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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1 — 밀린 자와 읽은 자

7장. 증기, 면직물, 석탄: 에너지 혁명이 만든 새로운 물리학


1712년, 스태퍼드셔 더들리 캐슬 인근 코니그리 탄광(Conygree Coalworks).

벽돌로 쌓은 엔진 하우스 위로 참나무 빔이 솟아 있었다. 길이 약 24피트. 빔은 중심축을 기점으로 시소처럼 기울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보일러에서 증기가 올라왔다. 실린더에 차올랐다. 차가운 물이 실린더 안으로 뿌려졌다. 증기가 응축되었다. 진공이 만들어졌다. 대기압이 피스톤을 아래로 밀었다. 빔이 기울었다. 반대편에 매달린 펌프 로드가 갱도 아래로 내려갔다. 지하수가 올라왔다.

4~5초마다 금속의 쿵 소리가 반복되었다. 증기가 새어나오는 쉬익 소리, 냉각수가 분사되는 철벅 소리. 토마스 뉴커먼이 만든 이 기계의 열효율은 약 0.5~1%였다. 석탄에 저장된 에너지의 99%가 유용한 일로 전환되지 않았다.

그런데 상관없었다.

연료는 바로 발밑에 있었다. 판매할 수 없는 잔여탄을 태우면 됐다. 연료의 기회비용이 사실상 제로였다. 이 기계가 하는 일은 단순했다. 탄광에 차오르는 물을 퍼내는 것. 그 이전에 이 일을 한 것은 말 50~100마리, 또는 가죽 양동이 체인을 돌리는 수백 명의 노동자였다. 뉴커먼 엔진 1대가 그 모두를 대체했다.

토마스 뉴커먼은 데번주 다트머스의 철물상이었다. 배관공 존 캘리와 협업하여 엔진을 개발했다.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실용적 장인이었다. 그의 선행 기술은 토마스 세이버리의 증기 펌프였다. 세이버리가 1698년에 받은 포괄적 특허 아래에서 작업해야 했다. 뉴커먼이 만든 것은 이론적 발명이 아니라, 광부들이 매일 마주하는 물리적 문제 — 갱도의 물 — 에 대한 실용적 해법이었다. 1729년 상대적 무명 속에서 사망했다. 그의 이름이 엔진에 붙은 것은 사후의 일이다. 그는 산업혁명의 첫 기계를 만들었으나, 산업혁명이라는 단어를 결코 듣지 못했다.

누구도 알지 못했다. 열효율 1%의 이 투박하고 거대한 기계가 1만 년간 인류를 가둬온 감옥 — 토지 면적이 결정하는 에너지의 절대적 상한 — 에 첫 번째 균열을 냈다는 것을.

Ch.6에서 우리는 로마 공화정이 구조적 모순에 적응하는 데 106년이 걸렸음을 보았다. 4번의 대규모 내전과 2번의 프로스크립티오를 치른 뒤에야 새로운 체제가 들어섰다. 1,700년 뒤, 크롬포드에서 가발 제조업자 출신의 사업가가 강가에 공장을 세웠을 때, 같은 공식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기술이 생산성을 폭발시키고, 자본이 집중되고, 사람들이 밀려나는 순환. 이번에는 토지가 아니라 에너지가 그 사이클의 기점이었다.

이 챕터에서 우리는 세 가지 기술이 하나의 피드백 루프로 연결되는 과정을 본다. 증기가 에너지를 풀었다. 면직물이 그 에너지를 산업으로 전환했다. 석탄이 그 산업의 연료를 공급했다. 세 축은 각각 독립적이 아니라 서로를 강화하는 순환 구조였다. 이 순환이 영국을 유기 경제의 천장 너머로 밀어 올렸다.


1. 증기 — 에너지를 돈으로 환산한 최초의 계약

뉴커먼 엔진은 탄광의 도구로 태어났다.

1712년 코니그리 탄광에서 첫 가동을 시작한 이후, 엔진은 영국의 탄전 지대를 따라 퍼져 나갔다. 1733년까지 약 110~125대. 1769년까지 약 600~700대. 1775년에는 해외 포함 약 1,000대 이상이 가동 중이었다. 뉴캐슬, 콘월, 미들랜즈 — 석탄이 있는 곳에 엔진이 있었다. 벨기에 리에주에도 1721년에 도달했다.

뉴커먼 이전의 탄광 배수는 물리적 한계와의 싸움이었다. 가죽 양동이를 체인에 매달아 올리는 펌프를 말이 원형으로 돌며 작동시켰다. 갱도가 깊어질수록 침수량이 늘었다. 말을 추가 투입했다. 수확체감이 시작됐다. 배수 용량이 침수를 감당하지 못하면 갱도를 포기했다. 석탄은 발밑에 있었으나, 물이 가로막았다. 뉴커먼 엔진은 이 교착을 깨뜨렸다.

근본적 한계가 있었다. 대기압 엔진(atmospheric engine)은 이름 그대로 대기압이 일을 하는 기계였다. 증기가 직접 일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증기는 진공을 만들기 위한 수단이었고, 대기압이 피스톤을 밀었다. 매 행정마다 실린더를 가열했다가 냉각시키는 사이클이 반복되었다. 투입 에너지의 약 75~80%가 실린더 벽을 재가열하는 데 낭비되었다. 출력은 약 5~6마력. 석탄 소비는 약 30파운드/마력.시간. 볼턴-와트 엔진의 약 3배였다. 왕복 운동만 가능하여 펌핑 이외의 용도에 쓸 수 없었다. 탄광에서는 문제가 아니었다 — 연료가 공짜였으니까 — 반면 석탄을 사야 하는 다른 산업에서는 채산성이 없었다. 콘월의 주석 광산처럼 석탄을 수입해야 하는 곳에서는 연료비가 엔진 운영 비용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더 효율적인 엔진에 대한 경제적 수요는 탄광 밖에서 더 절실했다.

