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1년, 더비셔 크롬포드. 새벽 5시.
더웬트 강 위로 아직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수차가 돌아가는 저음의 진동이 강물 소리에 섞였다. 벨이 울렸다. 짧고 날카로운 금속음이 골짜기를 타고 퍼졌다. 석조 건물의 문이 열리고, 약 200명의 노동자가 줄지어 들어갔다. 그중 약 3분의 2가 7세에서 14세 사이의 아이들이었다.
기계가 시작되었다. 수차의 회전이 축(shaft)과 벨트를 통해 각 층의 방적기로 전달되었다. 작업 속도는 노동자가 정하지 않았다. 물이 정했다. 더웬트 강이 수차를 돌리고, 수차가 기계를 돌리고, 기계가 인간의 리듬을 결정했다. 13시간 교대제. 주간조가 끝나면 야간조가 들어왔다. 공장은 거의 잠들지 않았다.
리처드 아크라이트가 세운 이 건물은 단순한 작업장이 아니었다. 그 이전에도 물레가 있었고, 방적공이 있었고, 실이 만들어졌다. 크롬포드가 다른 것은 이 모든 요소를 하나의 체계 안에 묶었다는 점이다. 기계, 동력, 노동, 시간, 감독 — 분산된 것들을 집중시키고, 느슨한 것들을 규율로 조였다. Ch.7에서 우리는 증기와 면직물과 석탄이 만든 에너지 혁명을 보았다. 기술이 가능성을 열었다. 이 장에서 우리는 그 가능성을 현실로 바꾼 시스템을 본다.
공장이라는 조직. 주식회사라는 법적 도구. 은행이라는 자본의 모세혈관. 그리고 철도 버블이라는 광기와 유산. 네 축은 각각 독립된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의 프레임으로 연결된다. 자본의 운영체제(operating system of capital). 로마가 도로와 수도교와 콘크리트로 제국의 운영체제를 만들었다면, 산업혁명의 영국은 공장과 은행과 주식회사로 자본주의의 운영체제를 만들었다.
1. 공장 시스템의 탄생 — 인간을 기계의 리듬에 맞추다
크롬포드 이전의 세계를 먼저 봐야 한다.
산업혁명 이전 영국 섬유 산업의 지배적 형태는 가내수공업(putting-out system)이었다. 구조는 이랬다. 상인이 원자재를 구매한다. 농촌의 가내 노동자에게 배분한다. 방적공에게는 실 제조를, 직공에게는 직조를 맡긴다. 노동자는 자기 집에서, 자기 도구로, 자기 속도에 맞춰 일한다. 완제품을 상인이 회수하여 시장에 판매한다.
이 시스템에서 노동자의 시간은 "과업"으로 측정되었다. E.P. 톰슨(Thompson)이 "과업 중심(task-orientation)"이라 부른 시간 감각이다.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쉬었다. 월요일에는 '성 월요일(Saint Monday)'이라는 관행대로 주말의 연장으로 쉬고,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몰아서 일했다. 수확기에는 밭에 나가고, 겨울에는 직기 앞에 앉았다. 일과 삶의 경계가 불분명했다. 파도처럼 격렬한 노동과 한가함이 교차했다.
자본가의 관점에서 이 시스템은 한계가 명확했다. 품질을 통제할 수 없었다. 수백 가구에 분산된 생산을 일일이 검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원자재 횡령이 만연했다. 배분받은 양모나 면의 약 5~25%를 빼돌리는 관행이 체계적이었다. 관련 법률만 수십 건에 달했다. 가장 결정적인 한계는 동력이었다. 수력이나 증기력은 분산된 가정집에 적용할 수 없었다.
공장은 이 모든 한계를 한 번에 풀었다. 생산을 한 건물에 집중시키고, 기계에 동력을 연결하고, 노동자를 감독관 아래 배치했다. 크롬포드가 최초의 "진정한 공장(first true factory)"으로 불리는 이유는 기계 하나를 처음 썼기 때문이 아니다. 여섯 가지 요소를 동시에 결합했기 때문이다.
가내수공업에서 생산 장소는 노동자의 집이었다. 공장에서는 단일 건물이었다. 작업 속도를 노동자가 정했던 것이, 공장에서는 기계가 정했다. 가족 내 자연 분업이, 공정별 전문화된 분업으로 바뀌었다. 감독이 없던 세계에 감독관이 상시 배치되었다. 과업이 끝나면 쉬던 시간이, 벨과 시계가 지배하는 시간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변화 — 노동자가 소유하던 생산 수단(물레, 수직기)이 자본가의 소유(기계, 건물, 수차)로 넘어갔다.
