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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0년, 영국 해군이 비치 헤드(Beachy Head) 해전에서 프랑스에 참패했다.
영국 해안에서 벌어진 해전이었다. 프랑스 함대가 영불해협을 장악했고, 런던은 침공의 위협에 노출되었다. 윌리엄 3세 — 네덜란드 출신으로 명예혁명을 통해 영국 왕이 된 인물 — 는 해군을 재건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150만 파운드가 필요했다.
비치 헤드 패전 소식은 빠르게 런던에 도달했다. 영불해협의 제해권이 프랑스에 넘어갔다는 것은 곧 침공이 가능해졌다는 의미였다. 템스 강 하구에 프랑스 함대가 나타날 수 있었다. 런던 시티의 상인들은 금을 숨기기 시작했고, 항구에서는 선박 보험료가 치솟았다. 해안가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짐을 꾸렸다. 영국 본토가 군사적 위협에 직접 노출된 것은 스페인 무적함대 이후 한 세기 만이었다. 전쟁은 바다 건너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해안선 바로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항구의 선술집에서, 시티의 커피하우스에서, 교회 앞마당에서 같은 질문이 떠돌았다 — 프랑스가 상륙하면 어떻게 되는가.
왕은 런던 시티(City of London)의 금세공업자(goldsmith)들에게 대출을 요청했다. 거절당했다.
당시 금세공업자들은 이름과 달리 금만 다루는 장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사실상 런던의 은행가였다. 귀족과 상인들이 금화를 맡기면 보관 영수증을 발행했고, 그 영수증이 시장에서 지불 수단으로 통용되었다. 금세공업자들의 금고는 런던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었고, 그들의 영수증은 영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종이였다. 왕실의 대부업자 역할을 맡는 일도 잦았다.
그런데 바로 그 역할이 문제였다. 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었다.
1672년 1월, 찰스 2세가 '지급정지 명령(Stop of the Exchequer)'을 선포했다. 왕실 금고에서 나가야 할 돈 — 금세공업자들에게 빌린 약 130만 파운드의 원리금 — 의 상환을 일방적으로 중단한 것이다. 선전포고도 없이, 협상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왕이 "갚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금세공업자 에드워드 백웰(Edward Backwell)은 하룻밤 사이에 최대 채권자에서 파산 직전의 처지로 전락했다. 왕실에 빌려준 돈을 회수할 수 없게 된 금세공업자들 가운데 일부는 줄줄이 문을 닫았고, 그들에게 돈을 맡겨둔 예금자들까지 연쇄적으로 손실을 입었다. 왕의 채무 불이행이 민간 금융 시스템 전체에 충격파를 보낸 것이다. 빚을 갚겠다는 왕의 말 한마디에 의존하는 시스템의 취약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었다. 이후 금세공업자들은 왕실 대출에 극도로 신중해졌고, 대출을 하더라도 훨씬 높은 이자를 요구했다.
18년이 지났지만, 런던 금융가의 기억은 선명했다. 왕의 빚은 왕의 개인적인 빚이었다. 왕이 돈을 빌리고 싶으면, 자신의 신용으로 빌려야 했다. 그런데 그 신용이라는 것이 왕의 기분에 달려 있었다. 마음이 바뀌면, 혹은 왕이 죽으면, 빚은 사라질 수 있었다. 금세공업자들이 윌리엄 3세의 요청을 거절한 것은 당연했다. 왕실에 돈을 빌려주는 것은, 15세기 피렌체에서 부르고뉴 공작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문제였다 — 군주의 상환 의지에 의존하는 도박.
메디치 은행의 포르티나리가 저질렀던 실수를, 런던의 금세공업자들은 반복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전쟁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유럽에서 가장 강한 군대와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고, 인구와 경제 규모 모두 영국의 세 배였다. 군사력만으로는 이길 수 없었다. 돈이 필요했다. 그것도 왕의 금고에서 나오는 돈이 아니라, 나라 전체의 자원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했다.