전환점은 글래스고에서 왔다.

제임스 와트는 글래스고 대학교의 수학 기기 제작자(mathematical instrument maker)였다. 1763~1764년경, 존 앤더슨 교수의 자연철학 강의용 뉴커먼 엔진 모형을 수리하게 되었다. 와트는 모형의 비효율을 정량적으로 분석했다. 실린더에 투입된 증기 에너지의 약 75~80%가 매 행정마다 실린더 벽을 재가열하는 데 소비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문제의 근원은 명확했다. 응축(냉각)과 팽창(가열)이 같은 공간에서 번갈아 일어나는 것.

와트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1765년 봄 어느 일요일 오후 글래스고 그린을 산책하다가 해결책이 떠올랐다. "골프장을 지나기도 전에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정리되었다." 이 진술은 약 50년 뒤 로버트 하트에게 한 회고적 진술이다. 실제 과정은 수개월에 걸친 점진적 실험과 사고의 축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핵심 아이디어는 분명했다. 응축을 실린더 외부의 별도 용기에서 수행한다. 분리 응축기(separate condenser). 실린더는 항상 뜨거운 상태를 유지한다. 실린더를 재가열할 필요가 없으므로 연료 소비가 뉴커먼 대비 약 60~75% 감소했다. 열효율은 약 2~4%로 향상되었다.

와트는 발명가였지 사업가가 아니었다. 1765년에서 1771년까지, 6년간 상업화에 실패했다. 첫 파트너 존 로벅은 캐런 제철소를 운영하던 기업가였으나 1773년 파산했다. 와트는 운하 측량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만성적 우울증에 시달렸다. 건강이 악화되었다. 첫 아내 마거릿이 1773년 사망했다. 산업혁명을 만들 기계의 발명가는 아내를 잃고, 빚에 쫓기며, 우울증 속에서 6년을 보냈다.

전환은 매슈 볼턴이 가져왔다.

버밍엄 소호 공장의 소유자 볼턴은 금속 제품 — 버클, 단추, 은식기 — 을 제조하는 사업가였다. 발명가가 아니라 조직가였다. 로벅의 파산에서 와트의 특허 지분 2/3를 인수했다. 그가 제공한 것은 자금만이 아니었다. 소호 공장의 정밀 제조 역량. 존 윌킨슨의 대포 포신 보링 기계를 실린더 제작에 전용하여 약 1/16~1/20인치 정밀도를 달성한 것 — 윌킨슨의 정밀 실린더 없이는 와트의 분리 응축기가 기밀을 유지할 수 없었다. 대포 기술의 민수 전용이었다. 1775년 의회 로비로 특허를 1800년까지 25년 연장한 것. 유럽 전역의 판매 대리인 네트워크. 상업화 이전 투자액만 약 4만 7,000파운드에 달했다. 특허 보호 없이는 이 투자를 회수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비즈니스 모델. 볼턴과 와트는 엔진을 판매하지 않았다. 연료 절감분의 1/3을 매년 로열티로 징수했다. 25년간. 고객이 얻는 가치에 비례하여 과금하는 가치 기반 가격 책정(value-based pricing)이었다. 일회성 판매가 아닌 반복 수익(recurring revenue). 250년 전의 SaaS 구독 모델이었다. 문제도 있었다. 절감량을 누가 검증하는가. 콘월 광산주들은 조직적으로 지불을 거부했다. 측정 가능성이 비즈니스 모델의 지속 가능성을 결정한다는 교훈. 현대의 클라우드 종량제와 같은 구조적 딜레마였다.

이 모델을 가능하게 한 것은 측정 단위의 발명이었다. 1782년, 와트는 1마력(horsepower)을 33,000ft.lbs/min으로 정의했다. 런던 양조장의 짐마차용 말의 출력을 측정하여 산출했다. 말의 실제 지속 출력은 약 0.7마력이었다. 와트가 의도적으로 높게 설정한 것이다. 고객이 10마력 엔진을 구매하면 실제로 말 10마리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 기대를 초과하는 경험 설계. 기술의 가치를 기존 대안과 비교 가능한 단위로 번역한 것이다. 오늘날 AI 벤치마크가 인간 전문가 대비 성능을 측정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1776년 3월, 제임스 보즈웰이 소호 공장을 방문했다. 볼턴이 말했다. "저는 여기서 온 세상이 원하는 것을 팝니다 — 힘(POWER)을."

에너지가 상품이 된 순간이었다. 이전까지 동력은 자연에서 나왔다. 인간의 근육, 말의 힘, 바람, 물. 모두 예측 불가능하고 제한적인 원천이었다. 바람은 멈출 수 있었고, 강은 겨울에 얼고 여름에 마를 수 있었고, 인간과 동물은 먹여야 했고 지쳤다. 볼턴은 동력을 공장에서 제조하고 시장에서 판매했다. 예측 가능하고, 측정 가능하고, 확장 가능한 형태로.

