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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아침 아홉 시, 경기도의 한 저축은행 10층 회의실에서 하루가 시작된다.
건물은 수도권 외곽 산업단지 한가운데 서 있다. 고속도로 IC에서 내리면 왕복 4차선 도로가 곧게 뻗어 있고, 도로 양옆으로 자동차 부품 공장의 철재 지붕이 줄을 잇는다. 공장 사이사이에 편의점, 김밥집, 노무사 사무실이 끼어 있다. 간판의 글씨는 때가 타 있고, 가로수는 미세먼지에 회색빛을 띠고 있다. 이 풍경 속에 10층짜리 유리 건물이 하나 솟아 있다. 산업단지 치고는 깔끔한 편이다. 외벽에 저축은행 이름이 적힌 간판이 붙어 있고, 1층 현관 위에는 "고객 여러분의 소중한 자산을 지키겠습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1층 로비에 들어서면 대리석 바닥이 깔끔하게 닦여 있고, 왼쪽에 관엽식물 화분 두 개가 놓여 있다. 보안 게이트를 지나면 오른쪽에 예금 창구가 있다. 오전 영업 시작 전인데도 로비 벤치에 고객 서너 명이 번호표를 쥐고 앉아 있다. 정기예금 만기 해지, 적금 신규 가입. 500만 원짜리 정기예금을 넣으러 온 60대 남성, 전세 보증금 일부를 정기적금에 넣으려는 30대 부부. 이 사람들의 돈이 10층에서 논의될 것이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10층에만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에 내리면, 복도 왼쪽에 회의실이 있다. 회의실이라고 부르기에는 좁다. 12인용 직사각형 테이블이 벽에 거의 닿을 정도로 들어차 있고, 창문 너머로는 주차장과 회색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형광등 두 줄이 천장에 박혀 있는데, 오른쪽 줄의 셋째 등이 미세하게 깜빡인다 — 시설팀에 보고했지만 두 달째 교체가 안 되고 있다. 에어컨은 틀어져 있는데 바람이 테이블 한쪽 끝에만 집중적으로 내려와, 그 자리에 앉는 리스크관리팀장은 늘 얇은 카디건을 걸친다. 벽 한쪽의 화이트보드에는 지난주 안건에서 누군가 적었다가 지운 숫자들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LTV 62%", "분양률 68%". 지워진 숫자들은 결정된 과거의 흔적이다. 오늘도 새로운 숫자들이 이 화이트보드 위에 올라올 것이다.
자판기 커피의 인스턴트 냄새가 회의실 안에 옅게 퍼져 있다. PE 시절에는 네스프레소 캡슐이었고, 투자은행에서는 핸드드립이었다. 저축은행의 커피는 복도 끝 자판기에서 뽑은 200원짜리 커피믹스다. 종이컵 바닥에 갈색 침전물이 가라앉아 있다. 이 커피의 품질이 의사결정의 품질과 무관하다는 것은, 이 업계에 오래 있으면 알게 된다.
경영기획본부장이 노트북을 열고 엑셀 파일을 띄운다. 화면 한가운데, 노란색으로 하이라이트된 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지난달 말 기준 BIS 비율이다.
BIS 비율. 이 숫자 하나가 저축은행의 운명을 가른다. 정식으로는 '국제결제은행 기준 자기자본비율'이라고 부르는데, 풀어서 말하면 이렇다. 은행은 남의 돈 — 예금자의 돈 — 으로 장사한다. 빌려준 돈이 떼이면, 그 손실은 결국 예금자의 돈으로 메워야 한다. BIS 비율은 "위험한 자산 100원당 자기 돈을 얼마나 쌓아뒀는가"를 보여주는 지표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100만 원을 빌려주는데, 내 주머니에 8만 원이 있으면 BIS 비율 8%다. 그 8만 원이 떼인 돈을 메우는 완충 장치다. 자산 규모 1조 원 이상 저축은행의 경우 이 비율이 8% 아래로 떨어지면 금융감독원이 들여다보기 시작하고, 더 떨어지면 경영개선권고, 경영개선요구, 경영개선명령 순으로 족쇄가 채워진다. 세 단계의 경고등이 순서대로 켜지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영업정지다.
2011년 부산저축은행이 그렇게 문을 닫았다. 2월 17일, 금융위원회가 영업정지 명령을 내렸다. 그 전달인 1월, 삼화저축은행이 부실기관으로 지정된 것이 신호탄이었다. 부산저축은행을 필두로 부산 계열 3개 저축은행이 동시에 셔터를 내렸고, 같은 해 대전, 보해, 전주, 도민 저축은행이 줄줄이 뒤를 따랐다. 도미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금감원이 당시 85개 저축은행 전수조사에 나서면서, 2011년 한 해에만 16개 저축은행이 영업정지를 받았다. 24곳의 저축은행이 문을 닫았고, 3만 8,000여 명의 예금자가 피해를 입었다. 전체 피해자는 약 10만 명에 달했다. 2010년 말 사상 최대인 76조 원에 달했던 저축은행 전체 예금에서 32조 원이 빠져나갔다. 뱅크런이었다. 예금보험공사가 투입한 공적 자금은 27조 원을 넘었는데, 2022년 말까지 회수된 금액은 절반인 13조 8,000억 원에 그쳤다. 나머지 절반은 국민의 세금으로 메워졌다.
2022년 하반기부터 부동산 PF 시장이 다시 급격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레고랜드 사태가 기폭제였다. 2022년 9월, 강원도가 레고랜드 개발사업의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에 대해 지급 보증을 이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부동산 PF 시장 전체에 공포가 번졌다. 지방자치단체가 보증을 깨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모든 PF 보증의 신뢰성을 훼손한 것이다. 2023년 12월에는 시공능력 16위의 태영건설이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PF 보증채무 3조 2천억 원을 감당하지 못한 결과였다. 시공능력 상위 20위 안의 건설사가 쓰러진다는 것은, 그 건설사가 책임준공을 확약한 수십 개 사업장의 금융 안전망이 동시에 흔들린다는 뜻이었다.