1693년, 재정은 한계에 도달했다. 9년 전쟁(1688~1697) 기간 동안 영국의 연간 전비는 550만~850만 파운드로 급증했는데, 이전 제임스 2세 시절 정부 지출은 연 170만 파운드에 불과했다. 지출이 4~5배로 뛰는 동안, 수입은 그만큼 늘지 않았다. 기존의 방식 — 단기 차입, 주화 재주조, 세금 인상 — 은 모두 한계에 부딪혔다. 단기 차입의 이자율은 치솟았고, 은화의 품질은 떨어지고 있었으며, 세금을 더 올리면 민심이 이반할 것이었다. 금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이때, 한 스코틀랜드 상인이 아이디어를 들고 나타났다.
2
윌리엄 패터슨(William Paterson).
금융 역사에서 그의 이름은 잉글랜드 은행의 설립자로 기록되어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설립자보다는 설계자에 가깝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설립 1년 만에 이사회와의 갈등으로 쫓겨난 인물이기도 하다.
패터슨의 아이디어는 단순하지만 혁명적이었다: 빚의 보증인을 왕에서 의회로 바꾸자.
구체적으로는 이런 구조였다. 투자자들에게 120만 파운드를 모집한다. 이 돈은 정부에 영구히 빌려준다 — 원금 상환 기한이 없는 영구채(perpetual bond)다. 대신 투자자들에게는 연 8%의 이자를 지급한다. 이자 지급은 왕의 약속이 아니라, 의회가 법으로 보증한다. 의회는 주류세와 선박톤세를 담보로 잡았다. 왕이 바뀌어도, 의회가 존속하는 한, 이자는 계속 나온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가 더 붙었다. 이 투자자 집단에게 은행 영업권을 준다. 예금을 받고, 은행권을 발행하고, 대출을 할 수 있는 권리. 이것이 잉글랜드 은행(Bank of England)이다.
1694년 4월, 의회가 톤니법(Tonnage Act)을 통과시키며 설립이 승인되었다. 6월, 투자자 모집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2일 만에 120만 파운드가 모두 모였다. 목표 금액이 전부 채워진 것이다. 전쟁의 위기감이 투자를 촉진했을 것이다. 연 8%의 이자를 의회가 법으로 보증한다는 조건은, 왕의 변덕에 전 재산을 잃었던 금세공업자들의 기억 속에서 유난히 매력적으로 빛났을 것이다.
1,268명의 투자자가 참여했다. 부유한 상인부터 미망인, 지방의 지주까지. 칩사이드(Cheapside)의 머서스 홀(Mercers' Hall) — 직물 상인 길드의 건물 — 에 줄을 섰다. 왕실 궁전이 아니라 상인 조합의 홀에서 국가의 미래가 결정된 것이다. 무거운 나무 문 앞에서, 비단 코트를 입은 상인과 검은 양모 옷의 미망인이 뒤섞여 대기했다. 오크 테이블 위에 거대한 가죽 장부가 펼쳐져 있었고, 투자자들은 차례로 이름과 금액을 적었다. 서기 17명의 깃펜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1694년 7월 27일, 윌리엄 3세가 왕실 헌장에 국새(國璽)를 찍었다. 8월 1일, 잉글랜드 은행이 머서스 홀에서 첫 영업을 시작했다. 직원은 서기 17명과 문지기(gatekeeper) 2명, 총 19명이었다.
