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218년,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기 직전의 로마.
원로원 의사당에서 전쟁 준비와 무관한 법안 하나가 통과되었다. 렉스 클라우디아(Lex Claudia de nave senatorum). 원로원 의원은 300암포라 이상의 화물을 실을 수 있는 선박을 소유할 수 없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취지는 단순했다. 의원에게 상업은 체면에 맞지 않는다. 귀족의 부는 땅에서 나와야 한다.
표결은 끝났다. 의원들은 전쟁 논의로 돌아갔다. 이 법이 200년 뒤 이탈리아 농촌의 지형을 결정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전쟁에서 돌아온 장군들, 속주 총독직을 마치고 귀환한 의원들, 정복지에서 전리품을 거머쥔 귀족들. 그들의 손에는 현금이 쥐어져 있었다. 해상무역은 금지되었다.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땅을 사라.
앞 장에서 우리는 도로, 수도교, 콘크리트, 라틴어라는 네 개의 프로토콜이 결합된 운영체제를 보았다. 그 운영체제 위에서 누가 번영하고 누가 밀려나는가. 이 장은 그 질문에 답한다.
법 하나가 자본의 흐름을 결정했다. 의원들의 잉여 자본이 이탈리아 농지로 쏟아져 들어갔다. 렉스 클라우디아는 농업 정책이 아니었다. 신분 정치의 산물이었다. 그 법이 만든 자본의 물길 위에서, 전쟁과 부채와 화폐경제가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소농 경제가 대자본 농업으로 전환된 과정을 지금부터 추적한다.
1. 라티푼디움이란 무엇인가
라틴어 라투스(latus)는 '넓은', 푼두스(fundus)는 '토지'다. 합치면 라티푼디움(latifundium). BC 2세기 이후 이 단어에는 경멸의 뉘앙스가 배어들었다.
규모부터 짚자. 로마의 토지 단위 유게룸(iugerum)은 약 0.252헥타르다. 바로(Varro)에 따르면, 자급자족하는 소농 가족에게 필요한 땅은 약 7~10유게룸, 1.8~2.5헥타르였다. 바로가 제시한 이상적 포도원은 100~200유게룸, 25~50헥타르. 노예 10~20명이 필요한 규모다. 현대 학자들이 라티푼디움으로 분류하는 기준은 500유게룸, 약 125헥타르 이상이다. 다만 이 기준은 고대 사료에 명시된 것이 아니라 학술적 조작 정의다.
소농의 7유게룸과 라티푼디움의 500유게룸. 71배 차이다. AD 1~2세기의 소 플리니우스(Pliny the Younger)는 서한에서 자신의 소유지를 언급했다. 토스카나와 움브리아에 흩어진 농장들의 총합은 약 3,000유게룸, 약 750헥타르로 추정된다. 소농 기준의 약 430배. 그런데 플리니우스는 당대 최대 지주가 아니었다.
지리적 분포는 균일하지 않았다. 포에니 전쟁 이후 황폐화된 이탈리아 남부 — 아풀리아, 루카니아, 브루티움 — 에서 라티푼디움은 가장 빠르게 확산되었다. 계절에 따라 가축을 이동시키는 이목(transhumance) 경제가 이 지역을 지배했다. 에트루리아에서는 올리브와 포도의 집약 재배가 중심이었다.
시칠리아는 BC 3세기부터 제국 최대의 곡물 생산지로, 대규모 노예 농장이 들어섰다. BC 135~132년과 BC 104~100년, 두 차례의 대규모 노예 반란이 이 섬에서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반면 북부 이탈리아 포 강 유역에서는 소규모 농장이 상당 기간 잔존했다. 라티푼디움화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동시에 일어난 균질적 과정이 아니었다.
콜루멜라(Columella)는 이 변환의 결과를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Latifundia perdidere Italiam" — 라티푼디움이 이탈리아를 망쳤다. 대 플리니우스(Pliny the Elder)도 이 문구를 재인용하며 확장했다. 라티푼디움이 이탈리아를, 그리고 이미 속주들까지 망쳤다고.
다만 콜루멜라 자신이 대농장주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포도원 수익률을 계산하고 노예 관리 기법을 상세히 기술한 바로 그 사람이 라티푼디움을 비판했다. 로마 문학에는 농촌을 이상화하는 오래된 전통이 있었다. 도시의 부유한 저자가 소농의 단순한 삶을 예찬하는 관습이다.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역사적 실체를 과장할 위험이 있다.