이 저축은행의 BIS 비율도 불안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우발 채무를 감안하면 자본 건전성이 걱정되는 수준이다. 경영기획본부장은 이 숫자를 매주 업데이트한다. 정확한 값은 분기 말에 확정되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 분기 말에 7%대가 찍히면 금감원 검사가 들어온다. 들어오면 나가는 데 석 달이 걸린다. 석 달이면 시장 상황이 어디로 갈지 모른다.
"PF 연체 현황부터 가겠습니다."
리스크관리팀장이 입을 연다. 카디건 소매를 여미며 A4 한 장짜리 요약표를 테이블 위에 놓는다. 다섯 건의 부동산 PF 대출 현황이 적혀 있다. 세 건은 검은 글씨, 한 건은 주황색, 그중 한 건이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주황색은 주의, 빨간색은 위험. 색의 의미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다.
"용인 건 이자 미수금이 3개월째입니다. 시행사 대표가 전화를 안 받기 시작했습니다."
전화를 안 받는다는 것은, 이 업계에서는 거의 항복 선언에 가깝다. 시행사가 연락을 끊으면, 남은 것은 담보 처분뿐이다. 그러나 부동산 경기가 얼어붙은 지금, 미분양 아파트 부지를 경매에 넘긴다고 해서 원금을 회수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용인 일대 미분양 물량은 이미 수천 세대에 달한다. 감정가 대비 60%에 낙찰되면 다행이다. 40%에 낙찰되면, 나머지 40%는 고스란히 손실이다. 그리고 경매에 넘기는 데만 6개월에서 1년이 걸린다. 그동안 이자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는다.
"시공사 현장 답사 다녀왔는데요." 다른 팀원이 말한다. "공정률 서류랑 실제가 맞지 않습니다. 서류에는 40%인데, 현장은 기초 공사 수준입니다. 골조가 올라간 흔적이 없습니다. 레미콘 타설 기록을 확인했는데 서류의 절반 수준이고, 현장에는 타워크레인이 보이지 않습니다."
침묵.
이 침묵에는 무게가 있다. 공정률 서류가 현장과 맞지 않는다는 것은, 기성(旣成) 청구가 부풀려졌을 가능성을 의미한다. 대출금이 공사에 쓰인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흘러갔을 수 있다. 시행사가 기성 청구를 부풀려 대출금을 빼돌리는 것은, PF 부실의 가장 흔한 수법 중 하나다. 2011년 저축은행 사태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었다 — 서류와 현실의 괴리. 부산저축은행의 대주주 박연호는 120여 개의 특수목적법인(SPC)을 세워 4조 5,000억 원이 넘는 대출을 집행했다. 대출자산 약 7조 원 중 PF 대출이 65%를 차지했다. 당시 저축은행권 평균 PF 비중이 20%를 넘지 않았으니, 세 배 이상의 집중이었다. 서류상으로는 멀쩡했다. 감사보고서에 문제가 없었고, PF 사업성 검토 보고서도 갖춰져 있었다. 그 서류들 뒤에서, 돈은 엉뚱한 곳으로 흐르고 있었다.
"금감원 검사 일정 나왔습니까?"
"다음 달 중순으로 들었습니다."
회의실 안에 연필 굴리는 소리가 난다. 경영기획본부장이 연필을 무의식적으로 돌리는 습관이 있다. 금감원 검사 일정이 확정되었다는 것은, 이미 누군가가 이 저축은행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뜻이다.
브리핑이 끝나도 공기는 풀리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이 상태에서 오후에 예정된 신규 PF 여신심사를 진행해야 한다는 것. 대출을 늘리면 위험가중자산이 증가해서 BIS 비율이 더 떨어진다. 그러나 대출을 줄이면 이자수익이 감소하고 수익성이 악화된다. 줄여도 위험, 늘려도 위험. 이것이 경영개선권고 직전 저축은행의 일상이다. 부동산 PF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손이 끼인 채로, 멈출 수도 없고 계속 돌릴 수도 없는 상태.
창밖으로 산업단지의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가고 있다. 이 건물 10층에서 보면, 경기도 외곽의 풍경은 어디를 바라봐도 회색이다. 공장 지붕, 아파트 단지, 주차장의 아스팔트. 그 회색 풍경 안에서, 수백억 원의 흐름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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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같은 회의실. 테이블 위의 풍경이 아침과 달라져 있다. 각 자리 앞에 바인더 한 부씩이 놓여 있다. 두께가 3센티미터는 된다. 색인 탭이 붙어 있다 — "사업계획서", "감정평가서", "재무제표", "시공사 신용등급", "분양성 검토". 누군가 바인더를 펼칠 때마다 플라스틱 색인 탭이 부딪히며 딸깍거리는 소리가 난다. 바인더 표지에는 날짜와 안건 번호가 적혀 있다. 오늘 안건은 경기도 외곽의 주상복합 개발 건이다.
여신심사위원회. 법률 용어로는 '신용공여의 적정성을 심의·의결하는 합의체'라고 부른다. 쉽게 말하면, 이 돈을 빌려줘도 되는지를 판단하는 자리다. 재적위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해야 하고, 출석위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통과된다. 상호저축은행법 제12조와 동법 시행령이 정한 절차다. 금융감독원의 '저축은행 감독업무 시행세칙'은 여기에 더해, 여신심사위원회의 독립성을 강조한다. 대주주나 경영진이 심사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의사록에는 참석자 성명, 안건 요지, 각 위원의 발언 요약, 표결 결과가 기록된다. 이 의사록은 금감원 검사 때 가장 먼저 들여다보는 서류 중 하나다. 원칙은 그렇다.
오늘 참석자는 다섯 명이다.
