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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4월 26일, 시카고.
시카고상품거래소(CBOT) 건물 안, 한때 흡연실이었던 공간이 아침부터 소란스럽다. 퀴퀴한 담배 냄새가 벽에 배어 있다. 수십 년간 트레이더들이 점심시간에 들어와 연기를 내뿜던 방이다. 누군가 그 방을 치우고, 팔각형 나무 구조물 여덟 개를 세우고, 벽에 CRT 모니터를 달았다. 검은 화면 위에 초록색 글자가 깜빡인다. 1973년의 첨단 기술이다.
일리노이 주지사 댄 워커와 SEC 의장 브래드 쿡이 참석했다. 그러나 이 행사의 주인공은 정치인이 아니라, 형형색색 메시 재킷을 입은 트레이더들이었다. 밝은 노랑, 빨강, 파랑 — 재킷 색으로 소속을 구분했다. 가슴에는 이름과 약자가 큼지막하게 적힌 배지가 달려 있었다. 군중 속에서 누가 뭘 외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시카고옵션거래소(CBOE). 미국 최초의 표준화된 옵션 거래소가 이날 문을 열었다. 시카고상품거래소의 부속 기관으로 출발한 CBOE는, 엄밀히 말하면 옆방의 곡물 거래소가 낳은 자식이었다. 밀, 옥수수, 대두의 선물을 거래하던 시카고는 이미 파생상품의 도시였다. 농산물의 미래 가격을 거래하던 곳에서, 이제 주식의 미래 변동성을 거래하기 시작한 것이다. 농부의 불확실성에서 투자자의 불확실성으로 — 대상은 바뀌었지만 본질은 같았다.
첫날 상장 종목은 16개. 모두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종목이었다. AT&T, 제록스(Xerox), 맥도날드, 포드, 폴라로이드,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머크, 이스트먼 코닥, 모토로라, 노스웨스트 항공, 스페리 랜드, 업존, 걸프앤웨스턴, 로우스, 애틀랜틱 리치필드, 펜즈오일. 1973년 미국 산업의 단면이 그 16개 이름 안에 압축되어 있었다. 통신의 독점 거인 AT&T. 복사기로 사무실 혁명을 이끌던 제록스. 패스트푸드의 확산을 상징하는 맥도날드. 자동차 산업의 포드. 즉석 사진의 폴라로이드. 반도체의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석유, 제약, 필름, 항공 — 전후 미국의 번영을 떠받치던 산업들이 16개 종목 안에 나열되어 있었다.
첫 체결 종목이 제록스였다고 전해진다. 복사기가 사무실을 바꾸던 시대에, 복사기 회사의 옵션이 새 시장의 첫 거래를 열었다. 왜 이 16개 종목이었는가. CBOE가 의도한 것은 명확했다 — 거래량이 많고 변동성이 충분한 대형주. 옵션이라는 새로운 상품을 시작하려면, 기초 자산이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어야 했다. 아무도 사지 않는 주식의 옵션은 더더욱 사지 않을 테니까.
이 16개 종목의 이후 궤적은 의미심장하다. 폴라로이드는 디지털 사진에 밀려 2001년 파산했다. 이스트먼 코닥은 디지털 카메라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2012년 파산 보호를 신청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디지털 카메라를 최초로 개발한 것이 코닥이었는데도. 노스웨스트 항공은 델타에 흡수되어 사라졌고, 걸프앤웨스턴은 기업 사냥꾼의 시대를 지나 파라마운트로 변신했다가 다시 바이아컴에 합병되었다. 스페리 랜드는 버로스와 합병해 유니시스가 되었다. 1973년 미국 산업을 대표하던 기업 상당수가 반세기를 버티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기업들의 불확실성을 거래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장은, 기업들이 사라진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기업이 사라지는 과정 자체가 — 파산, 합병, 인수 — 옵션 시장에는 또 하나의 거래 기회였다.
첫날 거래량은 911계약. 옆방 곡물 피트에서는 하루에 수만 건의 선물 계약이 소리와 손짓으로 체결되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911계약은 미미했다. 옆방에서 점심시간에 넘어온 선물 트레이더들 — 나중에 "맥도날드 런치 번치"라 불리게 되는 — 이 호기심 반으로 거래에 참여했을 정도다.
그러나 이 낡은 흡연실에서, 금융의 문법이 바뀌려 하고 있었다.
911계약으로 시작한 CBOE의 첫해 거래량은 110만 계약이었다. 10년 뒤인 1983년에는 8,200만 계약. 2008년에는 10억 계약을 넘었다. 2024년, 미국 상장옵션 전체 거래량은 122억 계약에 달했다. 기업은 사라지고 산업은 재편되어도, 불확실성 자체를 거래하는 시장은 반세기 만에 122억 계약으로 성장했다.
이 폭발의 기폭제는 총이나 폭탄이 아니었다. 종이 위의 수학, 공식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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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셔 블랙은 물리학을 전공했다. 응용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금융은 그의 원래 영역이 아니었다.
