. 두 사람은 세미나 후 리셉션에서 처음 만났다. 자본 배분이라는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두 사람이 마주하는 세계는 달랐다. 그 차이가 대화의 이유였다.

서윤아는 뉴욕에서 온 글로벌 자산운용사의 리스크 분석가다. 매일 아침 4개의 모니터 앞에 앉아 시스템이 생성한 리스크 리포트를 확인하고, 포트폴리오 위반 사항을 처리한다. 서른다섯. 연세대 경제학과를 나와 뉴욕대 스턴스쿨에서 MBA를 한 뒤, 맨해튼의 자산운용사에서 3년 일하다 서울 오피스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은퇴한 시중은행 여신심사역이다. 이준혁은 AI 에이전트 기반의 DeFi 프로토콜을 개발하는 스타트업 대표다. KAIST에서 전산학을 전공하고 실리콘밸리를 거쳐 돌아온, 30대 초반의 개발자다. 판교의 사무실은 공유 오피스 한 칸이고, 팀원은 다섯 명이다.

서윤아가 자기 일을 설명했다.

"시스템이 매일 아침 리스크 리포트를 생성해요. 포트폴리오별로 VaR 위반이 있으면 플래그가 올라오고, 저는 그 플래그를 확인합니다. 코파일럿이 이미 리밸런싱 제안까지 준비해놓고 있어요. 대부분의 경우 시스템의 제안이 맞아요. 제가 추가로 분석해야 할 일은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이어갔다. "처음에는 좋았어요. 반복 작업이 줄었으니까. 그런데 1년쯤 지나니까, 이상한 감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시스템이 올린 플래그를 저는 확인합니다. 확인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실제로 제가 하는 것은... 승인에 가까워요. 시스템이 이미 답을 내놓은 것을 제가 도장 찍는 거죠."

그녀가 커피잔을 양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아버지가 은행에서 30년 동안 여신 심사를 하셨는데, 아버지한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이해를 못 하세요. '그래서 네가 판단하는 거야, 기계가 판단하는 거야?' 설 연휴에 같이 밥 먹으면서 한 이야기예요. 아버지는 대출 심사를 할 때 항상 시행사 사무실에 직접 가셨대요. 현장을 안 보면 숫자만으로는 모른다고. 분양 사무실의 분위기, 모델하우스의 마감재 품질, 심지어 시행사 대표가 차를 내오는 태도까지 보셨대요. '현장감이라는 게 있다, 숫자 뒤에 사람이 있다'고. 저한테 같은 질문을 하시더라고요. '너는 현장에 가보니?'"

짧은 침묵 뒤에 덧붙였다. "솔직히, 저도 그 경계가 흐릿해요. 확인인지 의례인지."

같은 질문을 받은 이준혁의 답은 달랐다.

"저는 에이전트를 만듭니다. 에이전트가 온체인 데이터를 읽고, 유동성 풀의 상태를 분석하고, 최적의 전략을 스스로 찾아서 실행해요. 24시간 돌아갑니다. 감정이 없고, 편향도 없어요. 제 역할은 에이전트의 목적 함수를 설계하고, 파라미터를 조정하고, 가끔 로그를 확인하는 정도입니다."

서윤아가 물었다. "에이전트가 실수하면요?"

이준혁이 잠깐 웃었다. "코드를 고칩니다."

"이미 실행된 거래는?"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웃음이 사라지고, 커피잔을 내려놓는 손이 멈추었다.

"... 블록체인에 기록된 트랜잭션은 되돌릴 수 없어요. 하지만 그건 장점이기도 합니다. 투명하고, 감사 가능하고, 누구도 기록을 조작할 수 없으니까."

"한 번 있었어요." 이준혁이 한참 뒤에 말했다. 서윤아가 기다렸다. 그가 아이패드를 테이블 옆으로 밀어놓으며 이어갔다. "작년에. 에이전트의 가격 오라클이 일시적으로 왜곡된 적이 있어요. 5분이었는데, 그 사이에 에이전트가 왜곡된 가격을 기준으로 포지션을 잡았어요. 오라클이 복구된 뒤에 알았죠. 이미 체결된 트랜잭션이었고, 되돌릴 수 없었어요. 손실은 크지 않았지만..."