위원장 — 여신본부장이 맡고 있다. 상석에 앉는다. 나이는 오십대 초반이지만 머리가 반쯤 세었고, 은테 안경이 늘 코 끝에 걸쳐져 있다. 시중은행 기업금융본부에서 25년을 보낸 뒤 저축은행으로 옮겨왔다. 그의 역할은 주재이지 발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서류를 넘기며 듣는다. 오른손으로 볼펜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습관이 있다. 딸깍, 딸깍. 심사가 길어지면 이 소리가 빨라진다. 발표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볼펜이 멈추고, 안경 너머로 RM을 바라본다. 그 시선은 질문보다 날카롭다. 그의 한마디가 수백억의 방향을 결정하지만, 그 한마디는 회의가 거의 끝날 무렵에야 나온다. 기다리는 것이 권력이라는 것을 오래전에 배운 사람이다.
수석 심사역 — 이 딜의 리스크를 분석하고 보고서를 작성한 당사자다. 마른 체형에 안경을 쓴 40대 초반. 책상 앞에 빨간 볼펜과 형광펜이 정렬되어 있다. 바인더의 여기저기에 포스트잇이 붙어 있고, 감정평가서 페이지에는 빨간 밑줄이 그어져 있다. 딜의 결점을 가장 잘 안다. 회의실의 검사 역할. 바인더 속 숫자를 외울 정도로 읽었고, 인근 단지의 분양 실적 데이터를 별도의 A4 용지에 정리해왔다. 질문이 짧고 날카롭다. 그는 늘 한 치의 여유 없이 서류를 준비한다. 틀리면 금감원이 올 때 자기 이름이 보고서에 남기 때문이다.
리스크관리팀장 — 개별 딜이 아니라 포트폴리오 전체를 본다. "이 한 건"이 아니라 "이 한 건을 더했을 때 전체가 어떻게 되는가"를 따진다. 그녀의 노트북에는 포트폴리오 시뮬레이션 엑셀이 항상 열려 있다. 새 건을 넣었을 때 PF 비중, BIS 비율 변동, 유동성 커버리지 비율이 실시간으로 바뀌는 시트다. 숫자가 빨간색으로 변하면 고개를 젓는다. 오늘은 아직 고개를 젓지 않았지만, 카디건을 여미는 손이 긴장되어 있다.
준법감시인 — 규제 위반 여부만 본다. LTV, 동일인 한도, PF 총량 규제. 법에 걸리면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반대. 타협이 없다. 60대 초반으로, 참석자 중 가장 나이가 많다. 금감원 출신이다. 갈색 서류 봉투에서 관련 규정을 인쇄한 종이를 꺼내놓고, 안건이 올라올 때마다 형광펜으로 해당 조항을 체크한다. 이 사람이 "안 됩니다"라고 말하면, 논의의 여지가 없다. 법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법의 문구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가끔 위원장과 눈이 마주치면, 미세하게 고개를 흔드는 것으로 의사를 전달한다. 그가 반대하면 안건이 자동으로 부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반대 의견이 의사록에 남는다. 그리고 의사록은 금감원이 본다.
그리고 영업 담당 RM(Relationship Manager) — 이 딜을 발굴하고 키워온 사람이다. 30대 후반.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있지만, 와이셔츠 소매에 볼펜 자국이 묻어 있다. 시행사 편이다. 아니, 시행사 편이어야 한다 — 그래야 딜이 살아남으니까. 그는 문에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는다. 발표가 끝나면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위치. 동시에, 회의실에서 가장 먼저 바람을 맞는 자리이기도 하다. 소매를 접어 올린 팔 옆에 스마트폰이 놓여 있다. 오늘 아침에도 시행사 대표에게서 "오늘 결과 좀 알려주세요"라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받았다. 그 메시지의 무게가 그의 등에 얹혀 있다. 몇 달간 사업장을 돌아다니며 감정가를 맞추고, 시공사 확약서를 받아내고, 법무법인 의견서를 요청하고, 신용평가를 돌린 시간이 이 회의 2시간에 걸려 있다.
RM이 노트북을 열고 프로젝터를 켠다. 천장의 프로젝터에서 팬 소리가 작게 울리고, 흰 벽에 푸른 빛이 번진다.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12장. 첫 장에 사업 개요가 뜬다. RM의 목소리가 또렷하다. 약간 빠른 템포. 발표 연습을 여러 번 한 티가 난다. 오른손의 레이저 포인터가 슬라이드 위의 숫자를 가리킬 때마다 빨간 점이 벽 위를 미세하게 떤다. 긴장하고 있다.
사업명: OO시 OO동 주상복합 개발사업 규모: 지하 2층, 지상 29층, 아파트 280세대 + 오피스텔 120실 + 근린생활시설 총 사업비: 1,850억 원 요청 대출 규모: 680억 원 (브릿지론 → 본PF 전환) 담보: 토지 담보신탁 + 시공사 책임준공 확약 감정평가액: 토지 1,020억 원 (LTV 기준 67%) 시공사: 중견 건설사 (신용등급 BBB+, 도급순위 40위권) 분양가: 3.3㎡당 1,650만 원
680억 원. 이 숫자의 무게를 비전문가에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대한민국 평균 연봉이 약 4,000만 원이니, 680억 원은 1,700명이 한 해 동안 번 돈의 총합이다.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가 약 12억 원이니, 57채를 살 수 있는 돈이다. 1층 로비에서 번호표를 들고 앉아 있던 그 60대 남성이 500만 원짜리 정기예금을 넣으러 왔다면, 그 사람 1만 3,600명분의 예금이다. 이 저축은행 전체 자기자본의 상당 부분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그 돈을 빌려줄지 말지를, 이 좁은 회의실에서 다섯 명이 판단한다. 형광등이 깜빡이고, 자판기 커피가 식어가는 방에서.