인간 1명의 지속 출력이 약 0.1마력일 때, 볼턴-와트 엔진은 20~33마력을 냈다. 대형 엔진은 54마력에 달했다. 인간 대비 200~500배. 말 1마리의 지속 출력이 약 0.7마력이었으므로, 대형 엔진 1대가 말 약 80마리에 해당했다. 기계는 쉬지 않았다. 24시간 가동이 가능했다. 인간은 8~10시간, 말은 4~6시간이 한계였다. 이를 고려하면 실질 대체 배율은 그 2~3배에 달했다.

1775년에서 1800년까지 볼턴-와트는 약 500대의 엔진을 판매했다. 1781년 태양-행성 기어로 왕복 운동을 회전 운동으로 전환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뉴커먼 엔진은 왕복 운동만 가능하여 펌핑 전용이었다. 회전 운동은 공장 기계를 구동할 수 있었다. 증기기관을 '광산의 펌프'에서 '산업의 동력원'으로 바꾼 것이다. 1782년 이중 작동으로 피스톤 양방향에서 동력을 생산한 것, 1788년 원심 조속기(centrifugal governor)로 회전 속도를 자동 조절한 것이 뒤따랐다. 원심 조속기는 회전 속도가 빨라지면 증기 공급을 줄이고, 느려지면 늘렸다. 기계가 자동으로 자신을 조절하는 최초의 피드백 시스템이었다. 20세기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의 선행 사례였다.

1800년, 와트의 특허가 만료되었다. 25년간의 독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은 지적재산 논쟁의 원형이 되었다. 특허의 벽이 사라지자 억눌렸던 혁신이 폭발했다. 콘월 지역에서 조엘 린의 월간 보고서가 각 광산 엔진의 성능 데이터를 공개하기 시작했다. 경쟁적 벤치마킹이 이루어졌다. 엔진 효율(duty)이 약 2,000만에서 6,000만~1억으로, 20년간 약 3~5배 향상되었다. 리처드 트레비식은 1790년대에 이미 고압 엔진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특허가 가로막았다. 조너선 혼블로어의 복합 팽창 엔진은 볼턴-와트의 소송으로 좌절되었다. 독점적 혁신을 개방형 혁신이 압도한 사례였다. 진정한 혁신 폭발은 특허가 만료된 뒤에 왔다.

투자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기술 독점은 초기 상업화를 가능하게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술 발전 속도를 늦출 수 있다. 와트 특허는 증기력 발전을 약 20~30년 지연시켰을 가능성이 논의된다. 현대의 병렬 사례는 의약품 특허 만료 후 제네릭 폭발, 또는 기본 AI 모델의 오픈소스화 이후 응용 혁신의 가속이다.


2. 면직물 — 하나의 혁신이 다음 병목을 만드는 연쇄 반응

증기가 에너지를 풀었다면, 면직물은 그 에너지가 흘러갈 산업을 만들었다.

시작은 인도에서 왔다. 17세기 후반, 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산 캘리코(calico)와 모슬린(muslin)이 영국에 대량 유입되었다. 1664년 약 25만 필이던 수입량이 1684년에는 약 150만 필로 늘어났다. 약 6배 증가. 인도산 면직물은 영국산 모직물 대비 가격이 약 1/3~1/2 수준이었고, 세탁이 쉬웠고, 가벼웠다. 색상이 선명하게 유지되었다. 소비자는 열광했다. 인도 방적공의 일당은 영국 방적공의 약 1/5~1/6이었다. 로버트 앨런의 연구에 따르면, 이 임금 격차가 영국 면직물 산업의 운명을 결정했다. 인도의 저임금을 이기려면 기계가 필요했다.

영국 모직물 산업은 의회에 호소했다. 1700년 캘리코법이 인도산 완제 면직물의 수입을 금지했다. 1721년 강화법이 면직물의 착용과 사용 자체를 금지했다. 단, 면과 마의 혼방(fustian)은 허용되었다.

이 예외 조항이 랭커셔 면직물 산업의 법적 기반이 되었다. 보호무역이 혁신을 촉발한 역설이었다. 수입 금지가 국내 대체 수요를 만들었고, 혼방 허용이 랭커셔에서 면직물 산업 성장의 틈을 열었다. 순면 직물은 아직 국내 기술로 생산할 수 없었다. 인도산 면직물을 대체하려면 영국 노동자의 높은 임금을 상쇄할 기계가 필요했다. 방적 기술 혁신의 경제적 인센티브가 극대화된 구조였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규제가 시장을 만든 것이다.

1733년, 존 케이가 플라잉 셔틀(flying shuttle) 특허를 받았다. 셔틀을 손으로 던지는 대신 줄을 당겨 기계적으로 이동시키는 장치였다. 직조 속도가 약 2배 증가했다. 단순한 기계적 개선이었다. 실제 보급은 1750년대부터 본격화되었다. 이 작은 변화가 연쇄 반응의 기점이 되었다. 직조가 빨라지자 실이 부족해졌다. 직공 1명이 소비하는 실을 방적공 4~8명이 만들어야 했다. 실 가격이 올랐다. 방적 혁신의 경제적 보상이 커졌다.

존 케이 자신은 이 보상을 받지 못했다. 특허 침해 소송에 파산했다. 1753년 성난 방적공들이 그의 집을 습격했을 때, 양모 뭉치 속에 숨어 탈출했다. 프랑스로 도피하여 빈곤 속에 사망했다. 발명가의 저주 — 혁신의 가치는 발명가가 아니라 시스템 구축자에게 귀속되었다.