이 19명의 직원 위에 선 초대 총재는 존 허블론 경(Sir John Houblon)이었다. 그의 집안 내력이 흥미롭다. 허블론가는 위그노(Huguenot) — 프랑스의 개신교도 — 난민의 후손이었다. 가톨릭 프랑스에서 쫓겨나 영불해협을 건넌 사람들. 그 난민의 손자가 런던 시티에서 상인으로 성공했고, 이제 프랑스와 싸우는 영국의 금융 기관을 이끌게 된 것이다. 프랑스가 내쫓은 사람의 후손이 프랑스를 꺾을 무기를 만들고 있었다. 허블론은 레반트 무역(Levant trade)으로 부를 축적한 런던 최상위 상인이었고, 시장(Lord Mayor) 후보에까지 이름이 오른 인물이었다. 그가 총재직을 맡은 것은 순전히 재력이나 가문 때문이 아니었다. 난민 출신이라는 배경이 오히려 투자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 이 사람은 프랑스와 타협할 이유가 없으며, 전쟁에서 이겨야 할 동기가 누구보다 강하다는 것을. 300년 뒤, 영국은 허블론의 초상화를 50파운드 지폐에 새겨 넣었다 — 난민의 후손이 화폐의 얼굴이 되었다.
허블론 옆에는 초대 부총재 마이클 갓프리(Michael Godfrey)가 있었다. 은행 설립의 실무를 주도한 인물이다. 투자자 모집을 설계하고, 머서스 홀의 영업 체계를 세우고, 첫 대출 승인 절차를 만들었다. 잉글랜드 은행이라는 거대한 기계의 설계도를 패터슨이 그렸다면, 그 기계를 실제로 조립한 것은 갓프리였다.
그런데 설립 이듬해인 1695년, 갓프리는 윌리엄 3세를 수행해 플랑드르 전선을 방문했다. 전장에서 은행의 신용을 직접 확인하겠다는 취지였다. 잉글랜드 은행이 빌려준 돈이 어디에 쓰이고 있는지, 전비가 실제로 어떻게 집행되는지 자기 눈으로 보겠다는 것이었다. 나뮈르(Namur) 공성전이 진행 중이었다. 포성이 쉬지 않는 전선이었다. 왕이 경고했다. 참호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갓프리는 듣지 않았다. 전선을 시찰하던 중 프랑스군의 포탄이 날아왔고, 초대 부총재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잉글랜드 은행 설립 불과 1년 만의 일이었다. 머서스 홀의 오크 테이블 앞에 앉아 장부를 검토하던 사람이, 플랑드르의 진흙탕 참호에서 포탄에 맞아 죽었다. 국가의 금융 시스템을 만든 사람이 국가의 전쟁터에서 죽었다 — 이 은행이 태어날 때부터 전쟁과 금융이 얼마나 깊이 얽혀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문지기가 두 명이었다는 사실은 기억해둘 만하다. 실제로 문을 지키는 수위를 뜻하지만, 이 은행은 처음부터 "문지기"의 기관이었다. 누구의 돈을 받고, 누구에게 빌려주고, 누구를 신뢰할 것인가 — 그 판단을 개인이 아닌 기관이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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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은행이 발명한 것은 단지 은행이 아니었다. 세 가지 금융 혁신이 동시에 탄생했다.
첫째, 국가 부채(National Debt)의 발명이다. 왕의 개인적인 빚이 아니라, 의회가 보증하고 세금으로 뒷받침되는 국가의 빚. 왕이 바뀌어도 유효한 빚. 이것은 신용의 주체를 개인에서 제도로 이전한 것이다. 메디치 은행이 조반니에서 코시모로, 코시모에서 로렌초로 이어지며 한 가문에 의존한 것과 대조된다. 잉글랜드 은행의 신용은 특정 개인에게 귀속되지 않았다. 시스템이 사람보다 오래 살도록 설계된 것이다.
둘째, 영구채(perpetual bond)다. 원금을 언제 갚겠다는 약속 없이, 영구히 이자만 지급하는 채권. 이것의 천재성은 양면에 있었다. 정부 입장에서는 원금 상환 압박 없이 전쟁 비용을 조달할 수 있었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만기가 없으니 원금 회수가 불가능해 보이지만, 시장에서 다른 사람에게 팔면 된다. 당시 런던의 조나단 커피하우스(Jonathan's Coffee House) — 낮은 천장, 연기에 그을린 벽, 가발 쓴 브로커들이 테이블 위에 올라가 호가를 외치는 곳 — 에서 이 채권들이 사고팔렸다. 미래의 이자 수입을 현재의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유동성이 생긴 것이다.