"그때 어떤 기분이었어요?"

"기분이라기보다... 책임에 대한 질문이 왔어요. 오라클을 제공한 서비스의 문제인가. 오라클 의존도를 고려하지 않은 제 설계의 문제인가. 에이전트에게 자금을 맡긴 사용자의 책임인가. 명확하지 않았어요." 그가 창밖을 보았다. 안개가 짙어지고 있었다. "447편의 조종사가 실속 상태에서 누구 탓인지 따질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저도 그때 따질 시간이 없었어요. 먼저 손실을 멈추고, 에이전트를 중단시키고, 그 다음에 원인을 분석했죠."

서윤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쪽에서는 명확해요. 시스템이 틀렸을 때 전화를 받는 건 저예요."

그녀는 2022년 9월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영국 길트 위기. 리즈 트러스 총리의 미니 버짓(mini-budget)이 시장을 강타했다. 감세와 재정 확대를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발표 후, 영국 국채 금리가 나흘 만에 100베이시스포인트 이상 급등했다. 그 자체로도 충격이었지만, 진짜 위기는 그 뒤에 있었다.

영국 연금펀드들이 사용하던 LDI(Liability-Driven Investment) 전략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LDI는 연금펀드가 장기 부채를 매칭하기 위해 장기 국채에 레버리지를 걸어 투자하는 전략이다. 금리가 안정적이면 효율적인 구조지만, 금리가 급등하면 마진콜의 연쇄가 시작된다. 국채 가격이 떨어지면 담보 가치가 하락하고, 마진콜이 오면 국채를 팔아 현금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 매도가 국채 가격을 더 떨어뜨리고, 가격이 더 떨어지면 더 많은 마진콜이 온다. 자기강화적 하락 루프. 테라/루나의 죽음의 나선과 구조적으로 같았다 — 다만 이것은 암호화폐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지던 자산인 영국 국채 시장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미니 버짓 발표 후 5일 동안 LDI 펀드들은 약 250억 파운드의 국채를 매도했다. 그 중 30%가 첫 5일에 집중되었다. 30년 만기 국채 금리가 5%를 돌파하던 순간, 영란은행이 긴급 개입했다. 9월 28일부터 10월 14일까지 매일 최대 50억 파운드, 이후 100억 파운드로 확대된 국채 매입 프로그램. 총 1,000억 파운드 이상의 자금이 투입되었다.

"그 이틀 동안 전화기를 놓지 못했어요." 서윤아가 말했다. "마진콜이 연쇄적으로 오고, 국채 가격이 매 시간 바뀌고, 시스템이 생성하는 리밸런싱 제안이 시장 상황보다 한 발 늦었어요. 알라딘이 '매도하라'고 했지만, 시장의 유동성이 이미 증발한 상태에서 매도하면 손실만 확대될 거라고 판단했어요. 기다렸어요."

"직감이요?" 이준혁이 물었다.

"경험이라고 해야겠죠. 숫자에서 오는 게 아니라, 시장을 오래 보면서 쌓이는 패턴 인식. 중앙은행이 어느 지점에서 개입하는지에 대한 감각. 금리가 이 수준을 넘으면 시스템 리스크가 되고, 시스템 리스크가 되면 중앙은행이 개입한다. 모델에는 '중앙은행이 내일 개입할 확률'을 계산하는 변수가 없어요. 하지만 경험이 있으면 느낌은 있어요. 2008년에도, 2020년에도, 2022년에도, 중앙은행은 결국 왔으니까."

"그 직감은 항상 맞아요?"

서윤아가 솔직하게 답했다. "아니요. 반반이에요. 2020년 3월에는 맞았고, 다른 때는 틀린 적도 있어요. 하지만 맞든 틀리든, 적어도 그 판단의 책임은 제가 져요. 전화를 받는 사람이 있다는 거죠. 고객이 전화하고, 상사가 전화하고, 컴플라이언스가 전화하고, 규제당국이 전화해요."

그리고 덧붙였다. 목소리에 날이 서 있지는 않았다. 같은 세계에 대한 다른 경험에서 나오는 진지한 물음이었다. "에이전트가 틀리면, 전화를 받는 사람이 있나요?"

