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이지 않는 손의 마지막 거래 Vol. 3 10 / 12 English
Vol. 3 — 보이지 않는 손의 마지막 거래

10장: 세 개의 문법


1

2025년 어느 화요일 아침, 서울.

저축은행 10층 회의실의 형광등이 켜진다. 누군가 블라인드를 올리자 주차장 위로 희뿌연 하늘이 드러난다. 미세먼지 농도가 '나쁨'인 날 특유의 탁한 빛이다. 12인용 직사각형 테이블, 벽에 거의 닿을 듯 들어찬 의자들, 화이트보드에 희미하게 남은 지난주 숫자들. "LTV 62%", "분양률 68%". 지워졌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판단의 흔적이다. 화이트보드 보드마카 한 개가 바닥에 떨어져 있고, 아무도 줍지 않는다.

오전 8시 30분, 모닝 브리핑.

경영기획본부장이 노트북을 열고 엑셀 파일을 띄운다. 노란색으로 하이라이트된 셀 하나. 지난달 말 기준 BIS 비율이다. 부동산 PF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우발 채무를 감안한 추정치가 불안한 방향으로 기울고 있다. 이 숫자를 매주 업데이트하는 것이 그의 일상이다. 매주 같은 숫자를 다른 무게로 읽는다.

"PF 연체 현황부터 가겠습니다."

리스크관리팀장이 A4 한 장짜리 요약표를 테이블 위에 놓는다. 종이가 테이블 위에 닿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다.

"용인 건 이자 미수금이 3개월째입니다. 시행사 대표가 전화를 안 받기 시작했습니다."

전화를 안 받는다는 것. 이 업계에서는 항복 선언에 가깝다.

"시공사 현장 답사 다녀왔는데요. 공정률 서류랑 실제가 맞지 않습니다."

침묵. 에어컨 소리만 낮게 운다. 누군가의 자판기 커피에서 올라오는 김이 형광등 빛에 반사되어 가늘게 흔들린다.

이 장면은 낯설지 않다. 3장에서 이미 한 번 본 회의실이다. 같은 크기의 테이블, 같은 종류의 서류, 같은 무게의 침묵. 달라진 것이 있다면 시선이다. 3장에서는 이 회의실 안에 있었다. 서류를 넘기고, 숫자를 따지고, 도장을 찍는 손을 가까이에서 보았다. 위원장의 볼펜이 돌아가는 것, 심사역의 바인더에서 플라스틱 색인 탭이 딸깍거리는 소리, 준법감시인이 형광펜으로 규정 조항을 체크하는 모습 — 그 모든 디테일을 안쪽에서 보았다.

지금은 이 회의실을 바깥에서 본다. 같은 시각, 지구 반대편에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회의실 안에서 보면 이것이 세계의 전부다. 밖에서 보면 이것은 세 개의 문법 중 하나일 뿐이다.


2

오후 2시, 같은 회의실. 테이블 위의 풍경이 달라져 있다. 각 자리 앞에 바인더 한 부씩. 두께가 3센티미터는 된다. 색인 탭 — "사업계획서", "감정평가서", "재무제표", "시공사 신용등급", "분양성 검토". 바인더를 펼칠 때마다 새 종이 냄새와 토너 잉크 냄새가 섞여 올라온다. 오늘 안건은 경기도 외곽의 주상복합 개발 건이다.

여신심사위원회가 시작된다. 다섯 명이 자리에 앉는다. 위원장, 수석 심사역, 리스크관리팀장, 준법감시인, 영업 담당 RM.

RM이 프로젝터를 켠다. 파워포인트 12장. 첫 장에 숫자가 뜬다.

총 사업비 1,850억 원. 요청 대출 규모 680억 원. 담보 감정평가액 토지 1,020억 원, LTV 67%. 시공사 신용등급 BBB+. 분양가 3.3제곱미터당 1,650만 원.

680억 원. 평균 연봉 4,000만 원 기준으로, 1,700명이 1년간 번 돈의 총합이다.

RM의 발표가 10분간 이어진다. 지하철 연장 호재, 경쟁력 있는 분양가, 시공사 책임준공 확약.

심사역이 발언을 시작하면서 공기가 바뀐다.

"분양률 가정부터 짚겠습니다. 인근 유사 단지 실적 — A단지 64%, B단지 58%, C단지 71%. 평균 64%. 손익분기점이 73%인데, 분양가를 시세 수준으로 낮추면 손익분기점은 81%로 올라갑니다."

RM이 반박한다. 역세권 프리미엄, 특화 평면.

"지하철 연장이 확정입니까?"

"예비타당성 통과했습니다."

"착공은요?"

멈칫. "내년 하반기 예정입니다."

예정. 착공이 아니라 예정. 예비타당성과 실제 착공 사이에는 예산 배정, 설계, 입찰, 보상이 산처럼 쌓여 있다. 이 자리에 있는 다섯 명 모두 그것을 안다. RM도 안다. 그런데도 "예정"이라는 단어를 쓸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리스크관리팀장이 끼어든다.

"포트폴리오 관점에서 말씀드리면, 현재 PF 비중이 신용공여 대비 18.3%입니다. 이 건을 넣으면 여유가 1.7%밖에 안 남습니다."

준법감시인이 서류를 들여다본다. "시공사 책임준공 확약서, 본 계약서 있습니까? 도급계약안 말고요."

침묵.

이 침묵의 질감은 3장에서 경험한 것과 같다. 숫자와 논리를 쌓아도 채울 수 없는 공백. 분양률 73%가 현실적인지, 지하철이 제때 뚫릴지, 시공사가 끝까지 책임질지. 확실한 것은 불확실하다는 사실뿐이고, 그 불확실성 앞에서 누군가는 "가"라고 말해야 한다.

3시 45분, 위원장이 처음으로 입을 연다.