앤드루 유어(Andrew Ure)는 1835년 《공장 철학》(Philosophy of Manufactures)에서 이 전환의 본질을 정확히 짚었다. "진정한 어려움은 적절한 자동 기계의 발명에 있지 않았다. 인간으로 하여금 산만한 작업 습관을 버리고, 복잡한 자동 장치의 변함없는 규칙성에 자신을 동일시하게 만드는 것에 있었다." ("The main difficulty did not lie so much in the invention of a proper self-acting mechanism, as in training human beings to renounce their desultory habits of work, and to identify themselves with the unvarying regularity of the complex automaton.") 공장 시스템의 진정한 도전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었다.
확산은 빨랐다. 1785년 아크라이트의 특허가 취소된 후 공장 수가 급증했다. 1780년대 약 20~30개에서, 1787년 랭커셔만 약 143개(수력)와 68개(제니 작업장)로 늘었다. 1797년에는 약 900개 이상. 1838년에는 약 1,815개. 면직물 공장 고용은 1806년 약 9만 명에서 1833년 약 22만 명, 1861년 약 45만 2,000명으로 불어났다.
공장의 규율은 세밀했다. 타일즈리 면직물 공장의 규칙표를 보면, 지각은 1~2펜스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대화, 노래, 휘파람 — 벌금. 작업 중 이석 — 3~6펜스. 창밖을 보는 것 — 벌금. 규칙표에는 한 줄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공장주의 시계가 기준이 된다." 노동자들은 공장주가 아침에 시계를 느리게, 저녁에 빨리 맞춘다고 불만을 제기했다. 시간의 통제권이 자연에서 자본으로 이전된 것이다.
톰슨의 분석에 따르면, 이 전환은 세대에 걸쳐 내면화되었다. 1세대 공장 노동자는 시간 규율을 강제당했다. 2세대는 그것을 받아들이되, 10시간 운동(ten-hour movement)을 통해 범위를 제한하려 했다. 3세대는 시간 규율을 완전히 내면화하고, 초과근무 수당을 요구했다. 톰슨의 원문이 이 과정을 압축한다. "1세대는 시간의 중요성을 고용주에게서 배웠다. 2세대는 단시간 위원회를 만들어 10시간 운동에 나섰다. 3세대는 초과근무 수당 또는 1.5배 할증을 요구하며 파업했다." ("The first generation of factory workers were taught by their masters the importance of time; the second generation formed their short-time committees in the ten-hour movement; the third generation struck for overtime or time-and-a-half.")
자신의 시간에 가격을 매기는 것. 그것은 시간이 상품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시간을 보낸다(pass)"에서 "시간을 쓴다(spend)"로. 시간의 화폐화. 공장 시계는 교회 시계를 대체했고, 이윽고 개인 회중시계(pocket watch)로 확산되었다. 1790년대에 이미 노동자들이 시계를 구매하기 시작했다.
저항도 있었다. 1779년 아크라이트의 버카크레 공장이 방적공들에게 습격당하고 방화되었다. 1826년에는 랭커셔에서 수백 대의 역직기가 파괴되었다. 수직공들은 임금이 80% 이상 하락하는 동안에도 약 40년간 공장 전환을 거부했다. 자율성, 가족 단위 작업, 숙련 장인으로서의 정체성 — 그것을 포기하느니 가난을 택했다. 그 이야기는 Ch.9에서 본다.
벨이 울릴 때 — 새벽 3시의 아이들
1832년, 런던 웨스트민스터. 마이클 새들러 의원이 주재하는 의회 특별위원회.
증인석에 앉은 사무엘 쿨슨은 공장에서 일하는 딸들의 아버지였다. 질문이 시작되었다.
"바쁜 때 아이들은 몇 시에 출근했습니까?"
"바쁜 약 6주 동안은 새벽 3시에 출근하여 밤 10시, 거의 10시 반까지 일했습니다."
"그 19시간의 노동 중 쉬거나 식사할 시간이 얼마나 있었습니까?"
"아침 15분, 점심 30분, 간식 15분이었습니다."
19시간 30분의 노동. 식사 시간 합계 1시간. 가장 어린 딸은 밤 10시에 집에 돌아오면 저녁을 먹지 못하고 쓰러져 잤다.