이준혁이 잠시 커피잔을 돌렸다. 대답하기까지 몇 초가 걸렸다.

"아직은 제가 받아요. 제가 만든 에이전트니까. 하지만 에이전트가 10개, 100개, 1000개가 되면? 서로 다른 프로토콜에서 서로 다른 에이전트가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만들어낼 때, 누구의 전화가 울려야 하는 거죠?"

카페 안의 재즈 피아노가 곡을 바꿨다. 빌 에반스의 'Waltz for Debby'. 느린 왈츠의 선율이 두 사람의 침묵 사이를 채웠다.

3장의 여신심사위원회를 떠올리면, 세 번째 풍경이 겹친다. 12인용 직사각형 테이블이 벽에 거의 닿을 정도로 들어찬 회의실. 화이트보드에 지난주 누군가 적었다가 지운 "LTV 62%"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그 공간에서, 바인더를 넘기고, 분양률 가정을 따지고, 시행사 대표의 눈빛을 읽으려 애쓰던 오후들. 서류 200장을 검토한 끝에 "조건부 가결"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도장 하나를 찍는 일. 인주의 붉은 색이 종이 위에 번지는 순간의 감촉. 도장이 찍히기 직전의 0.5초 — 잠깐의 주저, 정말 이것이 맞는가라는 질문이 의식의 저변에서 스치는 순간. 틀리면 이름이 의사록에 남고, 크게 틀리면 금감원이 오며, 더 크게 틀리면 검찰이 온다.

그것이 핵심이었다. 600년간 자본 배분의 판단에는 항상 책임을 지는 인간이 있었다. 환어음에 서명한 메디치의 지점장. 국채 청약을 승인한 잉글랜드 은행의 이사. 도장을 찍은 여신심사위원장. CDO에 AAA를 부여한 무디스의 분석가. 레버리지를 건 LTCM의 파트너들. 그들이 실패했을 때 — 그리고 역사가 보여주듯 자주 실패했다 — 적어도 "누구의 잘못인가"를 물을 수 있었다. 포르티나리에게, 뉴턴에게, 모질로에게, 머튼에게. 이름이 있었고, 얼굴이 있었으며, 법정에 세울 수 있었다.

AI 에이전트의 세계에서 그 질문은 아직 답이 없다. 에이전트를 설계한 개발자의 책임인가. 파라미터를 설정한 운용사의 책임인가. 코드를 감사한 감사법인의 책임인가. 아니면 에이전트에게 자본을 맡긴 사용자의 책임인가. 블록체인의 검증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스마트컨트랙트를 배포한 DAO의 거버넌스 토큰 보유자들에게? 책임이 분산되면 책임이 희석되고, 희석된 책임은 무책임과 구분이 어려워진다. 부산저축은행의 여신심사위원회가 합의체라는 형식 속에서 개인의 책임을 흐려뜨린 것처럼. 도구는 달라졌지만, 책임의 분산이 만드는 위험은 같은 구조를 반복한다.

이준혁이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래도 투명성은 진전이에요. 블록체인 위의 거래는 누구나 볼 수 있어요. 부산저축은행의 120개 SPC는 아무도 몰랐잖아요. 적어도 온체인에서는 자금의 흐름이 숨겨지지 않아요."

서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아요. 하지만 투명하다고 책임이 명확해지는 건 아니에요. 모든 거래가 공개되어도, '이 거래의 결과에 대해 누가 책임지는가'라는 질문은 남아요. 투명성은 감사의 조건이지, 책임의 조건은 아니에요."

두 사람의 답을 나란히 놓으면, 같은 윤곽이 드러난다. 서윤아는 "차이가 있다면 속도와 규모"라고 했고, 이준혁은 "도구가 다를 뿐, 본질은 같다 — 돈을 어디에 넣을지 판단하는 것"이라고 했다. 차이가 있다면, 실패했을 때 책임지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차이가 사소하지 않았다.

600년간 반복되어온 질문 — "이 사람이 돈을 갚을 수 있는가" — 은 형태가 달라지고 있었다. 누가 갚을 수 있는가에서, 자본 배분의 판단을 누가 해야 하는가로. 능력의 문제에서 당위의 문제로. 메디치의 스크리또이오에서 시작된 그 질문이 600년을 건너왔을 때, 질문은 같되 무게가 달라져 있었다.