그전까지 그는 오른손으로 볼펜을 돌리고 있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운 볼펜이 한 바퀴, 또 한 바퀴. 발표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볼펜이 멈춘다고 3장에서 말했다. 오늘은 볼펜이 두 번 멈추었다 — 분양률 가정에서 한 번, 확약서 부재에서 한 번. 그가 안경 너머로 RM을 바라볼 때, 그 시선은 질문보다 날카롭다.

"조건부로 올려봅시다. 확약서 원본 징구 전제, 분양률 가정 65%로 재산출."

투표. 찬성, 찬성, 조건부 찬성, 찬성, 기권. 가결.

4시 10분, 직인.

위원장이 서랍에서 인장을 꺼낸다. 원형 직인. 지름 3센티미터 남짓한 나무 손잡이가 세월에 닳아 매끄럽다. 인주함 뚜껑을 연다. 빨간 인주의 기름 냄새가 잠깐 번진다. 인장을 인주에 찍고, 의사록 위에 내려놓는다. 종이 위에 인장이 닿는 순간의 소리 — 둔탁하고 짧은, "턱" 소리. 잉크가 종이 섬유에 스며들기까지 1초도 걸리지 않는다. 인장을 들어올리면 빨간 원 안에 은행명과 직인 문구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2시간 10분의 논쟁이 이 한 동작으로 수렴한다.

이 순간의 무게를 위원장은 느끼고 있을까. 인장을 내려놓기 직전, 그의 오른손이 미세하게 멈칫하는 것을 심사역은 알아챘다. 0.5초쯤의 망설임. 그것이 신중함인지 습관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30년간 금융 현장에서 일한 사람의 손이 인장 위에서 멈추는 그 0.5초 안에는, 숫자가 담지 못하는 무엇 — 직감, 경험, 두려움 — 이 압축되어 있을 것이다.

680억 원의 흐름이 확정된 시각, 서울 시간으로 오후 4시 10분.

뉴욕은 새벽 3시 10분이다. 맨해튼 허드슨 야드 50번지, 블랙록 본사 건물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포스터 앤 파트너스(Foster + Partners)가 설계한 58층, 높이 308미터의 유리 타워. LEED 골드 인증을 받은 290만 평방피트의 빌딩이 허드슨 강변에 서 있다. 로비에는 자연광이 쏟아지고, 프라이빗 스카이 로비에서는 강 너머 뉴저지의 불빛이 보인다. 그러나 새벽 3시의 로비에는 경비원 외에 아무도 없다.

사람은 없지만 시스템은 깨어 있다. 워싱턴주 이스트 위내치(East Wenatchee)의 데이터센터에서는 약 6,000대의 서버가 멈추지 않고 돌아가고 있다. 파란 LED 표시등이 일정한 리듬으로 깜박이고, 공조 시스템의 저음이 끊임없이 울린다. 실내 온도 18도. 컬럼비아 강의 수력발전소에서 공급되는 전력이 서버 랙을 식힌다. 옥상의 간접 증발 냉각 유닛이 서버 구역의 뜨거운 공기를 빨아들이고, 차가운 공기를 내보낸다. PUE(전력사용효율)는 1.13에서 1.21 사이. 이 데이터센터를 관리하는 상주 인력은 6명에 불과하다. 블랙록 자체 개발 모니터링 소프트웨어가 6,000대의 서버를 원격으로 감시한다.

알라딘(Aladdin)이 전날 마감 데이터를 기반으로 데일리 리스크 리포트를 생성하고 있다. 14조 달러 규모의 포트폴리오를 대상으로, 수천 가지 시나리오의 몬테카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다. 몬테카를로 시뮬레이션이란 난수를 이용해 미래의 가능한 경로를 수천, 수만 개 생성하고, 그 경로들의 분포를 분석하는 방법이다. 금리가 50bp 오르면, 지정학 리스크가 확대되면, 유동성이 급격히 수축하면, 미국과 중국 사이에 관세 전쟁이 격화되면, 일본은행이 금리를 올리면. 수천 갈래의 미래를 동시에 계산하고, 각 시나리오에서 포트폴리오의 손익을 추정하며, 그 결과를 확률 분포로 압축한다. 그리고 그 확률 분포에서 최악의 5% — VaR(Value at Risk), 최대 예상 손실 — 를 추출해 PDF 한 장으로 만든다.

서울의 회의실에서 다섯 명이 2시간 10분 동안 680억 원을 논의하는 사이, 알라딘은 14조 달러 — 한화로 약 1경 8,000조 원 — 를 점검했다.


3

뉴욕 시간 오전 6시 30분, 서울 시간 오후 8시 30분.

서윤아가 허드슨 야드의 사무실에 들어선다. 50 허드슨 야드 빌딩의 지상층 입구. 자동문을 지나면 대리석과 유리로 이루어진 로비가 펼쳐진다. 천장이 높고, 자연광이 쏟아지는 설계다. 배지를 보안 게이트에 찍는다 — 짧은 전자음, 초록 불, 유리 게이트가 열린다.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허드슨 강 쪽 유리벽을 통해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이 보인다. 블랙록이 임대한 15개 층 중 서윤아의 팀이 있는 층에서 내려, 통로를 걸어 자기 자리에 앉기까지 3분. 그사이 서울의 저축은행에서는 심사역이 의사록을 정리하고 퇴근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네 개의 모니터. 모니터 하나에 블룸버그 터미널 — 검은 화면 위에 초록색과 주황색 텍스트가 빽빽하게 흐른다. 하나에 알라딘 대시보드 — 초록색에서 노란색, 빨간색으로 변하는 히트맵 타일들이 촘촘하게 나열되어 있다. 각 타일이 하나의 포트폴리오 또는 자산군을 대표하고, 색상이 리스크 수준을 표시한다. 초록은 정상, 노란은 주의, 빨간은 위반 — 직관적이지만, 그 직관 뒤에는 수천 가지 시나리오의 확률 계산이 깔려 있다. 하나에 알라딘 코파일럿(Aladdin Copilot) 채팅 인터페이스 — 2023년 블랙록이 마이크로소프트와 협업해 도입한 자연어 AI 어시스턴트. 마지막 하나에 이메일.