1965년, 블랙은 컨설팅 회사 아서 디 리틀(Arthur D. Little)에서 금융 연구를 시작했다. 케임브리지의 아콘 파크 — 아서 디 리틀 본사가 자리 잡은 찰스 강변의 연구단지 — 는 대학도 아니고 은행도 아닌 기묘한 공간이었다. 복도에는 화학자, 엔지니어, 경영 컨설턴트가 섞여 있었고, 사무실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1960년대의 사무실이 다 그랬다. 재떨이가 책상 위의 필수품이었고, 종이 출력물 더미 사이에서 파이프 담배 냄새가 배어 나왔다. 블랙은 이 사무실에서, 금융이라는 낯선 영역에 물리학의 도구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그가 파고든 문제는 단순하면서도 난해한 것이었다. 옵션의 가격은 얼마여야 하는가.
옵션이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따르면, 밀레토스의 탈레스는 천문 관측을 통해 이듬해 올리브 풍작을 예견하고, 겨울에 미리 올리브 압착기의 사용권을 헐값에 확보했다. 수확기가 되자 압착기 수요가 폭발했고, 탈레스는 사용권을 비싼 값에 되팔았다. 이것이 기록에 남은 최초의 옵션 거래에 가까운 것이다. 17세기 네덜란드 튤립 버블에서도 옵션 거래가 있었다. 투기꾼들은 아직 피지 않은 튤립의 구근을 특정 가격에 살 권리를 사고팔았다. 그러나 탈레스로부터 2,400년이 넘도록, 아무도 옵션의 "적정 가격"을 계산하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옵션은 존재했지만, 그것의 가치를 수학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왜 어려운가. 주식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 주식 한 주의 가격은 시장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 그 가격은 수천 명의 매수자와 매도자가 매 순간 합의하는 숫자다. 그러나 옵션은 미래에 대한 것이다. "3개월 뒤에 삼성전자 주식을 7만 원에 살 수 있는 권리"의 가격은 얼마인가? 그것은 3개월 뒤 삼성전자 주가가 어디에 있느냐에 달려 있고, 3개월 뒤 주가는 누구도 모른다. 3개월 동안 반도체 가격이 폭락할 수도 있고, 새 칩이 대박을 칠 수도 있다. 전쟁이 날 수도 있고, 금리가 오를 수도 있다. 미래의 모든 가능성이 이 작은 계약 하나에 압축되어 있다. 불확실성 그 자체를 사고파는 것이다.
1969년, MIT 주변에서 블랙과 마이런 숄즈의 협업이 본격화되었다. 두 사람은 같은 문제를 파고 있었지만, 사고의 출발점은 달랐다.
블랙은 물리학자의 방식으로 금융에 접근했다. 하버드에서 물리학 학사를 받고 응용수학으로 박사 학위를 마친 그에게, 금융은 또 하나의 물리적 시스템이었다. "만약 시장이 효율적이라면"이라는 전제를 세우고, 그 전제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을 따라갔다. 물리학이 "만약 마찰이 없다면"에서 출발하듯, 블랙은 "만약 차익거래 기회가 없다면"에서 출발한 것이다. 아서 디 리틀 컨설팅에서 금융 연구를 시작한 그에게, 월스트리트의 관행이나 경제학의 전통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수학적 일관성이었다. 전제가 옳다면 결론도 옳아야 한다. 결론이 직관에 반하더라도. 블랙은 학계에 정식 소속이 없는 외부인이기도 했다. 경제학과 교수가 아니라 컨설턴트였다. 이것이 오히려 그에게 자유를 주었을지 모른다. 기존 학파의 관성에 얽매이지 않았으니까.
숄즈는 경제학자였고, 실용주의자였다. 그의 관심은 이론 자체보다 이론이 현실에서 작동하는 방식에 있었다. 나중에 스탠퍼드 대학의 기자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품질도 중요하지만, 양도 중요합니다(quality is important, but quantity is also important)." 이 문장에 그의 기질이 담겨 있었다. 아름다운 공식보다 쓸 수 있는 공식을 원한 사람이었다.
그 옆에서 로버트 머튼이 긴 토론의 상대가 되었다. 머튼은 수학자 집안 출신이었다. 아버지 로버트 K. 머튼은 사회학의 거장으로,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라는 개념을 만든 사람이었다. 아들은 금융에서 아버지의 직관이 현실이 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 블랙-숄즈 공식은 일종의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었으니까. 머튼은 블랙-숄즈와 같은 문제를 독립적으로 풀고 있었으며, 1973년 Bell Journal of Economics and Management Science에 자신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블랙-숄즈의 공식을 일반화하고 확장한 것이었다. 배당이 있는 경우, 금리가 변하는 경우, 기초자산의 구조가 다른 경우까지 포괄하는 더 넓은 수학적 틀을 제시했다. 학계 일부에서는 "블랙-숄즈-머튼 모델"이라 불러야 한다는 명명 논쟁이 오래 지속되었고, 머튼 자신은 공식의 이름에 자기 이름이 빠진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하지 않았지만, 학계의 논쟁은 조용히 계속되었다.