2. 토지 집중의 세 개 엔진
왜 소농의 땅이 대농장주에게로 넘어갔는가. 세 개의 엔진이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작동했다.
엔진 1: 아게르 푸블리쿠스의 점유
아게르 푸블리쿠스(ager publicus)는 정복지에서 몰수한 국유지다. BC 2세기 최대치 기준, 이탈리아 전체 농경지의 약 20~30%로 추정된다. 이론적으로 이 땅은 로마 시민에게 배분되어야 했다.
현실은 달랐다. 아피아누스(Appian)의 기록이 가장 상세하다. "부자들이 분배되지 않은 토지를 점유하기 시작했고,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이 점유를 마치 세습 재산처럼 여기게 되었다."
법적 소유가 아니라 사실상의 점유(possessio)가 기정사실이 된 것이다.
BC 367년의 리키니우스 토지법(Lex Licinia Sextia). 1인당 아게르 푸블리쿠스 점유 상한을 500유게룸, 약 125헥타르로 규정했다. 이 법은 수백 년간 위반이 누적되었다. 상한은 있었으나 집행은 없었다. BC 133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이 상한을 재확인하고 초과분을 회수하여 무산자에게 30유게룸씩 재분배하려 했을 때, 원로원은 그를 살해했다.
법의 비강제성이 자본 집중의 핵심 동인이었다. 현대의 독점 규제가 플랫폼 기업의 시장 지배를 뒤늦게 쫓아가는 구조와 닮아 있다. EU의 디지털시장법(Digital Markets Act, 2022)이 빅테크 게이트키퍼를 지정하기까지 플랫폼 독점이 수년간 방치된 것처럼, 로마에서도 법은 있었으나 집행은 늘 뒤늦었다.
엔진 2: 전쟁이 만든 구조적 파괴
BC 3~2세기, 로마의 해외 원정은 소농에게 이중의 타격을 가했다.
첫째, 병역이 농장을 비웠다.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통상 6~7년의 해외 복무가 요구되었고 일부 원정은 10년 이상에 달했다. BC 171년에는 병사들이 원정 거부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둘째, 제2차 포에니 전쟁(BC 218~201)에서 한니발의 15년간 이탈리아 원정은 남부 농촌을 집중적으로 황폐화했다.
연쇄는 이렇게 작동했다. 장기 원정으로 농장이 방치된다. 생산성이 떨어진다. 부채가 쌓인다. 전쟁이 끝나고 귀환하면 이미 대농장주가 토지를 점거하고 있다. 팔 수 있으면 팔고, 팔지 못하면 내몰린다.
플루타르코스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여정을 증언했다. "이탈리아를 돌아다니며 [티베리우스는] 들판과 목장이 외국인 노예들로 채워진 것을 보았다." 자유 시민은 전쟁으로 인해 쫓겨나 있었다.
전쟁은 동시에 노예를 공급했다. BC 167년 에피루스 정복에서 약 10만~15만 명이 노예화되었다. 리비우스 원문은 15만 명을 기록하지만 과장 가능성이 있으므로 범위값으로 표현한다. 대규모 군사 작전 하나가 이탈리아 농업의 노동력 구조를 바꿔놓았다.
엔진 3: 부채 메커니즘
BC 326년, 렉스 포에텔리아 파피리아(Lex Poetelia Papiria)가 인신담보 부채계약, 넥숨(nexum)을 폐지했다. 채무자를 신체로 예속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진보적 법률처럼 보인다.
토지담보 경매(addictio)는 남았다. 빚을 갚지 못하면 몸 대신 땅을 잃었다. BC 357년에 설정된 합법 이자율 상한은 8⅓%였으나, 실제 시장 금리는 6~12%에 달했다. 부유한 원로원 계층이 농업 투자를 위해 빌리는 돈의 금리가 연 6~8%였다면, 소농이 흉작 후 빌리는 소비성 대출의 금리는 연 12~24%였다.
신용 접근의 비대칭이었다. 부유층은 낮은 금리로 자산을 매입했다. 소농은 높은 금리로 자산을 내놓았다. 복리의 방향이 구조적으로 한쪽을 향했다.