RM의 발표가 10분간 이어진다. 슬라이드를 넘기며 사업의 강점을 설명한다. 지하철 연장 호재, 주변 시세 대비 경쟁력 있는 분양가, 시공사의 책임준공 확약, 시행사 대표의 이전 사업 트랙레코드 — 인근 지역에서 두 차례 분양에 성공한 이력. "특화 평면 설계로 3베이 구조를 구현했습니다." "학군이 우수합니다. 반경 1킬로미터 이내에 초등학교 두 곳, 중학교 한 곳." 슬라이드가 넘어갈 때마다 숫자가 바뀌지만, 논조는 하나다 — 이 사업은 될 수 있다.
숫자로 보면 나쁘지 않다. 총 분양수입 2,340억 원. 손익분기 분양률 73%. 사업 IRR 연 11.2%. 시공사 도급순위 40위권. 재무비율도 양호하다. 부채비율 180%, 영업이익률 6.3%. 책임준공 확약까지 받았다. 숫자만 놓고 보면 빌려줄 만하다.
그러나 숫자만 놓고 보는 사람은 이 회의실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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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역이 발언을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진다.
"분양률 가정부터 짚겠습니다."
그는 별도의 A4 한 장을 꺼낸다. 인근 유사 단지의 실제 분양 실적을 정리한 표다. 글씨가 빽빽하고 여백이 없다. 빨간 볼펜으로 핵심 숫자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다. 이 한 장을 만들기 위해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시스템, 부동산114, 그리고 현장 방문을 병행했다.
"손익분기점이 73%입니다. 그런데 인근 유사 단지 최근 실제 분양률을 보시면, A단지가 64%, B단지가 58%, C단지가 71%입니다. 평균 64%. 분양가 3.3㎡당 1,650만 원은 인근 시세보다 약 8% 높습니다. 분양가를 시세 수준으로 낮추면 손익분기점은 81%로 올라갑니다."
숫자들이 공중에 떠다닌다. 73%, 64%, 58%, 71%, 81%. 이 숫자들 사이의 간격에 680억 원의 운명이 걸려 있다. 9%포인트의 괴리. 사업 계획과 현실 사이에 놓인 간극.
RM이 반박한다. "A단지는 역세권이 아니었습니다. 저희 사업장은 지하철 연장 확정 구간이고, 2027년 개통 예정이라 프리미엄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특화 평면이—"
"지하철 연장이 확정인 건 맞습니까?" 심사역이 자른다.
"예비타당성 통과했습니다."
"착공은요?"
잠시 멈칫. "내년 하반기 예정입니다."
예정이다. 착공이 아니라 예정. 부동산 개발 사업에서 "예정"은 "아직 안 됐다"와 같은 말이다. 예비타당성 통과와 실제 착공 사이에는 예산 배정, 설계, 입찰, 보상이라는 산이 있다. 2027년 개통이 2029년이 되고, 2031년이 되는 것은 이 업계에서 흔한 일이다. 서울 지하철 9호선 3단계 연장은 애초 2014년 개통 예정이었지만, 2024년에야 완료되었다. 10년의 지연. "예정"이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불확실성의 크기다. "예정"이라는 단어는 분양 홍보에서는 "확정"처럼 쓰인다. 모델하우스 팸플릿에는 지하철 노선도가 이미 완성된 형태로 인쇄되어 있다. 그러나 여신심사 테이블 위에서, "예정"은 "예정"일 뿐이다.
"B단지 분양률 58%가 더 문제입니다." 심사역이 말을 잇는다. "B단지는 저희 사업장에서 2킬로미터 거리입니다. 같은 생활권이에요. 준공 후 1년이 지났는데 아직 58%입니다. 미분양 세대가 안 빠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미분양이 장기화되면 시행사가 이자 부담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RM이 다시 반박한다. "B단지는 조망권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저희 사업장은 남향 위주 배치에—"
"RM님." 심사역이 말한다.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단호하다. "모든 사업장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A단지는 역세권이 아니어서, B단지는 조망권이 나빠서, C단지는 평면이 별로라서. 그런데 결과는 세 곳 다 73% 이하입니다. 개별 이유가 다르더라도, 시장이 보내는 시그널은 같습니다. 이 지역에서 73% 이상 분양은 현재 시장에서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RM의 얼굴이 약간 굳는다. 그의 손이 발표 자료를 넘기다가 멈춘다.
심사역이 두 번째 포인트로 넘어간다. "시공사 신용등급 BBB+입니다. 태영건설 사태 이전에는 이 등급이면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태영건설이 A등급이었습니다. A등급 건설사가 PF 보증채무 때문에 워크아웃에 들어간 마당에, BBB+를 어떻게 보셔야 합니까. 등급이 한 단계만 내려가면 BB+, 투기등급입니다. 시공사가 투기등급으로 떨어지면 책임준공 확약의 의미가 희석됩니다."
리스크관리팀장이 끼어든다.
"포트폴리오 관점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우리 PF 비중이 신용공여 대비 18.3%입니다. 규제 한도가 20%니까, 이 건을 넣으면 여유가 1.7%밖에 안 남습니다. 다음 분기에 다른 건이 들어오면 한도 초과입니다."
그녀는 노트북 화면을 돌려 시뮬레이션 결과를 보여준다. 스프레드시트의 셀 하나가 노란색에서 주황색으로 바뀌어 있다. 빨간색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지만, 그 여유가 1.7%포인트라는 숫자 하나에 달려 있다.
이것은 개별 딜의 좋고 나쁨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설령 이 딜이 훌륭해도, 전체 포트폴리오에서 부동산 PF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높으면 시스템 리스크가 커진다. 한 바구니에 달걀을 너무 많이 담는 것이다. 2011년 부산저축은행의 PF 비중은 대출자산의 65%를 넘었다. 20%라는 규제 한도 자체가, 그 참사 이후에 만들어진 울타리다.