커피를 내려놓고 알라딘 대시보드를 연다. 종이컵에서 올라오는 아메리카노 향이 모니터 열기와 만나 금방 사라진다. 오늘의 리스크 리포트가 이미 와 있다.

VaR 위반 3건.

포트폴리오 A — 베타 1.12, 위임 한도 1.05 이하 초과. 포트폴리오 B — 듀레이션 7.2년, 위임 한도 6.5년 이하 초과. 포트폴리오 C — 이머징마켓 익스포저 18.3%, 위임 한도 15% 이하 초과.

조치 기한: 오늘 장 마감 전 리밸런싱 완료.

알라딘 코파일럿이 각 건에 대한 리밸런싱 제안을 이미 준비해놨다. 포트폴리오 A는 주식 비중 3.2% 축소. 포트폴리오 B는 10년물 미 국채를 5년물로 교체, 액면 2억 달러. 포트폴리오 C는 이머징마켓 ETF 4억 5,000만 달러 매도.

서윤아는 코파일럿 채팅 창에 입력한다.

"포트폴리오 C의 EM 비중 초과가 일시적 요인인지 구조적 요인인지 분석해줘."

3초 후 답이 온다. "지난 30일 데이터 기준, EM 비중 증가의 78%는 인도 IT 섹터 랠리에 기인합니다. 구조적 요인(위안화 약세)이 22%입니다. 권고: 인도 비중만 조정, 기타 EM 유지."

서윤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팀장에게 메신저를 보낸다. "Portfolio C 확인했습니다. 코파일럿 권고대로 인도 비중만 조정하겠습니다."

이 과정에 걸린 시간은 12분이다.

래리 핑크(Larry Fink)가 블랙록을 세운 계기는 실패였다. 1986년 퍼스트보스턴(First Boston) 재직 시절. 핑크는 모기지 채권 트레이딩의 스타였다. 채권부의 공동 부서장이자 경영위원회 멤버, 관리 이사(Managing Director). 모기지 담보부 증권과 금융 선물·옵션 분야를 개척한 인물이었다. CEO 후보로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금리 예측에 실패했다. 핑크의 팀은 금리가 하락할 것이라는 확신에 포지션을 집중시켰다. 금리가 예상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을 때 — 금리가 예기치 않게 하락하면서 그의 모기지 포지션의 헤지가 무력화되었을 때 — 한 분기 만에 1억 달러가 증발했다. 금리의 방향은 맞았으나, 움직임의 속도와 폭을 틀렸다. 헤지의 구조가 그 속도를 감당하지 못했다. 영웅에서 전범으로의 추락은 순식간이었다. 복도에서 동료들이 눈을 피했다. 그 전까지 10년간 회사에 가져다 준 수익은 이미 잊혀져 있었다.

그 경험이 그에게 강박적인 철학을 심어주었다. 리스크를 이해하지 못하면 투자하지 않는다. 직감을 믿지 않는다. 직감이 만들어낸 1억 달러의 구멍을, 시스템이 다시는 허용하지 않게 만들겠다. 1988년 블랙스톤(Blackstone) 그룹의 우산 아래에서 블랙록을 공동 설립하면서 알라딘을 회사의 중추 신경계로 설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어떤 인간도 다시 저지르지 못하게 만들 시스템. 한 사람의 실패가 만들어낸 그 시스템이 40년 뒤 14조 달러를 관리하고 있다.

알라딘은 원래 내부 리스크 관리 도구였다. 자산(Asset), 부채(Liability), 채무(Debt), 파생상품(Derivative) 투자 네트워크 — 그래서 Aladdin이다. 그것이 1990년대 중반 외부 기관에 판매되기 시작했고, 2020년대 중반에는 모니터링하는 자산이 약 21조 달러를 넘어섰다. 블랙록 자체가 운용하는 14조 달러(2025년 12월 말 기준)만으로도 전 세계 금융자산의 약 5%에 해당하지만, 알라딘은 그보다 넓은 바다를 감시한다. 1,000개 이상의 기관이 투자 프로세스의 일부 또는 전부에 알라딘을 사용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도이체방크, 수많은 연기금과 보험사가 알라딘의 고객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도, 유럽중앙은행(ECB)도 위기 때 알라딘에 의존했다. 2008년 금융위기에서 부실 자산 매입 프로그램을 설계할 때, 2020년 팬데믹에서 시장이 얼어붙었을 때. 블랙록의 기술 서비스(알라딘과 eFront 포함)는 2025년 기준 연간 매출 20억 달러, 전년 대비 24% 성장을 기록했다. 래리 핑크는 알라딘을 "기술 스타트업"이라 부르며 블랙록을 자산운용사가 아닌 기술 기업으로 재정의하려 했다.

서윤아가 하는 일은 결정이 아니다. 확인이다. 알라딘이 리스크를 감지하고, 시나리오를 분석하고, 해법을 제안한다. 서윤아는 그 제안이 합리적인지 검증하고, 실행 버튼을 누른다. 표면적으로는 인간이 최종 결정권을 가진다. 그러나 알라딘이 "리스크 초과"를 띄웠을 때, 그것을 무시하고 포지션을 유지하는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사실상 없다. 컴플라이언스 위반이 되고, 성과 책임이 따른다. 알고리즘이 실질적인 거부권을 갖고 있는 셈이다.

서울의 저축은행 위원장은 2시간 10분 동안 서류를 넘기고, 심사역의 보고를 듣고, 준법감시인의 이의를 접수한 뒤, 자신의 경험과 직관을 더해 판단했다. 서윤아는 12분 만에 알라딘의 분석을 확인하고 실행했다. 위원장의 판단 근거는 30년의 실무 경험이다. 서윤아의 판단 근거는 수천 가지 시나리오를 동시에 돌린 시뮬레이션이다.

둘 다 "이 자본을 여기에 배분해도 되는가"를 묻고 있다. 묻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4

전화가 울린다.