5

카페의 조명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저녁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창밖의 한강은 겨울 밤으로 물들어가고, 다리의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면서 강 위에 길쭉한 빛의 기둥을 그렸다. 서윤아가 코트를 집어들었다. 이준혁이 아이패드를 가방에 넣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이준혁이 말했다.

"결국 도구가 바뀌는 거지, 질문은 안 바뀌는 거 아닐까요."

서윤아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잠시 창밖의 강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질문이 안 바뀌는 게 아니라, 질문하는 사람이 바뀌는 거예요. 그게 더 무서운 거고."

이 두 문장 사이의 간극이 이 책의 핵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준혁의 관점은 연속성의 관점이다. 메디치의 환어음에서 이더리움의 트랜잭션까지, 본질은 같다 — 자본의 이동. 도구가 양피지에서 블록체인으로, 밀랍 인장에서 디지털 서명으로, 전령에서 광섬유로 바뀌었을 뿐이다. 속도와 규모와 정밀도가 달라졌지만, 핵심 행위 — 돈을 어디에 보낼지 결정하는 것 — 는 동일하다. 이 관점에서 AI 에이전트는 두려울 것이 없다. 더 빠르고, 더 정확하고, 더 일관된 도구일 뿐이다.

서윤아의 관점은 단절의 관점이다. 도구가 바뀌는 것과 판단의 주체가 바뀌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변화다. 메디치의 지점장이 깃펜 대신 만년필을 쓰게 되어도, 판단하는 사람은 여전히 지점장이었다. 블랙-숄즈 공식이 등장해도, 공식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인간 트레이더였다. 도구는 바뀌었지만 판단의 주체는 600년간 일관되게 인간이었다. 그런데 AI 에이전트가 판단 자체를 수행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도구의 진화가 아니라 주체의 교체다. 주어가 바뀌는 것이다. "인간이 판단한다"에서 "코드가 판단한다"로. 동사는 같지만 주어가 다르면, 문장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이준혁이 반론했다. "주체가 바뀐다고 해도, 결국 코드를 쓰는 것은 인간이잖아요. 에이전트의 목적 함수를 설계하는 것은 저예요. 저는 에이전트를 통해 판단하는 거지, 판단을 포기한 게 아니에요."

서윤아가 미소를 지었다. "그건 알라딘의 개발자도 같은 말을 해요. 시스템을 설계한 것은 우리라고. 하지만 시스템이 어느 순간부터 설계자가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면, '내가 설계했다'는 말은 책임의 근거가 되나요, 면책의 근거가 되나요?"

이준혁이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둘 다인 것 같아요."

서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창밖에서 유람선이 다리 아래를 지나갔다. 유람선의 불빛이 강물 위에 기름처럼 번지고, 다리의 가로등 불빛과 겹치면서 잠시 밝아졌다가 흩어졌다.

"아버지가 은행 다닐 때," 서윤아가 말했다, "도장을 찍기 전에 항상 잠깐 멈추셨대요. 0.5초, 어쩌면 그보다 짧은 시간. 습관이래요. '이게 정말 맞는가' 하는 마지막 확인. 30년간 한 번도 안 빠뜨리셨대요. 은퇴하실 때 후배한테 그 얘기를 하셨대요. '도장 찍기 전에 0.5초만 멈춰라. 그 0.5초가 너를 지켜줄 거다.' 후배가 웃었대요. '요즘 세상에 0.5초요?' 아버지가 답하셨대요. '그래, 0.5초. 평생 해도 부족하다.'"

이준혁이 말했다. "에이전트에게는 그 0.5초가 없어요. 멈출 이유가 없으니까."

"그게 효율인가요, 결함인가요?"

"효율이죠. 0.5초 동안 일어나는 것은 판단이 아니라 불안이에요. 불안은 제거해야 할 노이즈예요."

서윤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닐 수도 있어요. 그 0.5초가 양심이 작동하는 시간일 수도 있으니까. 불안이 판단의 일부일 수도 있어요. 447편의 오토파일럿에는 불안이 없었어요. 그리고 조종간을 당기는 것을 멈추지 않았어요."