같은 위원회에서 엘리자베스 벤틀리가 증언했다. 증언 당시 23세. 6세부터 리즈의 아마 공장에서 일했다. "새벽 5시부터 밤 9시까지, 바쁠 때. 식사 시간은 정오 40분뿐이었습니다." 아침이나 간식 시간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답했다. "아니요, 일하면서 먹을 수 있을 때 먹었습니다." 17년간의 공장 노동으로 그녀의 허리는 굽어 있었다.
새들러 위원회(Sadler Committee)의 증언록은 당대 공장 조건의 가장 생생한 1차 사료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를 수집했다는 비판이 있다. 정부는 편향을 우려하여 별도 왕립위원회(Factory Commission)를 구성했다. 에드윈 채드윅 등이 참여한 이 위원회는 체계적 조사를 수행했다. 결론은 같았다. 학대는 사실이었다.
직접적 결과가 1833년 공장법이다. 9세 미만 아동의 섬유 공장 고용이 금지되었다. 9~13세는 하루 최대 8시간에 교육 2시간이 의무화되었다. 13~18세는 하루 최대 12시간. 유급 공장감독관이 임명되었다. 4명.
4명이 잉글랜드 전역의 공장을 감독했다. Ch.6에서 우리가 본 패턴이다. 로마의 리키니우스 토지법이 수세기 동안 위반이 누적된 것과 같은 구조. 1802년에 영국 최초의 공장법이 제정되었으나 집행관이 없어 사문화되었다. 1833년에 비로소 실효적 규제가 시작되었다. 31년의 간극. 명목적 규제와 실효적 규제 사이의 시차는 시대를 초월한다.
한편, 대안이 존재했다. 로버트 오언(Robert Owen)은 1799년 스코틀랜드 클라이드 강변의 뉴 라나크(New Lanark) 공장을 인수했다. 노동자 약 1,500~2,000명, 아동 약 500명. 오언은 노동 시간을 10시간 45분으로 단축했다. 10세 미만 고용을 금지했다. 1816년에 유아학교를 설립했다. 체벌과 벌금을 폐지하고 '침묵의 감시자(Silent Monitor)'라는 행동 평가 시스템을 도입했다. 회사 상점에서는 원가 수준으로 물품을 판매했다.
핵심은 이것이다. 이 모든 개혁에도 공장은 수익성을 유지했다. 1815년에서 1825년 사이 약 2만 명 이상이 뉴 라나크를 방문했다.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훗날 니콜라이 1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인도적 공장 경영이 경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였다.
그런데 뉴 라나크 모델은 확산되지 못했다. 오언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했다. 대부분의 공장주에게 인도적 경영의 인센티브가 없었다. 경쟁 압력 아래에서 비용 절감이 우선이었다. 크롬포드의 벨이 울릴 때 새벽 3시에 일어나야 했던 아이들의 수는 뉴 라나크의 유아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아이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공장은 생산성을 폭발시켰다. 그러나 공장은 자본을 필요로 했다. 건물, 기계, 수차, 노동자 주택 — 이 모든 것을 지을 돈은 어디서 왔는가?
2. 자본의 운영체제 — 파트너십, 은행, 어음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다. 산업혁명 초기의 공장은 적은 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채프먼(Chapman)의 화재보험 기록 분석에 따르면, 1790년대 면직물 공장의 보험 가액은 소형 약 100~2,000파운드에서 대형 5,000파운드 이상까지 분포했다. 이 규모의 자본은 개인 저축, 가족 자금, 파트너십으로 충분히 조달할 수 있었다.
아크라이트의 크롬포드가 전형적 사례다. 1770년, 제디다이어 스트럿(더비셔 양말 제조업자)과 새뮤얼 니드(노팅엄 상인)가 500파운드를 출자했다. 스트럿과 니드는 비국교도(Dissenter) 네트워크의 핵심 인물이었다. 비국교도는 영국 인구의 약 7~8%에 불과했으나, 발명가와 기업가의 약 40~50%를 배출했다. 대학과 관직과 법조에서 배제된 이들이 제조업과 금융에 집중했다. 로이드 은행, 바클리 은행, 다비 가문의 코크 제철 — 모두 퀘이커(Quaker)였다.
이 네트워크의 기능은 단순했다. 신뢰. 공식 금융 시스템이 부재할 때, 신뢰 네트워크가 자본 동원의 대체 인프라로 작동했다. "퀘이커에게 돈을 맡기면 안전하다"는 평판이 자본을 끌어모았다. 현대 실리콘밸리의 '따뜻한 소개(warm introduction)' 문화와 구조적으로 동형적이다.