셋째, 그리고 가장 위험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혁신 — 부분 지급준비금(fractional reserve)이다.
여기서 잠시, 당시 최고의 은행 시스템이었던 암스테르담 위셀방크(Wisselbank)와 비교해보자. 1609년에 설립된 위셀방크는 예금의 100%를 금고에 보관하는 전액 지급준비금 원칙을 고수했다. 금 100을 맡기면, 금 100이 금고에 있다. 안전하다. 그러나 은행이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된다. 금고에 쌓인 금은 잠자고 있을 뿐,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안전한 대신 무력한 시스템이었다. 위셀방크의 원칙대로라면, 전쟁 자금을 조달할 방법은 세금을 올리거나 금광을 찾는 수밖에 없다.
잉글랜드 은행은 다르게 했다. 예금보다 많은 양의 은행권을 발행했다. 금 100이 금고에 있으면, 은행권 150을 찍어내고 그중 50을 정부에 빌려줬다. 존재하지 않는 돈을 만들어낸 것이다. 패터슨은 이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후대에 그에게 귀속되는 유명한 말이 있다: "은행은 무(無)에서 창조한 돈에 대해 이자를 받는다." 다만 이 문구는 패터슨의 어떤 저술에서도 원문이 확인되지 않는다. 금융사에서 반복적으로 인용되어 왔으나, 확인 가능한 1차 출처는 존재하지 않는 속성 인용(attributed quotation)이다. 문구의 정확성은 불확실하지만, 잉글랜드 은행의 작동 원리를 이보다 정확하게 요약한 문장도 드물다.
그렇다면 이 "무에서 창조한 돈"은 물리적으로 어떤 형태를 취했을까. 머서스 홀의 창구에서 첫 인출 요청이 들어왔을 때, 서기가 건네준 것은 인쇄된 화폐가 아니었다. 직사각형 종이 위에 서기가 직접 깃펜으로 금액을 적었다 — 이를테면 "53파운드 10실링 6펜스". 그 아래에 "I Promise to pay the Bearer on Demand..."라는 문구와 함께 은행 관계자의 서명이 들어갔다. 이것이 최초의 은행권(Bank Note)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화폐가 아니라 예금 영수증에 가까운 것이었고, 금액도 표준화되지 않아 예금자마다 다른 숫자가 적혔다. 서기 17명의 손글씨로 탄생한 이 종이 조각들이 런던 시장에서 돌기 시작했다. 상인은 이 종이를 받고 물건을 넘겼다. 다른 상인은 그 종이를 다시 받고 선박 화물의 대금으로 썼다. 종이 위의 약속이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며 실물 거래를 매개했다. 금고에 실제로 있는 금보다 많은 양의 약속이 종이 위에 적혀 시장을 떠돌았다. 암스테르담의 위셀방크가 금고 속 금의 무게에 의존했다면, 잉글랜드 은행은 서기의 서명에 대한 신뢰에 의존했다. 부분 지급준비금이란 결국 이런 것이었다 — 신뢰가 금을 대체하는 순간. 이 시스템은 사람들이 동시에 금고로 달려와 금을 요구하지 않는 한 작동한다. 그리고 그 "동시에 달려오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이 장의 뒤에서 곧 목도하게 된다.
이 마법 — 혹은 사기에 가까운 마법 — 이 영국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했다. 프랑스는 인구가 세 배, 경제 규모도 세 배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재정은 왕의 금고에서 나왔고, 영국의 재정은 신용 시스템에서 나왔다. 돈이 '많아서' 이긴 것이 아니라, 미래의 세수를 현재의 전쟁 자금으로 당겨 쓸 수 있는 시스템적 우위로 이긴 것이다.