세 사람의 대화가 핵심적인 돌파구를 만들어냈다. 물리학자의 엄밀함, 경제학자의 실용성, 수학자의 일반화 능력. 서로 다른 세 가지 기질이 하나의 공식으로 수렴한 것이다.
그 수렴의 현장을 상상해보자. 1960년대 말 MIT 슬론 경영대학원 건물. 복도 끝 세미나실의 녹색 칠판에는 편미분방정식이 빼곡히 적혀 있고, 분필 가루가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다. 테이블 위에는 종이컵 커피가 식어가고, 재떨이에서 연기가 올라온다. 블랙이 긴 침묵 끝에 한마디를 던지면, 숄즈가 그것을 실무의 언어로 번역하고, 머튼이 수학적 허점을 짚어낸다. 창밖으로는 찰스 강이 보인다. 1960년대 말, 베트남 반전 시위가 캠퍼스를 뒤흔들고 있었지만, 이 방 안의 세 사람은 다른 종류의 혁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칠판 위의 기호들이 월스트리트를 바꾸리라는 것을 아직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이 돌파구의 가장 쓸쓸한 대목은 한참 뒤에 온다.
피셔 블랙은 1993년에 인후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남은 시간 동안에도 연구를 계속했다. 골드만삭스의 파트너이자 금융 이론가로서, 그가 마지막까지 파고든 주제는 "소음(noise)" — 시장에서 정보와 구별할 수 없는 무의미한 변동 — 이었다. 1995년 8월 30일, 블랙은 세상을 떠났다. 쉰여덟이었다. 2년 뒤인 1997년, 노벨 경제학상 위원회는 옵션 가격 이론에 상을 수여했다. 수상자는 숄즈와 머튼이었다. 노벨상은 사후에 수여되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에, 블랙의 이름은 수상자 명단에 오를 수 없었다. 위원회는 시상 보도자료에서 블랙의 "선구적 공헌"을 별도로 언급하는 것으로 갈음해야 했다.
블랙이 2년만 더 살았더라면. 그러나 "만약"은 옵션의 언어다. 그리고 옵션에는 만기가 있다. 불확실성에 가격을 매기는 공식을 만든 사람이,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확실한 보상이 올 시점을 알 수 없었다.
블랙과 숄즈가 찾은 답의 핵심은 이것이었다. 옵션의 가격을 직접 구하려 하지 말고, 옵션의 위험을 완전히 상쇄하는 포트폴리오를 만들어라.
비유하면 이렇다. 집에 화재보험을 들 때, 보험회사는 "이 집이 불탈 확률"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수천 채의 집에 보험을 걸면, 전체적으로 몇 채가 타는지는 통계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 보험회사는 개별 사건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분산시켜 상쇄하는 것이다.
블랙과 숄즈의 아이디어도 비슷한 구조다. 주식과 옵션을 적절한 비율로 결합하면, 주가가 오르든 내리든 포트폴리오의 가치가 변하지 않는 조합을 만들 수 있다. 위험이 완전히 상쇄된 포트폴리오는 무위험 — 은행 예금과 같은 — 수익률을 얻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가 공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 시장은 그런 기회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 논리에서 옵션의 가격이 하나의 값으로 결정된다.
핵심을 다시 말하면: 미래를 예측할 필요가 없다. 위험을 상쇄할 수만 있으면, 가격은 저절로 나온다.
이것이 혁명적이었던 이유는, 불확실성 앞에서 인간의 직관이나 경험이 필요 없다는 선언이었기 때문이다. 메디치의 지점장이 상인의 평판을 저울질하고, 저축은행의 심사역이 분양률 가정을 두고 2시간 동안 논쟁하는 것 — 그 모든 인간적 판단의 과정을 수학이 대체할 수 있다는 것. 적어도 옵션이라는 영역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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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션이란 무엇인가. 개념부터 정리하자.
가장 직관적인 비유부터 시작하자. 당신이 서울 강남의 아파트를 6개월 뒤에 15억 원에 살 수 있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상상해보자. 계약금은 3,000만 원. 6개월 뒤 시세가 18억이 되면, 당신은 15억에 사서 3억의 차익을 얻는다. 계약금 3,000만 원을 빼도 2억 7,000만 원의 이득이다. 그런데 6개월 뒤 시세가 13억으로 떨어지면? 15억에 살 이유가 없다. 계약을 포기하면 된다. 잃는 것은 계약금 3,000만 원뿐이다. 오를 때의 이익은 무한히 클 수 있지만, 내릴 때의 손실은 계약금으로 한정된다. 이것이 옵션의 본질이다.
주식으로 옮겨보자. 콜옵션(call option)은 "살 수 있는 권리"다. 지금 삼성전자 주식이 7만 원이라고 치자. 누군가가 "3개월 뒤에 이 주식을 7만 5천 원에 살 수 있는 권리"를 판다면, 그것이 콜옵션이다.