그런데 공장의 규모가 커지고,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자본 수요가 급증했다. 여기서 금융 인프라가 등장한다. 그 구조는 세 층위로 구성되었다.
첫째, 잉글랜드 은행(Bank of England). 1694년에 설립되었다. 산업을 위해 설계된 기관이 아니었다. 전쟁 자금 조달 수단이었다. 윌리엄 3세가 프랑스와의 9년 전쟁에 필요한 120만 파운드를 마련하기 위해, 투자자들에게 연 8%의 이자를 약속하고, 그 대가로 주식회사 은행 설립 칙허를 부여했다. 전쟁 자금조달 장치가 우연히 상업 신용의 중추가 된 것이다. 잉글랜드 은행의 가장 중요한 부수 효과는 정부 차입비용의 하락이었다. 1690년대 약 8~14%이던 이자율이 1750년대에는 약 3%로 떨어졌다. 프랑스는 여전히 5~6%였다. 낮은 정부 차입비용은 민간 자본을 산업 투자로 해방시켰다.
둘째, 지방 은행(country banks). 이것이 산업혁명 금융의 진짜 이야기다.
1708년, 기묘한 법률이 하나 통과되었다. 런던 65마일 이내에서 6인 이상의 합자은행이 은행권을 발행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잉글랜드 은행의 독점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었다. 이 법의 의도치 않은 결과가 지방 은행 체계의 탄생이었다. 대규모 은행이 형성될 수 없었으므로, 빈 공간을 소규모 사적 합명회사(2~6인)가 채웠다. 직물상, 양조업자, 세금징수인, 곡물상이 은행가로 변신했다. 지역 산업을 알고 신용도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관계 금융(relationship banking)의 원형이다.
지방 은행의 성장은 폭발적이었다. 1750년 약 12개에서 1784년 약 120개, 1800년 약 370개, 1810년에는 약 800개에 달했다. 60년간 약 65배. 이 은행들은 자체 은행권을 발행하고, 제조업자의 어음을 할인해주고, 지역 저축을 예금으로 받았다. 핵심 기능은 이것이었다. 농업 잉여를 산업 자본으로 재순환시키는 것. 농업이 풍요로운 노퍽과 서퍽의 잉여 예금이 런던을 경유하여 산업이 활발한 랭커셔와 요크셔로 흘러갔다.
셋째, 어음(bill of exchange). 산업혁명의 진짜 돈이었다.
제조업자 A가 상인 B에게 상품을 외상으로 판매한다. A가 B에게 어음을 발행한다. "90일 후 100파운드를 지급하라." B가 서명하면 법적 구속력이 생긴다. A는 만기까지 기다릴 수도 있고, 은행에서 할인할 수도 있다. 은행이 A에게 즉시 97파운드를 지급하고, 만기에 B로부터 100파운드를 회수한다. 어음은 여러 번 재배서 가능했다. 각 배서인이 자신의 신용을 체인에 추가했다.
규모를 보면 이 시스템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1800년경, 내국 어음 유통액은 약 1억 5,000만~2억 파운드로 추정된다. 같은 시기 주화 유통액이 약 3,000만~5,000만 파운드, 은행권 유통액이 약 3,000만~4,000만 파운드였다. 어음이 주화와 은행권 합산의 약 3~5배에 달했다. 금도 은행권도 아닌, 신용 네트워크 자체가 화폐 공급이었다.
채프먼(Chapman)의 연구에 따르면, "전형적 면사 방적업자는 고정 자본이 5,000~10,000파운드였지만 유동 자본(대부분 무역 신용)은 그 2~3배였다." 폴라드(Pollard, 1964)는 더 직설적이었다. "초기 산업가들은 만성적으로 고정 자본이 부족했다. 무역 신용이 그들의 산소였다."
이 시스템은 강력했지만 취약했다. 소규모 은행은 경기 변동에 노출되었다. 1793년 프랑스 혁명 전쟁 패닉으로 약 100개 은행이 영업을 정지했다. 1814~1816년 전후 디플레이션으로 약 240개가 파산했다. 1825년에는 남미 광산 투기 붕괴로 약 70~80개가 무너졌다. 잉글랜드 은행의 금 보유고가 통상의 10분의 1 수준인 약 100만 파운드까지 떨어졌다.