"그리고 하나 더." 리스크관리팀장이 덧붙인다. "이 건이 실행되면, 다음 달 금감원 검사에서 PF 비중 18.3%가 아니라 19.8%로 보고됩니다. 한도까지 0.2% 남은 포트폴리오를 검사관이 보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다들 아실 겁니다."
회의실이 다시 조용해진다. 에어컨 바람 소리만 남는다. 깜빡이는 형광등 아래로, 다섯 사람의 표정이 각자 다른 방향을 향해 있다.
준법감시인이 서류를 들여다보며 묻는다. "시공사 책임준공 확약서, 본 계약서 있습니까? 도급계약'안' 말고요."
RM이 바인더를 넘긴다. "... 현재 도급계약안으로 준비되어 있고, 확약서 원본은 대출 실행 전까지—"
"원본 없이 심의 진행이 가능합니까?" 준법감시인이 위원장을 본다. 그의 손에는 형광펜으로 밑줄 그어진 규정 사본이 들려 있다. '여신심사 시 시공사 책임준공 확약서 원본 징구 후 심의 진행' — 감독업무 시행세칙의 해당 조항이다. 안경 너머로 시선이 날카롭다.
침묵.
위원장의 볼펜 뚜껑 소리가 멈추었다.
이 침묵이 여신심사위원회의 본질이다. 숫자와 논리가 아무리 쌓여도, 결국 결정의 순간에는 말로 채울 수 없는 공백이 생긴다. 분양률 73%가 현실적인지, 지하철이 제때 뚫릴지, 시공사가 끝까지 책임질지 — 이 질문들에 대한 확실한 답은 누구에게도 없다. 확실한 것은 불확실하다는 사실뿐이고, 그 불확실성 앞에서 누군가는 "가"라고 말해야 한다.
여기서 이 딜이 컨소시엄이라는 사실이 무게를 더한다. 이 저축은행 단독이 아니라, 다른 금융기관 두 곳과 함께 자금을 대는 구조다. 나머지 두 곳은 이미 여신심사를 통과했다. 바인더 뒤쪽 참고자료 탭에 그 사실이 적혀 있다. 여기서 부결되면, 컨소시엄 전체가 흔들린다. 시행사와의 관계도 끊어진다. RM이 몇 달간 공들인 딜이 물거품이 된다.
그 압력은 심사 테이블 위에 올라오지 않지만, 회의실 안의 모든 사람이 느끼고 있다. 컨소시엄의 다른 참여 기관이 "저쪽은 이미 승인했는데, 왜 여기만 안 됩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시행사 대표는 "이 저축은행 때문에 사업이 엎어졌다"고 말할 것이다. 금융 시장은 좁다. 평판은 한번 무너지면 회복이 어렵다. RM의 실적 평가, 팀의 영업 목표, 부서장의 경영 평가 — 모든 것이 이 작은 회의실의 결정에 연결되어 있다. 순수한 신용 판단을 내려야 하는 자리에서, 판단과 무관한 힘들이 작용하고 있다.
다수의 목소리가 "가"라고 할 때, 혼자서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게이트키퍼의 판단이 '집단'이 되면, 역설적으로 판단의 날이 무뎌진다. 모두가 책임을 나누는 구조에서, 아무도 전적으로 책임지지 않게 된다. 이것이 합의체 의사결정의 구조적 모순이다. 독단은 위험하지만, 합의는 대담한 거부를 억제한다.
위원장이 처음으로 입을 연다. 회의가 시작된 지 1시간 40분쯤 되었을 때다. 볼펜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작은 소리가 나고, 그 소리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향한다.
"조건부로 올려봅시다. 시공사 책임준공 확약서 원본 징구 전제, 분양률 가정 65%로 재산출, LTV 재검토."
조건부 가결. 완전한 승인도 아니고, 명확한 거부도 아닌. 그러나 실무적으로는 이것이 "가"에 가깝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 조건이 충족되면 실행된다. 대부분의 경우, 조건은 충족된다 — 충족되도록 만든다. "분양률 가정 65%로 재산출"이라는 조건은, 재산출한 뒤에도 수익성이 나온다는 결론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그 결론이 나오면, 남은 조건들은 절차적으로 처리된다. 확약서 원본은 시공사에서 받아오면 되고, LTV 재검토는 감정평가사의 수치를 조정하면 된다. 조건부 가결은 사실상의 가결이다 — 다만, 모든 참석자에게 "나는 무조건 찬성한 것이 아니다"라는 방어선을 제공한다.
투표가 진행된다. 위원장이 한 명씩 호명한다.
"수석 심사역."
잠시 망설임. 빨간 볼펜을 테이블 위에서 한 번 굴린다. "... 조건부 찬성."
"리스크관리팀장."
"찬성. 단, 분양률 재산출 결과가 일정 수준 이하면 재상정 요청합니다."
"준법감시인."
서류를 한 번 더 들여다본다. 형광펜이 그어진 조항 위에 시선이 머문다. "확약서 원본 징구 전까지 기권합니다."
"RM은 이해관계자이므로 의결권이 없습니다."
찬성, 찬성, 조건부 찬성, 찬성, 기권. 가결이다. 요즘은 투표 결과가 누구의 것인지 표시가 나지 않게 하는 곳도 많다. 그래야 솔직한 판단이 가능하다는 취지인데, 그것은 동시에 책임의 소재도 흐려진다는 뜻이다. 기권이 하나 있었다. 그 기권의 무게는, 나중에 이 딜이 어떤 결과를 맞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의사록이 작성된다. 결의 사항이 기재된다. 680억 원의 흐름이 확정되는 순간은, 회의실의 크기에 어울리지 않게 조용하다.
4
나는 이 세계에 들어오기 전에 다른 세계에 있었다.
사모펀드(PE) — Private Equity. 투자자들의 돈을 모아 기업이나 자산에 투자하고, 가치를 올린 뒤 되파는 일이다. 내가 대표이사로 있던 PE에서 하던 일도 본질적으로는 같았다. "이 돈을 여기에 넣어도 되는가"를 판단하는 것.