서윤아는 화면에서 눈을 떼고 휴대폰을 확인한다. 아버지다. 서울 시간 오후 9시. 퇴근 후 저녁을 먹고 전화하는 시간이다. 아버지는 한국의 시중은행에서 30년을 일한 은행원이다. 지점장을 거쳐 여신심사 부서를 맡았고, 지금은 퇴직했다. 그의 경력 전체가 "사람을 보고 판단하는" 일이었다.

"오늘 하루 어땠어?"

"VaR 위반 세 건 처리했어요. 별 거 아니었어요."

"아직도 그 컴퓨터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서윤아는 웃는다. 이 대화는 변주만 달라질 뿐 매번 같은 곳으로 향한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아니라, 알라딘이 분석하면 나는 확인하는 거예요."

"내가 여신심사할 때는 서류만 보는 게 아니었거든. 사장님을 만나서 눈을 봤어. 이 사람이 진짜 이 사업을 할 사람인지, 서류 뒤에 뭘 숨기고 있는지. 숫자가 아무리 좋아도 눈빛이 이상하면 안 했어."

아버지는 잠시 멈추었다가 덧붙인다.

"한 번은 말이야, 강남에 꽤 큰 빌딩 담보 대출 건이 올라왔는데. 서류상으로는 완벽했어. LTV, 임대율, 감정가, 다 맞았어. 근데 실사 나가서 보니까 건물 로비에 가구가 없더라고. 안내 데스크도 비어 있고, 우편함에 우편물이 쌓여 있었어. 임대율 95%라고 적혀 있는데, 건물에 사람이 없는 거야."

"그래서요?"

"돌아와서 부결시켰지. 다른 위원들은 서류만 보고 통과시키려 했는데, 내가 반대했어. 나중에 그 시행사 대표가 다른 데서 문제가 터졌어. 허위 임대차 계약서였다는 게 밝혀졌지."

서윤아는 수화기 너머로 아버지의 숨소리를 듣는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묻어난다. 현장에 가서, 눈으로 보고, 냄새를 맡고, 분위기를 읽는 것. 그것이 아버지 세대의 여신심사였다.

"아빠, 알라딘은 눈빛 대신 데이터를 봐요. 지난 30년간의 상관관계, 수천 개의 시나리오, 실시간 시장 데이터. 눈빛보다 정확해요."

아버지는 바로 반박하지 않는다. 수화기 너머로 신문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아버지는 경제 관련 기사를 스크랩하는 버릇이 있다. 요즘은 알라딘과 AI 투자 관련 기사를 따로 모아두고 있다고 했다. 식탁 위에 오려놓은 기사들이 노란 포스트잇과 함께 쌓여 있다는 것을, 어머니가 전화로 알려준 적이 있다. 아버지 나름의 방식으로 딸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묻는다.

"100%는 아니잖아?"

잠시 멈춘다. 알라딘의 모델이 포착하지 못하는 것 — 블랙스완, 전례 없는 상관관계의 붕괴 — 이 실제로 존재한다. 2020년 3월에 그것을 목격했다.

그 주는 서윤아의 커리어에서 가장 긴 일주일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세계를 덮쳤을 때, 모든 자산이 동시에 떨어졌다. 주식, 채권, 원자재, 심지어 안전자산인 미 국채시장마저 유동성이 증발했다. 3월 9일부터 18일 사이, 미 10년물 국채 수익률이 64베이시스포인트나 급등했다 — 채권 가격이 급락했다는 뜻이다. 세계에서 가장 깊고 유동적인 시장으로 여겨지던 미 국채시장이 얼어붙은 것이다. 외국인, 뮤추얼 펀드, 헤지 펀드가 동시에 매도에 나서면서 — 그 규모가 2020년 1분기에만 각각 2,870억 달러, 2,660억 달러, 1,960억 달러에 달했다 — 딜러들의 대차대조표가 포화되었다. 규제가 허용하는 한도까지 재고를 안은 딜러들이 더 이상 매수할 수 없게 되면서, 매수-매도 스프레드가 급등하고 시장 깊이가 소멸했다.

알라딘의 히트맵이 온통 빨갛게 변하는 것을 서윤아는 지켜봤다. 히트맵의 타일이 하나씩, 그리고 한꺼번에 빨간색으로 바뀌는 장면은, 도시의 불이 하나씩 꺼지는 것 같았다. 알라딘의 시나리오 분석이 평상시에는 정확했지만, 모든 자산 간 상관관계가 1.0으로 수렴하는 상황 — 모든 것이 동시에 떨어지는 상황 — 은 모델의 기본 가정을 무너뜨렸다. 연준은 3월 15일부터 31일 사이에 7,750억 달러의 미 국채와 2,910억 달러의 모기지담보부증권(MBS)을 매입해야 했다. 매일 1조 달러의 오버나이트 레포를 경매에 내놓았다. 공적 유동성 투입이 없었다면, 시장은 완전히 마비되었을 것이다.

그 주에 서윤아는 매일 새벽 4시에 출근하고 자정에 퇴근했다. 커피를 하루에 여섯 잔 마셨고, 점심을 두 번 건너뛰었다. 알라딘의 히트맵이 조금씩 초록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은 연준의 개입 이후였다.

"100%는 아니에요. 하지만 아빠의 눈빛 판단도 100%는 아니잖아요."

아버지가 웃는다. 반박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화를 끊지 않고 잠시 숨을 고른다.

"서윤아, 하나만 더 물어보자."

"네."

"그 알라딘이라는 게 틀리면, 누가 책임지는 거야?"

서윤아는 대답하지 못한다. 알라딘은 조언 도구라는 것이 공식 입장이고, 최종 판단은 포트폴리오 매니저의 몫이라는 것이 법적 구조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알라딘의 경고를 무시하는 매니저는 없다. 컴플라이언스 위반이 걸리고, 손실이 나면 성과 책임이 따른다. 도구라는 이름 뒤에 실질적인 거부권이 숨어 있다. 책임은 인간이 지고, 판단은 시스템이 내린다. 이 구조의 이상함을 서윤아는 알고 있지만, 아버지에게 설명하기엔 너무 많은 맥락이 필요하다.