1825년의 위기에서 잉글랜드 은행은 처음으로 '최종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로 행동했다. 이 역할은 설립 목적이 아니었다. 위기를 겪으며 즉흥적으로 진화한 것이다. 1873년에야 월터 배젓(Walter Bagehot)이 그 원칙을 공식화했다. "좋은 담보에 대해, 벌칙 금리로, 자유롭게 대출하라." 중앙은행은 본래 역할을 위해 설계된 적이 없다. 위기에서 진화한다.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도, 유럽중앙은행도, 2008년과 2020년에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성장을 가능케 하는 모든 금융 인프라는 동시에 과잉을 가능케 한다. 이것은 버그가 아니라 기능이다. 대안 — 신용 팽창 없음 — 은 곧 산업혁명 없음을 의미한다.
3. 주식회사의 역설 — 100년간의 봉인
여기서 기묘한 역설이 등장한다.
산업혁명의 핵심 기간(1760~1840)에, 영국에서는 주식회사를 설립하는 것이 사실상 금지되어 있었다.
1720년 남해 버블(South Sea Bubble).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는 1711년 영국 국채 인수의 대가로 남미 무역 독점권을 획득한 회사였다. 1720년, 주가가 약 100파운드에서 8월 고점 약 1,000파운드까지 치솟았다. 10배. 12월에 124파운드로 폭락했다. 고점 대비 약 87% 하락. 아이작 뉴턴도 초기 수익 후 재투자하여 약 2만 파운드를 잃었다.
의회의 대응이 거품법(Bubble Act)이었다. 1720년 6월 11일 제정. 왕실 칙허나 개별 의회 법률 없이 주식회사를 설립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최근 학술 연구(해리스, 2000)에 따르면, 이 법은 투자자 보호가 아니라 남해회사가 경쟁 기업의 투자자 흡수를 막기 위해 로비한 결과였다. 독점 보호가 목적이었다.
이 법은 1825년까지 105년간 지속되었다. 산업혁명 기간을 완전히 포괄한다.
투기 버블에 대한 규제가 한 세기 동안 자본 동원을 억제한 셈이다. 문제(버블)에 대한 과잉 대응이 새로운 문제(자본 부족)를 낳은 고전적 사례.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산업혁명은 그 금지 속에서 시작되었다. 초기 공장은 소자본으로 가능했기 때문이다. 주식회사가 필요 없었다.
문제는 규모의 도약에서 발생했다. 1780년대 소형 면직물 공장의 자본이 약 3,000~5,000파운드였다면,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Great Western Railway)의 총 자본은 약 280만 파운드였다. 약 560~930배의 도약. 파트너십으로는 절대 조달할 수 없는 규모였다.
1825년 거품법이 폐지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칙허나 개별 법률이 필요했다. 1844년, 등기(registration)만으로 주식회사 설립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유한책임은 포함되지 않았다. 주주는 여전히 개인의 전 재산으로 회사 채무에 대해 무한 책임을 졌다. 사업 실패는 곧 개인 파산이었고, 채무자 감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부유한 사람일수록 투자를 꺼렸다. 자본의 역설적 동결이었다.
1855년, 유한책임법(Limited Liability Act)이 통과되었다. 주주의 손실 한도가 출자금에 한정되었다. 잃을 수 있는 만큼만 투자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다수의 소액 투자자가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로버트 로우(Robert Lowe)는 의회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실용적 과학 지식은 있으나 소자본인 사람들로부터도 기꺼이 자본이 유입될 것이다." 자본의 민주화(democratization of capital)였다.
1862년, 회사법(Companies Act)이 은행과 보험사에도 유한책임을 확대했다. 현대 회사법의 기초가 놓였다.
기술-법률 시차를 보면 이렇다. 아크라이트의 수력 방적기(1769)에서 거품법 폐지(1825)까지 56년. 등기법(1844)까지 75년. 유한책임(1855)까지 86년. 완전한 회사법(1862)까지 93년. 기술 혁신에서 법적 혁신까지 약 93년이 걸렸다. Ch.6에서 본 기술-제도 시차(64~109년)와 일관된다.
투자자에게 이 연대기가 말해주는 것은 명확하다. 기술 사이클의 초기 단계에서는 소자본과 시스템이 승리한다. 아크라이트가 증명했다. 그러나 기술이 인프라 단계에 진입하면, 법적 혁신이 자본 동원의 병목을 해소해야 한다. 현재 AI는 어느 단계에 있는가?
4. 철도 버블 — 광기, 붕괴, 그리고 유산
1830년 9월 15일, 리버풀.