그러나 두 세계의 공기는 완전히 달랐다.
PE의 투자위원회(Investment Committee, IC)는 빠르다. 강남 테헤란로의 사무실. 통유리 너머로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보인다. 회의실 테이블은 저축은행의 그것보다 넓지만, 바인더 대신 노트북 화면이 열려 있다. IC는 대개 영어로 진행된다. 한국 PE에서도 투자위원회는 "IC"라고 부르고, 보고 자료는 영문 파워포인트로 만든다. 30장 내외의 슬라이드. 첫 장은 Executive Summary — 한 페이지에 딜의 핵심을 압축한다. "What's the thesis?" "What's the exit multiple?" "What's the downside case?" 영어와 한국어가 섞인 대화가 빠른 템포로 오간다. "IRR이 몇이야?" "Deal-breaker가 뭐야?" 슬라이드 한 장에 핵심 숫자 네다섯 개. 30분이면 방향이 잡힌다. 확신이 있으면 빠르게 움직인다. 시장의 타이밍을 놓치면 딜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PE의 파워포인트는 깔끔하다. 맥킨지 스타일의 구조화된 슬라이드. 시장 분석(Market Overview), 투자 논거(Investment Thesis), 밸류에이션(Valuation), 리스크 요인(Key Risks), 출구 전략(Exit Strategy). 각 슬라이드에 하나의 메시지. 숫자는 차트와 표로 시각화되어 있고, 핵심 지표는 색깔로 구분된다 — 초록은 긍정, 빨강은 경고. "이 회사의 가치가 지금 300억인데, 우리가 손대면 500억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이 핵심 질문이다. 물론 PE도 downside risk를 본다. 그러나 프레임의 무게중심은 '기회' 쪽에 있다.
저축은행의 여신심사 자료는 다르다. 파워포인트가 아니라 바인더다. 3센티미터 두께의 바인더 안에, A4 용지에 빽빽하게 인쇄된 문서들이 색인 탭으로 구분되어 있다. 감정평가서, 등기부등본, 건축허가서, 사업계획서, 재무제표, 법무법인 의견서. 디자인은 없고, 수치와 문자만 있다. 화려하지 않지만, 정보의 밀도는 PE의 파워포인트보다 높다. PE의 슬라이드가 "이 딜이 왜 좋은가"를 설득하기 위한 문서라면, 저축은행의 바인더는 "이 딜이 왜 위험한가"를 검증하기 위한 문서다. 같은 정보를 정반대의 프레임으로 조직한 것이다. 무게중심이 '리스크' 쪽에 있다. "이 대출이 부실화되면 어떻게 되는가"가 모든 질문의 출발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PE가 운용하는 돈은 기관 투자자와 고액 자산가의 돈이다. 그들은 리스크를 이해하고 감수한다. 투자설명서에 "원금 손실 가능"이라고 적혀 있고, 그것에 서명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저축은행이 운용하는 돈은 예금자의 돈이다. 퇴직금을 맡긴 60대, 전세보증금을 넣어둔 젊은 부부, 매달 꼬박꼬박 적금을 붓는 자영업자. 그들은 자기 돈이 부동산 PF에 들어간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 은행이 알아서 잘 굴려줄 테니까. 예금자보호법이 5,000만 원까지 보호해주니까. 1층 로비에 앉아 있던 그 사람들이다.
PE에서 저축은행으로 넘어왔을 때 가장 적응이 어려웠던 것은 이 의사결정의 프레임 차이였다. 같은 자본 배분인데, 문법이 다르다. PE에서는 "왜 이 딜을 해야 하는가"를 증명하면 되지만, 저축은행에서는 "왜 이 딜이 안전한가"를 증명해야 한다. 주어가 다르다. 공격과 수비의 차이라기보다는, 바라보는 방향 자체가 다르다. PE에서는 창문 밖 지평선을 바라보지만, 저축은행에서는 발밑의 균열을 살핀다.
내가 기억하는 장면이 하나 있다. PE 시절, 한 중견기업 인수 건을 검토하고 있었다. 숫자는 좋았다. EBITDA 대비 인수가격이 합리적이었고, 시너지 시나리오도 설득력이 있었다. 투자위원회에서 나는 발표를 마치고 질의를 받았다. 가장 시니어한 파트너가 물었다. "이 딜에서 가장 흥분되는 점이 뭐야?" 그게 PE의 언어였다. 흥분. 기회. 상승.
저축은행에 온 뒤, 비슷한 규모의 PF 건을 심사하면서 내가 받은 질문은 달랐다. "이게 터지면 우리가 얼마를 잃습니까?" 그게 저축은행의 언어였다. 손실. 방어. 하한.
그리고 한 가지 더. 사람들이 몸을 사린다. PE에서는 과감한 판단이 칭찬받지만, 저축은행에서는 보수적인 판단이 미덕이다. 틀렸을 때의 대가가 다르기 때문이다. PE 펀드가 손실을 내면 투자자들이 분노하고 다음 펀드레이징이 어려워진다. 그러나 GP(General Partner, 운용사)가 감옥에 가지는 않는다. 저축은행의 대출이 부실화되면 BIS 비율이 떨어지고, 금감원이 들어오고, 신문에 이름이 나고, 경영진이 처벌을 받는다. 2011년 부산저축은행 사태 이후 구속된 사람이 70여 명이다. 대주주, 경영진, 심사역까지 줄줄이 법정에 섰다. 고객의 돈이라는 무게는,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나는 PE의 투자위원회에서 수백억 규모의 딜을 심사하면서 "Exit 배수가 얼마인가"를 물었다. 저축은행의 여신심사위원회에서는 "분양률 가정이 현실적인가"를 물었다. 질문의 형태는 달랐지만, 결국 같은 질문이었다:
이 사람이 돈을 갚을 수 있는가.