두 사람이 카페를 나서며 악수했다. 서윤아는 여의도 방향으로, 이준혁은 지하철역 방향으로 걸어갔다. 겨울 밤의 한강 바람이 차가웠다.


6

이 책은 정답을 위한 책이 아니다. PE에서는 확신이 미덕이었고, 저축은행에서는 보수적 판단이 미덕이었다. 그러나 600년의 역사 앞에서 확신도 보수도 반쪽짜리였다.

카페를 나온 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피렌체의 스크리또이오를 생각했다.

1397년, 아르노 강이 내려다보이는 돌 건물 2층의 좁은 방. 방의 크기는 기껏해야 네 평 남짓. 천장이 낮고, 벽은 거칠게 칠한 석회로 마감되어 있다. 녹색 천이 덮인 나무 테이블 위에 가죽 장정의 장부가 펼쳐져 있고, 놋쇠 저울이 한쪽에 놓여 있으며, 깃펜 한 자루가 잉크병 옆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빛이 양피지 위에 기울어져 있다. 빛의 각도로 시각을 짐작할 수 있다 — 해가 아르노 강 너머로 기울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 양초의 기름 냄새와 철분 잉크의 쓴 향이 섞인 공기. 양피지에서 올라오는 동물 가죽 특유의 미세한 노린내. 벽돌벽에서 올라오는 석재의 냉기가 손등에 닿는다. 먼 곳에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의 종소리가 불규칙하게 들려온다. 종소리 사이사이에, 아르노 강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의 희미한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올라오고, 베키오 다리 위 금세공사의 망치 소리가 간간이 끼어든다.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가 환어음을 쓰고 있다. 나이 예순. 눈가에 주름이 깊고, 오른손의 중지에는 수십 년간 깃펜을 쥐어 생긴 굳은살이 박여 있다. "브뤼헤의 메디치 지점에서, 수취인에게, 사용 기한 내에 지급하라." 라틴어와 이탈리아어가 섞인 상업 문체. 깃펜 끝에서 잉크가 양피지 위에 내려앉기 직전, 찰나의 정지가 있었을 것이다. 0.5초, 어쩌면 그보다 짧은 시간. 깃펜의 끝이 양피지 표면 위 1밀리미터 지점에서 멈춘 순간.

브뤼헤의 양모 무역은 안전한가. 부르고뉴의 필리프 공(公)이 전쟁에 나서면 양모 가격이 흔들릴 것이다. 플랑드르의 정세는 안정적인가 — 직공들의 봉기 소문이 있었다. 이 거래 상대의 평판은 믿을 만한가 — 지난번 결제가 2주 늦었다. 전령이 브레너 고개를 넘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 겨울이면 고개가 막히고, 산적이 출몰한다. 수십 가지 변수가 그의 머릿속에서 교차하고, 경험이 축적한 직관이 그 변수들을 저울질하며, 마침내 잉크가 종이에 닿는다.

붉은 밀랍 인장이 찍힌다. 밀랍 막대의 끝을 양초 불꽃에 가져가면, 붉은 액체가 방울져 양피지 위에 떨어진다. 순간적으로 퍼지는 밀랍의 달콤한 연기. 아직 굳지 않은 밀랍 위에 금속 인장을 누르면, 여섯 개의 팔레(palle) 문양이 양피지 위에 선명하게 남는다. 밀랍이 굳으면서 내는 미세한 딱 소리가 방 안의 정적 속에 잠긴다. 밀랍의 온기가 손끝에서 식어간다. 서명 완료. 이 환어음이 알프스를 넘어 브뤼헤에 도착하면, 그곳의 지점장이 금화를 내줄 것이다. 조반니의 이름이, 메디치라는 이름이, 그 보증이다.

그 0.5초가 600년 금융 역사의 엔진이었다.

판단의 순간. 멈춤의 순간. "이것이 옳은가"라는 질문이 의식의 표면 아래에서 스치는 순간. 그 순간은 잉글랜드 은행 이사회의 투표에서도, 시카고 옵션거래소의 트레이더가 밸류 시트를 들여다보는 순간에도, 저축은행 여신심사위원회의 위원장이 도장을 찍기 직전의 침묵에서도 반복되었다. 형태는 달랐지만 구조는 같았다. 인간이 멈추고, 저울질하고, 결정한다.