8대의 특별 장식 기관차가 크라운 스트리트 역에 줄지어 서 있었다. 깃발과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노선을 따라 5만 명 이상의 군중이 운집했다. 세계 최초의 도시 간 여객 철도, 리버풀-맨체스터 철도의 개통식이었다.
웰링턴 공작(총리)을 태운 열차가 파크사이드 역에서 급수를 위해 정차했다. 리버풀 하원의원 윌리엄 허스키슨이 웰링턴에게 인사하기 위해 열차에서 내렸다. 인접 선로에서 로켓호가 접근했다. 허스키슨이 다시 올라타려 했으나 발을 헛디뎠다. 로켓호가 그의 다리를 치었다.
조지 스티븐슨이 직접 허스키슨을 태우고 시속 약 36마일 — 당시 세계 최고 속도 — 로 맨체스터 병원까지 달렸다. 그날 저녁 허스키슨은 사망했다. 기록된 최초의 철도 여객 사망자였다. 철도를 가장 적극적으로 옹호한 정치인이 철도에 의해 죽었다.
사고조차 열풍을 막지 못했다. 오히려 사고 보도가 철도의 속도와 위력을 국민에게 각인시켰다. 개통 첫해, 약 44만 5,000명이 탑승했다. 수익 15만 5,702파운드. 배당률 9.5%. 국채 수익률 약 3%의 3배 이상이었다.
이 "개념 증명(proof of concept)"이 투기를 점화했다. 그랜드 정션 철도는 약 10%를 배당했다. 런던-버밍엄 철도도 약 10%. "철도는 확실한 투자"라는 믿음이 형성되었다. 문제는 초기 노선들이 가장 수익성 높은 구간이었다는 점이다. 후속 노선의 수익성은 점진적으로 낮아졌으나, 투자자들은 이를 간과했다.
1842년, 잉글랜드 은행이 기준금리를 2.5%로 인하했다. 국채 수익률은 약 3.1%. 철도는 8~10%를 배당했다. 1844년 주식회사법으로 등기만으로 철도 회사를 설립할 수 있게 되었다. 저금리, 높은 수익 사례, 규제 완화 — 버블의 조건이 갖춰졌다.
철도 광풍(Railway Mania)이 시작되었다.
1845년 120개, 1846년 263개, 1847년 184개의 철도법이 의회를 통과했다. 1846년 단일 연도 263개 법안. 의회 역사상 전례 없는 입법 폭발이었다. 총 승인 노선 약 9,500마일. 총 승인 자본 약 2억 파운드. 당시 영국 GDP와 거의 동등했다. 연간 투자가 400만 파운드(1840년대 초)에서 3,000만 파운드 이상(1847)으로 7.5배 뛰었다. 피크 시점(1847)에 철도 투자가 GDP의 약 7%, 국내 총투자의 약 45%를 차지했다.
이것은 전문 투자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오들리즈코(Odlyzko)의 주주 명부 분석에 따르면, 일부 명부에서 약 20%가 여성 투자자(미망인, 미혼 여성)였다. 성직자, 의사, 변호사, 퇴역 장교가 참여했다. 런던뿐 아니라 맨체스터, 리버풀, 리즈, 브리스톨의 중산층이 뛰어들었다. "국민 투기"였다.
청약 시스템이 이 광풍을 부채질했다. 액면 100파운드 주식에 보증금 10파운드만 내면 됐다. 실질 레버리지 10배. 주가가 오르면 전액 납입 없이 매도하여 차익을 챙겼다. 무상의 돈처럼 보였다. 하락하면? 나머지 90파운드에 대한 "추가 납입(call)"이 날아왔다. 그때서야 무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철도 왕의 부상과 몰락
이 광풍의 중심에 조지 허드슨(George Hudson)이 있었다.
요크셔 하우셤의 농부의 아들. 아마포 상인(linen draper) 도제. 1827년, 대숙부 매튜 보트릴로부터 약 3만 파운드를 상속받았다. 이 돈이 시드 캐피탈이 되었다. 1833년 요크-노스미들랜드 철도에 투자했고, 1835년 조지 스티븐슨과 교류를 시작했다.
부상은 수직적이었다. 요크 시장 3회 연임(1837~39). 1844년 미들랜드 철도 합병을 주도했다. 1845년 선더랜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그가 지배한 철도는 약 1,450마일. 영국 전체 철도망의 약 25~30%였다. 앨버트 공과 교류했다. 각료급 정치인들이 그를 환대했다. 언론은 그를 "철도 왕(Railway King)"이라 불렀다.