왜 이런 권리를 사겠는가? 3개월 뒤 주가가 9만 원이 되면, 7만 5천 원에 살 수 있는 권리는 주당 1만 5천 원의 가치가 있다. 그러나 3개월 뒤 주가가 6만 원이 되면, 7만 5천 원에 살 이유가 없으므로 권리를 그냥 버리면 된다. 손실은 처음에 권리를 사기 위해 지불한 금액 — 프리미엄이라 부른다 — 으로 한정된다.
풋옵션(put option)은 반대다. "팔 수 있는 권리." 주가가 떨어질 때 돈을 버는 구조다.
이것은 사실 보험과 같다. 집에 화재보험을 드는 것은 "집이 불타면 보상받을 권리"를 사는 것이다. 보험료를 내고, 사고가 나면 보상을 받고, 사고가 나지 않으면 보험료는 그냥 비용으로 사라진다. 풋옵션도 마찬가지다. 주가 하락에 대한 보험이다. 프리미엄이 보험료고, 주가가 떨어지면 보상을 받고, 떨어지지 않으면 프리미엄만 날린다.
그런데 보험의 가격은 어떻게 정해지는가. 화재보험료는 보험회사가 수십 년간 쌓아온 화재 통계를 바탕으로 산출한다. 지역, 건물 구조, 용도 — 변수들을 넣으면 가격이 나온다. 그러나 옵션의 가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식 가격은 화재 확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화재는 독립적인 사건이다. 옆집이 불탔다고 내 집이 탈 확률이 높아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주식 시장에서는 한 종목의 급락이 다른 종목의 급락을 부르고, 공포가 공포를 낳는다. 사건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게다가 주식 가격은 매 순간 변하고, 그 변화 자체가 변한다. 변동성이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며, 변동성의 변동성마저 존재한다. 금리가 바뀌면 옵션 가격도 바뀌고, 만기까지 남은 시간이 줄어드는 것만으로도 가격이 바뀐다. 변수가 움직이고, 변수끼리 서로 영향을 주며, 그 모든 것이 동시에 작동한다.
1973년 이전까지, 옵션 가격은 경험과 감으로 정해졌다. 장외시장(OTC)에서 딜러들이 상대방과 일대일로 협상하며 가격을 매겼다. 표준화된 기준이 없었으므로, 같은 옵션이 딜러마다 다른 가격에 거래되었다. 누군가 AT&T 콜옵션을 사고 싶으면, 풋콜 딜러에게 전화를 걸어 가격을 물어야 했다. 딜러는 자신의 경험과 시장 감각에 기대어 가격을 불렀다. 다른 딜러에게 전화하면 다른 가격이 나올 수 있었다. 비교의 기준이 없었다.
SEC가 1959년에 옵션 시장을 조사했을 때, 그 시장은 소수 딜러가 지배하는 폐쇄적인 OTC 생태계였다. 옵션 딜러 협회 소속의 소수 중개인이 시장을 쥐고 있었고, 거래 조건은 표준화되어 있지 않았으며, 가격의 투명성은 거의 없었다. 옵션은 존재했지만 시장이라 부르기 어려운 상태였다.
블랙-숄즈 공식은 이 혼돈에 하나의 답을 제시했다. 다섯 가지 재료 — 현재 주가, 행사가격, 만기까지 남은 시간, 무위험 이자율, 그리고 변동성 — 를 넣으면 옵션의 적정 가격이 나온다. 레시피와 같다. 재료를 넣으면 요리가 나온다. 다만 다섯 번째 재료인 변동성은 직접 관측할 수 없어서 추정해야 했다. 레시피의 재료 중 하나가 "맛의 강도"처럼 모호한 것이었다. 이 맹점이 나중에 중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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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은 아름다웠다. 문제는 그것을 현실에서 쓰는 것이었다.
블랙과 숄즈의 논문은 처음에 학술지에 게재되지 못했다.
첫 번째 시도. Journal of Political Economy에 보냈다. 거절당했다. 경제학의 최고 학술지 중 하나였고, 시카고대학이 발행하는 저널이었다. 두 번째 시도. Review of Economics and Statistics에 보냈다. 역시 거절. 숄즈는 후에 거절 이유 중 하나를 이렇게 설명했다. 초기 원고에서 일부 내용을 다음 논문으로 유보한 것이 문제였다고. 논문이 불완전해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노벨상 시상 연설에 따르면, "위험 프리미엄이 필요 없다는 결론이 당시로서는 너무 낯설었다." 옵션의 적정 가격이 투자자의 위험 선호도와 무관하게 결정된다는 주장은, 당시 경제학의 상식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었다. 경제학에서 위험과 보상은 분리할 수 없는 짝이었다. 위험을 더 많이 감수하면 더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 이것이 금융 이론의 기본 전제였다. 그런데 블랙과 숄즈는 옵션의 영역에서 이 전제가 필요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경제학으로 보기엔 지나치게 수학적이라는 평가도 있었다고 한다.