1696년 11월, 잉글랜드 은행은 최초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했다. 자산 총액 330만 파운드. 투자자들이 출자한 120만 파운드의 거의 세 배다. 2년 만에 부분 지급준비금의 레버리지가 작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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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에서 돈을 만들어내는 마법에는, 대가가 따른다.
잉글랜드 은행이 만든 시스템은 국가 신용이라는 새로운 엔진을 탑재했지만, 그 엔진을 사적 탐욕의 연료로 채우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26년 뒤에 증명되었다.
1711년,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가 설립되었다. 설립을 주도한 것은 토리당의 로버트 하리(Robert Harley)였다. 잉글랜드 은행이 휘그당의 금융적 기반이었으므로, 토리당은 자신들의 금융 기구가 필요했다. 정치적 경쟁이 금융 혁신의 모방을 낳은 것이다.
표면적 명분은 스페인령 남미와의 무역 독점이었다. 실제로는 정부의 악성 부채를 인수하는 기구였다. 잉글랜드 은행이 국가 부채를 신용 창출의 기반으로 삼은 것을 보고, 남해회사도 같은 구조를 모방했다 — 국채를 인수하는 대가로 주식을 발행할 권리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잉글랜드 은행의 수익 모델은 이자 수입과 은행업이었다 — 실물 경제에 연결된 수익이다. 남해회사의 수익 모델은 주가 상승 그 자체였다. 국채 보유자들에게 "당신의 국채를 우리 주식으로 교환하시오"라고 제안하되, 주가가 높을수록 더 적은 주식으로 더 많은 부채를 탕감할 수 있었으므로, 주가 부양 자체가 회사의 지상 과제가 되었다. 실적이 아니라 기대로 돌아가는 시스템이었다. 남미 무역의 실제 수익은 미미했다. 스페인은 영국 상인들에게 매년 한 척의 무역선만 허용했고, 그마저도 수익의 상당 부분을 스페인 왕실에 상납해야 했다. 회사의 장부에는 무역 수익이 거의 잡히지 않았다. 남해회사는 이름만 '남해'였을 뿐, 바다에서 돈을 번 적이 없었다.
1720년, 런던이 미쳐 돌아가기 시작했다.
1월에 128파운드였던 남해회사 주식은 6월에 1,050파운드를 찍었다. 8배 상승. 런던의 익스체인지 앨리(Exchange Alley) — 좁고 진흙투성이인 골목길 — 에서 귀족과 상인과 하녀가 뒤엉켜 주식을 사고팔았다. 마차가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비좁은 골목에서, 가발을 쓴 브로커들이 테이블 위에 올라가 호가를 외쳤다. 조나단 커피하우스의 낮은 천장 아래, 커피와 초콜릿 향 속에서 루머가 생산되고 소비되었다. "스페인에서 금을 실은 배가 오고 있다." 근거 없는 소문 하나에 군중이 환호했다.
남해회사 주가만 오른 것이 아니었다. 광풍은 유령 회사들을 불러냈다. 의회의 인가도 없이, 실체도 없이, 이름만 걸어놓고 주식을 파는 회사들이 런던 곳곳에서 솟아났다. "영구동력 기관을 만드는 회사", "대서양 해저에서 은을 건져 올리는 회사", 심지어 "목적을 밝힐 수 없으나 대단히 유리한 사업을 하는 회사"라는 이름으로 주식을 파는 곳까지 있었다. 사업 내용을 공개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회사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돈을 냈다. 황당한 사업 계획서를 들고 나온 발기인들에게도 투자자가 몰렸다. 시중의 돈이 이런 잡주(bubble companies)들로 흘러들었고, 남해회사 입장에서 이것은 위협이었다. 자기 회사로 와야 할 돈이 경쟁자들에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1720년 6월, 남해회사는 의회에 손을 뻗었다. 결과물이 버블법(Bubble Act)이다. 의회의 허가 없이 주식회사를 설립하거나 주식을 발행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법. 표면상으로는 투자자 보호를 위한 건전한 규제였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남해회사의 이사진이 의회에 로비하여 경쟁자들의 숨통을 끊으려 한 것이다. 시장의 돈을 자기 회사에 독점적으로 몰아넣기 위한 계산이었다.