그의 사기는 정교했다. 신규 주식 발행 대금으로 기존 주주에게 배당을 지급했다. 본질적으로 폰지 구조였다. 합병 대상 회사의 주식을 사전에 매입하고, 합병 발표 후 가격이 오르면 매도했다. 의회에서 철도법 통과를 위해 의원을 매수했다. 건설 비용을 축소하고 수익을 부풀려 보고했다.
1847년, 버블이 붕괴했다. 방아쇠는 외생적이었다. 곡물 흉작과 금 유출이 잉글랜드 은행의 긴축을 촉발했다. 금리가 올랐다. 철도 회사의 자금 조달 비용이 급등했다. 건설 중인 노선들의 "추가 납입" 압박이 투자자들의 유동성 위기를 만들었다. 주가가 하락했다. 패닉 매도가 추가 하락을 불렀다. 자기 강화 사이클이었다. 재무장관이 서한으로 은행 칙허법의 발행 상한을 일시 정지해야 했다.
주가 평균 하락률 약 67%. 최악 노선은 약 85%. 총 투자자 손실 약 1억 파운드. GDP의 약 40~50%에 해당했다. 수십만 명의 중산층이 피해를 입었다.
1849년, 주주위원회가 허드슨의 사기를 조사했다. 약 50만~60만 파운드의 반환이 명령되었다. 모든 이사직에서 박탈되었다. 1859년 의원직을 상실했다. 프랑스로 도피하여 친구들의 자선에 의존했다. 1871년, 런던의 한 하숙집에서 빈곤 속에 사망했다.
타임스지가 그의 몰락을 논평했다. "철도 왕은 퇴위당했으나, 철도는 남아 있다."
이 한 문장이 철도 버블의 유산을 압축한다.
버블이 남긴 것 — 사적 손실, 공적 이득
붕괴 후, 실제로 무엇이 남았는가.
1840년 영국 철도 개통 마일은 1,498마일이었다. 1845년 2,441마일. 매니아기 건설이 반영된 1850년에는 6,084마일. 1860년 9,069마일. 1870년 13,388마일. 매니아기에 실제 건설된 약 6,220마일은 현대 영국 철도망(약 1만 1,000마일)의 약 56.5%에 해당한다. 오늘날 영국인이 타는 철도의 절반 이상이 1840년대의 광기 속에서 건설된 것이다.
경제적 파급은 거대했다. 런던에서 버밍엄까지 역마차로 12시간 걸리던 여정이 철도로 2.5시간으로 줄었다. 약 4.8배 단축. 도로와 운하 대비 운송비가 약 50~75% 절감되었다. 철도 직접 고용은 1850년 6만 명에서 1870년 27만 5,000명으로 늘었다. 건설 노동자(내비, navvies)는 피크 시점에 약 25만 명에 달했다. 1840년대 영국 철 생산의 약 25~30%를 철도가 소비했다.
1844년 글래드스턴 철도법은 모든 철도에 하루 최소 1편의 3등석 운행을 의무화했다. 운임 마일당 1페니. '의회 열차(Parliamentary train)'라 불렸다. 대중 이동의 민주화였다. 1847년에는 철도 시각표 통일을 위해 그리니치 표준시(GMT)가 채택되었다. 1880년에 법제화되었다. 철도가 국가의 시간을 통일한 것이다.
공장의 벨이 마을의 시간을 지배했다면, 철도의 시각표는 국가의 시간을 통일했다.
카를로타 페레즈(Carlota Perez)의 프레임워크가 이 역설을 이론화한다. 페레즈는 지난 250년간의 기술 혁명에서 반복되는 패턴을 발견했다. 설치기(Installation) — 새 기술이 도입되고 인프라가 건설된다. 금융 자본이 유입된다. 버블이 팽창한다. 전환점(Turning Point) — 버블이 붕괴한다. 금융 위기. 제도가 재구성된다. 전개기(Deployment) — 기술이 광범위하게 확산된다. 생산성 이득이 분배된다. 황금기가 온다.
철도에 적용하면 이렇다. 설치기(1829~1847): 리버풀-맨체스터가 촉발. 투기 자본이 네트워크를 건설. 매니아. 전환점(1847~1850): 버블 붕괴. 주가 67% 하락. 규제 개혁. 전개기(1850~1873): 저렴해진 철도 인프라 위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번영이 꽃피었다.