두 번의 거절 뒤, 전환점이 왔다. 시카고대학의 유진 파마와 머턴 밀러가 논문에 관심을 가졌다. 파마는 효율적 시장 가설의 창시자였고, 밀러는 기업 재무 이론의 대가였다. 두 사람 모두 나중에 노벨상을 받게 되는 학자들이었다. 이들이 논문의 가치를 알아보고 편집진에 개입한 것은 결정적이었다. 한 번 거절한 Journal of Political Economy가 논문을 재검토했고, 수정을 거쳐 마침내 1973년 게재가 확정되었다.
블랙은 나중에 이 과정을 회고하며 담담하게 적었다. 논문을 보냈고, 거절당했고, 다시 보냈고, 다시 거절당했다고. 그 사이 2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 2년 동안 공식은 이미 학계의 비공식 경로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워킹페이퍼 형태로 돌아다니던 원고를 읽은 사람들이 있었고, MIT의 세미나에서 논의가 이루어졌다. 공식이 공식적으로 출판되기 전에, 공식은 이미 비공식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같은 해, 머튼이 Bell Journal of Economics에 공식을 일반화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같은 해, CBOE가 개장했다. 노벨상 위원회의 배경문서는 이 시점을 "공식 출판 한 달 전"이라고 기록했다. 우연이었지만, 시기가 완벽했다. 공식과 시장이 동시에 태어난 것이다.
CBOE의 낡은 흡연실에서 벌어진 일은, 학문과 시장의 충돌이었다. 편미분방정식으로 박사 학위를 쓴 사람들의 언어가, 소리와 손짓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의 세계에 던져진 것이다.
초기 트레이더들의 구성은 잡다했다. 조 설리번의 회고에 따르면 "별별 사람들의 모임(motley bunch)"이었다. 경험 많은 선물 트레이더도 있었지만, 옵션이 뭔지도 잘 모르는 신참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의 하루를 따라가보자. 아침 여섯 시. 시카고 남쪽 교외에서 일어나 서둘러 넥타이를 맨다. 차로 라살 스트리트까지 30분. 주차장에서 CBOT 건물까지 걸어가는 동안 미시간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시카고의 바람은 친절하지 않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메시 재킷을 꺼낸다. 밝은 노란색. 소속 회사를 알리는 색이다. 재킷을 걸치고 배지를 단다. 안주머니에는 어젯밤 컴퓨터 센터에서 출력한 밸류 시트가 접혀 있다. 커다란 연속 용지를 네 번 접어야 주머니에 들어간다. 접힌 자리가 닳아서 구멍이 나기도 한다. 피트에 들어서면 소음이 덮친다. 수십 명의 트레이더가 동시에 소리를 지르고 손짓을 한다. 사겠다는 손바닥을 안으로, 팔겠다는 손바닥을 바깥으로. 숫자는 손가락으로 표시한다. 목이 쉬어가면서도 고함을 멈출 수 없다. 멈추면 거래를 놓친다. 점심은 피트 옆 복도에서 샌드위치를 서서 먹는다. 종가가 찍히면 재킷을 벗고 기록 카드를 정리한다. 오늘의 손익을 계산한다. 셔츠가 땀에 젖어 있다. 퇴근 후 라살 스트리트의 바에서 맥주 한 잔. 옆자리에는 같은 피트에서 소리를 질렀던 경쟁자가 앉아 있다. 피트 밖에서는 동료다. 이것이 1973년 CBOE 트레이더의 일상이었다.
이들에게 편미분방정식과 확률적 적분의 세계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공식의 결과물 — 숫자 — 은 전달할 수 있었다.
피셔 블랙이 직접 만든 것이 있었다. "밸류 시트(value sheet)"라고 불린 종이다. 컴퓨터로 블랙-숄즈 공식의 결과를 주가별, 변동성별로 계산해서 표로 출력한 것이다. 커다란 컴퓨터 출력 용지를 접고 또 접어서 재킷 안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크기로 만들었다. 트레이더들은 이 종이를 호주머니에 넣고 피트에 섰다.
거래의 방식은 이랬다. CRT 모니터에서 기초 주식의 현재 가격을 확인한다. 호주머니에서 밸류 시트를 꺼내 해당 주가에 대응하는 이론 가격을 찾는다. 그리고 소리를 지른다. 핏(pit)의 거래 방식은 공개 호가(open outcry) — 사겠다, 팔겠다를 소리와 손짓으로 외치는 것이다.
고급 수학의 결과물이 접힌 종이 한 장이 되고, 그 종이를 들고 흡연실에서 소리를 지르는 — 이 장면이 1973년 시카고의 현실이었다. 추상과 육체의 결합. 편미분방정식과 땀의 만남.
1975년 무렵이 되면,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 계산기에 블랙-숄즈 모델이 탑재되기 시작했다. 프로그래밍 가능한 휴대용 계산기가 등장한 것이다. 숄즈 본인이 회고한 바에 따르면, 이 계산기의 보급이 공식의 실무 확산을 가속화했다. 종이 밸류 시트 대신 계산기 버튼 몇 번으로 이론 가격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밸류 시트는 어제의 종가를 기준으로 만들어졌기에 장중 가격 변화에 뒤처질 수밖에 없었지만, 계산기는 실시간으로 새 가격을 넣어 이론값을 뽑아낼 수 있었다. 도구가 바뀌자 속도가 바뀌었고, 속도가 바뀌자 시장이 바뀌었다.