1694년, 런던. 잉글랜드 은행 설립 의결 직전, 의회 의원들이 투표에 앞서 잠시 침묵했을 순간. 국가의 신용으로 화폐를 발행한다는 전례 없는 결정 앞에서, 그들도 0.5초의 멈춤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 멈춤이 330년의 중앙은행 시대를 열었다.

1973년, 시카고. CBOE의 낡은 흡연실에서, 밸류 시트를 호주머니에서 꺼내 이론 가격을 확인한 트레이더가 호가를 외치기 직전. 그도 0.5초간 망설였을 것이다 — 공식이 정말 맞을까. 수학이 시장보다 나은가. 그 망설임 속에서 호가를 외쳤고, 파생상품 시대가 열렸다.

1987년, 뉴욕. 블랙먼데이 아침, 트레이딩 데스크에 앉은 포트폴리오 보험 매니저가 매도 버튼을 누르기 직전. 모델이 지시하는 대로 하는 것이 옳은가. 이 매도가 폭락을 더 악화시키지는 않을까. 그 0.5초의 망설임이 다우존스 22.6%의 추락에 일조했다.

2008년, 뉴욕. 무디스의 분석가가 모기지 풀에 AAA 등급을 부여하는 서류에 서명하기 직전. 이 등급이 정말 맞는가. 모델의 기본 가정 — 주택 가격은 전국적으로 동시에 떨어지지 않는다 — 은 유효한가. 그 0.5초의 질문이 묻혀버렸고, 서브프라임 위기가 왔다.

2011년, 부산. 여신심사위원회 위원장이 도장을 들어올린 순간. 대주주의 의중, 금감원의 시선, 직원들의 생계가 교차하는 그 자리에서. 붉은 인주가 종이에 닿기 직전의 0.5초. 그 0.5초에 "아니오"라고 할 수 있었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0.5초에 "네"라고 한 이유도 있었다. 인간의 판단은 항상 맥락 안에 있다.

2020년 3월, 서울. 서윤아가 알라딘의 매도 제안을 무시하고 기다리기로 결정한 순간. 시스템이 "매도하라"고 했지만, 직감이 "기다리라"고 한 그 순간. 0.5초의 멈춤이 시스템의 지시를 거스르는 용기가 된 순간.

모든 순간이 같은 구조다. 인간이 멈추고, 저울질하고, 결정한다. 때로는 현명하게, 때로는 어리석게. 그러나 항상 인간이.

600년 뒤, 2026년. 전 세계 어딘가의 데이터센터에서 —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수 없다, 수천 개의 이더리움 노드가 분산되어 있으니까 — AI 에이전트가 트랜잭션을 실행한다. USDC를 유동성 풀에 공급하고, ETH를 담보로 빌리며, 수익률을 최적화한다. 12초마다 블록이 생성되고, 그 안에서 자본이 국경을 넘는다. 모니터도 없고, 펜도 없고, 양초도 없다. 소리도 없다. 데이터센터의 냉각 팬이 돌아가는 저음만 있을 뿐이다 — 쉬지 않는 바람 소리, 기계가 스스로를 식히는 소리. 서버 랙 위의 파란 LED가 일정한 리듬으로 깜박인다. 그 깜박임은 심장 박동과 닮았지만, 심장이 없는 것의 박동이다. 형광등 불빛이 에폭시 바닥에 반사되어, 복도 전체가 푸르스름한 빛에 잠겨 있다.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냉각 팬의 바람에 먼지 한 점 없는 공기가 순환한다. 조반니의 스크리또이오에서 양초의 기름 냄새와 잉크의 쓴 향이 공기를 채웠던 것과 대비된다 — 여기에는 냄새가 없다. 인간의 체온이 없다. 판단의 무게가 없다.