핵심 공식은 이것이다. 투기적 자본이 합리적 계산으로는 정당화할 수 없는 규모의 인프라를 건설한다. 건설된 인프라는 매몰 비용이다. 매몰 비용 위에서 운영되는 철도는 한계비용으로 운영이 가능하다. 투자자에게는 재앙이었으나, 사회 전체에게는 영구적으로 저렴한 운송 인프라가 주어졌다. 사적 손실이 공적 이득이 된 것이다. 투자자가 잃은 약 1억 파운드가 영국에 세계 최고의 철도 인프라를 선물했다.
같은 패턴이 반복되었다. 1990년대 후반, 약 1,500억 달러가 광케이블에 투자되었다. 2002년 이용률은 약 2.5%에 불과했다. 버블이 터졌다. 나스닥이 78% 하락했다. 아마존 주가가 113달러에서 5.51달러로 95% 폭락했다. 과잉 투자된 광케이블은 남았다. 저렴한 대역폭을 제공했고, 그 위에서 유튜브(2005), 넷플릭스 스트리밍(2007), 클라우드 컴퓨팅이 가능해졌다. 아마존의 시가총액은 2025년 약 2조 달러에 달했다.
2024년,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 메타가 GPU 클러스터와 데이터센터에 약 2,300억~2,500억 달러를 투자했다. AI 인프라 투자가 미국 GDP의 약 1.5%를 차지했다. 레일웨이 매니아의 7%에 비하면 아직 5분의 1 수준이다. 사이클의 속도는 가속되고 있다. 철도는 촉발에서 붕괴까지 약 17년(1830~1847). 닷컴은 약 7년(1993~2000). AI는 2022년부터 이미 3년 이상이 흘렀다.
버블은 다음 시대의 인프라를 만든다. 이 명제가 투자자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GPU 클러스터는 1845년의 철도 노선인가? 과잉 투자, 붕괴, 그리고 그 위에서 피어나는 전개기 — 같은 공식이 세 번째로 작동하고 있는가?
핵심 차이가 하나 있다. 레일웨이 매니아는 분산적이었다. 수십만 명의 소액 투자자. 성직자의 미망인과 퇴역 장교까지. AI 투자는 극도로 집중적이다. 5~7개의 하이퍼스케일러. 투자 집중 구조의 차이가 붕괴의 양상을 바꿀 수 있는가. 그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에너지에서 시스템으로, 시스템에서 사람으로
이 챕터에서 우리가 본 것을 하나로 묶을 때다.
Ch.7의 에너지 혁명은 가능성을 열었다. Ch.8의 시스템 혁명은 그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었다. 공장이 생산을 조직했다. 은행이 자본을 순환시켰다. 주식회사가 규모의 도약을 가능케 했다. 철도가 시장을 통합했다.
기술(Ch.7)과 시스템(Ch.8)은 산업혁명의 두 엔진이었다. 어느 하나만으로는 부족했다. 와트의 증기기관이 없었다면 공장의 동력이 없었다. 공장 시스템이 없었다면 증기기관은 탄광의 펌프로 남았다. 주식회사가 없었다면 철도를 건설할 자본이 없었다. 철도가 없었다면 면직물을 전국에 실어 나를 수단이 없었다.
로마가 도로와 수도교로 제국을 연결했듯, 산업혁명의 영국은 공장과 은행과 철도로 산업 자본주의의 운영체제를 완성했다.
그러나 운영체제가 완성될수록, 그 안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더 선명해진다. 새벽 3시에 출근하던 쿨슨의 딸들. 6세부터 공장에서 일한 엘리자베스 벤틀리. 25실링이던 주급이 4.5실링으로 떨어지는 것을 지켜본 랭커셔의 수직공들. 10배 레버리지에 전 재산을 잃은 성직자의 미망인. 이 거대한 변환 속에서 개인의 운명은 어떻게 갈렸는가.
다음 장에서 우리는 두 영국인을 만난다. 한 사람은 자기 집에서 자기 직기로, 자기 속도에 맞춰 일하던 랭커셔의 수직공이다. 방적 혁신이 선물한 황금기를 누리다가, 역직기가 그 황금기를 파괴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 또 한 사람은 가발 제조업자(perruquier) 출신으로 강가에 공장을 세우고, 특허를 빼앗겨도 사업을 번성시킨 사람. 기술이 아니라 시스템을 만든 사람.
밀린 자와 읽은 자. 같은 시대, 같은 산업, 같은 면직물. 운명은 정반대로 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