법은 통과되었고, 유령 회사들은 강제 해산되었다. 법 집행은 신속했다. 의회의 칙허장(Royal Charter) 없이 운영되던 회사들에 해산 명령이 떨어졌고, 주식 거래가 즉각 금지되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유령 회사들의 주식을 팔아 현금화하려는 투자자들이 쏟아졌는데, 그 돈이 남해회사로 돌아오지 않았다. 시장 전체의 유동성이 경색되기 시작한 것이다. 팔려는 사람은 넘쳐났고 사려는 사람은 줄었다. 자기가 놓은 덫에 자기가 걸렸다. 남해회사가 경쟁자를 죽이려고 만든 법이, 시장 전체를 질식시키며 남해회사의 주가까지 끌어내리는 방아쇠가 되었다.
이 무렵, 내부자들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남해회사의 핵심 설계자 존 블런트(John Blunt)와 이사진 일부는 6월부터 조용히 보유 주식을 시장에 내놓기 시작했다. 대중에게는 "주가가 더 오를 것"이라고 선전하면서, 자신들의 주식은 팔고 있었다. 게이트키퍼가 문을 열어두고 자기만 먼저 빠져나간 것이다.
찰스 킨들버거(Charles Kindleberger)가 200년 뒤 체계화한 버블의 5단계 — 변위(Displacement), 호황(Boom), 도취(Euphoria), 이익 실현(Profit-taking), 공포(Panic) — 가 1720년 런던에서 완벽하게 재현되었다.
그리고 이 버블의 한가운데, 한 사람이 있었다. 지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성 중 하나.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고, 미적분학을 창안하고, 광학의 기초를 세운 인물. 아이작 뉴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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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0년의 뉴턴은 조폐국 장관(Master of the Mint)이었다. 영국의 화폐 시스템을 관장하는 관료. 우주의 법칙을 수학으로 규명한 이 천재에게, 주식 시장쯤은 중력의 법칙만큼이나 명쾌해 보였을 것이다.
4월, 뉴턴은 보유 중이던 남해회사 주식을 매도했다. 주가는 약 300파운드. 그는 약 7,000파운드의 시세 차익을 거두었다. 현재 가치로 대략 15억 원. 훌륭한 판단이었다.
냉철한 판단이었다. 주가가 과열되었다는 것을 감지하고, 이익을 확정하고, 시장을 떠났다. 천재다운 이성적 매도.
그런데 뉴턴이 시장을 떠난 뒤, 시장은 멈추지 않았다.
5월, 주가 500파운드. 6월, 700파운드. 뉴턴이 300에 팔았을 때, 주변 사람들은 웃으며 주식을 사고 있었다. 수학도 경제도 모르는 친구들이 벼락부자가 되고 있었다. 왕립학회 모임에서도, 마차를 타고 런던 시내를 지날 때도, 같은 이야기가 들려왔다. 어제는 500, 오늘은 600, 내일은 700.
7,000파운드의 이익이 갑자기 작아 보이기 시작했다. 팔지 않았으면 14,000이었을 텐데. 아니, 20,000이었을 텐데. 뉴턴은 조폐국에서 위조 화폐범을 추적하며 증거를 논리적으로 조립하는 관료였다. 수치와 증거에 기반한 판단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주변의 분위기에 휩쓸려 자기 판단을 뒤집었다. 카너먼이 훗날 '시스템 1'이라 부를 것 — 빠르고 감정적인 직관 — 이 느리고 계산적인 이성을 밀어냈다.