5
그 질문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600년 전 피렌체에서, 메디치 은행의 지점장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었다. 부르고뉴 공작에게 신용을 제공할 것인가. 양모 무역상의 환어음을 인수할 것인가. 그의 앞에는 거래 상대의 평판, 과거의 상환 이력, 지중해 항로의 불확실성이 놓여 있었고, 그는 그 모든 것을 계산기 없이 — 경험과 직관과 관계망으로 — 저울질했다.
서류의 형태가 달라졌을 뿐이다. 환어음이 여신심사보고서가 되었고, 금 플로린이 원화가 되었고, 피렌체에서 브뤼헤까지 25일 걸리던 송금이 실시간 이체가 되었다. 그러나 서류 더미 속에서 "이 사람이 돈을 갚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행위의 구조는, 놀라울 정도로 변하지 않았다.
메디치 은행에는 비밀 장부(libro segreto)가 있었다. 파트너들의 출자금, 각 지점의 손익, 대출 잔액이 기록된 가죽 장정의 장부였다. 금속 걸쇠로 잠겨 있었고, 이 장부를 열 수 있는 사람은 세 명뿐이었다. 1950년, 경제사학자 레이몬드 더 루버(Raymond de Roover)가 피렌체 고문서관에서 이 비밀 장부들을 발견했을 때, 600년 전 금융 제국의 체온을 재는 도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베네치아 지점의 총 자본금 12,000 플로린, 본점 출자 10,500 플로린, 지점장 출자 1,500 플로린. 각 지점의 수익성, 파트너별 자본금 변동, 부실 대출의 상세 내역 — 오늘날의 경영정보시스템(MIS)이 하는 일을 양피지와 잉크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저축은행에도 비밀 장부가 있다 — BIS 비율 추정 엑셀 파일이다. 공식 수치는 분기마다 나오지만, 실무자는 매주 이 숫자를 업데이트하며 은행의 체온을 잰다. 노란색 하이라이트가 양피지의 잉크를 대신하고, 피봇테이블이 장부의 페이지를 대신한다. 대비는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메디치의 장부에는 "남의 돈으로 얼마를 굴리고 있는가, 그 돈이 날아갈 때 버틸 수 있는 내 돈이 얼마인가"가 적혀 있었다. 저축은행의 엑셀에는 위험가중자산 총액, 자기자본 규모, 보완자본 항목이 적혀 있다. 형태는 양피지에서 스프레드시트로 바뀌었지만, 기능은 같다. 문지기(gatekeeper)에게 주어진 안전장치. "지금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알려주는 계기판.
그리고 문지기가 실패하는 방식도 같다.
메디치 은행이 쇠퇴한 핵심 원인 중 하나는, 브뤼헤 지점장 토마소 포르티나리가 본사의 통제를 벗어나 부르고뉴 궁정에 과도한 신용을 제공한 것이었다. 포르티나리는 열세 살에 브뤼헤 지점에 견습생으로 들어왔고, 1465년부터 1480년까지 지점장을 맡았다. 15년. 그 세월 동안 그는 부르고뉴 공작 샤를 르 테메레르(Charles the Bold)의 궁정에 깊이 들어갔다. 궁정의 연회에 초대받고, 공작의 측근으로 인정받는 사회적 지위에 취했다. 군주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은 정치적 영향력을 사는 행위였고, 포르티나리는 그 영향력에 매혹되었다. 그라블린(Gravelines) 항구의 양모 독점권을 연간 1만 6,000프랑에 사들였는데, 공작이 영국 양모 수입을 금지하면서 1471년 이후 투자금이 증발했다. 장부의 숫자보다 궁정의 총애가 그의 판단을 지배했다. 브뤼헤 지점이 1478년 청산될 때 누적 손실은 7만 금 플로린을 넘었다. 한 사람의 판단 오류가, 유럽 최대 금융 제국의 몰락을 앞당겼다.
2011년 부산저축은행의 대주주도 비슷했다. 여신심사위원회를 이미 결정된 안건의 추인 기관으로 만들었고, 준법감시인을 자기 사람으로 채웠으며, 120개의 SPC를 통해 4조 5,000억 원의 불법 대출을 집행했다. 포르티나리가 부르고뉴 궁정의 화려함에 눈이 멀었다면, 부산저축은행의 대주주는 부동산 개발의 이익에 눈이 멀었다. 도구는 달랐다 — 환어음과 SPC, 밀랍 인장과 법인 등기 — 그러나 패턴은 동일했다. 통제를 벗어난 현장 책임자가, 본부의 규약을 무시하고, 과도한 신용을 제공한 것.
시스템이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시스템을 운영하는 인간이 실패한 것이었다.
여신심사위원회, BIS 비율, CAEL 등급, 적기시정조치 — 이 모든 제도는 인간 게이트키퍼에게 씌운 안전장치다. 규칙으로 판단을 보조하고, 기준으로 재량을 제한하고, 처벌로 일탈을 억제한다. 메디치 은행에도 안전장치가 있었다 — "군주와 귀족에게는 가능한 한 거래하지 말라"는 내부 규약, 지점장의 자기자본 출자 의무, 본점의 감독 체계. 600년의 시차를 두고, 안전장치의 형태는 양피지에서 법률 조문으로, 가문의 규약에서 감독 당국의 시행세칙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안전장치를 만드는 것도 인간이고, 안전장치를 무력화하는 것도 인간이다.
600년의 역사가 보여주는 패턴이 있다면, 그것은 이것이다: 인간 게이트키퍼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잘 작동하지만, 실패할 때는 안전장치와 함께 실패한다. 포르티나리가 규약을 무시할 때, 로렌초 데 메디치는 은행 경영에 무관심했다. 부산저축은행의 대주주가 여신심사를 왜곡할 때, 금융감독원의 검사는 뒤늦게 도착했다. 안전장치가 가장 필요한 순간에, 안전장치가 작동하지 않는다. 이것이 역설이다.