그리고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초기에 CBOE의 실제 옵션 가격은 블랙-숄즈 이론 가격과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시장이 "틀렸다"기보다는, 트레이더들이 아직 공식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험과 감에 의존하는 트레이더가 대다수였고, 공식은 소수의 학문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만의 것이었다.
그런데 밸류 시트와 TI 계산기가 퍼지면서, 시장 가격이 점차 이론 가격에 수렴하기 시작했다. 메커니즘은 단순했다. 공식을 쓰는 트레이더가 시장에서 "저평가된" 옵션을 사고 "고평가된" 옵션을 팔았다. 이 전략이 꾸준히 수익을 내자, 다른 트레이더들도 주목했다. 누군가가 호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 가격을 확인하고 자신 있게 호가를 외칠 때, 감에 의존하는 트레이더는 점점 밀릴 수밖에 없었다. 공식을 쓰는 쪽이 돈을 벌자, 쓰지 않는 쪽도 따라 쓰기 시작했고, 결국 거의 모든 사람이 같은 공식으로 가격을 매기게 되었다.
에든버러 대학의 도널드 맥켄지는 이 현상에 이름을 붙였다. "수행성(performativity)." 모델이 현실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모델이 현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블랙-숄즈 공식이 시장을 정확히 예측해서 채택된 것이 아니라, 시장 참여자들이 공식을 채택하면서 시장이 공식에 맞추어진 것이다.
맥켄지는 이것을 "카메라가 아니라 엔진"이라는 비유로 설명했다. 카메라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찍는다. 엔진은 세계를 움직인다. 블랙-숄즈 공식은 옵션 시장의 카메라로 만들어졌지만, 실제로는 엔진이 되었다. 공식이 채택되기 전의 시장은 공식과 맞지 않았다. 공식이 채택된 후의 시장은 공식에 수렴했다. 이론이 현실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이론이 현실을 재구성한 것이다. 과학에서는 이런 일이 드물다. 뉴턴의 중력 법칙을 사람들이 믿든 말든 사과는 떨어진다. 그러나 금융에서는 참여자들의 믿음이 현실을 바꾼다. 모두가 같은 공식을 쓰면, 시장은 정말로 그 공식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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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숄즈가 바꾼 것은 옵션 시장만이 아니었다.
공식의 진짜 유산은 하나의 관념이었다. 리스크에 가격을 매길 수 있다. 불확실성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 거래할 수 있는 상품이다. 이 관념이 금융의 판을 뒤집었다.
옵션은 파생상품(derivatives)이라는 더 큰 범주의 일부다. 기초 자산에서 "파생된" 계약. 주식에서 파생된 옵션, 금리에서 파생된 스왑, 신용에서 파생된 CDS — 모두 같은 논리의 변주다. 미래의 불확실성을 쪼개고, 가격을 붙이고, 사고판다.
블랙-숄즈가 옵션의 가격 산정 방법을 제시하자, 같은 논리가 다른 영역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금리가 오를 위험? 금리 스왑으로 거래할 수 있다. 환율이 변할 위험? 통화 옵션이 있다. 거래 상대방이 파산할 위험? 신용부도스왑으로 이전할 수 있다. 리스크의 종류가 무엇이든, 그것을 분리하고 가격을 매기고 다른 누군가에게 넘길 수 있다는 관념이 금융의 모든 영역으로 스며들었다. 노벨상 위원회는 이 방법론이 "파생상품, 보험, 보증, 실물투자의 유연성 가치 평가"로 확장되었다고 명시했다.
1973년 CBOE의 첫날 거래량 911계약에서 시작된 흐름의 궤적을 다시 보자. 1983년, CBOE만으로 연간 8,200만 계약. 1993년, 1억 4천만 계약. 2006년, 5억 계약. 2008년, 10억 계약. 2024년, 미국 전체 상장옵션 122억 계약. 반세기 만에 거래량이 1,300만 배 넘게 늘었다.
이것은 단순히 숫자가 커진 것이 아니다. 리스크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바뀐 것이다.
1973년 이전, 리스크는 감수하거나 회피하는 것이었다. 농부는 내년 밀 가격이 떨어질 위험을 감수했고, 은행은 대출이 부실화될 위험을 충당금으로 대비했다. 리스크는 비용이었다. 피할 수 없는 비용.
1973년 이후, 리스크는 거래 가능한 상품이 되었다. 밀 가격 하락의 위험을 원하지 않는 농부는, 그 위험을 기꺼이 떠안을 투기자에게 팔 수 있다. 대출 부실의 위험을 원하지 않는 은행은, 그 위험을 다른 투자자에게 이전할 수 있다. 리스크가 비용에서 상품으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상품이 된 리스크는 쪼갤 수 있었다. 하나의 위험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각기 다른 투자자에게 팔 수 있었고, 반대로 여러 종류의 위험을 묶어 새로운 상품을 만들 수도 있었다. 리스크는 더 이상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하는 것이 되었다.