6월 말에서 7월, 뉴턴은 시장에 재진입했다. 전 재산에 가까운 20,000파운드를 남해회사 주식에 쏟아부었다. 매수가는 주당 700~800파운드. 7월, 주가는 950파운드에 근접하며 정점을 향해 치달았다. 1월의 128파운드에서 출발한 주가가 반년 만에 일곱 배 이상 뛴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가. 버블법 통과 직후부터 남해회사 이사진과 블런트의 측근들은 이미 보유 주식을 시장에 내놓고 있었다. 회사의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빠져나가는 중이었고, 뉴턴처럼 바깥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영리한 돈(smart money)이 나가고, 감정적인 돈이 들어오는 교차점. 뉴턴의 재진입은 바로 그 교차점의 한가운데였다. 합리적이었던 천재가 비합리적 군중의 일원이 된 순간.
파티는 오래가지 않았다. 8월이 되자 주가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9월에는 자유낙하했다. 9월, 주가가 400파운드 아래로 떨어졌을 때 소드 블레이드 은행(Sword Blade Bank) — 남해회사의 사실상 거래은행 — 이 지급을 정지했다. 연쇄 반응이 시작되었다. 남해회사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은 투자자들이 추가 담보를 채우지 못했고, 은행들은 대출을 회수하기 위해 주식을 강제 매도했으며, 그 매도가 다시 주가를 끌어내렸다. 12월, 주가 124파운드. 뉴턴이 처음 7,000파운드를 벌었을 때의 가격으로 돌아왔다. 1월의 시작점이자, 뉴턴에게는 끝점이었다.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20,000파운드가 사라졌다. 당시 평범한 노동자의 연봉이 수십 파운드였음을 감안하면, 수백 명의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버블이 꺼진 뒤, 뉴턴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앞에서 '남해(South Sea)'라는 단어를 꺼내지 못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후대에 전해지는 유명한 한마디: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어도, 인간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
이 문장은 조셉 스펜스(Joseph Spence)의 일화집(1820년 사후 출간)에서 처음 공개된 것으로, 뉴턴이 직접 쓴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다. 정확한 문구는 후대에 다듬어졌을 수 있다. 그러나 뉴턴이 평생 남해회사 이야기를 극도로 싫어했다는 사실은 여러 사료에서 확인된다. 문구의 정확성은 불확실해도, 그 감정의 진실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천재도, FOMO라는 감정적 중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뉴턴은 물리적 세계의 법칙을 수학으로 정복했지만, 군중 속에서 작동하는 심리적 법칙 앞에서는 무력했다. 이것이 1720년 남해 버블의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인간의 인지적 취약성은 지능과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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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회사 버블은 단순한 투기 사건이 아니라, 게이트키퍼 시스템의 첫 번째 시스템적 실패였다.
시장을 감시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투기의 주체였다. 국왕 조지 1세가 회사의 총재(Governor)였다. 재무장관 존 에이슬라비(John Aislabie)는 남해회사로부터 주식을 무상으로 받았고, 의회 의원 수십 명이 같은 방식으로 포섭되었다. 공짜 주식이라는 뇌물이 의회를 관통하며 버블법까지 통과시킨 것이다. 규제를 설계해야 할 사람들이 규제 대상으로부터 보수를 받고 있었다. 게이트키퍼가 문을 닫는 대신 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이다.
버블이 터진 뒤, 의회는 비밀 조사 위원회를 구성했다. 장부가 열렸고, 뇌물의 흔적이 드러났다. 남해회사의 핵심 설계자 존 블런트(John Blunt)는 전 재산 약 183,000파운드 중 178,000파운드를 몰수당하고 생계비 5,000파운드만 남겨 받았다. 전 재산의 97%가 사라진 것이다. 재무장관 에이슬라비는 런던탑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가장 의미 있는 결과는 처벌이 아니라 구조의 변화였다.
위기 수습 과정에서 잉글랜드 은행이 남해회사의 악성 부채를 일부 떠안으며, '최종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로서의 초기 형태를 보여주었다. 남해회사는 잉글랜드 은행을 대체하려 했으나, 실패를 통해 오히려 잉글랜드 은행의 위상을 공고히 한 것이다.