6
오후 4시가 넘었다. 여신심사위원회가 끝나고, 회의실에는 식은 커피와 바인더만 남아 있다. 종이컵이 다섯 개. 커피가 남아 있는 컵은 두 개뿐이다. 나머지 세 개는 완전히 비어 있다. 2시간 40분의 회의.
RM이 가장 먼저 나갔다. 복도 끝 비상구 옆에서 전화기를 꺼내 시행사 대표에게 전화를 건다. "네, 조건부로 통과했습니다. 확약서 원본이랑 분양률 재산출 자료 필요합니다. 네, 가능합니다. 감사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밝다. 회의실에서의 긴장이 풀린 것이다. 전화를 마친 RM은 잠시 창밖을 내다본다. 주차장에 오후의 햇살이 비치고 있다. 그에게 "조건부 가결"은 사실상 "가결"이다. 조건을 채우는 것은 그의 일이고, 그는 그 일을 해낼 자신이 있다. 시행사 대표에게 전화를 끊고, 시공사 담당자에게 바로 문자를 보낸다. "확약서 원본 이번 주까지 가능하신가요?" 딜의 관성이 그를 앞으로 밀고 있다.
심사역은 의사록을 정리하고 있다. 각 위원의 발언 요지를 정리하고, 조건부 가결의 조건들을 명확하게 기재한다. 볼펜으로 기권 표시를 한 번 더 확인하고, 파일에 끼운다. 이 의사록이 나중에 문제가 됐을 때 자신을 보호하는 방패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분양률 가정에 대해 심사역이 인근 유사 단지 실적을 근거로 이의를 제기하였음"이라는 한 줄이, 나중에 중요해질 수 있다.
리스크관리팀장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 노트북을 열었다. PF 비중 엑셀 파일을 업데이트한다. 18.3%에서 19.8%로. 노란색 하이라이트가 또 하나 추가된다. 그녀의 표정에서, 안도보다는 긴장이 읽힌다. 19.8%라는 숫자가 다음 달 금감원 검사에서 어떻게 해석될지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준법감시인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한숨을 쉰다. 확약서 원본 없이 심의가 진행된 것이 마음에 걸린다. 기권이라는 의사 표시가 의사록에 남아 있으니 자신의 역할은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찜찜하다. 시행세칙의 문구가 머릿속에서 맴돈다.
위원장은 상석에 혼자 남아 바인더를 덮는다. 빈 종이컵을 한곳에 모으고, 볼펜을 가슴 주머니에 넣는다. 창밖을 한 번 바라본다. 산업단지의 하늘이 오후의 빛에 물들어 있다. 680억 원. 그 숫자가 가슴 주머니 속 볼펜의 무게처럼 남아 있다.
680억 원의 흐름이 결정되었다. 다섯 명이 2시간 넘게 논쟁한 끝에.
이것이 게이트키퍼의 일이다. 화려하지 않다. 드라마틱하지도 않다. 서류를 읽고, 숫자를 따지고, 질문을 던지고, 불확실성 앞에서 판단한다. 그리고 그 판단의 결과를 책임진다. 틀리면 이름이 의사록에 남고, 크게 틀리면 금감원이 오고, 더 크게 틀리면 검찰이 온다. 맞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부실을 막은 심사역은 영웅이 되지 않는다. 뉴스에 나오는 것은 언제나 부실을 막지 못한 심사역이다.
600년간 자본 배분은 이 방식으로 작동해왔다. 도구는 바뀌었지만 구조는 동일했다. 메디치의 환어음, 잉글랜드 은행의 국채, 현대 저축은행의 PF 대출 — 이름이 다를 뿐, 모두 "인간이 판단하고, 인간이 결정하고, 인간이 책임진다"는 같은 엔진 위에서 돌아간다.
이 엔진이 견고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600년이나 버텨왔으니까. 그러나 이 오후에, 이 회의실에서, 불편한 진실도 함께 드러났다. 이 엔진은 느리다. 한 건의 대출을 심사하는 데 2시간이 걸린다. 비싸다. 다섯 명의 전문가가 동시에 투입되어야 한다. 그리고 편향에 취약하다. 컨소시엄의 압력, 실적의 유혹, 윗선의 눈치 — 순수한 판단을 흐리는 힘들이 회의실 안에 항상 존재한다. 기권이라는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시스템의 한계를 보여준다. "가"도 아니고 "아니오"도 아닌, 책임을 회피하는 제3의 선택.
600년간, 이 느림과 비쌈과 취약함은 감수할 만한 비용이었다. 인간 외에는 이 판단을 대신할 존재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방법이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이 회의실에서 다섯 명이 2시간 동안 680억 원을 논의하는 같은 시각, 뉴욕의 한 서버에서는 알고리즘이 14조 달러 규모의 포트폴리오를 밀리초 단위로 리밸런싱하고 있다. 이더리움 블록체인에서는 스마트컨트랙트가 12초마다 수백 건의 대출을 자동으로 승인하고 있다. 서류도 없고, 회의도 없고, 도장도 없다. 코드가 규칙을 정하고, 코드가 규칙을 집행한다. 감정평가서를 넘기는 손가락도, 볼펜을 돌리는 위원장도, 기권 표를 던지는 누군가도 없다.
세 가지 모두 "자본 배분"이다. 세 가지 모두 같은 일을 한다. 그러나 그 방식은, 지구상에서 가능한 가장 다른 세 가지다.
이 저축은행의 회의실이 600년 금융 역사의 가장 마지막 형태인지, 아니면 아직도 유효한 최선인지 — 그 답을 찾으려면, 먼저 다른 두 가지 방법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알아야 한다.
1973년 시카고에서, 두 수학자가 불확실성에 가격을 붙이는 공식을 발표했다. 거기서부터 이야기가 달라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