"... 복잡해요."

"그래, 복잡하겠지."

아버지의 목소리에 판단이 없다. 걱정만 묻어 나온다. 아버지는 2011년 저축은행 사태를 목격한 세대다. 부산저축은행이 무너졌을 때, 같은 업계에 있던 동료들이 줄줄이 조사를 받았다. 아버지의 은행에도 검찰이 왔다. 서류를 박스 째 가져갔고, 몇 달간 불안한 날들이 이어졌다. 아버지 자신은 무관했지만, 옆자리에 앉아 있던 동기가 체포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때 문제는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이었고, 책임 소재는 명확했다. 대주주가 구속되고, 경영진이 해임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알라딘의 세계에서는 그 명확함이 없다. 시스템이 판단하고, 인간이 확인하고, 잘못되면 — 모델을 수정할 뿐이다. 처벌받는 인간은 없다. 알고리즘을 체포할 수는 없으니까. 아버지가 불편해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이 불투명함이다.

전화를 끊고 서윤아는 다시 화면을 본다. 히트맵의 타일 대부분이 초록색이다. 오늘은 평온한 날이다. 포트폴리오 C의 인도 비중 조정이 실행 대기 중이다. 장이 열리면 자동으로 처리될 것이다. 4억 5,000만 달러 — 한화로 약 5,800억 원 — 가 알라딘의 제안대로 이동한다.

서울의 저축은행에서 680억 원이 결정되는 데 다섯 명과 2시간 10분이 필요했다. 여기서 5,800억 원이 이동하는 데는 한 명과 12분이 필요했다. 정확히 말하면, 한 명이 확인하는 데 12분이 필요했고, 알라딘이 분석하는 데는 밀리초가 필요했다.

래리 핑크는 2025년 연례 서한에서 "모든 자산의 토큰화"를 선언했다. 주식과 채권이 블록체인 위에서 토큰으로 거래되는 미래. 핑크는 썼다 — "모든 금융 자산은 토큰화될 수 있다." 분수 소유권, 실시간 정산, 시장이 닫힐 필요가 없는 세계. "주주 투표의 민주화", "수익률의 민주화"라는 표현을 썼다. 소유권과 투표권이 디지털로 추적되어, 누구든 어디서든 안전하게 투표할 수 있는 미래. 이전에는 법적·운영적·관료적 마찰에 의해 막혀 있던 투자 기회가 열린다고 했다.

그러나 핑크 자신이 지적한 결정적 장벽이 있었다. 디지털 신원 검증(digital verification)이다. "토큰화만을 옹호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디지털 검증 문제도 함께 풀어야 합니다." 누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 거래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블록체인 위에서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이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토큰화된 자산은 구조는 열려 있되 신뢰는 닫혀 있는 모순에 빠진다.

그 비전의 첫 번째 결과가 IBIT — 블랙록의 비트코인 ETF — 였다. IBIT는 2024년 1월 출시 후 10개월 만에 운용자산 1,000억 달러를 돌파했다(2025년 10월 기준). ETF 역사상 최단 기록이다. 금 ETF의 대표 상품 GLD가 2004년 상장 후 같은 규모에 도달하는 데 20년이 걸렸다. 2026년 2월 기준 IBIT의 운용자산은 약 541억 달러(78만 6,300 BTC), 전체 RIA(등록 투자자문사) 배분 암호화폐 ETF 자본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한화로 약 70조 원이다. 한국 국민연금 운용 규모의 약 6%에 해당하는 금액이, 사토시 나카모토가 국가의 통화 독점에 저항하며 설계한 자산에 몰려 있다. 그것을 포장한 것은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이고, 관리하는 것은 알라딘이다.

탈중앙화의 상징인 비트코인을, 중앙화된 ETF로 포장해서, 중앙화된 리스크 시스템이 관리한다. 투자자의 입구는 넓어졌지만, 시장의 운영체제는 좁아졌다. 접근은 민주화되었으나, 보관과 리스크 해석은 소수의 거대 기관에 집중되었다. 이 역설을 래리 핑크 자신이 얼마나 인식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2025년 서한에서 "민주화"라는 단어가 여러 번 등장하면서도, 블랙록이라는 단일 기관의 지배력 집중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는 것은 기록해둘 만하다.


5

같은 시각 — 정확히 같은 시각이라는 표현이 이 세 번째 장면에서는 의미가 없다. 이더리움 블록체인은 시간대를 모른다. 서울이 오후이든, 뉴욕이 새벽이든, 12초마다 블록이 생성된다. 멈추지 않는다. 주말도, 공휴일도, 점심시간도 없다.

블록 #19,XXX,XXX.

트랜잭션 하나가 기록된다.

발신: 0x7aF3... 수신: 0x87b1... (Aave V3 Pool). 메서드: supply. 자산: USDC. 금액: 500,000. 가스 사용: 142,387. 가스 가격: 12.3 gwei. 상태: 성공.

발신 주소 0x7aF3은 사람이 아니다. AI 에이전트 월렛이다. 자율적으로 DeFi 프로토콜을 탐색하고, 유동성 풀의 수익률을 비교하고, 최적의 전략을 계산해서 실행하는 코드다. 이 에이전트를 만든 개발자가 어딘가에 있겠지만, 이 트랜잭션을 실행한 것은 개발자가 아니라 에이전트 자신이다. 서명은 TEE(신뢰 실행 환경) 안에서 이루어졌고, 개발자조차 개인키에 직접 접근할 수 없다.

이더스캔(Etherscan)에서 이 트랜잭션을 조회하면, 발신자의 이름란은 비어 있다. 국적도, 나이도, 소속도 없다. 있는 것은 0x7aF3...이라는 42자리의 16진수 주소와, 이 주소가 과거에 실행한 트랜잭션의 이력뿐이다. 지난 30일간 이 주소는 847건의 트랜잭션을 실행했다. 평균 간격 51분. 인간이라면 잠을 자야 한다. 식사를 해야 한다. 이 주소는 새벽 3시에도, 일요일 아침에도 트랜잭션을 실행했다. 그것만으로도 이것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12초 뒤, 다음 블록.