플라잉 셔틀이 만든 병목을 세 개의 방적기가 순차적으로 풀었다.

1764년, 제임스 하그리브스의 제니 방적기(spinning jenny). 수동 조작으로 다수 스핀들을 동시에 방적했다. 초기 8개에서 1780년대에는 80~120개까지 늘어났다. 소형이라 탁자 위에 놓을 수 있었다. 가내수공업 체제와 호환되었다. 방적공의 아내와 딸이 집에서 작동할 수 있었다. 기존 사회구조를 파괴하지 않는 점진적 혁신이었다. 제니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 생산성은 8~16배 높아졌으나, 삶의 방식은 바뀌지 않았다. 다만 한계가 있었다. 위사(weft)용 부드러운 실만 생산할 수 있었고, 경사(warp)에 필요한 강한 실은 만들지 못했다.

1769년, 리처드 아크라이트의 수력 방적기(water frame). 롤러 인발과 수력 동력을 결합하여 강한 경사용 실을 생산했다. 이 기계는 수력이 필수였으므로 강가에 대형 건물을 세워야 했다. 가내수공업으로는 운영할 수 없었다. 공장 시스템의 물리적 필연성이 여기서 태어났다. 1771년 더비셔 크롬포드에 세워진 공장이 최초의 진정한 공장(factory)이었다. 수력, 기계, 임노동의 집중 생산. 약 200명의 노동자가 13시간 주야간 2교대로 일했다. Ch.6 끝에서 우리가 만난 '가발 제조업자 출신의 사업가'가 바로 아크라이트였다. 1774년, 수력 방적기 덕분에 국산 순면 직물이 가능해지자 의회가 순면직물 국내 판매를 허용했다.

1779년, 새뮤얼 크롬프턴의 뮬 방적기(mule). 제니의 간헐적 방적과 수력방적기의 연속 인발을 결합한 하이브리드였다. 'mule'은 잡종(노새)이라는 뜻이었다. 두 선행 기계의 장점만을 취한 발명이었다. 이 기계가 만든 것은 고급 세사(fine thread)였다. 인도 다카 모슬린에 필적하는 품질. 500년간 세계 최고였던 인도의 기술적 독점이 깨졌다.

크롬프턴은 5년간 다락방에서 뮬 방적기를 개발했다. 이웃들은 밤에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유령이 나온다고 소문냈다. 발명 후 특허 비용이 없어 제조업자들에게 약 60기니를 받고 기술을 공개했다. 의회에서 뒤늦게 5,000파운드를 보상했다. 그의 발명으로 영국은 면직물 제국이 되었지만, 크롬프턴 자신은 평생 가난했다. 존 케이와 같은 운명이었다.

방적 생산성의 도약을 숫자로 보면 이렇다. 물레로 면사 1파운드를 만드는 데 약 500시간이 걸렸다. 제니로 약 20시간. 수력 방적기로 약 3시간. 뮬과 증기를 결합하면 약 1.35시간. 1830년대 리처드 로버츠의 자동 뮬(self-acting mule)에 이르면 약 0.5시간. 70년간 약 1,000배의 향상이었다.

방추(spindle) 수가 산업의 물리적 규모를 보여준다. 1760년 영국 전체에 약 7,900개이던 방추가 1787년에는 약 145만 개, 1850년에는 약 2,100만 개로 늘어났다. 면직물 공장 고용도 폭발했다. 1806년 약 9만 명이던 공장 노동자가 1833년 약 22만 명, 1861년 약 45만 2,000명으로 불어났다. 새로운 산업 노동자 계층이 형성되고 있었다. 수직공은 줄었으나 공장 노동자는 늘었다. 직업의 형태가 바뀌고, 계층의 구성이 재편되고 있었다.

이 방적 혁신이 만든 것은 실만이 아니었다. 값싼 실이 쏟아지자 수직공(handloom weaver)의 수요가 폭발했다. 1795년 약 7만 5,000명이던 면직물 수직공이 1811년에는 약 20만~25만 명으로 늘어났다. 황금기였다. 1805년 주급 25실링. 숙련 수직공은 자기 집에서 자기 직기로 일했다. 작업 시간을 스스로 정했다. 도제 과정 5~7년을 거친 장인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방적 혁신이 수직공에게 선물한 번영이었다.

이 황금기가 어떻게 끝나는지는 다른 이야기다. 방적 혁신이 수직공의 번영을 만들었다면, 직조의 기계화가 그 번영을 파괴했다. 1785년 성직자 에드먼드 카트라이트가 역직기(power loom) 특허를 냈다. 카트라이트는 면직물 기술에 문외한이었다. 초기에는 실이 자주 끊어지는 미완의 기계였다. 카트라이트 자신도 공장 화재로 파산했다. 의회가 1만 파운드를 보상했다. 발명에서 실용화까지 약 25~30년이 걸렸다. 1810년대에 실용화가 이루어지면서, 역직기 대수는 1813년 약 2,400대에서 1820년 약 1만 4,150대, 1829년 약 5만 5,500대, 1833년 약 10만 대, 1850년 약 25만 대로 불어났다. 역직기 1대의 생산성이 수직기 대비 약 3~7배에 달했고, 단위 비용은 약 1/3~1/5이었다.