에이전트의 "계산"도 조반니와 같은 일을 한다. 유동성 풀의 깊이, 오라클 가격의 편차, 가스비 대비 기대 수익률, 포트폴리오의 상관관계. 수백 가지 변수를 밀리초 단위로 처리하고, 목적 함수가 최적이라고 판단한 경로로 자본을 보낸다. 조반니가 브뤼헤의 양모 시세와 부르고뉴 궁정의 지불 능력을 머릿속에서 저울질하던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연산이다. 변수의 수와 처리 속도가 달라졌을 뿐이다.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조반니의 0.5초 — 그 멈춤 — 는 에이전트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멈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옳은가"는 목적 함수에 포함되지 않는 질문이다. 효율적인가, 수익률이 높은가, 리스크가 허용 범위 안인가 — 이것들은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옳은가"는 계산의 대상이 아니다. 옳음은 맥락에 의존하고, 맥락은 숫자로 환원되지 않는 것들 — 역사, 관계, 직관, 그리고 책임감 — 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양피지 위에 잉크를 내려놓기 직전, 인간의 의식 어딘가에서 깜박이는 무언가다. 서윤아의 아버지가 도장을 찍기 전 30년간 빠뜨리지 않았던 그 멈춤. 이준혁이 "노이즈"라고 부른 것. 서윤아가 "양심"이라고 부른 것.

600년간 한 번도 꺼지지 않았던 그 깜박임이, 지금 처음으로 꺼질 수 있는 가능성 앞에 서 있다.

그것이 진보인가, 상실인가. 이 책은 답하지 않는다. 이 책이 할 수 있는 것은, 질문의 무게를 측정하는 것뿐이다.

600년의 역사를 따라오면서 분명해진 것이 하나 있다면, 자본 배분의 방식이 바뀔 때마다 이전 시대의 사람들은 새로운 방식을 두려워했고,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은 이전 방식을 비웃었으며, 결국 둘 다 부분적으로만 옳았다는 것이다. 메디치의 환어음을 두려워한 금세공업자들이 있었다. 잉글랜드 은행의 은행권을 의심한 지방 은행가들이 있었다. 블랙-숄즈 공식을 비웃은 시카고의 노장 트레이더들이 있었다. 비트코인을 사기라고 단정한 중앙은행가들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AI 에이전트를 경계하는 규제 당국이 있고, 인간 게이트키퍼를 구시대의 유물로 보는 프로토콜 빌더들이 있다.

역사는 어느 한쪽이 완전히 틀렸던 적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시에 어느 한쪽이 완전히 옳았던 적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환어음은 혁신이었지만 메디치 은행은 무너졌고, 블랙-숄즈는 아름다웠지만 LTCM은 파산했으며, 비트코인은 살아남았지만 테라/루나는 증발했다. 모든 시스템은 작동하는 동안에는 완벽해 보이고, 실패하는 순간에는 처음부터 결함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새로운 시스템은 이전 시스템을 완전히 대체하지 못한 채, 오래된 시스템의 옆자리에 앉는다. 환어음이 사라진 뒤에도 은행은 살아남았고, 블랙-숄즈 이후에도 인간 트레이더는 거래 플로어에 남아 있었으며, 비트코인이 등장한 뒤에도 중앙은행은 건재하다. 11장의 디지털 화폐 전쟁이 보여주듯, 새로운 것이 오래된 것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앉아 긴장을 만드는 것이 역사의 패턴이다.

다만 한 가지, 계속 돌아오는 장면이 있다. 3장의 여신심사위원회가 끝나고 불이 꺼진 회의실. 식은 커피잔과 바인더만 남은 그 공간에서, 680억 원의 향방이 결정되었다. 다섯 명의 인간이 2시간 넘게 불확실성과 씨름한 끝에 조건부 가결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도장 하나가 찍혔다. 느리고, 비싸고, 편향에 취약한 과정이었다. 컨소시엄의 압력과 실적의 유혹이 회의실 안에 항상 존재했다. 그리고 그 불완전한 과정이 600년간 자본 배분을 지탱해온 엔진이었다.

그 엔진이 교체되고 있다. 교체가 완료될지, 병존할지, 어떤 형태로 안착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이 변화가 이미 시작되었고, 600년의 궤적이 지금 하나의 전환점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속도의 역사를 보면 그 전환의 윤곽이 드러난다.