같은 AI 에이전트가 두 번째 트랜잭션을 실행한다. 메서드: borrow. 자산: WETH. 금액: 150. 변동 금리. 헬스 팩터(Health Factor): 1.82. LTV: 54.9%. 상태: 성공.

50만 USDC를 담보로 공급하고, ETH를 빌렸다. 빌린 ETH로 유동성 풀에 참여하거나, 다른 프로토콜에서 추가 수익을 추구할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서류는 0장이다. 심사위원회도 없고, 리스크 리포트도 없으며, 도장도 없다. 코드가 규칙을 정의하고, 코드가 규칙을 집행한다.

Aave V3의 대출 승인 기준은 단순하다. 담보 가치 대비 대출 비율(LTV)이 프로토콜이 정한 한도 이내인가. 그것뿐이다. 차입자의 신용등급을 보지 않는다. 사업계획서를 검토하지 않는다. 차입자가 사람인지 코드인지조차 구별하지 않는다. 수학적 조건이 충족되면 실행된다. 서울의 저축은행에서 위원장이 분양률 가정과 시공사 신용등급과 지하철 연장 일정을 따지는 동안, Aave는 하나의 숫자만 확인한다: 담보 비율.

그리고 수학적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역시 자동으로 집행된다. 방향만 반대다.


6

ETH 가격이 급락한다.

한 사용자의 포지션이 위험 구간에 진입한다. 담보로 잡힌 200 ETH의 가치가 36만 달러에서 28만 달러로 떨어진다. 부채는 18만 USDC. 헬스 팩터가 1.0 아래로 내려간다 — 0.93.

청산(Liquidation)이 시작된다.

시간을 밀리초 단위로 분해하면 이렇다.

밀리초 0: 이더리움 노드가 새로운 블록을 수신한다. 블록 안에 ETH 가격을 업데이트하는 오라클 트랜잭션이 포함되어 있다. 체인링크(Chainlink) 오라클이 외부 거래소들의 가격 데이터를 집계하여 온체인에 기록한 것이다.

밀리초 12: Aave V3의 스마트컨트랙트가 새 가격을 기반으로 모든 포지션의 헬스 팩터를 재계산한다. 200 ETH 포지션의 헬스 팩터가 1.03에서 0.93으로 떨어진다.

밀리초 47: 청산 봇 0x5eD2가 이 포지션을 감지한다. 청산 봇은 24시간 내내 모든 차입 포지션의 헬스 팩터를 감시하는 자동화 프로그램이다. 1.0 아래로 떨어지는 포지션이 발견되면, 즉시 청산 트랜잭션을 제출한다.

밀리초 183: 청산 봇이 트랜잭션을 구성한다. 부채의 50%에 해당하는 9만 USDC를 대신 상환하고, 담보 ETH를 5% 보너스(청산 인센티브)와 함께 가져가는 트랜잭션.

밀리초 297: 트랜잭션이 멤풀(mempool)에 제출된다. 다른 청산 봇들도 같은 포지션을 감지하고 경쟁 트랜잭션을 제출하지만, 0x5eD2가 더 높은 가스 가격을 제시하여 우선순위를 확보한다.

다음 블록(12초 뒤): 트랜잭션이 블록에 포함되어 확정된다.

청산 봇 0x5eD2의 수익은 약 6,800달러. 부채 9만 USDC를 상환한 대가로 받은 담보 ETH 97.2개에는 5% 보너스가 포함되어 있고, 그 보너스가 수익이다.

트리거에서 실행까지 걸린 시간: 0.3초. 인간의 개입: 없음. 항소 절차: 없음.

서울의 저축은행에서 PF 대출이 부실화되면, 절차가 시작된다. 심사역이 시행사 사무실을 방문한다. 전화를 안 받던 대표가 마지못해 문을 연다. 사무실은 비좁고, 잉크젯 프린터가 탁자 위에 놓여 있으며, 벽에 걸린 조감도에는 "00 프리미엄 시티" 같은 이름이 적혀 있다. 대표는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연체 사유를 말한다. 자재비가 올랐다, 분양이 안 된다, 시공사가 기성금을 밀린다. 사유는 다르지만 결론은 같다. 돈이 없다.

담보 처분 방안을 논의한다. 그러나 경기도 외곽의 미분양 아파트 부지는 사려는 사람이 없다. 경매를 추진한다. 법원에 압류 신청을 넣고, 감정평가를 다시 받고, 배분 순위를 다투는 과정이 시작된다. 1순위 근저당, 2순위 근저당, 체불 임금, 세금 체납. 배분표를 놓고 채권자들이 줄을 선다. 법원 경매 게시판에 사건번호가 올라가고, 이해관계인들이 입찰 기일에 맞춰 모여든다. 첫 경매가 유찰된다 — 최저 매각 가격에도 응찰자가 없다. 두 번째 경매가 유찰된다 — 최저 가격이 20% 내려간다. 세 번째에서야 감정가의 60%에 낙찰된다. 회수된 금액을 나눠 가지면 원금의 절반도 남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 과정에 6개월에서 2년이 걸린다. 그 사이에 사정이 있다. 시행사 대표의 호소, 시공사와의 관계, 지역 경제에 미치는 영향. 현장 노동자들의 체불 임금 문제가 뉴스에 나오기도 한다. 사람이 판단하기에, 사정을 들을 수 있다.

Aave에서는 0.3초다. 헬스 팩터가 1.0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 코드가 작동한다. 청산 봇은 사정을 묻지 않는다. 담보의 주인이 누구인지, 왜 가격이 떨어졌는지, 내일 반등할 가능성이 있는지. 이 질문들은 코드의 관심사가 아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으므로 실행한다. 항소 절차는 없다. 유예 기간도 없다. 대신 시스템은 안전하게 유지된다 — 적어도 코드가 정상 작동하는 한.