아풀리아 남부의 한 소농을 상상해보자.
이름은 알 수 없다. 기록은 원로원 의원과 장군을 위해 존재했지 소농을 위해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상황은 재구성할 수 있다.
BC 140년경, 그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바로의 자급 기준에 해당하는 약 8유게룸의 밭을 경작하고 있었다. 2헥타르 남짓한 땅에서 밀과 보리를 키워 아내와 아이 둘을 먹였다. 히스파니아 원정에 6년을 보냈다. 돌아왔을 때 밭의 절반은 이웃 대농장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 있었다. 아게르 푸블리쿠스에 인접한 그의 땅은 사실상의 점유 확대에 편입된 것이다.
남은 4유게룸으로는 가족을 먹일 수 없었다. 종자를 빌렸다. 이자가 붙었다. 흉작이 왔다. 갚지 못했다. 경매에 넘어갔다. 그의 땅은 누군가의 라티푼디움에 흡수되었다.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남았다. 자신의 옛 땅 근처에서 계절 임시 노동자(mercennarius)로 고용되거나, 로마로 향하는 것이다. 바로의 농장 조직도에서 그의 위치는 맨 아래 — 수확기에만 고용되는 임시직이었다. 자신이 경작하던 땅에서, 남의 지시를 받으며, 하루치 품삯을 받는다. 자유 농업 노동자의 일당은 약 2~4세스테르티우스(sestertius), 0.5~1데나리우스에 불과했다.
이것이 라티푼디움의 인적 비용이다. 세 개의 엔진 — 아게르 푸블리쿠스, 전쟁, 부채 — 은 따로 작동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강화하며 동일한 방향을 가리켰다.
3. 대자본 농업의 경제학
소농을 밀어낸 것은 탐욕이 아니었다. 경제학이었다.
착유기를 살 수 없는 사람들
대농장이 밀을 재배할 이유가 사라지고 있었다. 시칠리아와 이집트에서 들어오는 속주 곡물이 이탈리아산 밀보다 저렴했다. 소농은 밀을 자급용으로 재배했지만, 대농장은 수익률을 추구했다. 올리브와 포도가 그 답이었다.
올리브의 비교우위는 시간에 있었다. 한 번 심으면 수십 년간 수확이 가능하다. 문제는 초기 투자다. 올리브유 생산에 필수적인 착유기(trapetum)는 고정비용이 높았다. 수확한 올리브를 즉시 처리하지 않으면 품질이 떨어진다. 병목은 착유기에서 발생했다.
자체 착유기를 보유한 대농장은 최적 시점에 처리할 수 있었다. 소농은 남의 착유기를 빌려야 했고, 줄을 서야 했고, 품질이 떨어졌다.
포도주도 마찬가지였다. 착즙기(prelum)와 숙성 저장 시설의 고정비용이 소농의 진입을 가로막았다. 이탈리아산 포도주를 담은 드레셀(Dressel) 1형 암포라가 갈리아에서 수십만 개 발굴된 것은 장거리 수출의 증거다. 대농장의 포도주가 지중해를 건넜다. 소농의 포도주는 이웃 마을도 넘지 못했다.
소농을 몰아낸 것은 노예가 아니었다. 착유기를 살 수 없는 구조였다. 규모의 경제가 진입 장벽이 된 것이다. 기술결정론이 아니라 자본 구조의 문제였다.
말하는 도구
바로(Varro)는 농장의 자산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노예는 말하는 도구(instrumentum vocale)요, 가축은 반쯤 말하는 도구(instrumentum semi-vocale)요, 쟁기는 말 못 하는 도구(instrumentum mutum)다."
냉정한 자산 분류다. 사람이 도구의 범주 안에 들어가 있다.
그 도구의 공급 규모는 산업적이었다. 스트라보(Strabo)에 따르면, 에게 해의 델로스(Delos) 노예시장에서는 하루에 1만 명이 거래되었다. 해적과 전쟁이 공급원이었고, 이탈리아의 올리브원과 포도원이 수요처였다. 지중해 전역의 노예가 이 작은 섬을 경유하여 대농장으로 흘러들어갔다.
카토(Cato)의 농업 경영 매뉴얼은 더 구체적이다. 약 240유게룸의 올리브원에 노예 13명, 포도원에 노예 15명. 이것이 BC 2세기 중반 대농장의 표준 인력 배치였다.