수직공의 주급은 1826년 6실링, 1835년 4.5실링으로 떨어졌다. 한 세대 만에 80% 이상의 하락이었다. 수직공 인구는 1811년 약 20만~25만 명에서 1840년 약 12만 3,000명, 1850년 약 5만 명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직업 자체가 소멸하고 있었다. 그들은 임금이 떨어져도 다른 직업으로 옮기지 못했다. 직조는 세대를 걸쳐 전수된 기술이었고, 그들의 정체성이었다. 공장 노동은 그들에게 숙련공에서 미숙련 기계 부속품으로의 격하를 의미했다. 같은 산업의 기술이 번영과 몰락을 모두 만든 이중 반전. 그 이야기는 Ch.9에서 본다.

면직물 산업의 거시적 의미를 두 개의 숫자가 압축한다. 영국 수출에서 면직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1784년 약 6%에서 1830년대 약 48%로 뛰었다. 50년 만에 8배. 100번수 면사 1파운드의 가격은 1784년 약 38실링에서 1830년 약 3실링으로 떨어졌다. 약 92% 하락. 기술 혁신이 가격을 무너뜨렸고, 무너진 가격이 세계 시장을 열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메커니즘이 있다. 한 영역의 혁신은 인접 영역의 병목을 만들고, 그 병목이 다시 혁신을 촉발한다. 플라잉 셔틀이 직조를 가속시키자 방적이 병목이 되었다. 방적 혁신이 실을 쏟아내자 직조가 병목이 되었다. 역직기가 면직물을 쏟아내자 표백과 인쇄가 병목이 되어 화학 혁신을 불렀다. 면직물 생산이 폭증하자 원면 공급이 병목이 되어 1793년 엘리 휘트니의 조면기(cotton gin)와 미국 남부 플랜테이션의 확대가 뒤따랐다.

투자자에게 이 연쇄의 교훈은 구체적이다. 혁신은 병목을 해결하는 동시에 새로운 병목을 만든다. 다음 투자 기회는 현재의 혁신이 만들어내는 다음 병목에 있다. AI 시대의 병렬 사례를 보면, GPU 성능이 모델 학습 병목을 해결하자 추론 비용이 새 병목이 되었다. 추론 비용이 떨어지면 데이터 품질이 다음 병목이 된다. 플라잉 셔틀에서 조면기까지의 연쇄가 보여주듯, 병목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는 것이 투자의 핵심이다.


3. 석탄 — 지하의 숲

증기와 면직물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물질로 수렴한다. 석탄.

E.A. 리글리(Wrigley)의 프레임워크가 산업혁명의 에너지적 본질을 가장 명쾌하게 포착한다. 리글리는 산업혁명 이전의 모든 경제를 유기 경제(organic economy)로 정의했다. 유기 경제에서 에너지는 당해 연도의 광합성에서 나온다. 인간의 근육, 동물의 힘, 목재, 풍력, 수력 — 모두 현재의 태양에너지에 의존한다. 토지 면적이 에너지 공급의 절대적 상한을 설정한다. 경작지를 늘리면 산림이 줄고, 산림을 늘리면 경작지가 줄어든다. 제로섬이다. 인구가 증가하면 생산성 향상분을 흡수한다. 맬서스 함정(Malthusian trap)이다.

로마도 이 함정 안에 있었다. Ch.2에서 우리가 본 바르베갈 수차 단지 — 로마 최대의 수력 시설 — 의 합산 출력은 약 3킬로와트로 추정된다. 뉴커먼 엔진 1대의 출력이 약 3.7~5.5킬로와트였다. 약 1,500년 뒤의 기계 1대가, 로마가 16개의 수차를 동원하여 달성한 것을 넘어섰다. 로마는 스케일을 발명했다. 도로 약 8만 킬로미터, 44개 속주의 표준화. 에너지원은 여전히 유기적이었다. 더 많은 노예, 더 넓은 영토로 확장할 수 있었으나, 에너지의 천장을 뚫지는 못했다.

석탄이 그 천장을 뚫었다. 석탄은 수억 년간 축적된 태양 에너지의 저장고였다. 석탄기(Carboniferous period)의 나무들이 3억 년간 지하에서 압축된 결과물이었다.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의 비유를 빌리면, 영국의 탄전은 '지하의 숲(subterranean forests)'이었다. 리글리의 핵심 통찰은 여기에 있다. 석탄을 태우는 것은 과거의 태양 에너지를 현재로 소환하는 것이었다. 토지 면적의 제약에서 해방된, 시간을 초월한 에너지 수입이었다.

리글리의 가장 강력한 분석 도구는 석탄 생산량을 동일 에너지를 제공하는 데 필요한 삼림 면적으로 환산한 것이다. 1800년, 영국의 석탄이 제공한 에너지를 목재로 대체하려면 약 1,120만 에이커의 삼림이 필요했다. 잉글랜드와 웨일즈 전체 면적이 약 3,200만 에이커이므로 국토의 약 35%에 해당했다. 1850년에는 약 4,810만 에이커 — 국토의 약 150%. 국토 전체를 삼림으로 덮어도 부족한 에너지를 석탄이 공급하고 있었다.

영국에는 지질학적 행운이 있었다. 주요 탄전의 석탄층이 지표면 가까이에 노출되어 있었다. 계곡 측면에서 수평갱을 뚫거나 얕은 수직갱을 파는 것만으로 석탄에 접근할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탄전이 강과 해안 가까이에 있었다. 석탄은 무겁고 부피가 크다. 해상 운송비가 육상의 약 1/5~1/10에 불과하던 시대에, 탄전과 수로의 근접성은 석탄의 경제적 가치를 결정하는 핵심 변수였다.