이것이 코드의 문법이다. 냉정하다. 그리고 그 냉정함이 시스템을 지탱한다.


7

세 장면을 나란히 놓으면, 같은 행위의 완전히 다른 세 가지 문법이 드러난다.

서울의 저축은행. 다섯 명, 서류 200장, 2시간 10분. 위원장의 직인으로 확정. 680억 원.

뉴욕의 알라딘. 한 명의 확인, 밀리초의 시뮬레이션, 12분. 코파일럿의 제안으로 실행. 4억 5,000만 달러.

이더리움의 Aave. 인간 0명, 서류 0장, 12초. 코드의 조건 충족으로 자동 승인. 50만 달러.

세 시스템 모두 "이 자본을 여기에 배분해도 되는가"를 묻는다. 묻는 방식이 다르다.

저축은행 위원장은 직감과 경험으로 묻는다. 서류 뒤에 숨겨진 것, 시행사 대표의 눈빛, 30년의 업력이 만들어낸 감각. 불확실성 앞에서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볼펜을 돌리다가 "조건부로 올려봅시다"라고 말하는 그 순간의 무게. 인주 냄새가 번지고, 직인이 의사록 위에 내려앉는 0.5초의 망설임.

알라딘은 VaR 계산으로 묻는다. 수천 가지 시나리오를 돌려 최악의 경우 얼마를 잃을 수 있는지 수치화하고, 위임 한도와 비교한다. 감각이 아니라 확률이다. 서윤아는 그 확률을 확인한다. 히트맵의 초록색이 답이고, 빨간색이 경고다.

Aave의 스마트컨트랙트는 LTV 체크로 묻는다. 담보 가치가 대출 금액의 몇 %인가. 이것 하나뿐이다. 사업계획서도, 시나리오 분석도, 직감도 없다. 숫자 하나가 임계점을 넘느냐 넘지 않느냐.

세 시스템의 시간대가 겹치는 방식도 의미심장하다. 서울 시간 오후 4시 10분, 위원장의 직인이 의사록 위에 내려앉을 때 뉴욕은 새벽 3시 10분이다. 허드슨 야드의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워싱턴주 이스트 위내치의 데이터센터에서는 알라딘이 배치 작업을 돌리고 있다. 6,000대의 서버가 파란 LED를 깜박이며, 컬럼비아 강의 수력으로 냉각되고 있다. 서울의 저축은행 직원들이 퇴근 준비를 하는 오후 5시, 뉴욕은 새벽 3시. 서버 랙의 LED만 깜박인다. 서울 시간 저녁 8시 30분이 되어야 뉴욕에서 서윤아가 출근하고, 알라딘의 리스크 리포트를 연다. 서울의 하루가 끝나는 시점에 알라딘의 하루가 시작된다.

두 시스템 사이에는 시차가 있다. 업무 시간이 있고, 점심시간이 있고, 주말이 있다. 서울의 저축은행은 토요일에 문을 닫는다. 블랙록은 추수감사절과 독립기념일에 쉰다. 두 시스템 모두 인간의 생체 리듬에 묶여 있다. 사람이 쉬면 시스템도 쉰다. 서울의 밤에 위원장은 집에서 뉴스를 본다. 뉴욕의 밤에 서윤아는 아버지와 전화한다. 잠이 필요하고, 식사가 필요하며, 주말에는 쉬어야 한다.

이더리움은 그 사이를 쉬지 않고 채운다. 서울이 잠들고 뉴욕이 깨어나는 그 틈에도, 뉴욕이 잠들고 서울이 깨어나는 그 틈에도, 블록은 12초마다 생성된다. 크리스마스에도, 설날에도, 금융 위기의 한복판에서도. 자본은 멈추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세 번째 문법에서 자본은 멈출 수 없다. 멈추는 기능이 설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 시간대를 시네마틱하게 놓아보자. 서울의 밤 — 저축은행 건물의 불이 꺼지고, 주차장에 마지막 차가 빠져나간다. 10층 회의실의 형광등이 꺼지면, 화이트보드에 남은 숫자들이 어둠 속에 사라진다. 같은 순간, 뉴욕의 새벽 — 허드슨 야드의 유리 타워에 청소부의 불빛만 켜져 있다. 그리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시간 — 이더리움의 블록이 생성된다. 블록 #19,XXX,XXX+1. 서울의 밤과 뉴욕의 새벽 사이의 공백을, 코드가 12초 단위로 채워넣는다. 영원한 현재.

속도의 대비를 다시 놓아보면 이렇다. 2시간 10분, 밀리초, 12초. 첫 번째는 인간이 서류를 넘기고 질문하고 논쟁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두 번째는 알라딘이 수천 가지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세 번째는 이더리움 블록이 확정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12초는 밀리초보다 느리지만, 이 12초 안에는 인간의 개입이 전혀 없다. 알라딘의 밀리초 뒤에는 서윤아의 12분짜리 확인이 따라붙지만, Aave의 12초 뒤에는 아무도 없다. 다음 블록이 올 뿐이다.


8

세 문법의 공존이 가능한 이유는, 각각이 다른 영역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저축은행은 비정형의 대규모 프로젝트 금융을 처리한다. 분양률 가정이 현실적인지, 시공사가 신뢰할 만한지 — 이런 질문에 데이터만으로 답할 수는 없다. 로비에 가구가 있는지, 우편함에 우편물이 쌓여 있는지를 확인하러 현장에 가야 하는 세계다. 알라딘은 수만 개 자산의 상관관계를 추적하고, 규정된 한도 안에서 최적화한다. Aave는 초과담보 기반의 자동화 대출을 처리한다. 단순하지만 빠르고 투명하다.

그러나 영역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는 않다.