비숙련 노예의 구입가는 약 300~500데나리우스, 숙련공은 약 1,000~2,000데나리우스. 자유 노동자를 고용하면 연간 약 100~250데나리우스. 유지비를 제외한 단순 계산 기준으로, 노예를 구입하면 약 2~5년 안에 손익분기에 도달한다. 이후로는 유지비만 지불하면 된다.
에트루리아의 세테피네스트레(Settefinestre)에서 발굴된 빌라 루스티카(villa rustica)는 이 경제학의 물리적 증거다. BC 2~1세기 건축. 주거동, 농업동, 착유실이 분리된 구조. 그리고 에르가스툴룸(ergastulum). 격자형 창문과 두꺼운 내벽으로 설계된 노예 숙소다. 감시 비용을 건물 설계로 줄였다. 효율은 건축 안에 새겨져 있었다.
BC 1세기 이탈리아의 노예 인구는 전체의 약 25~40%로 추정된다. 중앙 추정치는 약 30~35%, 총 약 200만~300만 명이다. 직접적인 센서스 자료가 없으므로 이 수치는 간접 추론에 기반한 추정값이다.
역사상 최초의 ROI 계산
AD 60~65년경, 콜루멜라는 서재에서 숫자와 씨름하고 있었다.
약 200유게룸의 포도원. 노예 약 16명. 토지 구입비, 묘목, 장비, 노예 구입가와 유지비를 합산하고 연간 수확량과 판매가를 대입한다. 이상적 조건에서 연간 약 6~7%의 수익률. 이상적 조건의 가정이므로 실제 변동 폭은 이보다 컸을 것이다. 콜루멜라 자신도 이것이 최상의 시나리오임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그의 결론은 단호했다. 토지가 게으른 것이 아니라 농부가 게으른 것이다. 수익이 낮다면 그것은 경영의 문제다.
이 계산 자체가 중요하다. 고대에 남겨진 유일한 농업 투자수익률 분석이다. 농업이 수익률의 언어로 번역된 순간이었다. 자본이 토지를 감정의 대상이 아닌 투자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약 7%라는 숫자는 토지가 다른 자산과 비교 가능한 금융 상품이 되었음을 뜻한다.
4. 화폐경제와 계층 재편
라티푼디움의 확산은 화폐경제의 심화와 맞물렸다.
BC 211년,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로마는 통화 개혁을 단행했다. 데나리우스(denarius)가 도입되었다. 은 함량 약 4.5그램(공화정 초기 기준). 이전의 아에스 루데(aes rude, 구리 덩어리)에서 아에스 그라베(aes grave, 주조 구리화)를 거쳐 은화로. 약 2세기에 걸친 점진적 전환이었다.
BC 15~12년 아우구스투스의 화폐 개혁은 이 체계를 완성했다. 아우레우스(aureus, 금)-데나리우스(은)-세스테르티우스(동)의 3층 구조. 금:은:동의 비율은 약 1:25:100. 지중해 단일 통화권이 탄생한 것이다.
BC 167년, 마케도니아 정복 후 로마는 이탈리아 시민에게 부과하던 직접세, 트리부툼(tributum)을 폐지했다. 정복지에서 유입되는 전리품과 속주 세수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국가 재정에는 이로웠으나, 이 조치가 소농의 부채 악순환을 끊어주지는 못했다.
소농에게 화폐경제는 이중의 압박이었다. 부채 이자를 현금으로 내야 했다. 밀을 팔아 현금을 마련했다. 속주에서 들어오는 값싼 곡물이 이탈리아산 밀의 가격을 눌렀다. 소농은 더 많은 밀을 팔아야 같은 금액을 마련할 수 있었다. 악순환이었다.
계층 구조는 화폐로 명문화되었다. 원로원 의원이 되려면 최소 100만 세스테르티우스의 재산이 필요했다. 기사(eques) 계급의 자격은 40만 세스테르티우스. 일반 군인의 연봉이 900세스테르티우스였으니, 원로원 자격은 군인 연봉의 1,111배에 달했다.