1397년. 메디치의 환어음이 피렌체에서 브뤼헤까지 도착하는 데 25일이 걸렸다. 전령이 스카르셀라에 환어음을 넣고 브레너 고개를 넘었다. 진흙탕 길에 말발이 빠지고, 산적이 고갯길을 노렸으며, 겨울에는 고개가 눈으로 막혔다. 그 25일 동안 조반니의 판단은 유효했다 — 환어음이 도착할 때까지, 시장이 그의 판단을 뒤집을 정도로 빠르게 변하지 않았으니까.

1694년. 잉글랜드 은행의 국채 청약은 12일 만에 마감되었다.

1973년. 블랙-숄즈의 옵션 가격은 TI 계산기로 몇 분이면 계산할 수 있었다.

1987년. 블랙먼데이. 다우존스 지수가 22.6퍼센트를 잃는 데 하루.

2010년. 플래시 크래시. 998.5포인트가 증발하는 데 9분.

2018년. 볼마게돈. 19억 달러가 90퍼센트를 잃는 데 하루.

2022년. 테라/루나. 500억 달러가 증발하는 데 72시간.

2025년. DeFi의 블록타임은 12초. AI 에이전트의 판단은 밀리초 단위.

자본이 이동하는 속도는 600년 동안 수백만 배 빨라졌고, 그 속도 안에서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 틈은 같은 비율로 좁아져 왔다. 기술의 진보인지, 인간 판단의 퇴거인지 — 같은 현상의 두 이름일 뿐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점점 빨라지면서, 그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물을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피렌체의 스크리또이오에서 조반니가 환어음에 서명할 때, 그는 자신이 600년 뒤의 세계를 위한 문법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환어음이라는 종이 한 장이 알프스를 넘고, 지중해를 건너고, 대서양을 횡단하여, 마침내 블록체인의 트랜잭션이 되기까지. 가치를 물건에서 분리하고 관계 속에 저장한다는 원리는 변하지 않았다. 밀랍 인장이 디지털 서명이 되었고, 비밀 장부가 분산 원장이 되었으며, 전령의 가죽 문서함이 광섬유 케이블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가 바뀌었다. 600년간 그 종이 위에 서명한 것은 항상 인간이었다. 판단하고, 주저하고, 결정하고, 책임진 것은 인간이었다. 때로는 그 판단이 탁월했고 — 조반니의 음성 필터가 메디치 은행을 반세기 동안 지탱했듯 — 때로는 치명적으로 잘못되었지만 — 포르티나리가 부르고뉴 궁정에 빠져들었듯, 무디스가 쓰레기에 AAA를 붙였듯, 보냉이 실속 상태에서 조종간을 당겼듯 — 판단의 주체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그 연속성이 지금, 처음으로 끊어질 가능성 앞에 서 있다.

서울의 호텔 방 창밖으로 한강이 보였다. 겨울 밤의 강은 검었고, 그 위로 다리의 불빛이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반포대교, 동작대교, 한남대교 — 다리마다 다른 색의 불빛이 강물 위에 길게 일렁이고 있었다. 한강의 폭은 1킬로미터. 아르노 강의 열 배. 아르노 강변의 돌 건물에서 조반니가 양피지에 잉크를 내려놓던 그 순간과, 이 겨울 밤 한강변의 호텔 방 사이에 600년이 있다. 아르노 강에서 한강까지, 양피지에서 블록체인까지, 깃펜에서 코드까지. 밀랍 인장의 따뜻함에서 LED의 차가운 깜박임까지.

한강은 넓고 어둡고 조용했다. 아르노 강은 좁고 따뜻하고 시끄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두 강 위로 같은 질문이 흐르고 있었다. 이 돈을 보내도 되는가. 이 판단은 옳은가. 누가 책임지는가.

어딘가의 데이터센터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AI 에이전트가 트랜잭션을 실행하고 있을 것이다. 12초마다 블록이 생성되고, 블록 안에서 자본이 이동한다. 아무도 도장을 찍지 않는다. 아무도 멈추지 않는다. 0.5초의 여백 없이, 밀리초의 정밀도로, 자본은 쉬지 않고 흐른다.

보이지 않는 손은 아직 거래를 멈추지 않았다. 다만 그 손이 여전히 인간의 것인지, 우리는 점점 확신할 수 없게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