래리 핑크의 토큰화 비전이 실현된다면, 전통 자산 — 주식, 채권, 부동산 — 이 블록체인 위의 토큰이 된다. 알라딘이 토큰화된 자산의 리스크까지 관리하게 되면 두 번째 문법과 세 번째 문법의 경계가 흐려질 수밖에 없다. 리스크 해석의 권한이 하나의 플랫폼에 집중되면, 토큰화가 분산 원장 기술을 쓰더라도 실질적 의사결정은 중앙으로 수렴한다. 인프라는 탈중앙화되었는데 해석은 중앙화되는 역설. 도로는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지도는 하나뿐인 셈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같은 지도를 보고 운전하는 문제가 있다. 전 세계 1,000개 이상의 기관이 알라딘이라는 단일 리스크 모델을 사용한다. 평상시에는 문제가 없다. 교통이 원활할 때 같은 내비게이션을 쓰면 모두가 최적 경로로 빠르게 이동한다. 그러나 사고가 나면? 내비게이션이 동시에 같은 우회로를 안내하면, 그 우회로마저 정체된다. 금융에서도 마찬가지다. 위기가 발생하면 알라딘이 "매도"를 제안하고, 모든 기관이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거시 충격으로 VaR 한도가 악화되면 컴플라이언스 룰이 매도를 강제하고, 매도로 인한 가격 하락이 유동성을 더 저하시키며, 유동성 저하가 다시 모델 입력을 악화시킨다. 피드백 루프. 리스크 측정 잣대가 같으면 위기 국면에서 행동이 수렴한다.

이것은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1987년 블랙먼데이 때 포트폴리오 인슈어런스가 하락을 가속했던 것과 구조적으로 닮아 있다. 그때도 문제는 전략의 복잡성이 아니라, 같은 전략을 같은 시점에 같은 방향으로 실행하는 동시성이었다. 2020년 3월에 서윤아가 목격한 것도 같은 구조였다 — 모든 기관이 동시에 현금을 필요로 했고, 동시에 국채를 팔았으며, 동시에 유동성이 사라졌다.

알라딘의 위험은 거대해서가 아니다. 거대함과 표준화와 동시성이 결합되기 때문이다.

세 문법은 각자의 취약점도 갖고 있다. 저축은행 위원장의 판단은 편향에 취약하다. 컨소시엄의 압력, 실적의 유혹, 윗선의 눈치. 2011년 부산저축은행이 무너진 것은 시스템의 실패가 아니라, 시스템을 운영하는 인간이 내부에서 매수당한 결과였다. 대주주가 120개의 SPC를 통해 4.5조 원의 불법 대출을 집행했고, 서류는 멀쩡했다. 알라딘은 과거 상관관계가 미래에도 유효하다는 가정 위에 서 있다. 2020년 3월, 그 가정이 깨졌을 때 미 국채시장마저 유동성이 증발했고, 연준이 수천억 달러의 공적 유동성을 투입해야 했다. Aave는 오라클 가격이 조작되지 않는다는 가정 위에 놓여 있다. 오라클이 잘못된 가격을 전달하면, 코드는 정상 작동하면서 동시에 시스템을 파괴할 수 있다. 코드에는 "이 가격이 맞는가?"라고 의심하는 기능이 없다.

인간은 부패하고, 모델은 과거에 갇히며, 코드는 입력값에 종속된다. 세 문법 모두 완전하지 않다.


9

그래서 이것은 대체의 이야기가 아니다.

시간순으로 보면 인간에서 알고리즘으로, 알고리즘에서 프로토콜로, 깔끔한 진화처럼 보인다. 하나가 다음을 밀어내는 서사.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세 문법은 공존하고 있다. 같은 시각, 같은 행위를 각자의 방식으로 수행하면서 서로 다른 영역을 채우는 중이다.

서울의 위원장은 오늘도 서류를 넘긴다. 시행사 대표가 전화를 왜 안 받는지, 지하철 연장이 예정인지 확정인지 — 이 질문들에 답하려면 여전히 인간이 필요하다. 알라딘에게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이고, 스마트컨트랙트에 코딩할 수 없는 판단이다. 서윤아의 아버지가 빈 로비를 보고 부결을 결정한 것처럼, 숫자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읽는 것은 아직 인간의 영역이다.

서윤아는 오늘도 알라딘의 히트맵을 확인한다. 그녀가 하는 일의 본질은 확인이지 결정이 아니라고 그녀 자신이 말한다. 그러나 그 확인이 없으면 실행되지 않는다. 적어도 아직은. 인간은 알고리즘의 보조자가 되었지만, 보조자가 사라지면 시스템이 멈추는 보조자다. 래리 핑크가 1986년에 겪은 1억 달러의 손실이 만들어낸 시스템이, 서윤아의 12분짜리 확인을 통해 14조 달러를 움직인다. 한 사람의 실패가 만든 기계가, 다른 한 사람의 손을 빌려 작동하고 있다.

이더리움의 블록은 12초마다 생성되고, 청산이 실행되고, 항소 없이 정리된다. 그러나 세 번째 문법이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수학적으로 정의 가능한 조건뿐이다. "이 사업이 지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스마트컨트랙트에게 물을 수는 없다. "이 사람의 눈빛이 진실한가"를 코드로 판단할 수는 없다.

세 문법이 공존한다는 것은, 아직은 균형이 유지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이 이 평화로운 공존에 균열을 넣고 있다. 중앙은행의 기준금리가 세 번째 문법에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DeFi의 이자율은 한국은행이나 연준이 정하지 않는다. 유동성 풀의 수요와 공급이 정할 뿐이다. AI 에이전트는 국경을 인식하지 않는다. 코드는 여권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 330년간 자본의 흐름을 조절해온 중앙은행 시스템이, 처음으로 자신의 언어가 통하지 않는 영역과 마주하게 되었다.

세 개의 문법 위에서, 네 번째 문법을 쓰려는 시도가 시작되고 있다. 국가가 직접 화폐를 프로그래밍하는 것. 코드의 언어를 빌려, 국가의 권한을 다시 세우려는 시도. 베이징에서, 워싱턴에서, 프랑크푸르트에서 — 각자의 방식으로.

코드는 국경을 모른다. 그러나 국가는 국경을 포기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