노섬벌랜드-더럼 탄전은 타인강과 위어강에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 석탄은 강변 선적장에서 바지선에 실려 북해로, 다시 석탄 운반선에 환적되어 템스강의 런던까지 갔다. 이 항로를 'sea coal' 무역이라 불렀다. 16세기부터 이미 이 해상 석탄 무역은 영국 경제의 동맥이었다. 뉴캐슬의 석탄이 런던의 가정을 데우고, 양조장의 맥주를 끓이고, 대장간의 철을 달구었다. 1700년 런던에 도착한 석탄은 약 46만 톤 이상이었다.

영국의 에너지 전환은 산업혁명보다 200년 앞서 시작되었다. 이 점이 중요하다. 산업혁명은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200년에 걸친 에너지 전환의 누적 위에서 폭발한 것이다. 16세기 런던의 인구가 약 5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늘어나면서 목재 가격이 급등했다. 인구가 4배로 늘자 수요가 공급을 압도했다. 16세기 말에 석탄은 동일 열에너지 기준 목재의 약 절반 가격이 되었다. 가격이 전환을 이끌었다. 처음에 런던 시민들은 석탄 연기의 냄새를 혐오했다. 지갑이 코를 이겼다. 1660~70년대에 석탄의 에너지 공급량이 목재를 최초로 초과했다. 조지 3세 즉위(1760) 시점에 영국인은 목재보다 약 2.5배 많은 석탄을 사용하고 있었다. 1인당 에너지 소비도 변했다. 1560년 잉글랜드의 1인당 연간 에너지 소비는 약 30기가줄이었다. 1800년에는 약 67기가줄로 약 2.2배 증가했다. 같은 기간 프랑스는 22에서 24기가줄로 거의 정체했다.

영국 석탄 생산량은 1700년 약 250만~300만 톤에서 1800년 약 1,000만~1,500만 톤, 1850년 약 5,000만 톤, 1900년 약 2억 2,500만 톤으로 성장했다. 200년간 약 75~90배 증가. 1750년대에 영국은 세계 석탄 생산의 약 80~85%를 차지하고 있었다. 로버트 앨런의 말을 빌리면, "산업혁명의 지도는 탄전의 지도였다."


4. 왜 영국이었는가

1775년 어느 보름달 밤, 버밍엄.

가로등 없는 거리를 달빛이 비추고 있었다. 매슈 볼턴의 저택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제임스 와트, 조지프 프리스틀리, 조사이어 웨지우드, 에라스무스 다윈. 발명가, 사업가, 과학자, 의사가 한 테이블에 앉았다. 루나 소사이어티(Lunar Society of Birmingham). 보름달 밤에 모인 것은 달빛을 이용해 귀가하기 위해서였다. 실용적 이유가 낭만적 이름을 만든 셈이다. 1765년부터 1813년까지 핵심 회원 약 14명. 과학(프리스틀리)과 기술(와트)과 자본(볼턴)과 시장(웨지우드)이 경계 없이 지식을 교환하는 비공식 네트워크였다.

이 모임은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압축한다. 왜 영국이었는가?

로버트 앨런(Allen)의 답이 가장 명쾌하다. 영국만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높은 임금과 저렴한 에너지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1750년대 런던 건설 노동자의 일급은 은 약 12~15그램이었다. 베이징의 3~4배, 이스탄불의 2~3배, 암스테르담에 비해서도 높았다. 동시에 뉴캐슬의 석탄 가격은 열량 단위당 대륙 도시의 1/3~1/2 수준이었다. 이 조합이 노동을 기계와 석탄으로 대체할 경제적 유인을 만들었다. 논리는 단순하다. 임금이 비싸고 에너지가 싸면, 사업가는 사람 대신 기계를 쓸 이유가 생긴다. 프랑스에서는 임금이 낮아서 기계를 도입할 이유가 약했다. 중국에서는 임금이 더욱 낮았고, 석탄은 산서성 내륙 깊숙이 있어 운송비가 가치를 잠식했다. 뉴커먼 엔진의 열효율 0.5%는 영국 탄광에서만 수지가 맞았다. 대륙에서는 그 비효율이 치명적이었다.

앨런의 가설이 투자자에게 시사하는 바는 이것이다. 기술 혁신의 채택 속도는 기술 자체의 우수성이 아니라 요소 가격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

조엘 모키르(Mokyr)는 루나 소사이어티 같은 네트워크가 가능했던 문화적 배경을 강조했다. 과학과 장인이 결합한 영국 특유의 '산업 계몽주의'. 인구의 약 7~8%에 불과한 비국교도(Dissenter)가 발명가와 기업가의 약 40~50%를 차지한 현상. 옥스브리지에서 배제된 이들이 수학, 화학, 기계학에 집중하며 실용적 지식의 문화를 만들었다. 특허 출원 건수가 이를 반영한다. 1660~1699년 총 102건에서 1760~1799년 총 976건으로 약 9.6배 증가했다.