이 계층 구조 위에서 푸블리카니(publicani)가 활동했다. BC 215년 리비우스가 최초로 기록한 이 세금징수 청부업자들은 소키에타스(societas)라는 조합 형태로 운영되었다. 지분(partes)이 거래 가능했다. 키케로는 바티니우스 탄핵(In Vatinium)에서 기록했다. "partes illo tempore carissimae" — 지분이 그 당시 매우 비쌌다.
원시적 형태의 지분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1602)보다 약 1,800년 앞선 선례다. 조직적 증권거래소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자본이 농업과 조세에 투자되고 수익을 추구하는 구조는 분명했다.
아르겐타리이(argentarii)라 불리는 환전·대출 업자들이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에 상설 영업소를 열었다. 환전, 신용대출, 결제대행, 경매신용까지 제공했다. 현대 은행의 기본 기능이 BC 4세기 이후 로마 광장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
바실리카 아이밀리아의 열주 사이에서 그들은 나무 탁자를 펼쳐놓고 동전을 세고 있었다. 저울 위에 데나리우스 은화를 올려 무게를 재고, 속주에서 건너온 상인에게 환율을 불러주고, 경매 참여자에게 단기 신용을 제공했다. 광장의 소음 속에서 그들의 탁자는 자본의 교차로였다.
슈이델과 프리젠(Scheidel & Friesen)의 연구에 따르면, 로마 제국의 지니 계수는 약 0.42~0.44. 상위 1%가 전체 소득의 약 16%를 점유했다. 운영체제는 부를 창출했다. 동시에 부의 흐름을 특정 방향으로 집중시켰다.
소농 몰락의 연쇄는 군사 체제까지 바꿨다. BC 107년,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군제를 개혁했다. 군 복무의 재산 기준을 철폐하고 무산자(proletarii)의 입대를 허용했다. 재산 기준을 충족하는 시민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농이 줄어들면서 징병 기반이 무너졌다. 시민군이 직업군인으로 대체된 것이다.
역사가 키스 홉킨스는 이것을 순환 모델로 정리했다. 정복이 노예를 공급한다. 노예가 대농장에 투입된다. 소농이 이탈한다. 이탈한 소농이 무산자가 된다. 무산자가 직업군인이 된다. 직업군인이 더 많은 정복을 수행한다.
설득력 있는 모델이다. 다만 역사적 우연성과 지역 편차를 과소평가한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5. '얼마나'의 논쟁
소농이 줄었다는 데에는 합의가 있다. 문제는 얼마나, 얼마나 빨리인가.
P.A. 브런트(Brunt)는 1971년 저서 이탈리아 인력(Italian Manpower)에서 급격하고 전면적인 쇠퇴를 주장했다. Brunt의 해석에 따르면 센서스 수치가 BC 164년 약 33만에서 BC 136년 약 31만으로 감소했다. 그는 이를 소농 몰락의 간접 증거로 읽었다. 이 해석은 한 세대 동안 통설이었다.
에릭 로 카시오(Lo Cascio)는 1994년에 센서스의 방법론적 한계를 지적했다. 이탈리아 동맹시의 포함 여부, 감독관별 집계 방식의 차이, 여성과 아동과 노예의 제외. 이 변수들로 인해 센서스로 소농 비율을 직접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Lo Cascio가 방법론을 해체한 바탕 위에서, 2004년 네이선 로젠스타인(Rosenstein)은 전시의 로마(Rome at War)를 통해 본격적인 반론을 제기했다. 쇠퇴는 제한적이고 점진적이며 지역적이었다. 군 복무가 소농 가계를 반드시 파괴하지는 않았다.
고고학이 중재에 나섰다. 에트루리아의 아게르 코사누스(Ager Cosanus) 조사에서는 BC 2세기에도 중소 농장 유적이 지속 확인되었다. 삼니움의 몰리세(Molise) 조사에서는 BC 2세기에도 소규모 농장이 광범위하게 잔존했다. 남부 에트루리아 조사에서는 BC 3~2세기에 소농 유적이 감소하고 BC 1세기~AD 1세기에 빌라가 급증하는 패턴이 나타났다.
고고학은 브런트의 급격한 전면적 대체보다 로젠스타인의 점진적이고 지역적인 변화를 지지한다. 다만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는 예외다. 이 지역에서 대규모 변화가 일어났음은 분명하다.