여기서 "같은 질문"의 형태가 바뀐다.
메디치 은행의 지점장은 물었다. "이 상인이 돈을 갚을 수 있는가." 잉글랜드 은행의 이사회는 물었다. "이 국채의 이자를 국가가 지급할 수 있는가." 저축은행의 여신심사위원회는 물었다. "이 시행사가 분양에 성공할 수 있는가."
블랙-숄즈는 질문의 형태 자체를 바꿨다.
"이 불확실성의 가격이 얼마인가."
갚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이분법이 아니라, 갚지 못할 확률이 가격에 반영되어 있느냐의 문제로 전환된 것이다. 판단이 계산으로, 직관이 공식으로, 인간이 수학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게이트키퍼가 문 앞에 서서 "너는 들어와도 된다, 너는 안 된다"고 말하던 세계에서, 모든 사람이 들어올 수 있되 각자의 리스크에 맞는 가격을 지불하는 세계로.
이 전환은 느리게, 그러나 되돌릴 수 없이 진행되었다. 옵션 트레이더들만 공식을 쓴 것이 아니었다. 채권 트레이더들이 금리 모델에 같은 논리를 적용하기 시작했고, 보험회사들이 리스크 산정에 파생상품 기법을 도입했으며, 기업의 재무 담당자들이 환율 변동을 헤지하기 위해 옵션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블랙-숄즈의 공식은 단일한 도구였지만, 그것이 심어놓은 관념 — 불확실성은 계량할 수 있고, 계량된 불확실성은 거래할 수 있다 — 은 하나의 철학이 되어 금융 전체에 퍼져나갔다.
1997년, 숄즈와 머튼은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블랙 없이. 위원회는 두 사람의 업적이 "새로운 방법론을 통해 경제의 많은 영역에서 경제적 가치 평가를 가능케 했다"고 평가했다. 불확실성에 가격을 매기는 방법이 인류 최고의 지적 훈장을 받은 순간이었다.
노벨상 시상 당시, 숄즈의 소속은 "롱텀캐피탈매니지먼트(LTCM)"로 기재되어 있었다. 불확실성에 가격을 매기는 공식의 공동 창시자가, 그 공식을 실전에 적용하는 헤지펀드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론과 실천의 완벽한 결합처럼 보였다. 수상 축하 자리에서, 아무도 이 소속이 1년 뒤에 무엇을 의미하게 될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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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숄즈의 공식은 아름다웠다. 간결했고, 논리적이었으며, 실용적이었다. 다섯 개의 재료를 넣으면 하나의 답이 나왔다. 흡연실의 트레이더들은 이 공식으로 돈을 벌었고, 노벨상 위원회는 이 공식에 인류 최고의 지적 훈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모든 공식에는 가정이 있다.
블랙-숄즈의 가정을 풀어보면 이렇다. 시장에서는 언제든 거래할 수 있다 — 거래 비용은 없다. 주가는 매끄럽게, 연속적으로 움직인다 — 갑자기 뛰거나 추락하지 않는다. 변동성은 일정하다 — 시장의 성격이 갑자기 변하지 않는다. 이 가정들은 수학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공식이 작동하려면, 세계가 이런 식으로 행동해야 했다.
현실의 시장은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거래 비용은 존재한다. 매수호가와 매도호가 사이에는 항상 간격이 있고, 주문이 체결되는 순간 슬리피지가 발생한다. 주가는 매끄럽게 움직이지 않고 점프한다. 기업이 실적을 발표하면 주가는 한 번에 10%가 뛸 수 있고, 전쟁이 발발하면 시장 전체가 순간적으로 추락할 수 있다. 변동성은 고정이 아니라 시시각각 변하며, 평온한 시기에는 잠들어 있다가 위기의 순간에 폭발적으로 커진다. 블랙-숄즈의 세계에서 주가는 잔잔한 호수 위의 보트처럼 부드럽게 흔들리지만, 현실의 주가는 때때로 폭풍우 속의 뗏목이 된다.
그러나 1973년부터 1987년까지, 이 가정들은 대체로 유지되는 것처럼 보였다. 시장은 꾸준히 성장했다. 다우존스 지수는 1982년의 800에서 1987년 8월의 2,700까지 세 배 이상 뛰었다. 옵션 시장은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블랙-숄즈는 실무의 표준이 되었고, TI 계산기와 밸류 시트는 거래소의 일상이 되었다. 공식이 작동했고, 시장은 공식대로 움직였으며, 공식의 가정을 의심하는 사람은 적었다. 14년간의 성공이 가정을 진실로 굳히고 있었다.