케네스 포머란츠(Pomeranz)는 석탄의 지리적 위치와 신대륙 접근성이라는 두 가지 우연을 지목했다. 그의 2000년 저작 《대분기(The Great Divergence)》는 유럽 중심적 설명에 도전했다. 1750년대까지 양쯔강 삼각주와 영국의 경제 수준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했다. 분기를 만든 것은 문화적 우월성이 아니라 탄전의 위치라는 지리적 우연이었다. 포머란츠가 산출한 '유령 면적(ghost acreage)' — 영국이 식민지로부터 추출한 자원에 해당하는 토지 면적 — 은 약 2,500만~3,000만 에이커로,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경작지와 대등했다.

더글러스 노스와 배리 웨인가스트(North & Weingast)는 1688년 명예혁명 이후의 재산권 보장을 강조했다. 의회가 왕권을 제한한 이후, 정부의 채무 불이행 위험이 줄었다. 영국 정부의 차입 이자율이 1690년대 약 8~14%에서 1750년대 약 3%로 떨어진 반면, 프랑스는 5~6%에 머물렀다. 낮은 이자율이 공장과 기계에 대한 장기 투자를 가능하게 했다. 볼턴이 상업화 이전에 약 4만 7,000파운드를 투자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투자가 국왕의 자의적 몰수로부터 보호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 학자의 설명은 경쟁이 아니라 보완이다. 고임금과 저에너지가 없었다면 기계화의 인센티브가 없었다. 과학-장인 문화가 없었다면 기계를 발명하지 못했다. 석탄이 내륙에 있었다면 에너지 전환이 일어나지 않았다. 재산권이 보장되지 않았다면 장기 투자가 불가능했다. 네 조건이 동시에 충족된 곳은 1760년대 영국뿐이었다. 네덜란드는 임금이 높았으나 석탄이 없었다. 프랑스는 시장이 컸으나 임금이 낮아 기계화의 경제적 유인이 약했다. 조건들의 부분적 충족은 어디에나 있었다. 전부의 동시 충족은 영국에만 있었다. 기술결정론도, 제도결정론도 아니다. 기술이 가능성을 열었고, 요소 가격이 방향을 설정했고, 문화가 역량을 공급했고, 제도가 투자를 보호했다.


5. 피드백 루프 — 세 축의 순환

이제 세 이야기를 하나로 묶을 때다.

증기, 면직물, 석탄은 각각의 혁명이 아니었다. 하나의 피드백 루프였다.

석탄이 증기기관을 만들었다. 탄광에 물이 차면 증기기관이 필요했다. 뉴커먼 엔진은 석탄을 태워 물을 퍼내는 기계였다. 증기기관이 석탄을 만들었다. 배수가 해결되자 더 깊은 탄층에 접근할 수 있었다. 더 깊은 탄광은 더 많은 지하수를, 더 많은 지하수는 더 강력한 엔진을, 더 강력한 엔진은 더 많은 석탄을 만들었다. 석탄 생산량이 늘자 가격이 안정되었다. 가격 안정이 석탄 사용 산업을 확대시켰다.

면직물이 이 루프에 합류했다. 아크라이트의 수력 방적기는 강가에만 세울 수 있었다. 가뭄이 들면 공장이 멈췄다. 홍수가 나면 수차가 파손되었다. 1785년 면직물 공장에 최초의 볼턴-와트 엔진이 노팅엄셔 패플위크에 설치되었다. 증기기관은 석탄만 있으면 어디서나, 어떤 날씨에서든 공장 건설을 가능하게 했다. 입지의 자유가 열렸다. 면직물 공장이 강가를 떠나 랭커셔의 탄전 지대로 집중했다. 1800년 약 84대이던 면직물 공장의 증기기관이 1835년에는 약 1,100대 이상으로 늘었다. 맨체스터의 인구가 1773년 약 2만 4,000명에서 1801년 약 7만 5,000명, 1831년 약 18만 2,000명, 1851년 약 30만 3,000명으로 증가했다. '코튼폴리스(Cottonopolis)'의 탄생이었다.

이 피드백 루프의 경제적 의미는 현대의 플라이휠 효과(flywheel effect)와 같다. 더 많은 석탄이 더 많은 증기를 만들고, 더 많은 증기가 더 많은 면직물을 만들고, 더 많은 면직물이 더 많은 수출을 만들고, 더 많은 수출이 더 많은 공장과 더 많은 석탄 수요를 만들었다. 자기강화 순환이었다. 일단 돌기 시작하면 멈추기 어려웠다.

영국 원면 수입량이 그 속도를 보여준다. 1760년 약 250만 파운드에서 1800년 약 5,200만 파운드, 1850년 약 5억 9,000만 파운드. 이 숫자 뒤에 미국 남부 플랜테이션의 면화밭이 있었고, 대서양을 횡단하는 선박이 있었고, 랭커셔 공장의 증기기관이 있었고, 세계 시장으로 나가는 면직물이 있었다. 영국의 대서양 무역 비중은 1700년 약 15%에서 1800년 약 57%로 뛰었다. 하나의 루프가 세계 무역의 구조를 재편하고 있었다.

면직물 수출이 영국 무역의 구조를 바꾸었다. 영국의 면직물 수출 금액은 1760년 약 25만 파운드에서 1800년 약 540만 파운드로 21.6배 뛰었다. 무역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했다.

1800년, 영국의 총 설치 증기 마력은 약 3만 5,000마력이었다. 인간 약 50만 명의 지속 노동력에 해당했다. 이 힘은 쉬지 않았고, 임금을 요구하지 않았고, 석탄만 있으면 24시간 작동했다. 유기 경제의 천장이 뚫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760년부터 1880년까지 120년간 총 설치 증기 마력은 약 1만 5,200배로 성장한다. 에너지 혁명은 한번 점화되면 자체 연료로 가속되는 불이었다.