한 가지 불편한 사실이 있다. 소농이 몰락했다고 해서 경제 전체가 후퇴한 것은 아니다. 로 카시오와 말라니마(Lo Cascio & Malanima)의 연구에 따르면, BC 2세기~AD 2세기 이탈리아의 1인당 GDP는 실질 기준으로 성장했다. 대농장의 상업적 농업, 장거리 교역, 도시화가 총생산을 끌어올렸다. 파이는 커졌으되 소농의 몫은 줄었다. 총량의 번영이 개인의 몰락을 가리고 있었다.
이 논쟁의 구조가 익숙하다면 정상이다. 방향에는 합의가 있다. 속도에는 논쟁이 있다. "AI가 일자리의 47~56%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이 있다. "직접 대체는 경제의 5%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있다. 2020년대와 구조적으로 동일한 논쟁이다. 2,000년 전에도, 지금도, 중요한 것은 '몇 퍼센트가 대체되는가'가 아니라 '어느 섹터가 먼저인가'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의 총합
이 장의 시작으로 돌아가자.
렉스 클라우디아는 농업 정책이 아니었다. 원로원 의원의 체면을 지키기 위한 신분법이었다. 아게르 푸블리쿠스의 500유게룸 상한은 토지 형평을 위한 것이었으나 집행되지 않았다. 넥숨 폐지는 채무 노예를 해방하려 했으나 토지 경매를 가속했다. 데나리우스 도입은 전쟁 재정을 안정화하려 했으나 소농을 현금 악순환에 빠뜨렸다.
네 개의 법과 제도, 각각은 나름의 합리적 이유로 만들어졌다. 어느 것도 소농을 몰아내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런데 네 개의 힘이 동시에 같은 방향을 가리켰을 때, 시스템은 개인의 도덕성과 무관하게 작동했다.
라티푼디움은 누군가의 음모가 만든 것이 아니다. 전쟁, 법, 화폐경제, 규모의 경제라는 구조적 힘의 합력이었다. 대농장주 중에 양심적인 사람도 있었고 가혹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결과를 바꾸지 못했다. 시스템이 특정 방향을 가리킬 때, 개인의 도덕성은 변수가 아니다.
콜루멜라가 라티푼디움을 비판하면서도 자신의 포도원 수익률을 계산한 것은 이 구조의 정확한 초상화다. 비판하면서도 따른다. 도덕적 실패가 아니라 구조적 현실이다.
대농장주의 성공에는 구조적 행운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전쟁이 노예를 공급하지 않았다면. 법이 자본을 토지로 몰아넣지 않았다면. 속주 곡물이 밀 가격을 눌러주지 않았다면. 같은 사업 수완으로도 같은 부를 쌓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토지를 잃은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가.
그들은 로마로 갔다. 테베레 강가의 목조 인슐라에 들어찼다. 몇 세스테르티우스의 임대료를 내고 4층, 5층에 비좁은 방을 얻었다. 기술이 없었다. 도시의 노동시장에서 그들이 차지할 자리는 많지 않았다. 무산자, 프롤레타리이(proletarii).
이 사람들의 수가 임계점을 넘어섰을 때, 국가는 빵을 나눠줘야 했다. BC 123년,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렉스 프루멘타리아(Lex Frumentaria). 시장가 이하의 곡물 보조 판매가 시작되었다. 수혜 대상은 약 20~32만 명의 로마 시 성인 남성 시민. 월 5모디우스, 약 33킬로그램의 밀.
대농장이 소농을 밀어냈다. 밀려난 소농이 도시 빈민이 되었다. 국가는 그들에게 곡물을 보조해야 했다. 그 보조 곡물의 상당 부분은 속주의 대농장에서 왔다. 문제를 만든 구조가 해결책을 공급했다. 이것이 라티푼디움 경제의 순환이었다.
빵과 서커스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그 빵의 경제학으로 들어간다. 도시로 몰려든 프롤레타리이에게 국가는 무엇을 약속했는가. 데나리우스 한 닢으로 살 수 있는 밀의 양은 줄어들고 있었고, 아눈나(Annona)라 불린 곡물 보조금의 규모는 늘어만 갔다. 그리고 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콜로세움의 검투사와 전차 경주, 황제가 주최하는 대규모 경기(ludi)가 빈민의 불만을 달래는 또 하나의 경제적 도구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제국 최초의 복지 실험이 시작되고 있었다.