온도조절기에 비유하면 이렇다. 블랙-숄즈의 핵심 기법인 델타 헤지(delta hedge)는, 시장이 움직일 때마다 포트폴리오를 미세 조정하여 위험을 상쇄하는 것이다. 자동 온도조절기가 실내 온도를 22도로 유지하듯, 시장의 변동에 맞춰 끊임없이 포지션을 조절한다. 이 조절기는 온도가 천천히 변할 때 잘 작동한다. 23도가 되면 냉방을 틀고, 21도가 되면 난방을 튼다.
그러나 방 안에 갑자기 불이 붙으면? 온도가 22도에서 단숨에 200도로 뛰면? 온도조절기는 대응할 수 없다. 설계 범위를 벗어난 것이다.
블랙-숄즈의 아름다운 공식에는 전제가 있었다 — 시장은 연속적으로 움직인다. 가격이 어제 100이면 오늘 101이거나 99이지, 갑자기 60이 되지는 않는다고. 1987년 10월 19일, 다우존스 지수가 하루 만에 22.6% 추락했을 때, 그 가정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부서진 자리에서, 시장은 스스로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냈다.
블랙먼데이 다음 날 아침, CBOE의 피트에 트레이더들이 돌아왔다. 평소의 고함이 없었다. 재킷을 입고 피트에 섰지만, 아무도 먼저 호가를 외치지 않았다. 안주머니의 밸류 시트는 의미를 잃었다. 어제의 종가를 기준으로 계산한 숫자들이었으니까. 어제의 종가에서 22.6%가 증발한 오늘, 그 숫자들은 폐지였다. CRT 모니터의 초록색 글자는 깜빡이고 있었지만, 화면 위의 숫자가 어디서 멈출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공식이 전제한 세계 — 가격이 매끄럽게 움직이는 세계 — 가 하루 만에 무너졌다는 자각이 피트 위를 눌렀다. 새로운 계산이 필요했다. 새로운 가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날 아침, 무엇이 새로워야 하는지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블랙-숄즈의 가정 중 하나는 변동성이 일정하다는 것이었다. 행사가격이 얼마든, 만기가 언제든, 같은 기초자산의 옵션이라면 내재변동성은 동일해야 했다. 이것은 공식의 수학적 구조가 요구하는 전제였다. 블랙먼데이 이전까지, 실제 시장도 대체로 이 가정에 부합했다. 내재변동성을 행사가격별로 그래프에 찍어보면 거의 평평한 선이 나왔다. 공식이 세계를 묘사하고, 세계가 공식에 맞추어져 있던 시절이었다.
블랙먼데이가 그 평평한 선을 구겨버렸다.
1987년 이후, 옵션 시장에서 기묘한 패턴이 나타났다. 현재 주가보다 훨씬 낮은 행사가격의 풋옵션 — 시장이 폭락해야만 가치가 생기는, 이른바 외가격 풋옵션 — 의 내재변동성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것이다. 트레이더들이 극단적 하락에 더 높은 가격을 매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22.6%의 하루 하락을 겪은 시장은, 그런 하락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공식의 가정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았다. 행사가격별 내재변동성을 그래프로 그리면 양쪽 끝이 올라간 곡선이 되었고, 금융학자들은 이를 "변동성 스마일(volatility smile)"이라 불렀다.
스마일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웃을 일은 아니었다. 이 곡선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시장 참여자들이 블랙-숄즈의 가정 — 극단적 사건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 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된 것이다. 블랙-숄즈의 수학적 세계에서 주가의 변동은 정규분포를 따르며, 하루에 22%가 빠지는 사건의 확률은 사실상 0이다. 우주의 나이보다 긴 시간 동안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확률. 그러나 그 사건은 1987년 10월 19일에 일어났다. 공식은 꼬리 위험 — 확률은 낮지만 발생하면 치명적인 사건 — 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블랙먼데이는 그 꼬리 위험이 수학의 예측과 무관하게 현실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고, 트레이더들은 그 교훈을 가격에 직접 반영하기 시작했다. 버클리의 마크 루빈스타인은 1994년 논문에서 이 현상을 체계적으로 기록했고, 이후 많은 학자들이 이 "스마일"의 의미를 파고들었다.
여기에 수행성의 두 번째 국면이 있었다. 블랙-숄즈 공식이 시장을 만들었다 — 이것이 첫 번째 국면이었다. 공식이 시장에 채택되고, 시장이 공식에 맞추어졌다. 그런데 이제 시장은 공식이 틀린 지점까지 스스로 교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식이 무시한 극단적 사건의 가능성을, 공식이 만든 시장의 참여자들이 가격이라는 언어로 되살려놓았다. 공식은 틀렸지만, 공식이 만든 시장은 공식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시장은 자신의 창조자를 초월하기 시작한 셈이다.
변동성 스마일은 하나의 경고이기도 했다. 시장이 공식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경고. 수학이 포착하지 못한 두려움이 가격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경고. 그리고 그 두려움은 기억에서 왔다. 1987년의 기억. 하루 만에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다는 기억.
그 기억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이해하려면, 1987년 10월 19일 월요일 아침의 뉴욕증권거래소로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