허슬릿의 아이들

에너지 혁명의 그림자도 보아야 한다.

1838년 7월 4일, 요크셔 실크스톤. 허슬릿 주니어 탄광(Huskar Pit). 격렬한 뇌우가 지나갔다. 빗물이 환기갱으로 밀려들었다. 갱도 깊은 곳에서 일하던 26명의 아이들이 물에 갇혔다. 소녀 11명, 소년 15명. 가장 어린 아이는 8세였다. 가장 나이 많은 아이가 16세였다. 그들의 이름은 기록에 남아 있다. 기록이 있다는 것은 이름 없이 죽은 아이들이 더 많았다는 뜻이다.

트래퍼(trapper)라 불리는 아이들이 있었다. 5~6세부터 갱도 안 환기 문 앞에 혼자 앉아 문을 열고 닫는 일을 했다. 하루 11~12시간. 어둠 속에서. 허리어(hurrier)라 불리는 아이들은 석탄 수레를 밀고 끌어 운반했다. 좁은 갱도에서 네 발로 기어다녔다. 26년 전인 1812년, 펠링 탄광에서 폭발이 일어나 92명이 사망했다. 그 중 11명이 10세 이하였다. 1841년 영국 탄광 노동자 약 21만 6,000명 중 20세 미만 소년이 약 4만 1,000명이었다.

허슬릿 사고는 1842년 아동 고용 위원회 보고서와 함께 광산법(Mines and Collieries Act) 제정의 직접 계기가 되었다. 여성과 소녀의 지하 작업이 전면 금지되었다. 10세 미만 소년의 지하 작업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국가 전체에 배치된 감독관은 단 1명이었다.

명목적 규제와 실효적 규제 사이의 간극. Ch.6에서 우리가 본 패턴이다. 1802년 영국의 첫 공장법은 집행관이 없어 사문화되었다. 1833년에 유급 공장감독관 4명이 임명되어서야 실효적 규제가 시작되었다. 31년의 간극이 있었다. 로마에서 리키니우스 토지법(BC 367)이 수세기 동안 위반이 누적된 것과 같은 구조였다. 법은 제정되지만 시행되지 않는다. 규제와 현실 사이의 시차는 시대를 초월한다.

석탄은 물리적 한계를 풀었다. 그러나 그 해방의 비용은 갱도 속 아이들의 몸에 새겨졌다. 에너지 혁명에도 밀린 자가 있었다. 그들은 땅 위에서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가 아니라, 땅 아래의 차갑고 좁은 어둠 속에 있었다. 볼턴이 "힘(POWER)을 팝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 힘의 원천에는 뉴캐슬 탄광의 소년들이 있었다. 증기기관이 물을 퍼올린 그 갱도 안에서, 아이들이 석탄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기술이 인간을 해방시킨 동시에, 기술을 위해 다른 인간이 소모되었다. 이 역설은 Ch.10에서 더 깊이 다룬다.


에너지 혁명이 남긴 공식

이 챕터에서 우리가 본 것을 하나의 공식으로 압축할 수 있다.

증기가 에너지를 상품으로 만들었다. 면직물이 그 에너지의 목적지를 제공했다. 석탄이 그 에너지의 원천을 공급했다. 세 축이 피드백 루프로 연결되면서, 유기 경제의 천장을 뚫는 힘이 자기강화적으로 커졌다.

영국은 왜 이 루프의 중심이 되었는가. 높은 임금이 기계화의 인센티브를 만들었고, 저렴한 석탄이 에너지를 공급했고, 과학-장인 문화가 발명을 촉진했고, 재산권 보호가 장기 투자를 가능하게 했다. 네 조건의 동시 충족이 핵심이었다. 기술결정론이 아니다. 기술이 가능성을 열었고, 자본과 제도가 방향을 결정했다.

투자자에게 이 구조가 말해주는 것은 세 가지다. 첫째, 에너지 단가의 전환이 구조적 기회를 만든다. 석탄이 목재를 대체하며 에너지 단가가 급락했을 때, 그 에너지를 사용하는 모든 산업에서 기회가 열렸다. 둘째, 자기강화 순환을 식별하는 것이 핵심이다. 석탄-증기-면직물 루프는 한번 돌기 시작하면 개별 기술의 한계를 넘어서는 비선형적 성장을 만들었다. 셋째, 혁신의 가치는 발명가가 아니라 시스템 구축자에게 귀속된다. 뉴커먼은 무명 속에서 죽었고, 크롬프턴은 60기니를 받았으나, 볼턴은 "힘을 팔았고" 아크라이트는 50만 파운드의 재산을 남겼다. 기술을 만드는 것과 기술로 사업을 만드는 것은 다른 능력이다.

그러나 기계와 에너지만으로는 산업혁명이 완성되지 않았다. 에너지는 누군가의 공장에서 타올라야 했고, 그 공장은 누군가의 자본으로 지어져야 했다. 새로운 조직 형태가 필요했다 — 공장이라는 시스템,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한 금융. 주식회사라는 도구가 등장하고, 철도 버블이라는 광기가 시작된다. 맨체스터 노동자의 평균 수명이 17세에 불과했던 1840년대, 같은 도시의 거래소에서 세계 최초의 철도 주식이 열광적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부와 비참이 같은 거리의 양쪽에 공존했다.

그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