여기에 핵심적인 구조적 대비가 있다.
잉글랜드 은행과 남해회사는 "국채를 민간 자본으로 전환한다"는 동일한 금융 혁신에서 출발했다. 같은 메커니즘이다. 그러나 잉글랜드 은행의 수익 모델은 이자 수입과 은행업, 즉 실물 경제에 연결된 것이었고, 남해회사의 수익 모델은 주가 상승 그 자체였다. 전자는 330년 동안 존속하는 기관이 되었고, 후자는 10년 만에 붕괴했다.
같은 도구가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은 것이다. 차이는 도구가 아니라 운영 구조에 있었다. 잉글랜드 은행은 예금을 받고, 은행권을 발행하고, 정부와 상인에게 대출을 해주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자가 수익이었다. 신용 창출이 실물 경제의 거래에 연결되어 있었다. 반면 남해회사의 이사진이 관심을 가진 유일한 숫자는 주가였다. 무역 수익도, 이자 수입도 아닌, 시장의 기대 그 자체가 자산이었다. 잉글랜드 은행은 신용 창출을 실물 경제에 연결하는 게이트키퍼 역할을 수행했고, 남해회사는 게이트키퍼 자체가 투기의 도구가 되었다. 1장에서 메디치 은행의 포르티나리가 보여준 패턴 — 문지기의 타락 — 이 26년 만에, 더 거대한 규모로 반복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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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은행은 살아남았다.
처음 설립되었을 때 이 기관은 현대적 중앙은행과 거리가 멀었다. 정부의 은행이자 독점적 주식회사였을 뿐, 다른 은행을 감독하거나 통화 정책을 집행하는 기관은 아니었다. 그러나 남해 버블의 위기 수습, 이후의 금융 위기들, 그리고 대영제국의 팽창과 함께, 잉글랜드 은행은 점진적으로 중앙은행의 역할을 획득해갔다. 1734년, 은행은 쓰레드니들 거리(Threadneedle Street)의 새 건물로 이전했다. 머서스 홀의 임시 세입자에서, 자기 건물을 가진 영구적 기관이 된 것이다. 런던 사람들은 이 건물을 '쓰레드니들 거리의 노부인(The Old Lady of Threadneedle Street)'이라 불렀다. 제도는 위기를 먹고 자란다.
잉글랜드 은행이 만든 구조 — 국가 부채, 중앙은행, 금융 규제 — 는 330년간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BIS(국제결제은행), 바젤 기준, 자기자본비율 — 오늘날 모든 은행이 따르는 규칙의 뿌리가 1694년 런던의 머서스 홀에 있다. 메디치 은행이 개인 신용의 원형을 만들었다면, 잉글랜드 은행은 제도적 신용의 원형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다.
제도는 330년간 정교해졌다. 국가 부채에서 중앙은행으로, 중앙은행에서 금융감독원으로, 금융감독원에서 BIS 비율과 바젤 규제로. 시스템은 층층이 쌓이며 갈수록 복잡해졌다. 그러나 정작 자본 배분이 결정되는 가장 마지막 순간 — 회의실 테이블 위에서 서류를 넘기며 "이 돈을 빌려줘도 되는가"를 판단하는 그 순간 — 은, 메디치의 스크리또이오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피렌체의 은행가가 양피지 위 환어음에 서명하던 행위와, 서울 외곽의 저축은행 10층 회의실에서 다섯 명이 680억 원 PF 대출을 심의하는 행위 사이에는, 600년의 시간과 대륙의 거리가 있다. 그러나 그 핵심에는 같은 질문이 놓여 있다:
이 사람이 돈을 갚을 수 있는가.
도구는 진화했지만, 판단의 주체는 여전히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의 판단은 — 뉴턴이 증명했듯이 — 천재에게도 한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